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국가 보위부 탈북자 오상민 수기( 2 )

by KT posted Aug 22, 2011 Likes 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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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너 공기 좋은데 가고 싶어?”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지하감방에 갇혀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절망적인지를 아마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한 시간이 열흘, 아니 100일 아니 1년 맞잡이다. 식사가 들어 와야 시간을 어렴풋이 알 수 있다.

매일 같이 심문이 계속됐다. 그들의 목적은 나를 정치적으로 매장시키려는 것 같았다.

나의 사무실을 수색해 교시 말씀, 학습노트들과 생화총화기록부, 그리고 외화벌이 장부를 가져다 놓고 일일별로 따지고 들었다.

사람이 일을 하노라면 한두 번 학습이나 생활총화에 빠질 수도 있는 것이고 회의에 못참가 할 때도 있다.

하지만 검열은 무자비 했다.

북한의 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공산주의자들은 결과를 놓고 무자비하다’는 것을 몸서리치게 느끼게 되었다.

“바른대로 불어. 여기는 서서 들어와서 누워서 나가는 곳이야.

그러니 시간낭비 말고 말하는 게 좋을 거야. 그러면 용서 받을 수도 있어.”

입에 거품을 물고 소리를 질러대는 수사관의 얼굴은 마치 먹잇감을 바라보는 하이에나의 모습 같았다.

나는 너무도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 “아니 내가 무엇을 말해야 합니까? 그럼 증거를 대던지.”

순간 눈앞이 번쩍했다. 그 다음 무차별적인 고문이 시작됐다.

각목으로 내리치고 또 내리치고, 그러다 내가 정신을 잃자 얼굴에 물을 끼얹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자 악이 오를 대로 오른 수사관은

옆에 지키고 있던 병사의 자동소총을 벗겨 개머리판으로 치기 시작했다.

족쇄에 팔이 뒤로 묶인 나는 무방비 상태에서 고스란히 뭇매를 다 맞을 수 밖에 없었다.

사방에 피가 튀고 살점이 뜯겨졌다. 얼마나 맞았는지 온 몸에 감각이 없다.

 “너 이새끼, 안되겠구나, 공기 좋은데 가고 싶어?”

하고 소리치던 수사관이 들고 있던 소총으로 나의 발등을 내리 찍었다.

‘공기 좋은 곳’이란 바로 북한에서 정치범관리소를 뜻하는 말이다.

관리소가 위치 한 곳이 심심산골이라 비유해서 말하는 것이다.

뼈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발등은 순식간에 피로 범벅이 되었다. 나는 또다시 정신을 잃었다.

시간이 흘러 정신을 차리고 매를 맞아 퉁퉁 부운 눈을 가까스로 떠보니 한치 앞도 가려볼 수 없는 지하 감방이었다.

온 몸이 욱신거리고 부서진 발등은 피가 덕지덕지 굳어 있고 그 아픔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김정일에게 충성한 대가가 바로 이것이란 말인가?’ 너무도 억울하고 분했다.

6 석방

이렇게 한 달반 동안 나의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수사관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나에게 누명을 씌워보려고 갖은 발악을 다하였다.

사무실과 집, 승용차를 샅샅이 수색하고 또 사람들을 만나 조사를 하였다.

하지만 그 어떤 단서도 잡을 수 없었다.

나를 그냥 석방하자니 무슨 큰 반혁명분자를 잡은 듯이 요란을 떨며 나를 잡아 온 것이

위로부터 추궁을 받기도 하거니와 저들의 목숨도 문제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수사관의 방으로 불려갔다.

오랜만에 밖으로 나온 탓에 햇빛에 눈이 시어 한동안 현훈증이 왔다.

통증이 심해 다리를 절며 수사관의 방에 들어서자 여느 때와 달리 담배를 권하는 것이었다.

언뜻 나의 머리에는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사관은 나에게

 “오늘이 마지막 날이니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네가 실토하면 살려주고 그렇지 않으면 관리소(정치범수용소)로 보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나는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이미 정해져 있다면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차라리 지하감방 보다는 정치범관리소가 낫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만큼 한 달반이 나에게는 너무도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야릇한 미소로 나를 바라보던 수사관은 나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종이에는 서약서라고 씌어 있었다.

 

나는 꿈인가 싶어 수사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읽어 보고 수표(사인)하시오.”

거기에는 이 안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 그 어떤 발설도 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한다고 되어 있었다.

결국 나는 ‘죄’를 벗었구나 하는 생각보다 억울함이 북받쳐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너무도 허무했다.

수사관은 “최고사령관 김정일동지의 배려에 의하여 오상민동지는 이 시각부터 자기위치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고 말했다. 이럴 때는 “최고사령관동지를 위하여 복무함”이라고 해야 하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집으로 돌아 왔다. 어머니는 두부를 준비해 놓고 계셨다.

북한에도 감옥에 갔다 오면 두부를 먹이는 풍습이 있다.

5살짜리 아들은 내가 어디에 갔다 온지도 모르고 어깨에 매달리며 좋아라 한다.

그런데 아내가 보이지 않았다.

7. 가슴 아픈 이별

아내가 집에 없는 이유를 어머니로부터 전해들은 나는 아연해졌다.

내가 한 달반 동안 보위사령부에 구속되어 있는 동안 아내는 정치범관리소로 갈수도 있다는 말에

이혼을 신청했다는 것이다.

친구들은 물론이고 집에 오는 사람마다 나보고 여자복이 있다고 할 정도로 내 아내는

인물도 좋고 출신성분도 좋으며 내조도 잘했었다.

