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년, 후테프는 재림교회와의 논의가 소득 없이 끝나자, 일년 뒤 수십명의 추종자들을 데리고 교회를 떠나 텍사스 웨이코 외곽의 브라조스(Brazos)강
유역에 있는 200에이커의 땅을 구매하게 됩니다. 일부 안식일교인들을 더 포섭하고 헌금 약정과 십일금의 형태로 재정을 확보하여 그 곳에 농장 커뮤니티를
만들고 그 지명을 갈멜산센터(Mt. Carmel Center)라 부르게 됩니다. 그런데 이들의 모습이 조금 익숙하게 않습니까?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 이러한
종교 중심의 캠프를 차리고 자급자족의 농장을 경영하려 했던 일련의 과정은 분명 화잇 여사가 평소 언급하던 "시골생활"의 모습과 정교하게 닮아있을 뿐만
아니라, 그 철학적 근거 역시 <예언의신>에서 비롯되었음을 우리는 쉽게 추론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곳에 오래 머물게 되리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미국은 "새끼양"과 같은 나라일 뿐, 하나님이 약속한 유토피아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잠시 이곳에 있다가 바로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여 그곳에 정통성 있는 다윗 왕조를 세우고, 이후 진정한 복음을 전하다가 재림한 예수와
함께 하늘로 곧바로 들리워 승천할 것이라는 당시 후테프의 예언을 철썩같이 믿고 있었습니다. (후테프의 신학적 논의는 지면상 생략하겠습니다. 죄송ㅋㅋ)
후테프가 세운 DSDA 조직은 SDA의 그것과 매우 흡사했습니다. 비단 조직뿐 아니라 그들의 삶의 방식 또한 재림교회와 마찬가지로 채식주의와 재림의 소망,
안식일, 예언의신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들의 자기 인식이 스스로를 "참된 안식교인"으로 이미지화했기 때문에 이는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1950년대에 접어들면서 후테프는 DSDA를 SDA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전세계 국가로 확대하려는 원대한 선교 목표를 세우게 되고, 이는 일부 결실을 거둬
국제적인 교인들을 확보하게 됩니다. 물론 그들은 모두 前/現 안식교인들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후테프가 주장하는 이상과 예언은 재림교인이 아니라면
이해하기 힘들거나 너무 낯선 것들이었고, 유독 그가 안식교인들이 생래적으로(?) 좋아하는 "성경을 예언으로 푸는 방식"에 탁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래전에 이혼하고 당시 혼자 살고 있었던 후테프는 같은 캠프에 있었던 자신보다 서른 여섯 살이나 어린 소녀 플로렌스 허맨슨(Florence Hermanson)과
재혼을 하게 되면서 그가 세운 종교왕국은 새로운 분수령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 당시 그의 나이는 52세. 이로써 DSDA는 일인체제에서 집단-친족체제로
뒤바뀌게 됩니다. 자신의 장모를 교단 조직의 서기로 앉히고, 자신의 어린 아내를 교회의 비서로 임명하게 됩니다. 비록 구성원들 중 일부 반발하는 이들이
있었으나 집단 내에서 후테프의 위세는 더욱 견고해져만 갔습니다. 이렇게 영원할 것만 같던 그의 카리스마는 1955년 후테프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유명을
달리하면서 교회 조직 전반을 위태롭게 하게 됩니다. 속절없는 남편의 죽음에 아내 플로렌스 후테프는 즉시 자신의 남편 후테프가 자신을 비밀리에 후계자로
지명했다고 공식 선언하므로 흔들리는 조직을 급히 추스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한번 무너진 1세대의 카리스마는 쉽게 복원되지 못했습니다. 플로렌스는
스스로 자신의 영적인 능력을 입증할 강력하고 절대적인 필요에 노출되고 말았고, 결국 그녀는 한 집단의 지도자로서의 생명을 걸만한 모험을 감행하게
