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 할머니

by Windwalker posted Jul 26, 2011 Likes 0 Replies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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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미국정부의 국가부도 가능성으로 인한 종말에 대해 걱정하거나,

하늘 높은 곳에 있는 영적인 세계를 추구하는 분들에게, 연전에 카스다에 올린 글을 다시 소개드리고 싶습니다.

 

다음에 제가 소개하는 분들이 평소에 얼마나 열심히 예수를 믿으라고 외쳤는지,

수도자로서 영적인 삶에 얼마나 충실했는지는 한 번도 뵙지 못했던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생수불이(生修不二)가 바로 자타불이 (自他不二),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차원이라면

이 분들의 삶 자체가 영적이며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표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전에 누군가가 산골 할머니의 신앙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이 분들을 말씀하셨다면 기꺼이 동의합니다.

 

혹시 이 분들과 짧은 시간이라도 함께 하신 분들이 있으시면, 그 실제 경험을 이 곳에서 같이 나누었으면 합니다.

 

20051121일 이른 새벽, 전남 고흥군 소록도의 선착장에는

첫 배를 타기 위해 나온 수녀 두 분이 서있었습니다.

그들의 손에 들린 것은 43년 전, 이 섬에 들어올 때 가지고 왔던

다 헤진 손가방 하나가 전부였습니다.

얼른 보기에 가까운 뭍으로 나들이를 가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의 행선지는 바로 오스트리아.

파란 눈의 수녀 두 분은 70대 은발이 되어서야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소록도 선착장에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두 수녀는 이른 새벽 아무도 모르게 섬을 떠났습니다.

사랑하는 친구 은인들에게란 편지 한 장만 남겼습니다.

이들은 편지에서 나이가 들어 제대로 일을 할 수 없고

우리들이 있는 곳에 부담을 주기 전에 떠나야 한다고 동료들에게 이야기했는데

이제 그 말을 실천할 때라 생각했다고 말했습니다.

이들은 또 부족한 외국인으로서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아 감사하며

저희들의 부족함으로 마음 아프게 해 드렸던 일에 대해 이 편지로 용서를 빈다고 말했습니다.

 

오스트리아 간호학교를 나온 두 수녀는 소록도병원이 간호사를 원한다는 소식이

소속 수녀회에 전해지자 1962년과 66년 차례로 소록도에 왔습니다.

 

환자들이 말리는데도 약을 꼼꼼히 발라야 한다며 장갑도 끼지 않고 상처를 만졌습니다.

오후엔 죽도 쑤고 과자도 구워 들고 마을을 돌았습니다.

 

사람들은 전라도 사투리에 한글까지 깨친 두 수녀를 할매라고 불렀습니다.

꽃다운 20대는 수천 환자의 손과 발로 살아가며 일흔 할머니가 됐습니다.

 

숨어 어루만지는 손의 기적과, 주님밖엔 누구에게도 얼굴을 알리지 않는 베품이

참베품임을 믿었던 두 사람은 상이나 인터뷰를 번번이 물리쳤습니다.

 

10여 년전 오스트리아 정부 훈장은 주한 오스트리아 대사가

섬까지 찾아와서야 줄 수 있었습니다.

병원 측이 마련한 회갑잔치마저 기도하러 간다며 피했습니다.

 

두 수녀는 본국 수녀회가 보내오는 생활비까지 환자들 우유와 간식비,

그리고 성한 몸이 돼 떠나는 사람들의 노자로 나눠줬습니다.

 

두 수녀의 귀향길엔... 소록도에 올 때 가져왔던

헤진 가방 한개만 들려 있었다고 합니다.

 

외로운 섬, 상처받은 사람들을 반세기 가깝게 위로한 두 수녀님의 사랑의 향기는

민들레 씨앗처럼 바람에 날려 어두운 곳을 밝히고 추운 세상을 덥혀 주리라고 믿습니다.

 

"처음 갔을 때 환자가 6000명이었어요. 아이들도 200명쯤 되었고,

약도 없고 돌봐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치료해 주려면 평생 이곳에서 살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

 

이 두 분은 팔을 걷어붙이고, 환자들을 직접 치료하기 시작한 것이 40년이나 된 것입니다.

할 일은 지천이었고, 돌봐야 할 사람은 끝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40년의 숨은 봉사...

 

이렇게 정성을 쏟은 소록도는 이제 많이 좋아져서, 환자도 600명 정도로 크게 줄었답니다.

 

누군가에게 알려질 까봐, 요란한 송별식이 될까봐 조용히 떠나갔습니다.

두 분은 배를 타고 소록도를 떠나던 날, 멀어지는 섬과 사람들을 멀리서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고 했습니다.

 

20대부터 40년을 살았던 소록도였기에, 소록도가 그들에게는 고향과 같았기에,

이제 돌아가는 고향 오스트리아는 도리어 낯선 땅이 되었지만,

3평 남짓 방 한 칸에 살면서 방을 온통 한국의 장식품으로 꾸며놓고 오늘도 '소록도의 꿈'을 꾼다고 했습니다.

 

그 분의 방문 앞에는 그분의 마음에 평생 담아두었던 말이 한국말로 써 있습니다.

 

'선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라'

 

"지금도 우리 집, 우리 병원 다 생각나요.

바다는 얼마나 푸르고 아름다운지...하지만 괜찮아요.

마음은 소록도에 두고 왔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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