좀더 분명히 하고 넘어갑니다

by 빈배 posted Jun 26, 2011 Likes 0 Replies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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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표층" "심층"이냐 할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여기에 대해 불분명하게 느끼거나 오해하시는 분이 계실 것 같아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밝히기 위해 제 책 <종교, 심층을 보다>의 앞부분 일부와 후기를 퍼옵니다.  지금 이 게시판에서 논의되는 문제나 우리 주위에서 보는 종교 현상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즐감부탁합니다.  (쌩욕은 삼가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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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제가 평생을 비교종교학 전공자로 살면서 세계종교들을 연구해보고 얻은 결론 비슷한 것은 세계 거의 모든 종교에 표층表層이 있고 심층深層이 있다는, 어찌 보면 평범하기 그지없는, 그러면서도 지극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기독교에도, 불교에도, 힌두교에도, 이슬람교에도, 유교에도 모두 표층과 심층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어느 종교에서나 일반적으로 표층이 심층보다 상대적으로 더 두꺼운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종교 전통에 따라 어느 종교는 표층이 심층보다 어느 정도 더 두껍고, 어느 종교는 표층이 심층보다 압도적으로 더 두꺼울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종교는 표층과 심층을 함께 가지고 있다고 보면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중략)

 

표층 종교와 심층 종교의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입니까?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그 차이를 수십 가지로 열거할 수도 있지만 가장 뚜렷하다고 생각되는 몇 가지만 손꼽아봅니다.

 

첫째, 무엇보다 큰 차이점은 표층 종교가 변화되지 않은 지금의 나, 다석 류영모 선생님의 용어를 빌리면 ‘몸나’, ‘제나’를 잘되게 하려고 애쓰는 데에 반하여, 심층 종교는 지금의 나를 부정하고 나를 죽여 새로운 나, 즉 ‘참나’, ‘큰나’, ‘얼나’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강조합니다. 교회나 절에 다니는 것, 헌금이나 시주를 바치는 것, 열심히 기도하는 것 등도 표층 종교에 속한 사람들은 그것으로 내가 복을 많이 받아 이 땅에서 병들지 않고 돈도 많이 벌어 남 보란 듯 살고 죽어서도 지금의 내가 그대로 어디에 가서 영생 복락을 누릴 것을 염두에 둡니다. 그러나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심층 종교에 속한 사람들은 그런 일을 내 욕심을 줄여가고, 나 자신을 부인하고, 나아가 남을 생각하기 위한 정신적 연습이나 훈련 과정으로 생각합니다.

 

둘째, 표층 종교는 무조건적인 ‘믿음’을 강조하는 반면 심층 종교는 ‘깨달음’을 중요시합니다. 표층 종교에서는 자기 종교에서 주어진 교리나 율법을 무조건 받아들이고 따르면 거기에 따른 보상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심층 종교에서는 지금의 나를 얽매고 있는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지금의 내가 죽고 새로운 나로 태어날 때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깨달음을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여깁니다. 모든 종교적인 의례나 활동도 이런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깨달음을 좀 거창한 말로 표현하면 ‘의식의 변화’ 또는 ‘주객초월적 의식의 획득’이나 ‘특수인식능력特殊認識能力의 활성화活性化’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깨달음이 있을 때 진정한 해방과 자유가 있을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셋째, 표층 종교는 ‘신은 하늘에 있고 인간은 땅에 있다’는 식으로 신과 나 사이에 ‘영원한 심연’만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신과 인간이 관계를 맺으려면 신이 그 심연을 뛰어 넘어 인간에게로 오거나 인간이 하늘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쳐야 된다고 믿습니다. 좀 어려운 말로 하면 신의 초월超越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심층 종교는 신이 내 밖에도 계시지만 내 안에도 계시다고 생각합니다. 신의 초월과 동시에 내재內在를 주장하는데, 이를 좀 어려운 말로 해서 ‘범재신론凡在神論․panentheism’의 입장이라 합니다.

