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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먼 독트린보다 2년 앞선 이 연설은 건국, 建國 지도자에 의하여 이뤄진, 2차 대전 이후 소련과 공산당에 대한 세계 최초의 정면 대결 선언이다. |
趙甲濟 |
1945년 12월19일 저녁 7시30분 李承晩은 서울중앙방송국(KBS)를 통하여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이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였다. 그때 李 박사는 모든 정당과 政派(정파)를 통합한 범국민, 汎國民 조직으로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만드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李 박사는 이 일을 방해하는, 벅헌영,朴憲永이 이끄는 공산당을 지목, 결별 선언을 한 것이다. 트루먼 행정부도 아직은 對蘇(대소) 봉쇄정책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있을 때였다. 소련군은 2차대전중 나치 독일군을 상대로 영웅적으로 싸웠다. 특히 1943년 초 소련군이 스탈린그라드 결전에서 독일군을 역공,逆攻, 섬멸한 것은 전세, 戰勢를 역전시킨 쾌거로서 세계인들의 가슴을 뛰게 하였다. 소련은 2차 대전으로 인구의 10%인 2000만 명이 죽었다. 미국 국무부, 재무부 요직, 要職엔 자발적으로 소련의 첩자가 된 고관, 高官들이 많았다.
이 연설은 建國 지도자에 의하여 이뤄진, 2차 대전 이후 공산당에 대한 세계 최초의 정면 대결 선언일 것이다. 대소, 對蘇 대결 노선을 천명한 트루먼 독트린은 그 2년 후였다. 할아버지 李 박사가 무슨 배짱으로 소련과 공산주의자들에 대하여 이토록 격렬한 직격탄을 날렸을까, 경이롭기만 하다. 더구나 이 연설엔 종북, 從北세력을 쳐부술 때 쓸 수 있는 비밀 폭탄들이 숨어 있다.
소위 공화국이라는 名詞(명사)를 조작하야 국민 전체의 분열상태를 세인, 世人에게 선전하기에 이르렀더니, 요즈음은 민중이 차차 깨어나서 공산에 대한 반동이 일어나매 奸計(간계)를 써서 각처에 선전하기를 저희들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요 민주주의자라 하야 민심을 현혹시키나니, 이 극렬분자들의 목적은 우리 독립국을 없이해서 남의 노예를 만들고 저희 私慾(사욕)을 채우려는 것을 누구나 볼 수 있을 것이다.” 독재를 공화국이란 말로, 공산주의를 민주주의란 말로 위장하는 저들의 숫법을 폭로한다. 李承晩은 선전 선동 부분에서도 공산당에 결코 밀리지 않는 전략, 戰略과 기술을 가진 분이었다. 그는 공산당이 소련을 ‘프롤레타리아의 조국’이라고 찬양하는 것을 약점으로 잡고 재차 직격탄을 날렸다. 우리는 우리나라를 찾아서 완전히 우리 것을 만들어 가지고 잘하나 못하나 우리의 원하는 대로 만들어가지고 살려는 것을 이 사람들이 한국 사람의 形容(형용)을 하고 와서 우리 것을 빼앗아가 저희 조국에 갖다 붙이려는 것은 우리가 결코 허락지 않는 것이니, 우리 삼천만 남녀가 다 목숨을 내어놓고 싸울 결심이다.”
“한국 사람의 형용, 形容을 하고 와서 우리 것을 빼앗아 가” 소련에 갖다 바치려는 민족반역자로 묘사하였다. 한국인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소련을 위하여 복무하는 간첩들이란 지적이었다. 남한의 공산주의자들, 즉 從北(종북)세력은 민주투사나 한국인의 형용, 形容을 하고 있으나 매국노, 賣國奴 김정일을 위하여 복무하는 간첩세력인 것이다.
공산당을 정상적인 인간집단으로 봐선 안 되다는 경고이기도 하였다. 그는 이어서 공산주의자들을 파괴자, 민족주의자들을 건설자로 규정하였다.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건설자와 파괴자는 협동이 못되는 법이다. 건설자가 변경되든지 파괴자가 회개하든지 해서 같은 목적을 가지기 전에는 완전한 합동은 못된다.” 나중에 李 박사는 "공산주의자들은 호열자(콜레라)와 같다. 인간은 호열자와 함께 살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문명, 文明 건설자인 대한민국 세력과 문명, 文明파괴자인 공산당은 절대로 한 덩어리가 될 수 없다.
김대중 노무현 종북세력은 공산당과 대한민국이 서로 화해하고 존중하면서 공존할 수 있다고 사기를 쳤지만 李 박사 눈엔 진실이 보인 것이다. “이 큰 문제를 우리 손으로 해결치 못하면 종시는 다른 해방국들과 같이 나라가 두 절분, 切分으로 나뉘어져서 동족상쟁의 禍(화)를 면치 못하고, 따라서 우리가 결국은 다시 남의 노예 노릇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경향 각처에 모든 애국애족하는 동포의 합심 합력으로 단순한 민주 정권 하,民主政體下에서 국가를 건설하야 만년무궁한 자유복락의 기초를 세우기로 결심하자.”
표현은 극렬했지만 守勢的(수세적)일 수밖에 없었다. 박헌영 등 공산세력이 주도한 좌익의 통일전선체인 조선인민공화국은 李承晩이 귀국하기 전에 그를 주석, 主席으로 추대하였던 적이 있었다. 그래 놓고 그를 파시스트라고 공격하니 국민들에겐 잘 먹히지 않았다. 대중의 李承晩에 대한 신뢰는 공산당의 선전 선동이 무너뜨릴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뿌리를 박고 있었다.
김구, 이승만 金九, 李承晩이 주도한 반탁, 反託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박헌영, 朴憲永의 조선공산당은 熱火(열화)와 같은 민심에 동요하여 贊反(찬반)을 정하지 못했다. 지령이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스크바에 갔던 북한주둔 소련군 민정, 民政사령관 로마넨코가 평양으로 돌아온 다음날 朴憲永에게 지침을 하달하였다. 신탁통치를 결의한 모스크바 협정을 지지하라는 것이었다.
李承晩의 1주일 전 예언대로 극렬공산주의자들은 민심, 民心을 거스르고, 소련의 지령에 충직하게 복무함으로써 민족반역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내었다.
그들은 회복이 불가능한 敗着(패착)을 두었다. 좌익은 매국, 賣國세력, 우익은 민족, 民族진영이 된 것이다. 右翼(우익) 주도의 반탁, 反託, 좌익 주도의 贊託(찬탁) 정국, 政局은 김구의 臨政(임정)세력을 오른쪽으로 몰았다.
그 뒤 한 동안 李承晩-金九 연합전선이 형성되면서 좌익은 더욱 고립된다.
그가 2010년 한국 대통령이었다면 연평도 도발 직후 평양의 금수산 기념궁전을 폭격하도록 명령하여 김일성의 屍身(시신)을 날려버리고 김정일-김정은을 昏絶(혼절) 시켰을 것이다. Artic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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