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답할 수 없는 질문

by 김원일 posted Sep 03, 2011 Likes 0 Replies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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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3 20 / 사순절 둘째 주일

대답할 수 없는 질문

누가 13:1-5

곽건용 목사

“네 잘못이 아냐. 네 잘못이 아냐......

어떤 분이 제 책 《예수와 함께 본 영화》를 읽고 제게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내용은, 자신은 책에서 얘기하는 영화 27편 가운데 한 편도 안 봤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책과 영화 DVD 27개를 한 세트로 만들어 팔면 어떻겠냐는 얘기였습니다. 물론 농담이었겠지요. 그 동안 책에 나온 영화들 중에서 절반 정도를 봤다거나 거의 다 봤다거나 전부 다 봤다거나 절반도 못 봤다거나 하는 얘기들은 들어봤지만 한 편도 안 봤다는 분은 이 분이 처음입니다. 어떤 TV 드라마에서 화면에 몇 권의 책이 등장했는데 드라마가 히트하니 거기 비친 책들까지 갑자기 베스트셀러가 됐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제 책 때문에 영화 DVD가 갑자기 많이 팔릴 것 같지는 않네요.


제가 설교에서 얘기하는 영화는 다는 아니지만 대부분이 많이 알려지지 않은 영화들입니다. 그게 얘기하기 편하기 때문입니다. 너무 널리 알려진 영화는 얘기하기가 어렵습니다. 제 기억이 틀릴 수도 있고요. 그런데 오늘은 널리 알려진 영화 얘기를 잠시 하겠습니다. 1997년에 나온 <굿 윌 헌팅 Good Will Hunting>이란 영화가 그것입니다. 이 영화는 배우이기도 한 맷 데이먼과 벤 에플릭이 함께 쓴 시나리오로 만든 영화이고 둘이 같이 출연하기도 했지요. 그 다음 해에 두 사람이 아카데미 영화제에 같이 나와서 상을 받던 장면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이때 이 두 사람은 서른 살도 안 됐던 걸로 기억합니다. 저는 영화를 보면서 ‘어떻게 서른 살도 안 된 아이들이 이런 영화를 썼나......’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스무 살의 윌 헌팅은 낮에는 건축현장에서 노동을 하고 저녁때는 MIT에서 청소를 하며 먹고 사는 평범한 청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천재입니다. 그에게는 가까운 친구들이 있는데 이들 중에는 윌이 천재임을 아는 친구도 있습니다. MIT에는 필즈(Fields) 메달 수상자인 제럴드 램보 교수가 있는데 그는 학생들에게 풀어보라고 어려운 수학문제를 복도에 있는 게시판에 써 놓곤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 문제를 풀어내는 학생이 없었습니다. 하루는 윌이 복도를 청소하다가 문제를 발견하고 순식간에 풀어버립니다. 다음날 이를 제럴드가 보고 학생들 중에서 문제 푼 사람을 찾으려 하지만 찾아내지 못합니다. 문제는 학교 청소부인 윌이 풀었으니 말입니다. 나중에 제럴드는 윌을 찾아내서 자기 학생으로 만들려 하지만 윌은 이를 완강히 거부합니다. 그러다가 윌이 동네 청년들과 패싸움을 하다가 체포됐고 판사는 구류처분을 내리지만 제럴드가 윌을 상담치료 받게 하겠다고 판사에게 약속함으로써 그는 풀려납니다. 그리고 제럴드는 윌을 자기 친구이고 커뮤니티 칼리지 교수인 션에게 데려가 상담을 받게 합니다.

윌은 좀처럼 션에게 마음을 열지 않지만 션은 윌의 심리상태에 뭔가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고 정성껏 상담을 합니다. 그러다가 션이 죽은 자기 아내와 만난 얘기를 꺼내지요. 1975년 보스턴 레드삭스가 월드시리즈에 진출했을 때 션은 아내와 데이트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는 시리즈가 33으로 팽팽했고 7차전 입장권이 있었지만 야구장에 가지 않고 아내(그때는 여자친구)와 데이트했다고 말하자 윌은 어떻게 그런 정신없는 짓을 했냐고 말합니다. 이런 대화를 통해서 둘은 서서히 마음을 열지요.

