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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적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여덟 가지 선언
  - 미국 <진보적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센터>(The Center for Progressive Christians: TCPC)

우리 자신들을 진보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다음 8가지 요점을 견지하는 그리스도인들임을 뜻한다.

요점 1: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영역에 들어가는 우리들의  대문(大門)이라고 선언한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문"이라는 상징은, 한편으로는 이 단어가 너무 많이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문"이라는 히브리어 단어의 뜻 때문에, 아주 분명한 이미지를 나타낸다.  히브리 성경에서는 "문"이란 마을이나 시의 성벽에 뚫린 출입문을 뜻한다. 그것은 성문 출입을 위해 뚫린 구멍이나, 혹은 열고 닫는 문짝을 의미하지만, 또 다른 중대한 의미는 성문 속이나 곁에 있는 공간(장소)을 뜻한다. 고고학자들이 발견한 바에 따르면, 성경이 말하는 지역의 초기 성읍들은 외적의 방어를 쉽게 하기 위하여 흔히 단 한 개의 성문을 가졌다고 한다. 성벽 내부의 도로들은 좁고 꼬불꼬불하여 대중이 모일 수 있는 넓은 장소라곤 성문 근처의 공간이 유일한 장소였다. 여기서 사람들은 공동체의 법적인 문제를 처리하고, 여기서 정의와 안전을 얻었고, 수치와 승낙을 경험하였다. 문(門)이 하느님의 경험을 지향하는 은유로 사용될 때, 이는 사람이 정의와 안전에 대한 갈망, 수치에 대한 두려움, 승낙을 얻으려는 소망을 표현할 비유적인 장소를 뜻한다. 복음서들이나 다른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저작에서는 문의 형상에 대한 이해를 히브리 성경에서 얻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요한복음 10: 7-9)

여기서 문은 양의 우리로 들어가는 문이나, 양들에 대한 그의 역할은 마치 성읍의 문이 사람들에게 하는 역할과 마찬가지다. 문은 안전한 곳으로 들어가는 길이요, 넓은 세계로 나가는 길이다. 문을 통하여 우리로 들어가는 양은 강도나 늑대로부터 구원되고, 목장으로 나가는 양은 굶주림으로부터 구원된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무엇으로부터 구원되는가?  드나든다는 말이 지시하는 바는, 그들이 궁극적인 안전과 승낙을 추구하느라고 문 안에 잡혀있거나, 세상에서 뭔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보려고 끊임없는 불안과 스트레스에 싸여있는 것으로부터 구원되는 것이다. 예수가 하느님의 영역에 들어가는 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하느님의 영역에 참여하는 것이란 정적인 성취의 결과가 아니라 동적인 실현의 과정이어야 한다. "문"은 예수 따르미들에게 이 땅 위의 영역에 항상 살아가되 하느님의 영역의 관점에서 살도록 하여준다.    

여기 진보적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요점 1에서 "문(門: gate)"이란 단어를 선택할 때, 처음 발기 그룹 안에서 상당한 논의가 있었다. 어떤 이들은 통로(Pathway) 란 단어가 더 낫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또 다른 이들은 창문(Window) 이나 문간(Doorway) 이란 말이 보다 정확한 이해를 준다고 느꼈다. 이런 은유들은 논의해 볼만한 매우 귀한 상징들이다. 그러나 문간 출입로(Gateway), 또는 그런 비슷한 상징들은 운동, 통과, 변화를 의미하여 어떤 거쳐가거나 따라갈 것을 시사함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상징들은 "앞을 향해 나간다(to move forward)"는 뜻의 전진하다(progress)에서 나온 진보적(progressive)이란 단어에 잘 어울린다.  이로부터 우리는 진보적(progressive)이란 단어와 출입로(gateway)란 단어가 우리들의 신앙의 변화하고 발전하는 이해를 제시한다고 생각한다.


요점 2:  하느님의 영역에 들어가는 통로로 다른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신실함을 인정한다.

