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변성우 목사의 책 내용에 대한 변증-1-
퍼온 글 일부입니다
student님 읽으시라고 퍼서 수정했습니다
절대예정을 칼뱅이 주장하면서 구원의 절대적 확실성을 강조한 것이었는데
변목사가 주로 이것을 공격한 글이다.
칼뱅의 원 의도는 눈에 보이는 구원의 확실성을 제공하고 있던(고해성사를 통하여)
가톨릭교회의 구원론에 비하여 내적으로만 자신의 구원을 확인해야 할 성도들이
끊임없이 불안해 하는 것에서부터 그들을 지키기 위하여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최후의 근거가 바로 하나님의 선택임을 강조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칼뱅의 의도는 변목사가 보기에는
거짓된 믿음, 지적인 수준에서 머무르는 믿음, 온전한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되지 못한
믿음을 옹호하는 것이라고 비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성도들을 지옥으로 보내는 잘못된 신학이라고 비판하는 것이다.
신학적으로 우리와 일맥 상통하는 점이 있는데
한 번 읽어볼 만한 글이다
성결교회가 칼뱅주의로 돌아 갈 것인가 아니면
알미니언주의로 남을 것인가 하는 문제라고 저들은 말하고 있다
오늘 우리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우리만의 칭의를 가지고 있고 우기는데 그게 맞는지도 연구해 볼만하다
1. 신자라도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것.
2. 그렇기에 믿음만으로 천국을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믿음에다가 반드시 회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회개를 청교도적으로 이해하여 회개가 바로 신앙의 출발점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3. 믿음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을 수 있다. 참된 믿음과 거짓된 믿음이 있다는 것이다.
단지 지식으로 믿는 믿음이나 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만
구주로만 받아들이는 믿음은 올바른 믿음이 아니기에 결국 죄에 지게 되고
죄에 지게 되면 지옥으로 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반면에 진실한 믿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로 믿는 믿음은
자신의 믿음을 통하여 이 세상에서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얻게되고
그것을 통하여 구원을 얻게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이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역사하시도록 하는 믿음이라고 강조한다.
이런 믿음을 스스로 검토할 수 있는데 확신이 필요하고, 행함이 필요하고,
사랑과 겸손이 그 표적이라고 말한다.
4. 믿음으로 얻는 칭의를 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화가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거룩함이 없이는 칭의를 논할 수 없다는 것이며
또한 죄로부터의 해방을 뜻하는 중생이 없이도 논할 수 없다는 것이다.
5. 중생을 보다 더 완벽하게 충실하게 이해할 때 그것은 “새로운 창조”이다라고
주장하고 중생을 통하여 성결에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찾게 된다고 주장.
중생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총이 첫 번째이지만
그 중생을 기다리며 적극적으로 이를 따르려는 신앙적 자숙이 필요하다는 것
6. 중생을 아는 방법은 무엇인가? 구체적인 변화이다.
“ 종교개혁이후 믿음이 강조되었지만 회개가 소외되었고 칭의가 강조된 반면
중생이 소외되었다고 주장한다.
거듭남이란 모든 죄에서부터 벗어나는 회개를 강조하는 것이다.
중생이 칭의보다 더 앞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중생이 없는 칭의를 주장하는 것은 오류이고 비 성서적인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 실제적인 내용은 믿음을 가졌다고 해서 그 이후의 모든 죄들이 저절로 용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반드시 중생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중생못하면 지옥간다고 강조한다
7. 부끄러운 구원(믿음이 있지만 행위가 완전치 못해서 받은 구원)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믿음만으로 자기의 육신을 이기는 자가 구원을 얻을 뿐이라고 강조한다.
위와 같은 그의 주장은 구원관이라는 다른 설교를 통해서 볼 때 대략 이해할 수 있게된다.
구원받았다는 사실은 과거(이미 구원받음)-현재(이루어야 할 것)-미래(기다림)의
통전적 구조에서 이해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구원사건을 통하여 우리들이 이미 얻은 구원만을 회상하면서
거기에서 그쳐서는 안되고 성령의 충만을 입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웨슬리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할 수 있다. 실제로 그의 설교에는 가장 많이 청교도주의자들의 글과
웨슬리와 같은 성결을 강조하는 이들의 글이 인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한 쪽으로만 치우치는 듯한 과제가 나타나는가?
역설적으로 이러한 논증이 심하게 부딪히는 이유는 천국과 지옥에 대한
그의 확신 때문이다. 즉, 구원은 천국에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결국은 잘못된 신앙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믿음을 역사하는 믿음으로 이해하는가 하면
어디에서는 단지 신뢰와 지적 동의를 의미할 때도 있는 것처럼
구원이라는 사실 역시 매우 더 넓게 인정하고 이해된다.
아픈자를 고쳐주는 것이 구원이고, 죄로부터 돌이키는 것이 구원이고,
또한 어려움으로부터, 곤란한 지경에서 벗어남을 받는 것도 구원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성서는 역사의 과정에서 이스라엘과 그 민족이 위기에서 벗어나는 것도
하나님의 구원사역이라고 폭넓게 이해하고 있다.
그렇다면 만약 우리가 변 목사의 열정을 좀 더 폭넓은 방식으로 교정해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다. 즉 구원은 다름 아니라 우리가 천국을 들어가는 것을 포함하여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초대교회의 결정적인 확신이
우리에게 빛을 줄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는 교단이
그의 참된 회개의 운동을 그리스도의 완전의 단계로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이다.
다음에 계속
student/
재림교회 신학자 대부분은 알미니언주의자 입니다. (죠지 나잇을 포함해서).
한편 으론 화잇을 "선지자"로 믿는다고 공언 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론 그 "선지자"가 강력하게 추천한 사상은 영 못 마땅하게 생각
하기에...하하 딜레마 지요...
어쨋든, 왜그너와 죤스의 사상을 알고 싶으시면 그들의 글들을 직접 읽어 보시고
화잇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싶으시면 그녀의 글을 직접 읽어 보심이
가장 정확하리라 생각됨니다. 화잇이 진술한 내용은 제가 위에 벌써 레퍼런스를 했기에 이문제 대해선
더이상 코멘트 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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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유전자의 이중고리 나사를 보는 것 같습니다
재림교회의 신학자들이 화잇의 사상과 다르다면 모가지를 비틀든지
아니면 데스몬드 포드처럼 신임서를 회수하고 쫒아 내든지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수 많은 학자들이 쓴 글을 분서갱유하든지
그래서 화잇의 서적만 깃발 휘날리는 그런 교단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
학생님의 할일 아닙니까?
어진 중생들은 이런기도력도 읽어보고 은혜를 받고 있는데
그 원전을 일일이 대조하라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화잇의 사상도 나이들면서 변했다고 나는 믿습니다
특히 1888년 이후로 그의 칭의는 더욱 새로와 졌습니다
그가 임종시 말한 디도서1장 12절도 그 결과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중 어떤 이는 예전의 사상이 옳다고 여깁니다
내가 구름 타고 오신다는 구절을 천사라고 했을 때 강하게 반대한 무리들 역시
그런 부류입니다
성경에 구름 타고 오신다고 했는데
화잇이 수처레나 그렇게 표현했는데
구름 타고 꼭 오셔야 한다고 믿고 가르치고 떠드는 무리가 우리들 일부라는 겁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서로가 가진 믿음의 차이를 인정해야 합니다
내 성경 지식의 한계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 뜻은 절대로 굽히지 않는 신앙은 올바르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화잇을 보는 양면성도 인정해야 합니다
안 그런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