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이들의 이야기 (2)
내가 쓰는 이유는 그들과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음을 직감하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이 직감이 내가 죽을 때까지 틀리지 않을 것이라는 비극적 사실 때문이다.
2. 그는 참 여렸다.
여성스러우면서도 아이처럼 순진했다.
L군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할머니와 살았단다.
그러다가 한의학을 공부하시고 목사가 되신 한 남자와 어머니가 재혼을 하셨다.
실업계를 다녔던 그는 고등학교 시절 하나님을 만나고
뜨거운 신앙의 체험을 하였었다.
그가 의지할 수 있는 분은 예수밖에 없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른체 삼육대학에 들어온것이 화근이었다.
삼육대학에서의 집화와 화잇부인의 글들,
신총장님의 따스한 인격은
19살짜리 청년의 가슴에 불을 댕겼다.
그의 가방은 예언의 신으로 가득 찼었고
온갖 신앙서적을 읽어대느라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는 참 눈물이 많았다.
찬양을 해도 울고, 설교를 들어도 울었다.
삼육대학을 다니던 시절이 그에게는 뜨거운 여름이었다.
내게는 선배라고 부르면서 이것 저것을 물어보며 달라붙었었는데,
전혀 싫지 않았었다.
귀한 인연이라고 생각했었다.
의분이 있는 친구였고, 나름대로 자기 생각이 서 있는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종이 될 자질이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다.
머지않아 그가 군대를 가게 되고 집총문제와 안식일 문제로 고군분투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곧 문제가 해결되었는가 싶었는데, 연락은 취해보질 못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아마도 그 후배의 아버지가 엄하게 그를 통제했던 모양이다.
그의 아버지는 작은 시골 교회를 담임하시는데,
아들이 이단교회에 빠져서 이런 물의를 일으키는게 무척이나 싫었던 모양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가 어린 시절부터 많이 얻어 맞았던것 같다.
자세한 핍박의 이야기는 교과책 간증난에 실렸었다.
2005년즘이나 되려나.
벌써 오래된 일이다.
그는 재림신앙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맞아가면서도, 사랑하는 어머니의 눈치를 보면서도
집에 손을 벌리지 않기 위해서 고시원을 전전긍긍하며, 끼니를 굶어가면서도
신념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의 피눈물 나는 사정을 누가 알리요!
하지만 결국 그는 개신교 신학대학으로 편입할 수 밖에 없었다.
나도 그편이 낫다고 생각했고, 그에게 그렇게 하도록 권유했다.
그의 아버지의 핍박이 심각해진 일에는 배경이 있었다.
홀로 신앙생활을 유지하기가 힘들어진 그 후배는
어느 목사님께 의뢰를 했는데,
그 목사님은 무슨생각이셨는지
그 친구의 아버지를 자신이 설득시켜서 허락을 받아내겠다고
호언장담을 하시고 전화를 해서 이야기를 좀 하시다가
논쟁으로 발전 되니까 그 아버지에게 "안식일 교가 아니면 진리가 아니다!"라고
못박으시면서 아들은 진리교회에 속해있으니 걱정마시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친구는 눈물을 흘리면서
되돌릴 수 없이 커져버린 사태를 어찌할 줄 몰라했다.
그가 가족을 쉽게 버릴 수 있었을까?
진리의 힘이 아무리 크다 한들, 쉽게 순교를 강요할 수 있을까?
그가 지금 재림교회 밖에 있따고 하나님의 사랑에서 떠나있다고 할 수있는가?
그는 결국 아버지의 뜻대로 개신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지금은 개신교 전도사를 하고 있다.
지금의 시점에와 돌아보면,
그 대담하고 용맹한 목사의 호기는 무엇이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는 이제도 종종 연락을 해서 재림교회를 조금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겠다고 말한다.
지성소문제, 구원문제, 음식물 문제, 지옥 문제 등등은 이제 못 믿겠다고 한다.
그렇다고 개신교회에도 그닥 만족해하는 것 같지 않다.
재림교인처럼 표준이 높으니 인간관계도 잘 못하고 설교도 재밌지가 않은가 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개신교도 재림교인도 아닌채로
어정쩡하게 작은 교회들을 돌고 도는 전도사 생활을 하고 있다.
해외선교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한국의 교회들 중에서도
그 친구가 정착할 만한 자리는 없어 보인다.
가끔, 삼육대학 신대원을 가면 어떨까요?라고 묻는다.
나는 자상하게 지원하지 말 것을 종용하곤 한다.
가족을 지키는게 낫다고...
재림교회도 자리가 없다고...
이제와 드는 생각은 그와 같이 여린 심정으로는
개신교회서도 재림교회서도 목회자가 되기는 힘들 것 같다.
서른이 넘어서 연애한번도 못해보고
몸은 불어서 외모도 볼품없어 졌다.
이런저런 신학적 사고들이 섞여있어 설교도 이해하기 쉽지 않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는 사역자가 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되어도 그는 실패할 것 같다.
누구보다 많이 기도하지만, 누구보다 정직하지만
그래서 더욱, 그는 목회자나 선교사가 될 수 없을 것 같다.
안타깝게도 그는 생계를 위한 다른 일을 찾는게 더 빠를 것 같았다.
물론, 이것은 내 개인적인 생각이긴 하다.
본인은 강력하게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어한다.
그런 신념을 누가 말릴 수 있겠는가?
이제 묻고 싶은것은 그의 재림신앙의 정체는 무엇이었냐는 것이다?
그 뜨겁던 시절에 남긴 간증들,
그 시간들, 그 젊음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의 글을 보고, 그의 간증을 듣고 은혜를 받았던 경험들은 다 무엇인가?
적어도 그이 삶 전체를 놓고 보았을 때
재림교회는 그의 대학생 시절의 장면만을 보고 싶어할 것이다.
마치 사진사가 잘 준비된 포즈를 렌즈로 담아내기 위해서
이것 저것을 주문하고 가장 완벽한 자세의 순간에 찰칵해서 담아내듯이 말이다.
우리는 어떤 사건, 어떤 존재를 그런식으로만 포착하고 이해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사진사는 자기가 원하는 사진만 챙겨서 휭 떠나고
그의 삶은 여전히 덩그러니 남겨졌다.
그렇다. 역시 인생은 고독한 것인가 보다.
나는 그래서, 언제부턴가
교회지남의 교회소식란에 눈이 가질 않는다.
몇명의 침례자가 낫네, 어떤 결실이 있었네 하는 자화자찬,
안타깝게 느껴질 뿐이다.
자기만족적 도취가 심해지면 심해질 수록
물에 빠져죽을 위험에 가깝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얼마전 너무 큰 욕심 부리지 말고, 맛난것 먹으면서, 흥미로운 책들 보면서
삶의 소소한 기쁨을 만끽하면서 살아보라고 권유했다가,
이제 곧 재림이 있을 텐데 어떻게 그러냐면서 나를 면박한다.
그의 인생길에 드리워진 짙은 그림자를 볼 때마다,
왠지 나의 책임처럼 느껴져서 가슴 한 쪽을 칼로 쓰윽 베는 느낌이다.
상징계에서 사는 사람들은 좋겠다.
실재계라는 사막의 황망함을 볼 수 없을 테니.
하지만 진짜 메시야는 실재계를 가로질러서 나타난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이 하늘이 무너져야 솟아날 구멍도 보일것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