이런 종교적 문화적 차이에 대한 접근은 다원주의(pluralism)라고 할 수 있겠으나, 그러나 그런 말은 혼란을 일으킬 우려가 있는데, 왜냐하면 이 단어(Pluralism)는 두 가지 뜻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다원주의는 한 특정한 사회 속에서 여러 인종들이나 종교적 그룹들이 그들의 전통과 자율성을 유지하는 조건을 뜻하기도 하고, 혹은 공동의 선을 증진시키기 위한 정책을 뜻하기도 한다. 비록 성경에서 이 단어에 대하여 그 어느 쪽의 의미로도 논의하지는 않았지만,  여러 단락에서 성경의 저자나 편집자가 그런 조건의 실재를 용인하고 있다.  예를 들어, 십계명의 처음에:

"나는 너를 애급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느님 야훼노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출애굽 20: 2-3)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가운데 살았던 여러 종족들은 그들 나름의 자기 종족의 신들을 갖고 있었기에, 야훼의 백성들도 그들 자신의 하느님께 충성할 것을 권고한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생각이 바뀌어서, 그들이 섬긴 야훼는 그들 종족들만의 하느님이 아니라, 우주의 지배자로 야훼란 이름을 알지 못하는 종족들까지도 포용한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그래서 어떤 예언자는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을 "주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the Lord's messiah)"로 불렀다(이사야 45:1). 동시에 유태인들은 자신들이 그런 우주적인 하느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어서, 그들은 "선택된 민족"이라고 생각하였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이 살았던 로마 제국의 종교적 다양성에 대하여 다소간 모호한 태도(양면성)를 취하였다. 제국 내의 작은 소종파로서, 다원정책의 혜택을 상당히 입었지만, 그러나 결코 그 다원정책을 교리로 옹호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자기들이 유태인을 대치하여 하느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생각을 발전시켰다.  이슬람 종교의 대두와 함께 자기들이 하느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제 3의 그룹이 생겨났다. 역사가 가르치는 교훈들이 있다면, 그 중 틀림없는 한 가지 교훈은, 하느님에게 특별한 접근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신앙이나 전통을 인정하지 않는 자는 누구든지 혐오와 억압의 대상으로 정당화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입장에 대하여 분명하고 적극적인 태도를 갖는 것이 중요하지만, 이제는 예수 따르미들은 평화롭고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필요조건으로 다원주의를 포용할 때가 되었다.

어떤 지역에서 유행한 자동차 뒤 범퍼에 붙인 글에, "하느님은 한 종교가 몽땅 다 차지하기엔 너무도 크신 분이다(God is too big for one religion)"라고 했다. 이런 말이 진보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적절하게 보이겠지만, 이런 생각은 지난 세월 그리스도교가 가르친 전통이 아니었다.  자주 논쟁되는 것으로서, 신약성경에서 구원의 경험이나 혹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갖는데 있어서 그리스도교가 유일한 길이라는 생각에 대한 성경적 근거가 있기는 하지만, 지난 세기동안 교회가 주장한 것처럼 그토록 분명하지는 않았다.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복음서) 속에는 예수가 새로운 종교를 만들거나 개종시키려고 노력했다는 증거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예수는 사마리아 사람들이나 다른 이방인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제 1세기 유태인으로서는 너무도 흔치않은 개방성과 다원주의적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요한복음 기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예수의 입을 빌어 기록해 두었다: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 14:6).  1세기에 생존을 위해 투쟁하던 종교적 소종파가 이런 말들을 했을 때는, 아마도 그들의 목적이나 느낌은 좀 다른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4세기에 들어와 그리스도교왕국(Christendom)이 등장하면서, 요한복음서에서 인용한 이런 말들은 교회와 국가에 의하여 통제와 권력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오늘날 블랙홀, 양자물리학, 팽창하는 우주와 세계의 다원성을 말하는 시대에, 어떤 한 종교가 하느님에 대한 유일한 통로와 전체적인 묘사를 주장하는 것은 믿기 어렵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종교들에서 배우고 심지어 이들 전통에서 어떤 실천을 포용함으로써 그들 개인의 종교적 경험과 신앙의 깊이를 더한다고 여긴다.

우리는 흔히 "우리의 길"이 유일한 길이라고 믿음으로써 상당한 안전을 느낀다. 이는  어떤 소종파 종교의 경험에서도 자연스러운 일면이다. 그러나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무한한 것, 그리고 변화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신뢰하려면, 보다 큰 신앙이 요구된다. 오늘날 교육받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전이 되는 것은 이 "신비의 면전에서" 신앙을 지켜나가는 일이다(Gordon D. Kaufmann, Ph. D.).

