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육일박님이 다음의 말을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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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신약 성경에서 바울이
수없이 말하고,
수세기를 거쳐 종교학자들이 외쳐대도
아직 우리에게 낯설어 지는 것은
체험되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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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말이 그 글 전체의 목적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이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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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일박님 같은 분도(^^)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해
적어도 조금은
낯설게 여기시는 구나!
나만 그런게 아닌가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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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정말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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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시간, 과정공부, 사경회, 전도회, 주말부흥회, 수 많은 책자들을 통해
눈이 빠지게 보고
귀가아프게 들어욌지만
아직도 의문 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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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래서 구원은 커녕 일원이라도 받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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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대상은 구약, 신약을 통털어 야훼와 예수 아닌가!
그 신이 나를 사랑하고 나의 죄값을 위해 죽어주셨다는 사실을
그래서 내 죄가 사해지고
죄와 먼 생활을 살 수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믿는다.
뭐 여기에다 관계신앙도 첨가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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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바로 내가 평생 보고 들어온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대강이고 핵심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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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것은 기독교의 이론이고
그 밖에서는 낯선 이야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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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속에서의 모든 말 되는 얘기들
물 밖에 나가면 통하지 않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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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기독교인 보단
기독교의 야훼나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이
동서고금을 통털어 훨 많지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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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들에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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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기도하고
안 믿기도하고
못 믿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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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세기를 거쳤지만
웬지 깨닫기 힘든 이 이론
웬지 내게는 잘 체험되어지지 않는 이 이론
몰라도
별 차이없이 사람들 잘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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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말해
하나님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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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말미맘는 의란 말 모르고 살았지만
하나님 열심히 믿었던 아브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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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란 이론 잘 깨달아서
하나님과 예수님 열심히 믿는 나성의 김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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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것 저것 아무것도 모르고 살다 간
맘씨좋은 중국의 비단장수 왕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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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 부류의 사람들에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의미는 무엇이며
하나님 앞에서의 차이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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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꼭 그 것을 알아야만 할까?
그리고 체험되어져야만 할까?
"경험되지 않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재림교회 조직신학의 핵심 난제중에 하나죠,
이미 "누가 진리를 말하는가?"에서 구원론을 중심으로 정리가 되었기는 했지만,
여전히 우리에게는 -타자-로 남아있습니다.
김총장님도 한창 <잭 세퀘이라>나 <모리스 벤덴> 운운하시다가 지금은 뭐 다 포기하셨고,
신계훈 목사님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강의도 손에 잡히는 듯 하면서도 끝끝내 시원치가 않았죠,
이정도 되면은 이게 시대 문제를 해결하는 "기별"이 아니라 "부담"이 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사족이랄까요? 이런것 까지 다 이해해야 하나? 몰라도 될 것 같은데...뭐 이런식이죠,,
일반 성도들은 다시 <신학포비아>가 생깁니다.
참, 비극적이면서도 희극적인 순환이 일어나죠.
재림교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도 크게 두가지로 나뉘지 않나 생각됩니다
인지적으로 예수님의 구원을 받아들인 자들에게 구원이 오는 것으로 믿는 것과
예수님을 만나는 (신비적) 체험과 그 증거로 변화된 삶을 보여줘야 한다는 입장이죠,
굳이 나누자면, 전자는 은혜와 칭의를 강조한다면, 후자는 행위과 성화를 강조하죠,
물론, 이 둘의 논의는 재림교회 신학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현상이니까, 두말하면 잔소리고요.
신학과 이국헌 교수님은 이 문제를 "은총론"의 도입으로 풀어보려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나름 새로운 시도이긴 합니다만, 어느정도 효과가 있을지는 미지수이겠죠,
한국의 재림교회 자체가 신학포비아에 걸려 있기 때문에...
제가 보기에 이 문제는 "개념사"적으로 풀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인들에게 서구적 종교인 기독교가 말하는 "믿음"이 무엇이라고 생각되는가? 하는 부분입니다.
뭐, 아시다시피, 기독교의 "믿음"은 상당히 인지적cognitive입니다.
특히, 개신교의 믿음은 그야말로 "앎이나 지적 동의"입니다.
아니라고 변명하면서 드는 이야기를 쭉 보면 그것은 "정서적"차원 정도 됩니다.
이러한 플라톤을 기반으로하는 서구 사상적 "믿음"의 개념은 한국인들에게 잘 맞지 않습니다.
저는 이러한 개념적 맥락부터 집어야 한다고 봅니다.
동양에서 "종교"개념이 들어오게 된것은 서구적 표준이 강제적으로 우리 세계에 밀려들어온 이후입니다.
