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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29 22:08

어제 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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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대구에서 했던 강연 초록입니다.

혹시 관심있으실 분이 계실까 하여...

잠수 목사님, 어제 여러 모로 고마웠습니다.

 

=======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 주최' 대구종교인평화회의(DCRP) 주관

◎ 후원: 문화체육관광부, 대구광역시

주제: 다종교 사회에서 종교간 대화운동과 갈등극복의 문

일시: 2011. 9. 29(목)16:00~18:00시

장소: 천주교 대구대교구 꾸르실 교육관(대구광역시 중구 남산3동 225-1)

 

종교, 심층에서 만나다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와 갈등극복의 과제를 중심으로

 

                                                                                    오강남(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 명예교수/종교학)

 

 

불교와 기독교는 현재 한국 인구의 절반 정도를 그 신도로 가지고 있는 한국 최대의 종교다. 한국 인구 절반 중에서 다시 절반 정도는 불교도고 다른 절반은 기독교도다. 이런 상황이라면 두 종교가 협력하고 대화하는 관계를 맺는 것이 평화스럽고 조화스러운 한국 사회의 미래를 위해서 불가결한 요소라는 것을 감지하기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글의 목적은 한국에 전래해온 불교와 기독교가 현재 한국에서 어떤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가를 분석해본 다음, 이들이 만나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 종교계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를 위해 바람직한 일인가 하는 문제를 고찰해보려는 것이다. 여기서 주장하고 싶은 것은 불교와 기독교가 한국 사회에서 그들이 수행할 수 있는 역사적․종교적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인식하고, 다 같이 한국인의 사회․윤리적 안녕과 정신적 복지를 위해 ‘함께 일하고’, ‘함께 생각하고’, ‘함께 변화하는’ 일을 해야 하리라는 것이다.

 

 

현재의 독백적 관계

 

한국에서의 불교와 기독교의 관계는 지금까지 이처럼 직접적인 접촉이나 의미 있는 만남이 없는 상태로 독자적으로 지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두 자기 나름의 고립된 울안에서 독자적인 생존과 발전을 꾀하느라 여념이 없었던 셈이다. 말하자면 자기 영역에서 독백만을 계속할 뿐 한 번도 상호의 이익을 위해 건설적이고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눠보지 못한 셈이다.

 

 

최근에 와서 서로 독립하여 상대에 대해 무관한 상태로 일관하던 것 같던 두 종교가 서로 가까운 접촉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접촉이 가능한 이유 중 하나로 급속히 이루어지고 있는 도시화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도시화의 결과, 서로 종교가 다른 사람들이 섞여 살 기회가 많아졌다. 또 대중 전달 매체의 폭발적 증가로 타종교의 신조와 의식을 피상적으로나마 접해볼 기회도 많아졌다.

 

 

이유가 무엇이든, 불교 신도와 기독교 신자간의 점증적인 접촉은 불행하게도 상대방을 이해하고 수납하는 태도를 증진시키기보다는 상호간의 긴장과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런 접촉이 가져온 훌륭한 실례가 없는 바는 아니다. 예를 들면,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감리교 신학대학의 변선환 박사를 중심으로 몇몇 학자들이 종교간의 대화, 특히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를 시도하기 위해 정기적인 모임을 가진 것 등이 그렇다. 그의 은퇴기념논문집은 신학자들 사이에 차차 늘고 있는 종교다원주의, 특히 불교․기독교간의 대화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좋은 실증이다. 최근에는 김경재 교수, 김진 교수, 진월 스님, 정양모 신부, 법정 스님, 현각 스님, 길희성 교수, 정진홍 교수, 이정배 교수, 최준식 교수, 정현경 교수, 이현주 목사 등이 이런 저런 방법으로 불교와 기독교 및 기타 종교간의 장벽을 허무는 데 공헌하고 있다.

