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르며 살기

by 김원일 posted Aug 26, 2011 Likes 0 Replies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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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3 13 / 사순절 첫째 주일

아우르며 살기

사도행전 10:9-16

곽건용 목사

우상에 절해도 괜찮네!

시리아라는 나라에 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던 나아만이란 장군이 있었는데 불행히도 그는 한센 병 환자 곧 문둥병자였습니다. 시리아군이 이스라엘을 침공했을 때 그는 거기서 한 어린 소녀를 잡아와서 여종으로 삼았는데 하루는 그녀에게서 이스라엘의 예언자 엘리사를 소개받았습니다. 그가 하라는 대로 하면 문둥병이 나을 것이란 얘기였습니다. 나아만은 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왕에게 나아가 자초지종을 얘기하여 이스라엘 왕에게 보내는 친서를 받아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왕에게 줄 선물을 나귀에 싣고 그에게 가서 자기 나라 왕의 친서를 전했습니다. 친서에는 “내 수하의 장군 나아만을 귀하에게 보내니 부디 그의 문둥병을 고쳐주십시오.”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편지를 읽은 이스라엘 왕은 이들의 의도를 오해했습니다. 그는 “내가 무슨 수로 문둥병을 고친단 말인가? 이는 필시 트집을 잡아 전쟁을 벌이려는 수작이다.”라며 옷을 찢었다고 했습니다. 외교문서였으니 표현과 의도를 분명히 밝혔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아 생긴 오해였습니다. 이로써 나아만은 위기에 빠졌습니다. 혹 떼려다 혹 붙인 격이 됐지요.

그런데 엘리사가 이 얘기를 듣고 왕에게 사람을 보내 나아만을 자기에게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나아만이 엘리사에게 갔는데 예언자는 무슨 이유인지 그를 직접 만나지 않고 그에게 사람을 보내 요단강 물에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말했습니다. 나아만은 이 말을 듣고 화가 나서 자기 나라로 돌아가려 했는데 부하 하나가 “그까짓 것 어려운 일도 아닌데 속는 셈 치고 그 사람 말대로 해보십시오.”하고 권하는 바람에 밑져봐야 본전이라고 생각하고 엘리사가 말한 대로 행했더니 몸에 새살이 돋아 어린아이처럼 몸이 깨끗해졌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나아만이 엘리사에게 가서 “저는 이스라엘 밖에는 온 세상에 신이 없음을 이제 알았습니다. 감사해서 드리는 이 선물을 받아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말하자면 복채를 내놨지만 엘리사는 그걸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나아만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제부터 저는 야훼 외에 다른 어떤 신에게도 번제나 희생 제사를 드리지 않겠습니다.”라고 엘리사에게 자발적으로 맹세를 했습니다. 종교선택의 자유가 있던 시절도 아니니 그는 매우 특별한 결단을 한 셈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개종’을 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그는 나귀 두 마리에 실을 만큼의 흙을 달라고 청했습니다. 요단강이 야훼의 관할지역인 이스라엘 안에 있기 때문에 자기가 그 물에 몸을 씻고 병이 나았다고 나아만이 믿었으므로 혹시 병이 재발이라도 하면 이스라엘 땅의 흙이 필요하리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야훼 이외에 다른 신에게는 제사를 드리지 않겠지만) 한 가지 야훼께서 양해해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저는 왕께서 림몬 신전에 제사 드리러 갈 때에 왕을 부축해드려야 하고 왕이 절을 할 때 같이 엎드려야 합니다. 이것만은 야훼께서 양해해주셔야 하겠습니다.” 림몬은 시리아의 신이고 시리아 왕은 당연히 림몬 앞에 나아가 제사를 드렸겠지요. 그때 시리아 왕의 신하인 자기도 왕을 따라서 절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입니다. 비록 자신은 야훼만 믿기로 작정했지만 이 경우에는 어쩔 수 없으니 양해해달라고 청한 것입니다. 엘리사는 그에게 “걱정 말고 가시오.”라고 대답했습니다. 시리아 왕과 함께 림몬 신에게 절해도 괜찮다는 뜻입니다. 엘리사는 나아만이 우상 앞에 절해도 괜찮다고 말했습니다! 야훼 하나님의 예언자가 나아만에게 십계명을 어겨도 괜찮다고 말했습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소리에 공명(共鳴)하는 것

‘신앙’처럼 정의하기 어려운 것도 흔치 않습니다. ‘정의’(definition)란 모든 사람이 공감하고 동의해야 하는데 신앙에 대해서 모두가 동의하는 정의를 만들기는 어렵습니다. 결국 신앙에 대한 모든 정의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일 수밖에 없지요. 하지만 그렇게 부분적으로라도 우리는 신앙을 정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분적이란 사실만 잊지 않으면 되겠습니다.

