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질긴 그놈의 일.팔.사.사...

by 김 성 진 posted Sep 30, 2011 Likes 1 Replies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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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어느분이 쓴 이 글..


"하나님이 성소봉사를 통해 죄를 처리하시겠다는 데,
죄에대해서 인간이 무엇을 안다고,
하찮은 인간들이 왜 망말이며 조롱하는가?
이해가 안되면, 이해되는 것만 가지고 살자 !!
다른사람들의 믿음을 조롱하지 말라!"

 


정말 시원한 말이다 !!!   "성소봉사" 만 빼놓으면..

위 글이 제대로 된 글이 되기 위해선

이렇게 쓰여져야 되는것 아닐까?

 


"하나님이 죄를 처리하겠다는데 죄에 대해서 인간이 뭘 안다고
하찮은 인간들이 왜 망말이며 조롱하는가?

이해가 안되면, 이해되는 것만 가지고 살자 !!
다른사람들의 믿음을 조롱하지 말라!"

 


그래, 맞는 말이다..


하나님이 알아서 십자가로 죄를 처리 했다는데 죄에 대해서 인간이 뭘 안다고

하찮은 인간들의 수준으로 "1844 년", "조사심판"  운운 거리며
이천년전에 끝난 하나님의 속죄를 이날 이때까지 질질 끌고 있는건가???

하나님이 1844 년 부터 성소봉사를 통해 죄 처리할려고 했다면
뭣하러 예수를 십자가에 달리게 했는가???


하늘 성소에서 인간들의 죄를 다 처리할수 있는데
그일이 하기 싫어서 이곳으로 토껴 오신건가??? 

예수가 하늘에서 지겨운 성소에 가만히 앉아있기 싫어서
지구까지 내려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건가???   


그리고는 다시 또 올라가서
성소봉사를 통해 죄를 또다시 사하신다???


이게 무슨 ** 같은 소리인가 !!!


예수가 한 말들을 자세히 한번 읽어 봐라..


죄사함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다는 말은 하지만

"십자가에서 용서해준 것 가지고는 죄사함이 부족한거 같으니까
내 다시 하늘성소에 가서 니네들 죄 사하고 있을테니 그리 알아라" 하신건 아무리 찿아봐도 없다..

 

오랫동안 읽어보질 않아서
'재림교리 24. 하늘 성소에서의 그리스도의 봉사' 을 다시 한번 읽어봤다..

 

예수가 행하는 지성소의 봉사가
"속죄 봉사의 두 번째요 마지막 단계" 라고 써져있다.. 

그러면서 이 개념을 설명할려고 성경 여기저기 이구절 저구절 들을 따다가 억지로 끼워 맞추고 있는데
대학 나온 나도 읽다가 읽다가 너무 길고 복잡하고 정신이 뱅뱅 돌아서 반 정도 읽다가 그만 뒀다... 

 

죄사함의 개념이 이렇게 어려워서야 !!!

 

글하나 못 읽는 사람들에게
재림교리 24 번 에 나온 죄사함 내용들을 한번 읽어줘 봐라..   

 

아마 단 한명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건지

감도 잡지 못할꺼다.. 

 

아니, 십자가에서 그 고통을 당하면서 피를 흘렸으면 됐지

무슨놈의 속죄봉사에 "단계" 가 다 있는가 !!! 


예수의 속죄봉사는 십자가에서 끝났다 !!!


십자가를 더 연장시켜가며
속죄봉사 할 이유가 전혀 없는걸 가지고..



=====



내 짐작으론,
잘못됐지만 아까운걸 쉽게 버릴수 없었던 재림교회의 선조들...  

 

분명히 1844 년 이란 연도가 너무나도 중요했던 나머지 대실망을 경험했는데도 불구하고
"1844 년" 을 그냥 버리기가 아까워 이걸 어디다 써먹을까 하며 성경을 뒤적거리다가
별의 별 성경구절들을 억지로 끼워 맞추어 "조사심판" 이란 이상한 교리를 만들어 놓고선
대실망을 경험하고서도 소중하고 버리기엔 너무너무 아까운 "1844 년" 에 적용을 시켜 버린것이라고 나는 본다.. 


사실 "1844 년" 이란 빗나간 수학계산은 대실망을 경험하면서
쓰레기통에 집어 넣었어야만 했었다.. 


그렇게도 큰 실망을 경험해 놓고선 뭐가 그리 아쉽다고 그걸 못 버리고
조사심판 운운하며 이날 이때까지 목메달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간다.. 


사복음서를 그냥 있는 그대로 읽으면
인간들의 죄사함은 십자가의 피로 끝났다는걸 빤히 알수 있었을텐데..


재림교회의 선조들에겐 1844 년 이란 개념이
얼마나 중요했는가를 잘 반영해 주고 있는 교리가 바로 이 "조사심판" 교리이다.. 


우리의 선조들에겐 십자가보다

1844 년 이 더 중요했는가 보다.. 


적어도 속죄의 개념에서 만큼은.. 



=====

 

 

그놈의 1844 년.. 

 

얼마나 선조들에게 중요하고 고귀하고 아까웠던 숫자였길래
예수가 1800 여 년 전 십자가를 통해 깨끗히 끝내버린 속죄의 개념을
"1844 년" 에 묶어버리면서 재생시켰을까? 

아무리 아까워도 대실망을 경험했다면
충분히, 속편하게, 아쉬움없이 쓰레기통에 버릴수 있었을텐데.. 


자신들이 죽어라고 성경연구한 끝에 발견한 1844 년이란 개념이 대실망으로 박살이 났다면
위에 글을 쓰신 분이 말한데로 "이해가 안되면, 이해되는 것만 가지고 살자 !!" 하면서 쓰레기통에 쳐박아 넣어도
이 교회 죽지 않고 충분히 다시 일어설수 있었을텐데.. 


그래봤자 수학계산일 뿐인데.. 


틀린게 밝혀지면 틀렸다는걸 인정하고
이해가 안되면 그저 이해되는 것만 가지고도 충분히 살수 있었을 텐데..

 

 

=====



그놈의 1844 년..


급기야는 이제 "조사심판" 이란걸 믿지 않는 수많은 재림교인들의 믿음까지
조롱해 버리는 숫자로 변해 버렸다.. 


조사심판을 믿지 않는 교인들을 향해
"가롯 유다" 어쩌구 저쩌구 조롱하며 욕지거리 하는 재림교인들을 만들어 버린
그놈의 1844 이란 별것도 아닌 숫자.. 


 

아.. 


 

165 년 전에 쓰레기통에 버렸어야 했는데..

1844 년이란 시간이 지나면서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했어야 했는데..


뭐가 아쉬워서..

뭐가 아깝다고..

 




 




 


.

.

.

.
.

 

언제서야 지나가 버릴까???
언제서야 쓰레기통에 집어넣을수 있을까???



 


끝..


 


(위 글은 지금 카스다에 들어가 예전에 썼던 글들을 컴으로 옮기다가 발견한 2 년 반전에 카스다에 올린 글이다..

요즘 토론되는 토픽과 연관성이 있는것 같아 다시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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