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절과 저작의 차이

by 로산 posted Sep 17, 2011 Likes 0 Replies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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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절과 저작의 차이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이 성경절을 표가 나지 않도록 내가 표절해 보겠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부족한 점을 온전하게 하시며

애타하는 영혼에게 희망을 주신 믿음의 주인을

매일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수를 보자“

 

 

사실 내가 표절한 글만 읽으시면

히12장2절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이게 글을 쓰는 사람들이 남의 글을 표절하는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대학교수들이 전문서적을 인용할 때는 그렇게도 못하고

문장 자체를 살그머니 가져다 놓으므로 나중에 표절에 몰리고

문제가 되는 겁니다

 

 

나도 설교할 때 화잇 여사의 글을 잘 인용합니다

표시 안 나게 구어체로 바꾸어서 인용합니다

 

 

정말로 1800년 대는 표절에 대한 법적 제제가 없어서

대쟁투가 수많은 책을 그대로 표절했을까요?

그러다가 그 와중에서 표절에 대한 법적 제제가 생겨서

1888년도에 개정판을 낼 때 인용구를 표시했을까요?

 

 

그런데 정작 제일 중요한 계13장의 예언해석

즉 우라이야 스미스가 해석한 부분은 왜 출처를 밝히지 않고

그대로 적었을까요

이 문제는 다음에 다시 거론하기로 하고...

 

 

간단히 말하자면 페니 볼톤은 화잇여사의 비서였습니다

요즘 드라마에서 나오는 전화나 받고 일정표를 정리해 주는

그런 비서가 아니라

화잇여사가 계시 본 부분을 구술하면 받아 적고

책을 구술하면 그것을 적어서 출판까지 하는 그런 비서였습니다

그는 매우 똑똑한 여인입니다

그는 찬미가도 작사 했는데 바로 450장 “오직 주만 높임을 받으시고”입니다

작사 작곡 모두 그가 Arr한 것입니다

 

 

그가 쓴 책이 있습니다

Step to Christ “그리스도께로 가는 계단” 즉 정로의 계단입니다

그가 쓴 앞 부분을 인용해 드립니다

 

God's Love for Man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자연과 계시는 모두 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증언하고 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생명과 지혜와 기쁨의 근원이시다. 자연에 있는 놀랍고도 아름다운 사물들을 바라보라. 인간뿐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의 필요와 행복을 위해서 자연이 얼마나 놀랍게 적응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라. 땅과 언덕과 바다와 평야에 기쁨과 생기를 주는 햇빛과 비는 모두 창조주의 사랑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그의 피조물들에게 매일 매일의 필요를 공급해 주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시편기자는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시로 하나님을 노래한다.

 

 

-모든 사람들의 눈들이 당신을 우러르니

-당신은 그들에게 절기에 맞춰 고기를 주시고

-당신은 당신의 손을 열어

-모든 생명의 필요를 충족시키시네

-시편 145;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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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화잇 여사가 쓴 정로의 계단입니다

 

 

제 1 장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천연계와 계시(啓示-성경을 의미함)는 둘 다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생명과 지혜와 기쁨의 근원이시다. 천연계의 기이하고 미묘한 것들을 보라. 그리고 그것들이 인류 뿐 아니라 모든 생물의 필요와 행복에 얼마나 적당한가를 생각하여 보라. 온 땅을 비추는 일광과 적시는 우로(雨露), 산과 바다와 들, 이 모든 것은 조물주의 사랑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과연 모든 피조물의 날마다의 필요를 공급하여 주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시인의 글 가운데 이런 아름다운 구절이 있다.

“중생의 눈이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때를 따라 저희에게 식물을 주시며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케 하시나이다"

 

 

두 번역본을 비교 대조해 보십시오

물론 나 역시 페니 볼톤의 책을 화잇 여사가 표절했다고 믿지 않습니다만

이 문제로 페니 볼톤이 화잇 여사를 선지자로 인정하지 않은 것은 물론

그의 곁을 떠났다는 것이 무척 슬프게 합니다

 

 

사실로 말하자면

선지자도 인격이 있습니다

그의 인격이나 성품에 치명적인 문제가 생기면 교단 자체에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그러니까 절대로 표절하지 않았다 또는 남의 책을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았다

그렇게 우기게 된 겁니다

글의 유사성 그리고 편집의 유사성을 볼 때

두 사람 중 누군가가 남의 책을 송두리째 베껴 쓰기를 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한 분의 교수님이 내게 제안을 하셨습니다

책을 발간하고 싶은데 요점을 적어 줄테니 살을 붙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바쁜 내가 수긍할 리가 없었지요

책을 쓴다는 것 글을 쓴다는 것 그것 모두가 피를 말리는 작업이니까요

전에 십계명에 대한 책을 한 권 적었는데 아무 것도 안 하고 꼬박 한 달 걸렸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쓴 책을 다른 이가 자기 이름으로 발간한다면

기분 좋을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래서 페니 볼턴이 “자기 것”이라고 우기게 되었고

결국은 반대자 편에 서게 되고

다른 길을 걷게 되자

그는 화잇 여사는 선지자가 아니다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화잇 여사의 글에 대하여 조금만 못 마땅한 글을 올린다 싶으면

여러분들은 나를 정죄하기를 서슴치 않습니다.