 

 

가톨릭 수녀와 불교 비구니와 원불교 정녀들이 모여 여러 가지 사회 활동과 종교 활동을 함께 하기로 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불교와 가톨릭 및 개신교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여 전국적인 장기臟器 기증 운동을 함께 하기로 합의하였다. 극히 최근에는 불교 도법 스님을 중심으로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 - 21세기 아쇼카 선언'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이런 몇 가지 훌륭한 사례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볼 때 오늘 한국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불교․기독교간의 관계는 밝은 면보다는 어두운 면이 더 많고, 심지어는 추하기까지 한 그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밖에 세워진 불상 이마에 빨간 페인트로 십자가를 그리는 일이 있는가 하면, 석상의 경우 일부가 파손되기도 한다. 1998년 6월에는 김수진이라는 사람이 제주도 원명선원에 들어가 작은 불상 750기의 목을 잘랐다. 이런 식으로 예를 들자면 한이 없다. 이 정도만 가지고도 현재 한국에서 불교와 기독교의 접촉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짐작하기는 충분하다.

 

 

이처럼 지금껏 두 종교가 무슨 심각한 접촉을 가졌다면 그것은 주로 서로에게 자극적이고 불리한 관계가 주종을 이루었다. 한국의 불교와 기독교가 각자의 독백만을 계속하면서 이와 같이 불편한 관계를 계속해왔다는 사실은 두 종교뿐만 아니라 전체 한국인에게도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불행한 관계가 끝도 없이 계속되어도 좋은 것인가?

 

미래의 대화적 동반관계

 

물론 각 종교간 독백적이고 무관심한 관계에서 대화적이고 우호적인 관계로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미국 템플 대학교의 레오나르드 스위들러(Leonard Swidler)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런 가공할 재난을 피하려면 자기중심주의적인 독백의 심성에서 벗어나 타종교들을 우리의 독백에서 투영된 대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보면서 그들과의 대화로 들어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요컨대, 우리는 이제 독백의 시대에서 대화의 시대로 옮겨가야 하는 것이다.

 

이런 대화적 동반자 관계가 긴급하고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더욱 극적으로 강조하기 위해서 그는 ‘미래는 두 가지 선택을 제공할 뿐이다. 죽음이냐 대화냐 하는 것이 그것이다’라고 말한다.

 

 

폴 모제스Paul Mojzes도 종교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것이 전쟁, 적대, 무관심, 대화, 협력, 그리고 종합의 관계에까지 여러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고 했다. 이제 한국 불교와 기독교는 종교간의 관계에서 생길 수 있는 이런 중대한 결과를 앞에 놓고, 양자간에 어떤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 좋을까를 심각하고 사려 깊게 결단해야 한다.

 

 

말할 나위도 없이, 한국의 불교와 기독교는 죽음보다는 대화를, 전쟁이나 적대관계보다는 대화와 협력관계를 택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독백의 시대에서 대화의 시대로 넘어가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 무관심과 불목의 관계를 대화와 화합의 관계로 바꾸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해야 할 것일까?

 

 

여기서 필자는 한국 불교와 기독교는 ‘다원주의적 시각’을 함양하여 서로가 서로를 경쟁적이거나 위협적 관계로 볼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보완적 관계’로 볼 것, 그리고 이런 근본적 시각에서 ‘함께 일하고’ ‘함께 생각하는’ 협력관계, 동반자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나 생각한다. 우선 한국의 불교와 기독교는 서로 대화의 관계를 맺음으로써 존 던이 말하는 ‘우리 시대의 정신적 모험’을 감행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던은 우리가 ‘딴 문화, 딴 생활양식, 딴 종교로 넘어가봄’에 이어서 ‘새로운 안목을 가지고 자기 자신의 문화, 자기 자신의 생활양식, 자기 자신의 종교로 되돌아옴’이라는 이 변증법 과정을 통해 진정으로 성숙한 종교인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서로에게 이런 생산적이고 유익한 관계가 이루어진다면, 한국 불교와 기독교는 그들의 종교를 활성화하고 사회․윤리적 삶을 더욱 활기차게 할 ‘지평융합’ 같은 일도 가능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일은 바로 불교와 기독교가 ‘함께 일하고’, ‘함께 생각하고’, '함께 변화하고'를 목표로 하는 대화의 관계에서만 가장 효과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고 본다.

