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과의 경주(어제 내 페이스북에 이 글을 올리고 '돈키호테'라는 칭호를 얻었음)

by 최종오 posted Sep 09, 2011 Likes 0 Replies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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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태양과의 결전의 날이 왔습니다.

난 페어플레이를 위해 태양이 내 머리 위까지 떠오르길 기다렸습니다.

나의 정정당당함에 기가 죽었는지 태양은 비구름 속에 숨어버렸습니다.

사실 꿈지럭 거리다가 그렇게 된 거지만 그런 말은 태양에겐 할 필요가 없습니다.

.

우린 동시에 출발했습니다.

나는 최대한 빨리 달렸습니다.

그러나 태양은 달리는 것 같지도 않은데 나보다 빨리 달아났습니다.

설상가상 내 가는 도로 위에는 뭔 그리 속도제한 표지판이 많은지 정말 답답했습니다.

하루 종일 태양을 놓칠까봐 마음 졸였습니다.

사실 난 서쪽 초원(스페인어로는 Las Vegas)에 사는 승리엄마 만날 생각에 빨리 간 건데 이 말도 태양에겐 감추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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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이 저 멀리 사라지려 합니다.

속도제한의 핸디캡에 고전하고 있는 내게 태양은 직사광선으로 내 눈을 부시게 해 추격의지를 꺾으려 합니다.

난 태양이 비겁한 얘란 걸 지난 번 동부로의 경주에서 이미 눈치 챘었습니다.

그땐 출발 때 부정을 저지르더니 이젠 후반에 그 짓을 하다니...

어째 초반에 페어플레이를 한다 했더니만 믿은 내가 잘못이었습니다.

저도 창피한지 빨간 얼굴로 얼른 사라져버렸습니다.

달리는 걸 그만두고 내일 태양과의 2차전을 위해 출발선 근처에 모텔을 잡았습니다.

사실 태양과 경주해야 예쁜 세상을 볼 수 있어서 그런 건데 그런 내 속마음은 털어놓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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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내일의 경주를 위해 작전을 짜는 시간입니다.

내일은 태양을 등 뒤 멀찍이 놓고 출발할 작정입니다.

그러나 정정당당한 내 성격상 또 태양을 내 머리 위에 올 때까지 기다릴게 뻔합니다.

그 방법으로 이길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매번 그렇게 합니다.

하지만 이번엔 나도 태양을 놀릴 히든카드가 있습니다.

그건 옛날 술래잡기 할 때 쓰던 건데 놀이하다말고 집에 가서 밥 먹고 잠들면 술래는 그것도 모르고 지구 끝까지 나를 찾아다니게 했던 전술이 그겁니다.

태양이 나를 재촉하느라 중천에서 하루 종일 아무리 쨍쨍 거려도 난 안 나갈 겁니다.

태양은 내 작전도 모르고 내 앞에 뽐내며 달릴 생각에 이 밤도 또 신나는 꿈을 꾸고 있겠지요.

태양은 내가 사전 통보 없이 이 경주를 그만둘 걸 모르고 있습니다.

사실 내가 먼거리를 홀로 여행하는게 너무 고독해 태양을 이용한 건데 그 이야기는 동부에로의 다음 경주를 위해 하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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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 8일 목요일 밤에...

미국 아이오와(Iowa)주 80번 고속도로 어딘가에 있는 모텔 6에서...

동부의 앤드류스 대학교에서 서부의 라스베가스까지 자동차로 3000km를 운전하고 가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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