 

넷째, 위의 셋째 차이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입니다만, 표층 종교에서는 신이 ‘저 위에’ 계시기 때문에 자연히 신을 내 밖에서 찾으려고 하지만, 심층 종교에서는 신이 내 속에 있고, 이렇게 내 속에 있는 신이 나의 진정한 나, 참나를 이루고 있기에 신을 찾는 것과 참나를 찾는 것이 결국은 같은 것이라 봅니다. 이런 생각을 연장하면 신과 나와 내 이웃, 우주가 모두 ‘하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연히 내 스스로도 늠름하고 의연한 삶을 살 수 있는 자유를 누리게 되고 내 이웃도 하늘 모시듯 하는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다섯째, 의식의 변화를 통해, 깨침을 통해, 내 속에 있는 신을 발견하는 일, 참나를 찾는 일 등의 이런 경험은 너무나 엄청나고 놀라워서 도저히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표현한다면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상징적symbolical’ ‘은유적metaphorical’, ‘유추적analogical' 수단을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보통 말은 인간사에서 일어나는 보통의 경험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기에 이런 엄청난 경험은 이런 보통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심층 종교의 사람들은 종교 전통에서 내려오는 경전들의 표피적인 뜻에 매달리는 ‘문자주의’를 배격합니다. 표층 종교에서 경전을 ‘문자대로’ ‘기록된 대로’ ‘그대로’ 읽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할 때 심층 종교는 문자 너머에 있는 ‘속내’를 알아차려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사실 모든 종교인들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거의 표층에서 시작합니다. 시대적으로도 역시 특별한 경우를 예외로 하고 옛날에는 이런 표층 종교인들이 절대다수를 이루었습니다. 문제는 이제 많은 종교인들이 개인적으로도 머리가 커졌고, 시대적으로도 인지가 고도로 발달하고 여러 가지 문화 환경도 급격히 변화된 상태라 위에서 지적한 것과 같은 표층적 종교로는 만족할 수가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이가 40이 되었는데 아직도 산타 할아버지를 위해 굴뚝을 쑤신다는 것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하기 힘든 일이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병이 나면 병원에 가고 돈이 필요하면 은행에 가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보통인 세상이 되었습니다. 종교를 이렇게 병이나 고치고 돈이나 벌게 해주는 등 개인적, 집단적 이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마술 방망이쯤으로 생각할 수가 없어졌습니다.

 

그러면 이제 종교란 완전히 무의미한 것인가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떠나는 것은 대부분 표층적인 종교가 종교의 전부라고 오해하기 때문이라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종교에서 심층 차원을 찾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목말라하는 것은 이런 심층 차원이 가져다줄 수 있는 시원함입니다. 종교의 이런 ‘심층’ 차원을 종교사에서 보통 쓰는 말로 바꾸면 ‘신비주의神秘主義․mysticism’입니다.

 

‘신비주의’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기 쉽습니다. 그것은 ‘신비주의’라는 말의 모호성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똑같은 말은 아니지만 신비주의라는 말 대신 ‘영성’이라든가, 독일 철학자 라이프니츠가 창안한 ‘영속철학perennial philosophy’이라는 말을 쓰는 이도 있고 ‘현교적顯敎的․exoteric’ 차원과 대조하여 ‘비교적秘敎的․esoteric’ 차원이라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말들도 모호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아리송함을 덜기 위해 독일어에서는 신비주의와 관련하여 두 가지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부정적인 뜻으로서의 신비주의를 ‘Mystismus’라 하는데, 일반적으로 영매, 육체 이탈, 점성술, 마술, 천리안 등 초자연현상이나 그리스도교 부흥회에서 흔히 발견되는 열광적 흥분, 신유체험 등과 같은 것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이런 일에 관심을 보이거나 거기에 관여하는 사람을 ‘Mystizist’라 합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종교의 가장 깊은 면, 인간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순수한 종교적 체험을 목표로 하는 신비주의는 ‘Mystik’이라 하고 이와 관계되거나 이런 일을 경험하는 사람을 ‘Mystiker’라 합니다.