 

-함께 일한다

 

오늘처럼 복잡한 사회에서는 어느 한 종교가 사회의 모든 문제에 모든 해답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할 수가 없다. 모든 종교는 이 시대의 도전에 응하기 위해 서로 협력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의 불교도와 기독교도는 상대 종교를 대할 때 모든 것을 진위, 선악, 시비, 우열 등과 같이 단순한 이분법으로 판가름하던 옛 패러다임을 청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스스로 자기만 옳고, 참되고, 우수하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애쓰는 데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는 대신에, 모두 동역자․동반자로서 함께 한국 사회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윤리적, 종교적 병리와 불의에서 사람들을 구해내는데 협력해야 할 것이다. 현재 한국에 그렇게도 만연한 자연훼손과 파괴에서 오는 생태적 문제를 경감하는데도 물론 힘을 합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폴 닛터가 말하는 ‘구원중심적(soterio-centric)’ 관심에 모두 함께 시간과 정력을 쏟아야 한다는 뜻이다.

 

 

사회적 맥락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불교도와 기독교도가 자비(karuna)와 사랑(agape)을 실천에 옮겨 천대받고, 소외되고, 주변으로 밀려나고, 비인간화된 계층의 사람들을 따뜻이 보살피는데 협력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또 불교의 보살정신과 기독교의 기독론에서 나타나는 ‘남을 위한 존재’의 이상을 실천에 옮겨 한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도시화, 산업화, 상업화 과정에서 일어나는 제반 문제에 함께 대처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나아가 변모된 한국 사회에서 점증하는 개인주의, 물질제일주의, 치열한 경쟁 등의 문제를 함께 붙들고 씨름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물론 무엇보다도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앞당기는데 손잡는 것을 의미한다.

 

-함께 생각한다

 

비록 이렇게 불교와 기독교가 사회․윤리적인 공동과업에서 건설적으로 힘을 합해 함께 일하는 것이 지극히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이런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중심적’ 관심만에서 한 발 더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입장이다. 즉, ‘함께 일하는 것’ 외에 ‘함께 생각하는 일’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함께 생각한다는 것은 불교와 기독교가 우선은 철학 및 신학적 영역에서의 근본 문제를 놓고 머리를 맞대고 토의하는 것이다. 이런 일을 위해 여러 학자의 여러 제안들이 있다.

 

 

예를 들면, 아베 마사오(阿部正雄)와 그의 미국 동료들은 불교의 공空과 기독교의 비움(kenosis)을 비교하는 것이 불교․기독교 대화에서 중요한 제목이 될 것이라고 제의하였다. 존 키난(John Keenan)은 기독론을 대승불교의 구원론에 비추어 재검토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물론 이처럼 근본적으로 형이상학적․이론적 관심을 기초로 한 대화도 불교 기독교간의 상호 이해와 우의를 돈독히 하는데 필요 불가결한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두 종교가 이런 기초에서 대화를 시도하는 것은 종교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와 정신계와 사상계 전체를 위해서도 크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한 것과 마찬가지로 불교와 기독교와의 대화는 궁극적으로 이보다도 한층 더 깊은 차원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함께 변화한다

 

한층 더 깊은 차원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이것이 ‘궁극 변화’의 차원, 한국어로 ‘깨침’이라고 하고, 중국어로 ‘우悟’라고 하고, 일본 발음으로 ‘사도리(悟り)’라고 하며 신약성서의 용어로 ‘메타노이아’라는 ‘의식意識의 변화’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뿐 아니라 어느 종교간의 대화든 결국은 이 ‘의식의 변화’를 어떻게 실현시킬 것인가를 논하는 데까지 가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런 차원의 대화를 ‘메타노이아 중심metanoia-centric’의 접근 방법이라 부르고 싶다.