기독교의 제국주의적 선교는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역사이구요, 그 거대한 흐름속에서 오늘의 우리가 나왔습니다.
지금의 우리의 관념을 지배하는 개념어들은 일본을 통해서 한국에 전해진 서구 개념입니다.
강제로 입혀진 남의 옷이 얼마나 우스운지 아시지 않습니까? 우리는 아직도 그러고 있는거죠.
뭐 이런 상황이 한국의 정신,문화,종교적,정치적,이념적 카오스를 낳았다고도 볼 수 있죠.
누구한테 책임을 물어야 할진 미지수이지만, 말입니다.
동양인은 종교를 전통적으로 "도: 걸어가야 할 길, 삶의 태도","교:가르침이나 교훈","법:따라야할 규칙이나 원리"로 보았습니다.
그냥 딱, 봐도 위 항목들이 모두 실존적입니다.
우리내 종교나 신행은 실존적인 것입니다.
근데, 사도바울이 기독교를 인류 모두를 위한 보편종교로 재정식 하기 위해 "율법주의"에 대항해서
구약을 새롭게 해석하면서 들고나온 "믿음"이라는 개념을
서구가 오랜동안 자기 나름대로 해석해서(특히, 개신교에서) 멀리 우리나라까지 전달해 주었는데,
이게 쉽게 이해가 될 수 있겠습니까? 쉽지 않은 이야깁니다.
그니까, 처음 이런 선교사들이 조선에 딱 와서 한다는 말이.."여긴 종교가 없네"였죠.
자신들이 이해하는 식의 종교가 부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나중에 오히려 종교가 많다.고 말을 바꿨지만,말이죠.
어째튼, 우리가 지금 이해해보려고 무척이나 애쓰는 개념"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우리가 체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것이 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우리와는 체질적으로 잘 맞지 않는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탈랄 아사드는 "종교=믿음"이라는 것은 서구,프로테스탄티즘 중심주의라고 비판한 것이죠,
동양의 종교는 전통적으로 전인적이었습니다. 그런 말을 사용하지 않았어도, 우리는 그렇게 해왔고
지금도 그러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아 보입니다.
저는 그래서 그게 왜 이해가 안될까? 왜 경험이 안될까? 고민하는 거 보다.
오히려 가볍게 , 혹은 발견론적 차원에서 바라보는게 낫다고 봅니다.
그거 모른다고 누가 잡아가지도 않고, 뭐라하지도 않습니다.(어떤분들은 엄포를 놓으시긴 하시더군요^^)
그리고 오래 노력해봐도 잘 안되는데, 그거 가지고 누굴 탓하겠습니까?
사실, 돌아보면, 잘 몰라도 잘 살아왔고 헌신 많이 해왔습니다.
사도 바울이 믿음 카드를 꺼내든 이유도,
마르틴 루터가 그렇게 한 이유도
모두 시대적 배경이 있었던 것이고
그것도 가깝게 바울로부터 멀리 루터 까지 모두 플라톤에 영향을 받는 것이 사실이라고 보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플라톤 철학이 이해되지 않는 것과 비슷하죠,
대한민국 주부가, 학생이 플라톤을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할수도 없고요,
또 반대로 오교수님의 재림교회사 책 보면, 1888년 투사들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경험이 얼마나 신비적이었는지 나옵니다.
예수님의 환상을 보고, 뜨거운 감동을 받고 막 그러죠,청중들 뒤집어지고요,
근데 그거 분명하게 평가하기 힘듭니다. 그들의 삶의 결과도 그렇고요,
그런 경험으로 판단하자면, 일반 개신교에는 다수가, 오순절쪽에 많습니다.
엄밀한 의미의 기준이 되긴 힘들죠,
신학적-철학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나 신비적 체험으로써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나 모두 우리에겐 참 어색합니다.
그런데 위의 두 가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신 분들이 간혹 있습니다.
뭐, 그럴 수 있겠죠, "믿음으로 말미 암는 의"를 명확하게 이해했다고 자부할 수도 있고,
그것을 경험햇다고 할 수도 고백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그것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뭐라 평가 할 수는 없는거죠, 불안해할 필요도 없을 것 같구요,
동양적 입장에서는 그 사람을 판단하려면 그 사람이 평생을 두고 걸어가는 길을 보고 해야 합니다.
어차피 신학자들도 실패하고, 목사님들도 계속 말이 바뀌고 견햬가 발전하는데 누가 누굴 판단하겠습니까?
말씀하신 대로 이젠 좀,
이런식의 강박에서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