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박국의 딜레마 - Oslo fantasia

by 아기자기 posted Jul 26, 2011 Likes 0 Replies 2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하나님께서는 왜 악인이 번창하도록 내버려 두시고 침묵하시는가? 하나님께서는 어찌 하여 보다 악한 이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고 횡포를 부리도록 내버려 두시는가? 이런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삶 속에서 악이 번창하는 것 사이의 갈등은 하박국의 딜레마일 뿐 아니라 욥의 울부짖음이기도 하며 시편의 저자들과 모든 히브리인들의 공통된 항의였다. 그리고 이것은 현대의 기독교인에게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끈질긴 딜레마인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정직하고 진실 되게 살려하는 많은 이들은 고난과 역경 속에 헤매게 내버려두시고 이기적인 욕망과 탐욕에 눈이 먼 저 노골적인 폭군들과 비도덕적이며 비열한 악인들의 형통을 참고만 계시는가? 이에 시편 저자는 부르짖는다. “일어나소서. 잠에서 깨어나소서!”(시 7:6, 9:19, 10:12, 44:23)

 

어서 일어나 원수를 갚아 달라한다. 악인들을 없애 달라한다. 그래도 오래 참으심으로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사람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마침내 책임을 물어 정의의 이름으로 군법회의에 회부한다. 그리고 결국에는 하나님께 사형선고를 내린다. “신은 죽었다!” “신은 없다.”고.

 

그러나 우리 솔직히 한번 생각해보자. 만일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아우성에 따라 오래 참으시지 않으시고 악인들을 즉각 벌하셨다면 과연 누가 살아남아 있겠는가? 틈만 있으면 우상 숭배한 이스라엘 백성인가? 간음하고 살인한 다윗인가? 수많은 폭력과 전쟁으로 얼룩진 그리스도인들인가? 아니면 얼마나 깨끗한 나인가? 바로 우리들도 전에는 하나님의 원수이지 않았는가? 바로 당신이 그 악인이지 아니었는가? 당신은 한 번도 죄인이었던 적이 없었단 말인가?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과연 민족 차별주의의 하나님(Divine racism)이신가? 이스라엘을 오래 참으신 하나님께서 왜 바벨론을 오래 참으시면 안 되는가? 죄인이었던 당신을 참으신 하나님께서 왜 같은 죄인인 그를 참으시면 안 되는 것인가? 이스라엘을 용서하신 하나님께서 팔레스타인을 용서하시면 안 되는가? 남한을 보호하시는 하나님께서 북한이나 일본을 보호하시면? 미국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아프카니스탄이나 이락을 사랑하시면 하나님이라도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사형선고를 받아야 되는 죄를 짓는 것인가?

 

신은 언제나 그 시대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들의 외연이며, 동시에 그것들의 정점이다. 즉 모든 시대의 사람들은 자기의 의식 수준에 맞게 신을 인식하고 묘사한다. 신관神觀은 당시대의 도덕적 기준과 종교적 바램을 나타낸다. 원시종교의 신관일수록 신인동감형의 신으로 그리스 로마의 신화에 나오는 신들 같이 신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나 백성에게는 아낌없는 용서와 복을 베풀어주고, 미워하는 민족과 사람에게는 무자비한 징벌을 내리는 -괴팍한 인간보다 나을 바가 없는- 신으로 묘사되었다. 이러한 신에 대한 잘못된 이기적인 기대와 유아적인 오해는 현대의 기독교인들에게까지 이어져서 아직도 기독교의 하나님이 타 종교인들이나 비기독교 국가를 원수로 여겨 어린아이들까지 진멸하고 그 땅까지 빼앗아 자기편에 줄 것이라는 믿음을 정통신앙이라 우기는 편견에 사로잡힌다.

 

이들은 성경의 문자적 적용에만 매달리며 자신의 불충분한 해석과 몰이해에도 불구하고 신의 뜻이라는 자기-기만의 착각 속에서 자기와 생각이 다른 이들과는 대화를 하지 않으며 배타적이 되고 상대를 정죄하고 심지어 폭력적인 언행을 신의 이름을 사칭해서 저지르는 근본주의자들이다. 일부 인터넷 악플러, 9.11 테러리스트, 그리고 아프카니스탄 이락 팔레스틴 지역 등의 현대판 십자군, 최근 노르웨이 Oslo의 기독교 근본주의자의 정신착란적인 만행이 바로 이런 편협하고 미신적인 신관에 기인한 것이다.

 

왜 탕자인 동생에게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푸시느냐 항의하는 맏아들의 불만이(눅 15:29,30) 바로 악인의 형통을 항의하는 이스라엘의 불만이며 이기적인 그리스도인의 딜레마인 것이다. 질문 자체가 잘못된 질문이었다. 악인들이 형통하는 것을 오래 참으시고 주무시는 듯 보이는 그 은혜와 용서가 바로 이스라엘과 나를 오래 참으시고 용서하시고 다시 받아 주신 그 은혜와 사랑이었다.

 

용서란 그가 아직 죄가 있을 때 하는 것이다. 죄가 없는 이는 용서와 은혜가 필요 없다. 내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 하셨고, 내가 아직 원수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심으로 내가 하나님과 화해되었던 것이다.(롬 5:6,8,10) 온 세상의 원래의 최고신(original high God)이신 우리의 여호와 하나님은 의인만이 아니라 죄인을 오래 참으시고 나뿐 아니라 나의 원수도 똑같은 용서와 은혜로 공평하게 사랑하시는 궁극적인 존재(ultimate being)이신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우리의 하나님은 나와 마찬가지로 나의 원수도 바벨론도 팔레스틴도 아프카니스탄도 북한도 일본도, 그리고 타종교인과 무신론자까지도 아직 죄인이고 원수일 때 오래 참으시고 용서하시고 아울러 때로는 송아지까지 잡아 주시는 것이다.

 

바로 그 똑같은 오래 참으심과 사랑과 은혜로 내가 구원을 받았기에, 이제는 원수의 형통함이 나의 불만이 아니라 오히려 나에게 희망이며, 죄인을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침묵이 우리에게 복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박국의 하나님에 대한 원수의 형통함과 오래 참으심을 항의하는 질문은 잘못된 모순이며 사람들이 하나님을 군법회의에 고소한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의심은 무죄로 밝혀진 것이다. 따라서 고소자들은 그들의 무고죄에 대한 책임을 지어야 할 것이다. 신에 대한 사형선고는 취소되었다. 아니 신에 대한 항의와 사형선고는 “순금에 도금하는 것, 백합에 색칠하는 것, 제비꽃에 향수를 뿌리는 것”(셰익스피어, 『존 왕(King John))』만큼이나 무의미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앞으로의 기도는 악인의 형통함과 악인을 오래 참으심을 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나와 나의 자손들에게 복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다시 쓰는 시편은 “주여, 주무소서. 아직은 일어나지 마소서. 조금 더 참으소서. 원수를 갚지 마소서.”가 될 것이다. “악인이 한 명이라도 남아 있는 한 제발 주무소서! 나의 원수를 살려 주소서! 그리고 우리 모두 깨닫게 하소서, 악인의 형통함이 나에게 복음이고 나의 자손들에게도 축복이며 공평하게 세계에 내재(immanence)하시고 초월(transcendence)하시는 선하신 하나님의 존재의 증거가 됨을!” 나비

 

 

  

Nella Fantasia 가 오슬로의 악몽으로 바뀐 밤입니다! Oslo에 눈물 한방울을 보태며 그래도 Nella fantasia를 꿈꾸어 봅니다!


Articles

5 6 7 8 9 10 11 12 13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