 

 

잘 알려진 바와 마찬가지로, 불교는 ‘깨침’을 위한 종교다. ‘불교’라는 말 자체가 문자적으로 ‘깨침을 위한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부처Buddha는 보드가야Bodhgaya에 있는 보리수Bodhi Tree 밑에서 ‘깨침Bodhi’을 경험한 분이요, 모든 불도는 그 가르침을 받아 이 깨침을 다시 경험하려는 사람들이다. ‘성불成佛’이란 이런 깨침의 경험을 통해 진정으로 자유스러워지고 참으로 인간다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의식의 변화를 통해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는 깨침의 경험이야말로 불교의 ‘알파와 오메가’요, 진수와 핵심이요, 존재이유인 것이다. 불교에서 이것을 빼면, 그야말로 ‘빛과 열이 없는 태양’과도 같다.

 

 

기독교의 경우는 어떠한가? 잘 알려진 것처럼, 예수님의 중심 가르침은 그가 공중전도 사업을 처음 시작하면서 외치신 말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태복음 4:17)’고 했을 때의 ‘회개’ 곧 ‘메타노이아’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회개로 번역된 그리스어 원문의 명사형은 ‘메타노이아’로서, 어원적으로 볼 때 이것은 한국말의 회개悔改나 영어의 repentance같이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정도의 뜻보다 훨씬 더 깊은 뜻, 곧 가장 깊은 내면에서부터 이루어지는 ‘의식의 변화’ 자체를 의미한다. 한스 큉(Hans Küng)이 말한 것처럼 이것은 ‘인간의 사고가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 변화(그리스어로 metanoia)를 받는 것, 모든 형태의 이기주의에서 하느님과 이웃으로 향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변화된 의식, 변화된 사고방식, 변화된 가치체계’를 의미한다. 이렇게 우리의 사람됨 전체가 궁극적으로 변화를 일으키는 이 메타노이아의 체험이 기독교에서 ‘중심적으로 중요한 것(central importance)’이라고 했을 때 필자도 이에 전적으로 찬동한다.

 

 

따라서 여기서 강력하게 주장하려는 바는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가 이렇게 근본적으로 중요한 ‘의식의 궁극적 변화’에 대한 논의를 포함해야 하고, 나아가 가장 깊은 차원에서는 이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는 점이다. 만약 불교와 기독교가 이런 의식의 변화를 각각의 종교 생활에 공통의 목표로 삼고, 가능한 한 많은 불교인과 기독교인 사이에서 이런 의식의 변화가 가능해지도록 하는 여러 가지 구체적 방법을 ‘함께 생각’하고 토의하는 진지한 대화에 임한다면, 이런 대화야말로 두 종교에게 더없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하리라.

 

 

필자는 평소 거의 모든 종교에 표층과 심층이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여기서 표층 종교와 심층 종교의 차이가 뭔가 하는 것을 길게 논의할 수는 없지만, 가장 중요한 요점 두 가지만 말하면. 표층 종교가 자기중심주의적인 종교라면 심층종교는 자기중심주의를 극복하려는 것을 목표로 하는 종교라는 점, 그리고 표층 종교가 무조건적인 믿음을 강조한다면 심층종교는 "깨달음"을 강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에서 종교들이 충돌하는 것은 한국 종교들이 표층적 성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종교적 발달장애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한국 종교가 진정으로 한국 사람들에게 봉사할 수 있는 종교가 되기 위해서는 표층 종교에서 심층 종교로 심화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런 심화과정을 위해 종교들이 서로 화해하고 대화하고 협력해서 이 땅에 생명과 평화와 정의가 넘치도록 하는 일에 동참하게 될 때 한국 종교가 진정으로 바람직한 열성과 열기로 가득한 역동성을 띠게 되리라 생각해 본다. 필자는 현재 한국에서 발견하게 되는 여러 가지 여건으로 보아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되리라 믿고 희망해 본다.

