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마저 존경했던 종교 지도자 조지 폭스

by 빈배 posted Jun 28, 2011 Likes 0 Replies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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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에 이야기하다가 퀘이커리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 창시자 조지 폭스에 관한 글을 올립니다.  종교의 표층과 심층의 차이가

극렬하게 들어나는 종교지도자에 속한다 할 수 있겠지요.

(긴 글 어떤 분들에게는 성가시고, 어떤 분들에게는 숙제 같이 느껴지실지 모르겠습니다.

읽고 싶으신 분들만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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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조지 폭스George Fox(1624~1691년)

-내 속에 있는 신을 깨달으라고 가르친 퀘이커교 창시자

 

서양 종교 중에서 선불교 전통에 가장 가까운 종교를 하나 꼽는다면 많은 사람이 주저하지 않고 퀘이커교Quakers를 지목할 것이다. 속칭 퀘이커교는 본래 ‘The Religious Society of Friends’로서 한국에서는 ‘종교친우회’, 혹은 ‘친우회’라 한다. 퀘이커(친우회)에서는 내 속에 ‘하느님의 일부’가 내재해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누구나 내 속에 있는 하느님을 직접 체험적으로 깨달아 알 수 있다고 믿고 이런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힘쓴다. 퀘이커 내에도 일반 교회와 비슷한 예배 형식으로 예배하는 ‘프로그램으로 하는 예배programmed worship’가 있기는 하지만 퀘이커 예배의 주종을 이루는 ‘프로그램 없는 예배unprogrammed worship’는 기본적으로 침묵 예배로서 ‘친우들Friends’이 한 자리에 모여 한 시간 동안 조용히 앉아 내 속에 빛으로 계신 하느님의 움직임을 기다리는 시간으로 보낸다. 그러다가 누구든지 내면의 빛이 비쳤다고 여겨지는 사람은 그 빛을 다른 이들과 나누기 위하여 짧게 몇 마디씩 간증을 한다.

 

그러기에 이들에게는 직업적인 목사minister가 없고 모두가 모두에게 ‘봉사’하는 ‘봉사자들ministers’만 있을 뿐이다. 십일조 등 전통적인 예배 의식을 배격하고 특정한 교리에 구애됨이 없이 오로지 신의 직접적인 체험을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여긴다.

 

퀘이커 교도들의 깊은 영성과 이런 영성을 통한 열성적인 사회봉사는 널리 알려져 있다. 종교학의 대가 루돌프 오토는 그의 유명한 책 『성스러움의 의미』에서 개신교에서도 퀘이커교에서 실행하는 이런 침묵의 예배가 널리 채택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또 1, 2차 세계대전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한 봉사 활동으로 미국 퀘이커 봉사위원회와 영국 퀘이커 봉사위원회는 1947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도 “내가 만일 유대인이 아니었다면 나는 퀘이커 교도가 되었을 것”이라 하였다.

 

퀘이커 운동은 미국 역사 초창기에 독립운동, 흑인 해방운동, 평화운동, 여성운동 등에도 지극히 큰 영향을 끼쳤다. 미국의 펜실베이니아 주는 그 별명 ‘Quaker State’가 말하는 것처럼 퀘이커 지도자 윌리엄 펜William Penn(1644~1718년)이 1681년 영국 왕 찰스 2세로부터 얻은 땅에 평화와 관용이라는 퀘이커의 이상을 실험하기 위해 세운 주이다.

 

그 주에 있는 가장 큰 도시 필라델피아는 ‘형제 우애’라는 뜻으로, 시청 꼭대기에는 윌리엄 펜의 동상이 서 있다. 2009년 기준 전 세계적으로 35만 정도의 교인들에 불과하지만 아직도 평화운동이나 사회 개혁 운동에서의 영향력은 엄청나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종교 사상가 함석헌(1901~1989년) 선생님이 퀘이커 지도자로 활약하기도 했다. 필자도 1975년 이후 지금까지 부정기적이나마 캐나다 퀘이커 모임에 참석하고 그들의 활동에 이런저런 형태로 참여하고 있다.

퀘이커교를 창시한 사람은 영국인 조지 폭스였다. 마침 한국친우회 홈페이지에 폭스에 관해 훌륭한 글이 올라와 있기에 이를 간추려 본다.

 

17세기 영국 사회는 그야말로 격랑의 시기였다.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공화정에서 다시 왕정으로 뒤바뀌는 정치적 격변은 물론 지금까지 내려오던 가톨릭과 종교개혁으로 새로 등장한 개신교 간의 갈등으로 사람들은 심한 혼란을 겪고 있었다.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가톨릭이나 개신교 어느 파에서도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런 사람들을 구도자Seekers라 불렀는데, 그들은 주로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접촉과 새로운 계시를 통해 삶의 의미를 찾으려 했다. 조지 폭스도 이런 ‘구도자들’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런 사람들 중 일부를 모아 일종의 신앙 운동을 전개하고 이것이 오늘 퀘이커라 불리는 종교의 시작이 되었다.

