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과 권력이 판을 치는 북한 ( 1 )

by KT posted Aug 22, 2011 Likes 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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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 오상민 수기 [ 1 ]

필자 오상민은 전 국가안전보위부 24국에서 외화벌이 담당 책임지도원으로 근무하다가 김정일 독재체제에 환멸을 느끼고 2005년 자유를 찾아 탈북 하였다. 자유와 민주, 인권이 보장되고 있는 남한에 와서 필자의 탈북 결심이 백번 옳았다는 것을 다시금 느꼈다.

1 나의 인생전환


나는 간부인 부모들의 덕으로 고생을 모르고 자랐다.

비서국 대상(중앙당 비서국 비준대상의 간부: 비서국 대상의 자녀들은 군복무를 3년간만 하도록 하였음)으로

군복무도 남들처럼 13년이 아니라 군단직속 경비소대에서 3년밖에 하지 않고 대학에 추천받았다.

대학을 졸업한 후 상위(중위와 대위의 중간)의 계급으로 국가안전보위부에 입대하였다.

처음 발령받은 곳이 평양시 평천구역에 있는 국가안전보위부청사(대호명 오봉산)의 내부지도원으로 근무를 시작하였다.

컴퓨터가 없이 하루에도 수많은 문건들을 선별, 등록하고 보고하는 등 수작업으로 씨름을 해야 하는

 내부 지도원의 업무는 방대한 것이다.

당시 사무실에는 펜티움 I급의 컴퓨터가 있었지만 다룰 사람이 없어 먼지만 싸여 있었다.

문건들은 관내 요시찰명단으로부터 시작하여 주민동향까지 다 들어 있었다.

우선 요시찰명단은 삼각 표시로 구분하는데 체포직전의 중요 요시찰감시대상은 빨간색 삼각,

그 다음 대상은 노란색 삼각, 적당한 정도는 파란색 삼각부호로 표시한다.

또 주민동향은 주민구성을 몇 가지로 구분하여

핵심군중(열성당원 및 성분이 좋은 사람)과 복잡군중(출신성분이 나쁘거나 가정환경이 나쁜사람)등으로 나누어

담당보위원들이 그들의 현 생활을 일일이 정보원들을 통하여 체크하여 보고한다.

나는 대학에서 컴퓨터를 배웠고 영어도 꽤 하는 터에 쉽게 컴퓨터로 문서작업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보름이상 걸려야 하던 문서작업이나 신원조회 같은 것이 단 몇 분 또는 몇 시간 내에 완벽하게 끝나게 되었다.

이러한 ‘재능’이 정치부장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그래서 울던 아이도 멈춘다는 쟁쟁한 실권자인 국가안전보위부의 정치부장

(국가 안전보위부는 부장이 없는 연고로 정치부장이 최고 실권자임)앞에 불리어 가게 되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나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나는 그때부터 막강한 권력자인 정치부장의 총애를 받기 시작했다. 나의 전도는 양양했다.

그래서 이 기회를 이용하여 따분한 내부지도원자리에서 벗어나자는 것이었다.

북한에는 부장의 아내는 부부장이고 정치부장의 아내는 정치부부장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치맛바람이 세다는 말이다.

출세를 하려면 정치위원 보다도 그의 부인에게 잘 보이는 것이 더 유리하였다.

 

해외에 친척이 있어 집안이 부유했던 나는 정치부장의 부인에게 계기가 있을 때 마다 푼푼하게 돈주머니를 열었다.
마침 정치부장의 둘째 딸이 결혼식을 하게 되었다.

 

나는 동대원구역에 위치한 ‘소피아’상점에 가서 결혼식용품으로

북한의 여성들이 부러워하는 30불짜리 진달래표 치마저고리를 부인과 딸에게 각각 한 벌씩,

120불짜리 중국산 천연색텔레비전을 선물했다.

일반사람들은 입어볼 엄두도 낼 수 없는 좋은 옷이어서 부인과 딸은 대단히 만족해했으며

그날 밤으로 정치부장에게 나의 ‘공로’가 보고되었다.

 

결국 내가 원하면 국가안전보위부 내에서는 어디든 갈수 있는 길이 열렸다

 

2 행복과 불행의 시작

90년대 중반이어서 경제난과 식량난이 혹심하여 사람들이 무리로 굶어 죽어나가는 때어서

당시의 최고의 인기직업으로서는 외화벌이였다.

 

그래서 나는 국가안전보위부산하인 신흥무역회사가 아니면 외화벌이 담당국인 24국으로 전근을 하기로 했다.
마침 24국에 수출입 책임지도원이 철직되어 자리가 비었다.