한편 윌은 하버드 대학생인 스카일라와 사귀는데 그녀는 졸업하면 스탠포드 의대에 진학할 예정이었습니다. 윌은 그녀를 좋아하지만 그녀에게 마음을 열지 않아 스카일라는 답답하기만 합니다. 윌이 그렇게 된 데는 그가 고아가 되어 양부모에게 맡겨졌는데 그들에게 많이 학대받으며 자라서 그때 생긴 방어기제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음을 열어야 할 때 열지 못하고 마음을 닫고 살아왔던 것입니다.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윌과 션이 드디어 마음을 열고 부둥켜안고 우는 장면입니다. 이때 션이 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 잘못이 아냐. 네 잘못이 아냐. It's not your fault.....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윌이 제럴드 덕에 얻을 뻔한 좋은 직장을 버리고 친구가 선물한 고물 자동차를 몰고 스카일라를 만나러 스탠포드로 가는 장면입니다. 윌의 마음에 견고하게 쌓여 있어 그가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열지 못하게 만들었던 방어기제를 무너뜨린 것은 션의 말 한 마디였습니다. “네 잘못이 아냐. 네 잘못이 아냐. It's not your fault.....


종교는 지식을 제공해줘야 한다?

사람들은 종교가 지식을 제공해줘야 한다는 생각에 익숙해 있습니다. 물론 종교는 지식과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하는 ‘열렬한’ 신자들도 있습니다. 그저 은혜 받으면 그만이고 천국 가면 그만이지 뭘 알 필요가 있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종교는 뭔가를 알려주는 것이고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길입니다. 오래 전 일이지만 서점에 갔다가 <예수 경영학>이란 제목의 책을 보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대충 살펴보니 예수를 알면 기업경영도 잘 할 수 있다, 성공적인 기업경영의 비결을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책의 저자에게 기독교는 성공적인 경영의 비결을 가르쳐주는 선생입니다.

성경에서 성공적인 기업경영의 비결을 찾으려 하는 시도를 ‘세속적’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 중에는 성경이 ‘축복받는 비결’을 알려주는 책이라고 하면 별로 거부감이 느끼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둘 다 뭔가를 알려준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둘 사이에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성경에서 기업경영의 비결이나 축복받는 비결을 찾는 시도가 바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수준이 낮다’고 비판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방법’이나 ‘구원받는 비결’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렵니까? ‘성공적인 기업경영’이 ‘영생’으로 바뀌고 ‘(물질적인) 축복’이 ‘구원’으로 바뀌면 달리 들리지 않습니까? 앞의 것은 세속적이고 뒤의 것은 영성적이니 다른 느낌이 드는 것도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근본적으로 종교(여기서는 기독교)가 그 어떤 지식이나 앎을 제공해준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는 ‘하급정보’이고 다른 하나는 ‘고급정보’라는 정도가 다를까요?


또 사람들은 종교가 신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를 알 수 지식 또는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지식을 얻으려고 종교를 갖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종교는 세상이 어떻게 존재하게 됐는지 그 과정과 세상이 왜 존재하는지 그 이유와 목적을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종교는 이와 관련된 지식을 제공하기도(또는 제공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나는 왜 존재하는지, 내가 존재하는 이유와 목적은 무엇인지 알려줄 의무가 종교에 있다는 듯이 사람들은 행동합니다. 이와 같은 다양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주지 못하는 종교는 ‘좋은’ 종교가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그런 종교는 ‘무능한 종교’이고 ‘쓸모없는 종교’로 치부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람들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과 사건들이 왜, 무엇을 위해서 일어나는지에 대한 대답을 종교가 주기를 기대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런 문제에 대해 대답할 ‘의무’를 종교에 부여하기도 하고 또 일부 종교지도자들(또는 종교권력자들)은 스스로 이 의무를 짊어지기도 합니다. 모름지기 종교지도자라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왜, 무슨 이유 때문에 일어나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런 사람에게 종교는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신비와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이 아닙니다.


종교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

결론을 미리 말하면, 종교적인 앎(지식)은 근본적으로 ‘오직 모를 뿐’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런 것은 무지이고 불신앙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린 지난 열흘 남짓을 일본에서 일어난 대지진과 해일 및 그 때문에 벌어진 원전의 참사에 대한 소식 가운데 지냈습니다. 서아시아와 북 아프리카에서 벌어지는 민주화 투쟁 등 다른 모든 뉴스들은 이 소식에 묻혀버렸을 정도입니다. 일본의 참변을 두고 세계 최대 교회의 원로목사인 조용기 목사가 “그것은 일본사람들의 우상숭배와 무신론과 물질주의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발언은 좁게 보면 그의 보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신앙의 표현이지만 넓게 보면 인간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과 사건들은 설명할 수 있다고 보는 생각의 표현입니다. 조 목사의 눈에는 이 세상에는 설명할 수 없는 신비는 존재하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은 있을 수 없어 보입니다. 합리주의자가 들으면 화를 낼지 모르지만 조 목사의 신앙은 매우 ‘합리주의적 신앙’입니다.