됩니다. 바로 1959년 4월 22일에 성경이 예언한 "그 날"이 온다고 선언하고 만 것입니다. 그녀는 이 날이 이르러 오면 중동에 큰 전쟁이 나고--당시가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이 일어난 직후임을 상기한다면 쉽게 납득갈만한 시나리오지만--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의 복된 나라가 세워지게 되며, 이윽고 죽었던
후테프는 부활하여 이 나라를 통치하게 될 것이라는 "후천년적 하나님나라"를 선포한 것입니다. 이 예언에 안식교인들을 한마디로 열광했습니다. 1930년대
후반 100여명의 신자들에 그 중 3분의 1일 어린아이였던 집단 구성에서 DSDA를 이루는 교인들이 1500여명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 날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흘러가고 맙니다. 밀러 때와 마찬가지로 "대실망(Great Disappointment)"이 이르러 온 것입니다. 사람들은 크게
실망하여 뿔뿔이 흩어졌으며 고작 50여명 남짓한 골수 추종자들만 갈멜산에 남게 됩니다. 조직이 한 지도자의 그릇된 계산으로 풍비박산 나자, 교인들은
심각한 정체성의 혼란에 빠졌고, 그와 함께 조직 자체는 존속과 생존의 기로에 놓이게 됩니다. 이때 혜성과 같이 나타난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벤자민 로덴
(Benjamin Roden)이라는 인물입니다. 그는 후테프가 사망했을 당시, 조직 내 짧은 리더쉽의 공백기가 있을 때 지도자 자리를 놓고 각축을 벌이던 사람 중
하나였고 플로렌스에게 있어서는 정적과도 같은 이였습니다. 그는 플로렌스의 "빗나간 예언"과 지도력을 통해 DSDA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었으며, 따라서
"죽은 지팡이(dead rod)에서 벗어나 산 가지(living branch)에 접붙이라"는 설교를 하게 됩니다. 이는 훗날 가지파(Branch Davidians)의 신학적 정초가
됩니다. 이에 맞서 플로렌스는 자신의 과오를 구성원들에게 고백하고 DSDA를 SDA에 다시 통합시키려는 헛된 시도를 여러차례 벌였으나, 로덴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지리한 법정공방과 소송을 통해 갈멜산을 비롯한 대부분의 부동산을 손에 넣게 되고, 1962년 스스로를 GADSA라고 명명하게
됩니다. 여기서 GADSA는 General Association of Davidian Seventh-Day Adventists를 뜻합니다. 분파에서 또 하나의 분파가 갈라져나온 것입니다. 바로
이때가 로덴이 57세였습니다.
그는 이 때 본능적으로 자신의 후계자를 미리 점지해야한다는 사실에 집착하게 됩니다. 어쩌면 로덴은 플로렌스의 사례를 통해 미리 이러한 상황을 학습했을
런지도 모르지요. 어쨌듯 바로 이 시점부터 다윗파운동은 개혁운동이라는 본래의 성격을 벗어나 무의미한 가계(家系)들의 이전투구로 전락하고 맙니다.
로덴은 자신의 아들 조지(George)를 부의장으로 임명하고, 자신의 아내 루이스(Lois)를 독자적 신학 체계를 세울 수 있게 후방지원합니다. 여기서 잠깐!!!
왜 아내를 신학의 주춧돌을 놓는 상징적 인물로 세운 것일까? 이것 역시 다분히 화잇의 데자뷰가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자신을 제임스 화잇으로 아내를 엘렌
화잇으로 간주하게 만든 것입니다. 사실 그녀는 명목상이라고 보기에는 결코 만만치 않은 신학적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눈에 띄는 것은
그녀가 특히 삼위일체 하나님은 남성과 여성이 함께 존재하는, 이른바 양성구유의 존재자며, 성령은 여성, 성자도 재림할 때에는 여성의 몸을 입고 임한다는,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주장을 했다는 점입니다. 그녀는 마치 화잇여사가 출판물을 강조한 권면을 그대로 따르듯이 스스로 공식잡지 <쉐키나(SHEkinah)>도
발행합니다. 1978년 10월 22일, 남편 로덴이 지병으로 죽자, 루이스는 자신이 화잇을 잇는 예언자라 공언하며 다시 전면에 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
그 루이스의 정부(情夫)는 우리가 이제 살펴볼 데이빗 코레쉬가 됩니다.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입니까?
감사합니다 내 장부(?)에 퍼 놓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