 

결론

 

세계적인 신학자 한스 큉은 ‘세계적인 윤리 없이는 (인류의) 생존이 불가능하다. 종교간의 평화 없이는 세계 평화가 불가능하고, 종교간의 대화 없이는 종교간의 평화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한국 종교계와 사회에서보다 이 말이 더 적절히 적용될 수 있는 곳이 있을까? 현재 한국은 종교적으로 가장 다종교多宗敎적인 사회 중 하나다. 한국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신자와 비신자를 막론하고, 한국에서 일어나는 종교간의 긴장과 갈등에 대해 다 같이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불교도와 기독교인들은 모두 7세기의 위대한 신라의 사상가 원효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리라 생각한다. 원효는 그의 유명한 화쟁론和諍論에서 일종의 다원적 시각을 강조한다. 그는 실재에 대한 논의에서 우리가 당면하는 여러 가지 상충되는 범주들, 예를 들어 있음有과 없음無, 빔空과 몸體 등을 다룰 때, ‘어느 한 쪽의 견해에만 집착하면’ 우리는 결국 실재를 분명히 볼 수 없다고 하였다. 어느 한 면을 절대화하는 우를 범하지 말고 양쪽을 보완적으로 보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원효가 제창한 이런 다원주의적 시각이 한국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에서 기본 태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미국의 사상가 중 한 사람인 토마스 머튼은 ‘만약 서양이 동양의 정신적 유산을 과소 평가하거나 등한시하기를 계속하면 인류와 인류의 문명을 위협하는 비극을 촉진시킬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은 물론 한국의 기독교가 더욱 주의 깊게 경청해야 할 것이지만, 불교의 정신적 전통에서 피상적인 것에만 집착하고 고집하는 불교인들도 불교의 가르침 중에서 정말로 깊은 면을 과소평가하거나 등한시해서는 안 된다는 말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기독교인들도 새로 받아들인 기독교의 가르침에서 여러 가지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한국의 정신적 유산을 과소평가하거나 등한시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제 한국 불교가 한국 기독교 모두에게 독백과 고립적 발전의 시대는 이미 종언을 고한 셈이다. 베트남 출신으로 프랑스와 미국에서 활약하고 있는 틱낫한 스님은 예수와 붓다는 ‘한 형제’요 기독교와 불교는 인류 역사에 핀 ‘아름다운 두 송이 꽃’이라고 하였다. 기독교와 불교가 서로 만나 이야기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이렇게 상호 만남과 영향이 불가피한 현실이라면, 이 두 종교는 좀 더 방법론적으로 확실하고 의미 있는 방향으로 만나 대화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런 원대한 목적에서 서로 만나 나누게 되는 허심탄회한 대화는 자신의 ‘상호 혁신과 변화’뿐만 아니라 한스 큉의 말처럼 한국 사회의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도, 한 걸음 나아가 세계 시민으로서 세계 평화를 위해서도, 불가결한 일임에 틀림이 없다.

 

  • ?
    우상 2011.09.30 07:08

    타종교를 서로 존중하는 태도의 변화는 마땅한 일이겠지만,

    심층에서 같은 깨달음이라하여 佛經과 聖經을 타협하는 일은 없겠지요.

  • ?
    Windwalker 2011.09.30 21:03

    앞으로 백 년이 더 지나면 불교와 가독교가 심층적으로, 또 영적으로 확실하게 접목되는 때가 옵니다.

    그 때는 불법(佛法)이 다차원(多次元)을 다루는 과학분야 등 다각도로 조명을 받게 됩니다.

     

    이제 겨우 시작인 우리들에게는 아직도 갈 길이 까마득합니다만, 

    빈배님을 비롯하여 이 누리의 많은 분들의 노력으로 인해

    세상은 점점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저는 그 점에서 다시 한 번 빈배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평강을 기원합니다.

  • ?
    노을 2011.09.30 23:38

    절에서 성경읽고

    교회에서 불도 강의하는 날이 그 날일겁니다.