구약성서의 욥은 “왜 하필 나입니까? Why me?”라고 물었습니다. 내가 뭘 그렇게 크게 잘못했다고 이 엄청난 고통이 내게 닥쳤는가 말입니다! 하나님도 절 의인이라고 부르지 않으셨습니까? 왜 저 같은 의인이 ‘이유 없이’ 이런 고통을 당하는가 말입니다!


욥기가 제기하는 의인이 당하는 고통에 대한 질문이요 그런 일이 일어나게 만드신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질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욥기 안에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일반 신자는 물론이고 학자들까지 그 답을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러저러한 학자들이 이러저러한 대답을 찾았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욥기를 잘 읽어보면 욥기가 내놓은 대답은 ‘답이 없다’입니다. 욥기는 의인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서도, 그런 ‘억울한’ 일이 일어나게 하신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서도 아무 답도 내놓지 않습니다. 욥의 세 친구들과 나중에 등장하는 엘리후의 말은 그 동안 이 문제들에 대해서 사람들이 내놓은 대답들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말하자면 욥은 문제를 제기하고 친구들은 답을 내놓은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하나님이 등장해서 길게 말씀합니다. 학자들은 이 하나님의 말씀에 문제에 대한 답이 있다고 믿고 열심히 연구해왔지요. 그리고 거기서 이런저런 답들을 내놓았습니다. 하지만 매우 모호하게 표현되어 있긴 하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가리키는 바는 ‘답이 없다’입니다.


오늘 읽은 누가복음 13 1-5절에는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그 때 어떤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빌라도가 희생물을 드리던 갈릴래아 사람들을 학살하여 그 흘린 피가 제물에 물들었다는 이야기를 일러드렸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죄가 많아서 그런 변을 당한 줄 아느냐? 아니다. 잘 들어라.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또 실로암 탑이 무너질 때 깔려 죽은 열여덟 사람은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죄가 많은 사람들인 줄 아느냐? 아니다. 잘 들어라.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도 안 좋은 시간에 안 좋은 곳에 있다가 불행을 당한 사람들은 그들이 지은 죄 때문에 그렇게 됐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죄가 많아서 그런 불행을 당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예수님 대답은 그런 것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므로 묻지 말라는 뜻으로 들립니다.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죄를 많이 져서도 아니고 더 적게 져서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죄와 상관없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런 것은 대답할 수 없는 문제일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들이 회개했어야 할 죄는 그런 불행을 죄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죄, 그래서 그런 불행을 당하지 않은 사람은 그 같은 죄를 저지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죄가 아닐까 하고 읽습니다. 이번에 일본인들이 겪고 있는 불행과 고통을 두고 우상숭배니 무신론이니 물질주의니 하고 비판한 조용기 목사의 경우가 여기 해당되지 않을까 합니다.


종교는 과학보다는 예술에 더 가깝습니다. 우리는 좋은 예술작품에 감동을 느끼지만 그 작품이 왜 감동적인지, 어떤 점에서 감동적인지, 그 감동이 어디서 오는지는 설명하지 못합니다. 예술작품을 요모조모로 분석해서 아름다움을 파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움과 감동은 그저 느껴지는 것이고 내게 다가오는 것이므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아름다움은 여기에 있고 감동은 저기에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종교는 우리네 삶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남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 예를 들면 삶의 유한함이라든지 고통의 문제라든지 슬픔과 절망, 그리고 삶의 불공평함과 같이 우리 사람의 힘으로는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음을 받아들이도록 돕는 것이 종교입니다. 물론 우리가 해결할 수 없으니까 이런 문제들을 방치해두자는 뜻은 아니고 그런 문제의 해결을 하나님에게 미뤄두자는 말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 문제들을 끌어안고 씨름해야 하지만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종교는 인간이 쉽게 설명되지 않는 현실과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과 더불어 ‘평화롭고 창조적으로’ 심지어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은 대답하려 하지 않고 그저 곁에 두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종교란 그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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