 

조지 폭스는 영국 중부의 레스터셔, 지금의 페니 드레이튼이라는 곳에서 마을 사람들로부터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 불리던 방직공紡織工 아버지와 다른 부인들보다 뛰어난 교양을 지닌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지 폭스의 어린 시절에 관하여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고, 공식 교육을 얼마나 받았는지조차도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는 어려서부터 나이에 비해 신앙심이 깊고, 생각하기를 좋아했으며, 침착하고 분별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또한 사려가 깊어 그가 어떤 사실에 대해 묻고 대답하는 것을 들으면 모두들 깜짝 놀랐으며, 영적인 일들에 관해서 특별히 그랬다고 한다.

 

십대 시절, 폭스는 신부가 될 것을 바라는 친척들의 희망을 뒤로한 채 어느 구두 제조업자 밑에서 일하면서 양털 장사를 한 적이 있었다. 그는 우직할 정도로 정직하고 성실했다. 물건을 속여 팔던 시대에 사람들은 그의 성실과 정직을 비웃었지만, 결국은 그를 좋아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사업도 번창하게 되었다. 물론 그가 사업에서 손을 떼고 신앙 운동을 전개하면서부터는 가난을 면하지 못했다.

 

윌리엄 펜에 의하면, 폭스는 양치는 일을 아주 좋아해서 양치는 솜씨가 훌륭했는데, 양치는 일은 깨끗하고 고독했던 폭스의 성격과 아주 잘 맞아떨어지는 일로서, 후에 하느님의 종으로서 사역하고 봉사하는 일의 상징이 되었다고 한다.

 

1644년 20세가 되던 해에 그는 심각한 고뇌에 휩싸였다. 친척들이나 여러 목사들을 찾아다니면서 위로와 해결을 구해보았지만 모두 허사였다. 그들이 실제로 어떤 삶을 사는가, 그들의 신앙의 실상이 어떤가 하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폭스는 번민과 좌절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그를 두고 친척들은 결혼을 시키려고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정치에 입문하라고도 했다. 그러나 영적 진리에 민감한 젊은이에게는 그러한 제안이 슬프기만 할 뿐이었다. 그는 이즈음의 심경을 자신의 일기Journal에 이렇게 기록했다.

 

<내 몸은 그야말로 슬픔과 고통과 괴로움으로 메말라 있었고, 그러한 고통들이 너무나 커서 차라리 태어나지 말거나 장님으로 태어나 사악하고 허망한 것들을 보지 않게 되거나, 벙어리로 태어나 헛되고 나쁜 말들이나 주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말들을 결코 듣지 않기를 바라는 게 나았을 것 같았다.>

 

고뇌하던 폭스는 하나 둘 깨달음을 얻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그 일이 “주께서 내 마음을 여시어opened 된 일”이라 했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열어 보이신 깨달음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개신교도이건 가톨릭교도이건 모두가 같은 그리스도인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로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긴 자들이어야 한다”,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에서 공부했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일꾼이 될 자격을 온전히 갖추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성전에 계시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계신다”, “여자들은 영혼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남녀는 평등하다” 등이었다.

 

 

이러한 깨달음들이 있긴 했지만 폭스의 고뇌가 다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 자신이 ‘아브라함의 가슴속에 있었노라’고 생각할 정도로 큰 기쁨을 맛보면서도, 번민은 계속되었다. 그는 번민을 씻기 위해서 ‘열림’의 경험을 한 다른 사람들을 열심히 만났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가 도달한 결론은 자신의 처지에 대해 말해줄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실의에 빠져 있던 바로 그때, 그에게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분, 한결같은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니, 그분만이 네 처지를 말해줄 수 있다.>

 

폭스는 이 음성에 너무 기뻐서 펄쩍펄쩍 뛰었다. 이 음성은 영의 문제로 고민하고 진리를 고대하던 그에게 이전의 다른 어떤 깨달음보다도 더욱 크고 뚜렷한 것이었다. 폭스가 들었던 그 음성이 후에 ‘내면의 빛’이라 불리게 된 바로 그것이다. 그 빛은 또한 ‘속에 계신 그리스도’ ‘각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그것’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증거’ 등으로도 불리게 된다. 그 빛은 모든 사람에게 있다. 그 빛은 모든 사람을 비추는 것이다.(『요한복음』1장 9절) 이 음성은 이후 폭스 자신의 생애와 퀘이커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폭스는 자신의 이런 체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왜 이 땅에는 내 처지에 관해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가를 주님은 깨닫게 하셨으며 그 때문에 나는 주께 모든 영광을 돌릴 수 있었다. 사람들 모두가 나처럼 죄 아래 있다는 판단을 내리고 불신앙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탁월하신 분으로 우리를 깨우치시며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시며 믿음과 능력을 주시는 분이시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누가 우리를 가로막겠는가? 이러한 사실을 나는 경험으로 알았다.>

 

그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위대함을 깨닫고 슬픔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이러한 모든 체험들을 계기로 그는 자신이 ‘마치 새로이 만들어져 바뀐 것처럼 용모와 사람이 바뀌었다’고 했다. 변화된 폭스에게 이제 세상은 온통 거두어들여야 할 하느님의 씨앗들이 널려 있는 으로 보였다. 우리는 종교의 심층에 접하므로 변화된 한 영혼이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해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조지 폭스의 경우에서 다시 확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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