  • ?
    cogito 2011.10.01 00:01

    서울에서 강연하시면 한번 가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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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82 김대성, 당신은 종말 중독 말기 환자야 9 유재춘 2011.06.23 2001
13181 나에게 뺨을 얻어맞은 안식교 목사 4 달수 2013.10.17 2000
13180 이 예수를 어찌 할까나....... 그러게, 어째쓰거나, 잉. 3 김원일 2013.08.16 2000
13179 순한 초식동물로 알려진 사슴이 새를 잡아먹기도 한다 3 로산 2011.05.17 2000
13178 역사의 교훈( 2 ) 1 purm 2010.12.23 2000
13177 Silent Night / Holy Night by The Isaacs 1.5세 2010.12.18 2000
13176 음악 얘기 하나 - 이 빌어먹을 사회에서 창녀가 아니고 노예가 아닌 사람이 누가 있을까 5 아기자기 2013.05.20 1999
13175 하나님 오늘 안식일에 또 일하고 왔습니다 14 QT 2011.07.30 1999
13174 youtube 펌 "하나님의 은혜" -박종호 빨간펜 2010.11.25 1999
13173 학생증 쥐고 간 아이들을 위한 조사: 조연희 김원일 2014.04.28 1998
13172 우리 안의 소크라테스를 위하여 !! 2 무실 2010.12.26 1998
13171 여러분 10분만 투자해 보십시오. 대박 납니다 2 로산 2012.03.26 1997
13170 아궁이에서 만난 하나님 (최 형복 목사님 아드님 이야기) QT 2011.08.07 1997
13169 하용조 목사 장례예배 울음속에서 폭소(퍼옴) 김기대 2011.08.04 1997
13168 들을 만한 음악 싸이트들 OH 2010.12.03 1997
13167 우라질노메 우라질 4 김원일 2012.04.19 1996
13166 "단8장의 작은 뿔을 누구라고 생각하세요?" 로산 2011.02.22 1996
13165 자유게시판은 얼마나 자유스러워야 하나 1 빈배 2010.12.01 1996
13164 충청도 사람은 말이 느리다고? (퍼온글) 8 초록빛 2010.12.27 1995
13163 나는 절망한다 2 안드로메다 2010.12.16 1995
13162 죄인님께 묻습니다. 4 student 2013.02.04 1994
13161 블랙홀의 밀도 로산 2012.08.13 1994
13160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3 19 2012.03.27 1994
13159 암, 암, 암.. 김성진박사 2011.10.28 1994
13158 하박국의 딜레마 - Oslo fantasia 2 아기자기 2011.07.26 1994
13157 탈북자수기 ( 아픔 속에 맺힌 사랑의 열매들 ) 페론 2011.03.07 1994
13156 세상에 이런 교인도 있나? 2 김재흠 2013.05.14 1993
13155 철수 씨는 바른 생활 아저씨 인가? 7 박영희 2012.07.26 1993
13154 잠수함 타기전 잘난척 한번하기 19 최인 2013.08.15 1992
13153 12월 2일 기념 순교성인, 성녀 아우렐리아 1 케로로맨 2012.12.01 1992
13152 이렇게 해 주시면 제가 재림마을 떠나겠습니다(퍼옴 박진하)오만의 극치 7 박진해 2012.04.20 1992
13151 고국에 새로운 신학교 설립 1 아멘 2011.09.12 1992
13150 우리가 뉴스타트 어쩌고 저쩌고 홍야홍야하는 사이에... 김원일 2011.10.12 1991
13149 뒷마당에서 중국 부추를 뽑아내며. 2 김재흠 2013.05.23 1990
13148 바다님께도 답, 욥의 자녀들은 억울하게 죽었는가? 푸름 2011.02.12 1990
13147 왜 대통령을 마담으로 고쳤나? 4 마담 2013.08.20 1989
13146 반달님, 님이 한국인이라는 것 회개하시고 방향전환 하시기 바랍니다. 4 김원일 2012.05.18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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