더구나 나의 일이라면 묵묵히 뒤에서 거들어주었다.

그러던 아내가 이혼을 하겠다는 것이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집안을 둘러보고서야 정신이 들었다. 집안은 아무것도 없었다.

가장집물은 물론 부엌세간마저 밥그릇 3개, 국그릇3개 숟가락 세 개, 밥솥 하나를 내놓고는 다 몰수해갔다.

이것이 바로 북한의 재산몰수 라는 것이다.

다음날 나는 친정에 가있는 아내를 만났다.

내 얼굴을 보자 아내는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빌었다.

 

 “그 사람들이(보위사령부) 이혼을 하지 않으면 나도 정치범관리소로 같이 보낸다고 해서...”

말끝을 흐리며 아내는 눈물만 흘렸다.

결국 독재가 한 가정을 갈라놓았다. 나는 그때에 뼈저리게 느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충성을 다해 지키던 ‘조국’이었다는 것을,

아내는 내가 무사히 돌아 왔으니 다시 재혼하자고 매달린다.

하지만 나의 동의 없이 이루어진 이혼이고 또 그처럼 믿었던, 자기 한 몸 때문에 자식까지 버리면서

이혼을 결심한 아내에게 배반당했다는 쓰라림으로 하여 그녀의 말을 뒤로 한 채 집으로 돌아 왔다.

이시기 나처럼 보위사령부에 의해 강제 이혼당한 가정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정치범수용소나 감옥으로 가게 되면 간부집들에서는 저들이 피해를 입지 않으려고 무조건 강제이혼 시킨다.

그러다가 ‘심화조’사건이 끝나면서 무죄로 해명돼 정치범수용소에서 풀려나 다시 돌아온 사람들 때문에

 재혼했던 사람들이 다시 이혼하고 본처와 합치는 웃지 못 할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집에는 내가 잡혀가 있을 때 머리 한번 내밀지 않았던 사람들이 꾸러미를 싸들고 모여들었다.

 정치부장은 집안을 둘러보고 나서 어디에 인가 전화를 하면서 “당장 물건들을 가져다 놓으라.”고 호통을 쳤다.

그로부터 이틀도 되기 전에 나의 집은 원상회복되었다.

이러는 모습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고맙기 보다는 쓰리고 아팠다.

만약 내가 나오지 못했더라면 이들은 우리 식구들을 쓴 오이 보듯 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8. 충신에서 배신에로의 의식변환

나는 다시 출근을 하였다. 하지만 무엇인가 나의 마음속 한구석을 짓누르고 있었다.

 아무리 술을 마셔도 내려가지 않았으며 가라오케(화면반주음악)가 설치된 서산호텔에서 목청껏 노래를 불러 봐도 내려가지 않았다.

어느날인가 집에 일찍 들어온 나는 무심결에 라디오를 켰다.

소리가 맑지 못하고 잡음이 들리기에 주파수를 돌려보았다.

참고로 북한에서 보위부원들의 라디오와 TV는 주파수를 고정하지 않는다.

주파수를 돌리던 중 우연히 남한방송을 듣게 되었다. KBS사회교육방송 채널이었다.

호기심으로 몇 분 들어 봤다.

뉴스시간이었는데 태국주재 북한대사관 참사인 홍순경씨가 한국으로 망명했다는 것이다.

이미 전에 황장엽선생이 남한으로 망명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터라 이 소식은 나의 심장을 뛰게 했다.

이 분들은 북한에서 고위직에 있었는데 남한이 이들을 받아준다는 것은

혹시 나도 받아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북한의 권력기관에 복무하는 사람들은 혹시나 남한에 의한 통일이 되거나 할 경우

자기들의 신변안전에 대해 신경을 많이 쓴다. 나도 물론이거니와 내주변의 친구들도 같은 생각이다.

지금은 내가 남한에 와서 알게 된 것이지만 북한에 있을 당시만 해도

내가 남한에 가면 보위부에서 근무한 것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지나 않을까하고 생각했다.

북한의 권력기관 복무자들에게 이런 내용을 알려주는 것도 필요하다고 본다.

이때부터 나는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으며 사회교육방송은 물론

미국의 소리방송과 자유아시아방송을 즐겨 듣게 되었다.

그런데 라디오를 듣는 사람이 나뿐이 아니라는 것을 그때에야 알게 되었다.

그전에는 무심결에 들었던 말들이 다 라디오를 듣고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북한에서 국가안전보위부에 같이 근무하던 친구와 술자리에서 이야기 하던 중

서로가 라디오를 듣는다는 것을 알고는 우리들의 우정은 더욱 두터워졌다.

그러던 그 친구를 남한에 와서 만났다. 그는 나보다 한참이나 먼저 탈북을 하였던 것이다.

 결국 나의 의식변화는 라디오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라디오를 들으면 김정일 독재정권의 기만성과 허위성을 잘 알게 되면서 그만큼 환멸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정치부장에게 라디오에서 들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처음에는 입도 못 열게 하던 그가 얼마 지나서 부터는 나의 말상대가 되어 주었다.

 정치부장 역시 라디오를 듣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분과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어느 날 밤 쥐도 새도 모르게 온가족이 풍차(정치범관리소전용차)에 실려 온데 간데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도 예외 없이 김정일의 숙청대상이 된 것이다.

나의 결심은 이미 내려 졌다.

사람의 운명이 촛불만도 못한 세상인 북한에 더는 미련이 남지 않았다.

나도 언젠가는 저 사람들처럼 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몸서리쳐졌다.

하지만 탈북을 결심하기 까지는 아직 시간이 필요 했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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