요점 3: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빵과 포도주를 나누는 것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하느님의 잔치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한다.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교 예배의 중심이 되는 상징이지만, 그 형상은 오랜 옛날에 기원을 두고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옛날 어려운 때에 하느님이 먹여 살려주셨다는 이야기를 했다--예컨대, 광야를 헤매던 부족들에게 준 만나(manna)와 엘리야(Elijah)에게 준 먹어도 줄지 않는 항아리.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자, "신비스러운" 멜키세덱이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대접했는데, 그는 가장 높은 하느님의 사제였다(창세기 14:18). 이렇게 두 종족의 관계를 결합하는 빵과 포도주의 신화적인 사용은 다양한 민족들을 향한 하느님의 관심을 나타내는 제의적 식사(ritual meal)의 일례를 나타낸다. 또 다른 예는 이사야서에 나오는데:

"만군의 야훼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 (이사야 25: 6).

이 연회의 비전(vision)에서는 이 땅 위의 모든 나라 모든 종족들이 하느님의 손님으로 초대됨을 주목하라. 아무도 제외되어 따돌리지 않는다.  

이사야서에 나오는 하느님의 잔치의 비전은 아마도 복음서에  자주 나오는 이야기에 영감을 준 것 같다--곧 예수께서 4천 혹은 5천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을 먹이신 일. 이런 이야기들에서 예수는 참여하는 자에게나 나눌 음식에 어떤 조건을 내걸지도 않았다. 그의 제자들과 나눈 마지막 만찬에서는, 아무도 아직 예수에 대한 확고한 신앙이 발전되지도 않았건만 열두 명 모두를 초대하였다. 그들 열두 명 가운데, 한 사람은 그를 배반하였고, 한 사람은 그를 부인하였고, 나머지들은 도망쳤다. 예수의 모범을 따라, 교회에서 성만찬 예식을 행할 때마다, 우리는 출석한 모든 사람에게 빵과 포도주를 준다.  그들이 이런 의식의 식사를 나눌 때, 그들은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아갈 정의로운 세계의 비전에 동참하는 것이다.

"잔치"는 언제나 빵과 포도주로 시작하며, 이는 유태교와 그리스도교의 전통을 통하여 포용성과 화해의 상징이 되었다. 오랜 세기 동안 교회는 성만찬 의식을 구별의 수단으로 사용하여, 때로는 복잡한 규칙과 율법과 정책을 정하여 성찬을 받을 수 있는 사람과 받을 수 없는 사람을 규정하기도 했으니, 얼마나 역설적인 일인가! 그러나 예수의 삶에 대하여 우리가 아주 좋아하는 많은 이야기는 그의 열린 식탁, 친교의 식탁, 놀랍도록 이상하고 독특한 사람들과 식사를 같이 나누고 빵을 떼는 예수를 발견하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학자들이 믿기로는, 예수의 열린 식탁에 대한 기사들이 아마도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역사적 기록들 가운데 가장 믿을 만한 진짜 기록들일 것이라고 여기는데, 이는 부분적으로는 그 당시 가장 독특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마커스 보르그(Marcus J. Borg)는 『처음 예수를 만남』(Meeting Jesus for the First Time)이란 책에서 "예수의 가장 특징적인 행동들은 열린 식탁, 포용적인 식탁"이라고 썼다 (p. 55). 나중에 그는 또 "예수의 식탁 친교에 나타난 포용성의 비전은 예수 운동 그 자체를 형성했다"(p. 56)고 덧붙여 말하였다.

존 도미닉 크로싼(John Dominic Crossan)은 예수의 열린 식탁 친교가 그의 삶의 핵심적인 가르침과 상징이라고 썼다. 예수가 "열린 음식나눔(식탁과 음식에 대한 규칙들)을 실천한 것은 그들 사이에 어떤 차별도 부정하고 또 어떤 위계질서의 필요도 거부하는 철저한 평등주의를 실현한 상징"이라고 그는 지적했다(Jesus: A Revolutionary Biography, p. 27, 1994)

대부분의 현대 신학자들은 이런 독특한 식탁 친교가 나중에 성만찬 의식의 선례가 되었다고 믿는다. 보르그는 "예수의 식사는 마침내 그리스도교 성만찬 의식의 선례가 되었다"고 썼다 (p. 56).

진보적인 그리스도인들은 그래서 우리가 열린 성만찬들 실천하는 것이 예수의 선례와 교훈을 따른다고 여긴다.  하느님의 사랑의 오랜 전통과 근원적인 표현, 그리고 본래적인 예수 운동의 핵심을 우리가 실행하는 것이다.