교조적이고 근본주의적이고

자기에게 고착된 사상이외는 절대 용납 못하는 신앙들입니다

 

 

페니 볼톤의 글을 더 적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더할 나위 없이 거룩하고 행복하게 만드셨으며 아름다운 땅은 창조주의 손으로부터 나올 때부터 부패나 저주의 어두운 그림자를 가지지 않았다. 저주와 죽음을 불러온 것은 사랑의 법인 하나님의 법을 거역한데 기인한다. 하지만 죄 때문에 당하는 고통 가운데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다. 인간을 위해서 하나님이 땅을 저주하셨다고 기록되어있는 것이다. (창 3;17) 여기에 언급된 가시와 엉겅퀴 즉 인생을 수고와 걱정으로 만들어 버린 역경과 시련들 조차 인간을 위해 마련된 것으로 죄가 만들어 놓은 폐허와 부패에서 인간을 곧바로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필요한 훈련의 일부분 이었다.

세상이 비록 죄에 의해서 하늘로부터 떨어졌지만 모든 것이 슬픔과 절망만은 아니다. 자연 그 자체가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이다. 엉겅퀴 위에 꽃이 피어 있고, 가시는 장미로 감싸여 있다.

 

 

그리고 그 글에 대한 화잇 여사의 정로의 계단을 인용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매우 거룩하고 행복스럽게 창조하셨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땅이 조물주의 손으로 창조되었을 당초에는 쇠퇴의 증상(症狀)이나 저주의 음영(陰影)이 도무지 없었다. 그렇던 것이 비애와 사망이 이 세상에 이르게 된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사랑의 율법-을 범한 까닭이다. 그러나 비록 죄의 결과로 생기는 고통 중에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나타나 있다. 성경에 기록하였으되 “땅은 너(사람)로 인하여 저주를 받았”(창 3:17)다고 하였다. 가시덤불과 엉겅퀴-사람의 생애를 괴롭게 하고 근심케 하는 고난과 시련-도 죄가 빚어낸 영락(零落)과 퇴폐(頹廢)에서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에 필요한 훈련의 한 부분으로서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마련된 것이다. 이 세상이 비록 타락하기는 하였으나 모두가 슬픔과 비애 뿐만은 아니다. 천연 그 자체 가운데서 희망과 위안의 기별을 찾을 수 있다. 엉겅퀴에도 꽃이 피고 가시덩굴에도 장미꽃이 덮이운다.

 

 

나는 앞에서 말한대로

화잇 여사가 그 책을 표절하거나 아니면 훔쳤거나 했다고 보지 않습니다

선지자가 그럴 수는 없다는 여러분들과 같은 고민의 심정으로 그 글을 읽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 구석에서 뭔가는 모르지만 찜찜한 것이 꿈틀거림은 틀림없습니다

화잇 여사가 먼저 적은 것이었거나 구술한 것을

페니 볼톤이 자기 것이라고 우길 수 있다고도 생각해 봅니다

 

 

전에 교회와 신앙의 발행인인 최 삼경 목사가

시대의 소망은 이더 샤임의 예수의 생애에서 60%를 차용해 왔다고 했습니다

내가 그분에게 메일을 넣었습니다

“ 이더 샤임이라는 분이 쓴 책이 있다는데

그 책이 한국어로 번역이 됐나요?

혹시 그 책을 구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가 2001년 1월에 내게 답했습니다

“부분적으로는 번역이 되었지만 전체가 번역되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결국 자기도 그 책을 읽은 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회자되어 오는 화잇여사의 선지성에 대한 부정적인 글을

정상인양 적고 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책이 부분적으로 번역이 될 일이 아니거든요

그런데도 우리들 일부는 그 사상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화잇유산위원회는 절대로 아니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우리가 선지자의 글을 읽을 적에 조심할 것은

그의 글 전부가 축자거나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 신앙을 위해서 우리 주위에는 많은 종교서적이 있습니다

그런 책 가운데 우리가 더 정답게 여겨지는 책이라 생각하십시오

우리 교단의 지도자나 교수들은 무슨 이야기만 나오면

그 글에 대하여 화잇 여사가 뭐라고 멘트했는지부터 검색하는 이런 사고방식으로는

교단 성경 연구의 수준을 알만 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즈커 박사의 “영원한 본체를 붙잡다”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그리스도의 성육신 또는 인성에 대하여 자기들에게 유리한 구절들 골라내는

그런 연구로 편을 가르고 있었습니다

이게 우리 신학자들이 하는 짓이라면

재림교회 신학이 발전한다는 대명제는 일종의 권모술수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160년 전의 글에 막혀 있으면서 무슨 발전이란 말입니까?

표절을 표절이라 부르지 못하는 그런 심정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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