저는 오늘 신앙을 ‘공명’(共鳴)이라고 정의해 봅니다. 우리가 예배 서두에 치는 징소리에는 공명이 있습니다. '!' 하고 징을 치면 그 소리가 주변으로 퍼져나가고 두 번째 징을 치면 그 소리가 첫 징소리와 공명하면서 퍼져나갑니다. 세 번째 징소리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징소리와 공명하지요. 신앙은 이와 같은 공명이란 얘기입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사람에게 다양한 소리를 내보내시는데 신앙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소리에 공명해서 같은 소리를 내는 것이란 얘기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2011년 사순절에 어떤 소리를 보내시는지 생각했습니다. 2011년 사순절에 우리에게 보내시는 하나님의 소리는 무엇일까요? 제가 묻고 제가 대답하는 게 좀 그렇지만 저는 그것을 ‘아우르라’는 소리로 듣습니다. 이 ‘아우르라’는 소리는 근래에 일어난 여러 사건들을 보면서, 또한 엘리사와 나아만의 얘기를 읽으면서, 그리고 이제부터 얘기하려는 베드로와 고넬료 얘기를 명상하면서 들은 소리입니다.

그 동안 우리는 나아만의 한센 병이 기적적으로 나았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지만 엘리사가 나아만의 처지를 이해하여 림몬 신에게 무릎 꿇는 일, 곧 우상에게 절하는 일에 대해 죄책감 가질 필요가 없다고 했다는 얘기, 곧 그 당시 상황을 감안하면 기절할 정도로 ‘획기적’인 말을 했다는 사실에는 귀를 막고 있었습니다. 이젠 이 얘기를 알게 됐으니 우리가 공명할 차례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고넬료라는 로마군 백부장이 있었습니다. 그는 “경건한 사람이어서 온 가족과 함께 하나님을 공경하였고 유대인들에게 자선을 베푼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유대교에 공감하는 이방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사람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God-fearer)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루는 그가 기도드리다 요빠에 사는 피장이 시몬의 집으로 사람을 보내서 베드로라는 사람을 데려오라는 천사의 지시를 받았고 그대로 시행했습니다.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에 당도했을 즈음에 이번에는 베드로가 환상을 봤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땅으로 내려와서 보니까 그 속에는 온갖 집짐승과 길짐승과 날짐승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베드로야, 어서 잡아먹어라.”라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주님, 저는 일찍이 속된 것이나 더러운 것을 한 번도 입에 대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는 겁니다. 그러자 다시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라.”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같은 말이 세 번 오고간 후 그릇이 하늘로 들려 올라갔습니다. 같은 말이 세 번 오갔다는 말은 베드로가 얼마나 고집스럽게 그 짐승들을 먹지 않겠다고 우겼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만큼 유대인들에게 먹어도 되는 음식과 먹으면 안 되는 음식을 규정한 정결법이 중요한 의미를 가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더럽지만 참고 먹으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라.”고 하늘은 말했습니다. 정결법 그 자체를 뒤집어 엎어버린 것입니다.

이 순간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당도했고 이튿날 베드로는 그들을 따라서 고넬료의 집으로 갔습니다. 거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유대인은 이방인과 어울리거나 찾아다니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어떤 사람이라도’ 속되거나 불결하게 여기지 말라고 이르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거절하지 않고 따라왔습니다. 무슨 일로 나를 오라고 하셨습니까?