 

정치부장의 부인은 넌지시 나에게 그 자리로 갈 의향이 있는 가고 물었다.

나는 얼른 동의하였고 다음날 소좌로의 승진과 함께 전근 명령서가 떨어졌다.

 

북한에서 상위에서 소좌로 두 계급을 단번에 뛰어 넘는 것은 흔치 않은 승진이었다.
나의 인생에서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한 운명이 시작된 것이다.

 

내가 24국에 배치되어 처음 담당한 일이 서부지구 외화벌이 기지들을 담당 관리하는 것이였다.

나에게 “평양 18-×××” 이라는 국가안전보위부의 차번호를 단 일제 고급승용차가 배정되었다.

나에 대한 정치위원의 ‘배려’였다.

그 때부터 나는 무역일군이 되었다.

첫 시작을 현지를 돌아보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외화벌이 기지장들에게 나의 취임을 알리고 그들의 사업을 일일이 검열을 하기위해서이다.

 

기지장들은 정식 정복을 입은 보위원이 아니고 사복편제로서 능력이 있거나 돈이 있는 사람을

노무자형식으로 채용하여 기지장이라는 간판을 준 것이다.

때문에 나의 한마디에 따라 기지장들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판이어서

나에게 잘 보이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다.

 

그러나 북한에서 지표에 따른 외화벌이 계획을 수행한다는 것은 너무나 아름찬 일이다.
매 단위들에서 항상 계획미달로 상급의 불같은 추궁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기지장들의 생활은 범 없는 골 안에서 삵이 왕 노릇 한다고

벌어들인 돈으로 흥청거리며 살고 있었다.

내가 현지에 내려가기 전 그들은 벌써 나의 경력?을 파악하고 있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 전의 책임지도원들은 가정생활이 말이 아니어서

기지장들의 비리를 보고도 뇌물을 찔러 주면 눈을 감아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내 앞의 책임지도원도 결국은 뇌물수수에 걸려 해임철직된 것이다.

그러니 나의 생활이 부유하다는 것을 안 기지장들이 불안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가정생활이 어려워야 뇌물이 먹히겠는데 그렇지가 않으니 언제 저들의 목이 달아날지 모르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누구의 편에도 서지 않고 공정하게 검열조사를 하였다.

조사결과는 너무도 한심했다.

연간 계획은 일인당 2000달러, 종업원 수에 따라 계획을 하자면 5명이 있는 기지에서는 1만 달러를 벌어야 했다.

그렇다고 해서 국가보위부에서 돈이나 물자를 대주는 것도 없었다.

오직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국가안전보위부라는 허울 좋은 간판의 신분증과

국가안전보위부의 차번호가 전부였다.

하긴 권력이 판을 치는 북한에서 이런 조건이면 절반은 먹고 들어간 셈이다.

3 기회는 사람을 만든다.

내가 담당한 서부지구는 평양시를 중심으로 평안남북도와 황해남북도, 자강도가 포함된다.

옹진, 해주, 사리원과 또 여기서 외화로 바꿀 수 있는 원천들은 농수산물을 비롯하여 사금과 유색금속들이다.

이것들을 원천 채취하여 일본이나 중국에 팔아 외화를 벌어들인다.

내가 수행한 첫 업무는 담당지구에 대한 요해 및 검열 사업이었다.

그런데 검열과정에 제일 심하게 걸린 사람이 평안남도의 온천군에 있는 수산기지 기지장이였다.

 

그는 자기 힘으로 수산 기지를 내오고 조개와 새우, 광어, 실뱀장어 등을 잡아서 수출을 하였다.

그런데 적자가 많이 나 있었고 계획도 수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검열을 진행하는 며칠 동안 온천 기지장은 얼굴이 거멓게 돼 애절한 눈빛으로 처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상식대로라면 적자난 사실만으로도 그 기지장은 두말할 것 없이 철직되고도 남을 일이였다.

그러나 나는 사람문제이기 때문에 신중하게 처리하려고 노력했다.

우선 기지장의 사람됨부터 파악했다.

 

그는 자기 돈으로 500톤급 배도 마련하고 원천 자금도 마련해서 필사적으로 노력 했지만

간부들이 요구하는 뇌물을 충당하기도 아름찼다.

간부들은 받아먹을 때뿐이지 정작 문제가 제기되면 나 몰라라 하고 발뺌을 한다.

수차례 상급이 바뀌는 바람에 온천 기지장의 잘못된 뇌물작전은 오히려 적자만을 낳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하긴 그 체제에서 권력자에게 아부하고 뇌물을 바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다.

그런데 더 이상 바칠 것이 없어지자 그를 처벌하려는 것이다.