 

신비주의에 대한 정의로 중세 이후 많이 쓰이던 ‘cognitio Dei experimentalis’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을 체험적으로 인식하기’이며, 하느님, 절대자, 궁극 실재를 몸소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안다’고 하는 것은 이론이나 추론이나 개념이나 논리나 교설이나 문자를 통하거나 다른 사람이 하는 권위 있는 말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영적인 눈이 열림을 통해, 나 자신의 내면적 깨달음을 통해, 의식의 변화를 통해 직접적으로, 그리고 체험적으로 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종교에서 이런 신비주의적 요소가 없는 종교는 진정한 의미에서 종교라 할 수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신비주의’라는 말이 거슬린다고 생각하면 일단 그것을 우리가 여기서 하는 것처럼 ‘심층 종교’라 부르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20세기 가톨릭 최대의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1904~1984년)는 “미래의 그리스도인은 신비주의자mystic가 되지 않으면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하게 되고 말 것”이라고 예견했습니다. 독일 신학자로서 미국 뉴욕에 있는 유니온 신학대학원에서 오래 가르친 도로테 죌레Dorthee Soelle(1929~2003년)도 최근에 펴낸 <신비와 저항>이라는 책에서 신비주의 체험이 역사적으로 특수한 몇몇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무엇이 아니라 이제 더욱 많은 사람에게서 있을 수 있는 일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이른바 ‘신비주의의 민주화democratization of mysticism’, 대중화를 주장했습니다. 여기서 이 두 대가들이 거론하는 ‘신비주의’라는 말은 물론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의미의 ‘신비주의’가 아니라 여러 종교 전통을 관통해서 흐르는 종교의 가장 깊은 ‘심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복잡한 이야기를 한 것 같아 죄송스러운 마음입니다. 그러나 인류의 스승들의 구체적인 삶과 가르침을 알아가다 보면 자연히 위와 같은 특징들이 뚜렷하게 드러나기 마련이기 때문에 지금 이런 복잡한 이야기가 껄끄러우시거나 이해하기 곤란하다고 생각되시면 그대로 지나가시고 크게 신경 쓰시지 않아도 됩니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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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세계 종교사에서 심층종교에 접한 사람 60명을 소개합니다.  마지막으로 동서 심층종교를 통섭한 분으로 류영모/함석헌 선생님을 소개하고 있지요.  끝으로 <닫는 글 - 남기는 화두>로 끝을 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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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우리는 인류 역사에서 횃불을 들어준 인류의 스승들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보았습니다. 이런 살핌을 통해 발견할 수 있었던 중요한 사실 하나는 종교라는 이름의 같은 지붕 아래 지금의 나를 위하는 데 신명을 바치는 자기중심주의적이고 기복적이고 미성숙한 표층 종교가 있고, 이와 대조적으로 정신적 눈뜸을 통해 지금의 내가 우리가 받들어야 할 궁극 실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이를 극복하므로 큰나, 참나, 얼나를 발견함을 궁극 목표로 삼는 심층 종교가 병존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런 엄연한 사실 앞에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살펴보게 됩니다. 우리는 아직 표층 종교에 속한 사람인가, 이제 심층 종교에 속하는 사람인가? 아직 심층 종교에 속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심층 종교의 존재를 인지하고 그 차원으로 우리의 눈을 돌리려 하는가, 아니면 아직도 표층 종교를 고집하면서 심층 차원의 종교 자체를 부정하고 그런 차원에 속하거나 그런 차원에 이르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정죄하고 욕하는 사람 쪽에 서 있는가?

 

이것을 필자가 이 책을 끝맺으면서 독자 여러분에게 던지는 화두(話頭)로 받아주시기 바라며 이제 컴퓨터에서 손을 떼고 두 손을 모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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