베드로는 이때 환상 속의 짐승이 사실은 짐승이 아니라 사람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짐승에 관한 얘기가 아니라 사람에 관한 얘기였고 따라서 부정한 짐승을 멀리하는 문제가 아니라 유대인이 부정하다고 생각했던 이방인을 멀리했던 데 대한 계시였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고 할례도 받지 않았다고 해서 ‘이방인’이라고 부르며 낮춰 취급했던 사람들을 하늘의 음성은 하나님이 그들도 본래부터 깨끗하고 거룩하게 창조하셨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베드로로 하여금 깨닫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나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차별대우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두려워하며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면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다 받아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라고 선언했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진화 과정

이 작은 에피소드가 갖는 의미는 매우 큽니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결정적인 순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것은 ‘선민의식’을 깨뜨린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 후 베드로가 예수에 대해 얘기하는 동안에 그 자리에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래서 거기 있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네요.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었던 모양입니다. 베드로도 놀랐겠지만 어쨌든 그는 “이 사람들이 우리처럼 성령을 받았으니 이들이 물로 세례 받는 것은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고 이들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이 사건은 교회 전체뿐 아니라 베드로 개인에게도 중대한 의미를 갖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은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했을 때 주님은 그를 칭찬하시며 그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천국의 열쇠란 것에 뭐 하는 것인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좌우간 중요한 의미를 가졌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너’가 베드로 개인을 가리키는지 그가 한 고백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지만 교회가 베드로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겠지요.

얘기가 여기서 끝났다면 해피엔딩이었겠지만 일이 그렇게 되지는 않았습니다. 베드로의 고백 직후에 예수께서 당신이 당할 고난과 부활에 대해 얘기하자 베드로가 썩 나서서 “그러면 안 됩니다!”라며 예수님을 꾸짖었습니다. 우리말 성경은 ‘만류했다’고 번역했지만 원문에 따르면 ‘꾸짖었다’가 맞습니다. 베드로가 감히(!) 예수님을 꾸짖었습니다. 그만큼 예수의 고난과 부활이 그에게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참변’이었던 것입니다. 이때 주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라고 말씀하시며 그를 꾸짖으셨습니다.

얘기가 이 에피소드로 끝났다면 베드로 얘기는 불행한 결말이었겠지요. 베드로의 고백은 완전히 ‘인증’받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부정되지도 않았습니다. 그의 고백은 아직은 어떻게 결말지어질지 모르는 미완성이었고 담금질이 필요한 설익은 고백이었습니다. 예수는 부활하신 후 베드로에게 나타나서 그의 고백을 용광로에 담금질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물음으로 말입니다. 이때 예수는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과거의 질문을 반복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베드로는 예수가 누군지 알았기 때문에 그의 신앙은 다음 단계로 진화해야 했는데 그 단계가 사랑의 단계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를 보면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은 ‘사랑’이라는 용광로를 통과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고백은 제 아무리 그럴듯하고 멋지다 해도 ‘사랑’이란 용광로에 담금질되지 않으면 에너지를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를 사랑의 용광로로 담금질하셨습니다.

그것으로 끝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직 과정이 하나 더 남아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의 참된 사도가 되려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차별대우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두려워하며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받아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에게는 ‘아우르는 영성’이 있어야 했습니다.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해서 예수께로 이끌 바로 그 아우르는 영성 말입니다. 하나님에게는 부정한 사람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거룩하게 창조하셨기 때문에 누구도 차별대우해서는 안 된다는 깨달음이 예수의 사도가 되기 위해서는 필수적이었습니다.

올바른 신앙고백이 중요하다는 말을 우리는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습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올바른 신앙고백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해야 할 사랑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하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는 사랑은 감정적인 사랑이 아니라 의지적인 사랑이어야 하고 전 인격적인 사랑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사랑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사랑이기에 차별이 있어서도 안 됩니다. 모든 사람을 아울러야 하는 사랑이란 얘기입니다.

아우름은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장식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과 사랑과 아우름의 세 다리가 떠받치고 있다고 믿습니다. 이 셋 중 하나라도 쓰러지면 그리스도교 신앙은 서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일본에서 일어난 전에 없는 대지진을 두고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의 원로목사가 이 참사를 일본 사람들의 우상숭배와 무신론과 물질주의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라고 해석했습니다. 마치 자신이 하나님이요 심판자라도 된 줄 아는 모양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비난하고 있으니 제가 더 보탤 필요는 없겠지만 이 분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세 기둥 중 적어도 하나를 무시하고 있음에 분명합니다. 그래서는 그리스도교가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의 종교를 그리스도교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2011년 사순절에 아우르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음성에 공명해서 이 하나님의 음성이 더 널리, 더 크게 퍼져나가게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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