검열 조사를 마치고 나는 아무 말도 없이 본부로 돌아와 나의 의견을 상급에 보고하였다.

“그에게 한번만 더 기회를 주어 1년을 지켜보자, 그다음 처벌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는 국가안전보위부를 위해 자기의 전 재산 그리고 친척들의 돈까지 들이 밀었다.

그러니 이런 사람을 처벌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나는 상급에게 이렇게 말했다.

상급의 동의를 얻어 다시 온천으로 내려갔다.

나의 말을 전해들은 기지장은 몇 번을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나는 24국의 원천물자인 밀가루와 사탕가루를 각각 20톤씩 온천 기지장에게 대여해 주었다.

온천 기지장은 정말 밤잠도 안자고 배에서 살다시피 하며 일을 하였다.

나는 자주 내려가 그와 마주 앉아 이야기도 하고 애로 되는 문제도 해결해주었으며 남포항에 냉동 창고도 마련해 주었다.

1년 후 온천 기지에서는 계획은 물론 3만 달러나 더 벌어 들였다.

온천기지장은 당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은 물론이다.

결국 한 번의 기회가 사람을 만든 것이다. 이때 나는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한 번 느꼈다.

내가 담당한 서부지구의 각 기지들에서 계획을 수행하고 돈이 많이 벌어지자

이를 질투하여 나를 시기하는 사람이 생겨났다.

윗선으로 나에 대한 신소장이 들어갔고 나도 모르게 내 뒷조사를 시작했다.

원래 북한은 일을 시켜 놓고 뒷다리를 잡아당기는 것이 특징이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고 먼지 털어 안 걸리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나에게도 곧 검은 구름이 밀려왔다

 

.4 지하 감방에서 한 달반

1998년 7월 어느 날 내가 일하는 사무실로 사복을 입은 사람들이 들이 닥쳤다.

보위사령부 신분증을 제시한 그들은 나보고 조사할게 있으니 다짜고짜 자기들과 보위사령부까지 동행하자는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구금영장을 보여 달라고 했다.

그 중 한사람이 잠간이면 되니 그냥 가자는 것이었다.

나는 상급에게 보고하고 차에 올랐다. 차에 오르는 순간 나의 손목에는 수갑이 채워졌다.

나는 너무도 억이 막혀 반항을 해 보았지만 양옆에서 힘 좋은 사병들이 누르는 탓에 옴짝달싹 할 수가 없었다.

그대로 차에 실려 눈을 가린 채 1시간가량 달린 후 내렸다.

눈을 가린 탓에 어디가 어딘지 구분을 할 수 없었다.

철문 열리는 소리가 나고 안에 들어 선 다음 눈을 풀어 주었다.

눈을 떠 보니 햇빛 한 점 없는 지하 감방이었다.

나는 “왜 나를 여기에 끌어왔는가?”고 고함을 질러 봤지만 대답대신 쾅 하고 철문이 닫혔다.

억울하고 분했다. 지금까지 고생한 번 모르고 자랐고 또 좋은 직업에서 권력까지 누리던

내가 도대체 무슨 죄로 이렇게 잡혀 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잡혀 온 당시는 ‘심화조’ 사건으로 한 달에도 몇 명씩 간첩이라는 이유로 간부들을 총살할 때였다.
결국 때를 잘못만난 것이다. 너무도 깜깜해서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는데 수갑을 찬 채로 있다 보니 고통은 이루 말할 정도가 아니었다.

조금씩 뒤로 움직여 잔등을 벽에 기대고 앉았다.

그렇게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

들어 올 때 시계를 비롯해서 일체 소지품을 빼앗겼기 때문에 시간도 알 수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육중한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가슴을 파고들었다.

벌써 다음날인 것이다. 아침부터 취조가 시작되었다.

우선 나에게 구금영장을 보여주었다.  구금 이유는 6개월 직무태만에 무직이라는 것이다.

 

밤사이에 구금영장을 날조해 만든 것이다.

사무실에서 일을 하다가 잡혀 온 사람에게 직무태만과 무직이라니 이처럼 날강도같은 체포가 또 어디 있는가?

나는 이성을 잃고 외쳤다.

 “내가 왜 직무태만이며 무직입니까?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자 담당수사관은 쓰겁게 내뱉었다.

“이게 바로 공화국이야, 장군님이자 곧 법이라는 걸 몰라서 그래?”

그리고는 두툼한 사무용지를 주면서 진술서를 쓰라는 것이다. 잘못이 없으니 쓸 것도 없었다.

그러자 수사관은 진술서를 쓰지 않는 한 나갈 생각을 하지 말라고 호통을 쳤다. 나는 묵비권을 행사했다. (계속)



탈북자 오상민 (2006년 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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