요점4: 다음에 열거하는 사항들을 포함하는(그러나 이것들에만 국한하지 않고) 모든 종류 모든 조건의 사람들을 우리의 예배와 공동 생활에 온전한 동반자로 참여하도록 초청하되, 그들이 우리와 똑같이 될 필요를 요구하지 않는다-신앙인들과 불가지론자들, 인습적인 그리스도인들과 질문하는 회의론자들, 동성애자들과 이성애자들, 여자들과 남자들, 절망에 젖은 사람들과 희망에 넘친 사람들, 모든 인종과 문화의 사람들, 그리고 모든 계급과 능력의 사람들.

태평양 연안 지역에서 개종한 사람들이 유럽풍의 옷을 입고 작은 오르간에 맞추어 서구식 음악으로 노래하게 되었다는 19세기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듣고 흐뭇해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오늘날에도 있다.  그러나 바로 그런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을 환영한다고 주장을 하면서도 그들의 새로운 회원들이 결국엔 자기들과 똑같이 보이게 되기를 기대한다. 그들은 회의자(懷疑者)들이나 구도자(求道者)들이 결국엔 신앙인들로 되고, 남성동성애자들(gays)과 여성동성애자들(lesbians)이 동성애가 아닌 자들 혹은 적어도 독신주의자가 되어 주고, 모든 사람들이 유쾌하게 보이고, 교회 안의 사람들이 비슷한 취향과 똑같은 매너(예절)를 채택하기를 기대한다. 진보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길을 택한다. 우리가 복음서를 읽고 나서 도달한 결론은, 예수 따르미들은 모든 사람들을 환영하되 그들의 태도나, 문화나, 신앙에 대한 이해나, 성적인 성향을 변경할 필요를 부과하지 않는다. 이런 입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교회 안의 기성 교인들이 늘 그들이야말로 정작 변화되어야 할 가능성을 기대하고 있기를 바란다고 우리는 말하고 싶다. 그들은 자기들이 환영하려는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을 적응시킬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요점 3을 토론한 다음에는 이 요점 4는 자명한 것으로 보이겠지만, 그러나 이 설명은 하느님의 자녀들과 이웃들을 서로 구별하려는 분리에 대하여 좀더 자세히 보라는 격려를 위함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아마도 "죄인들", "이방인들", 혹은 "부적절한 사람들"이 성만찬 식탁에 오는 것을 마음속에서는 허용할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변화되기를 기다리는 동안에는, 그들을 초대하여 "열린" 식탁에 합석하라고 하고, 교회 내 활동에 참여하도록 허락하기도 한다. 그러나 요점4 는 한 걸음 내딛는다: 여기 우리는 모든 종류의 사람들을 "완전한 동반자"로 교회 내 공동생활에 함께 할 것을 초대하면서도, 그들이 우리와 같이 되도록 요구하지도 않고, 심지어 우리처럼 행동하도록 노력하라고 원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는 "우리와 다른 사람들이 그들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있는 것"을 인정한다.

교회 내 그룹들이 이 문제를 다루고자 할 때, 대부분의 참여자들이 처음부터 예상하는 진짜 문제 는 동성애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수많은 종교 잡지들과 월간지들이 동성애 문제에 상당히 많은 주의를 기울여 초점을 맞추어 왔고, 심지어 지난 10년 동안 가장 중요한 문제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거의 모든 주요 교단들이 이 문제로 분파적인 행동으로 끓어올랐고, 아직도 대부분 그런 상태에 있다. 이상스러운 것은 우리 <진보적인 그리스도교 센터>에서는 이 문제가 많은 토론의 주제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 주제에 대해 좀 더 배우려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많은 훌륭한 책들, 논문들, 테이프들이 있다. (요청하면 TCPC 는 도서목록을 보내준다.)

그러나 성적 경향에 대하여 초점을 맞추고 그 대신 정작 교회를 훨씬 더 자주 분열시키는 문제들의 통계적 현실을 무시하기가 쉽다.  거의 모든 교회에는 정기적으로 예배에 출석하는 동성애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국적인 조사를 통한 통계가 말하는 바는, 인종간, 계급간, 그리고 연령간 갈등이 대체로 훨씬 우리 교회를 분열시켜 끼리끼리 모이는 동질 그룹으로 만든다고 한다. 가장 공통적인 것은 교회가 어떤 지역에 위치하는 가에 따른다.  또한 어떤 교회들은 소수 그룹의 언어나 문화적인 차이 때문에 다른 교회에서는 환영받지 못하는 그들에게 안전한 장소를 제공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소수인종에게 초점을 맞추는 목회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문제를 공개적으로 토론해본 우리 교회 내 많은 그룹이 발견한 바로는,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더 동질성을 유지하려는 편견과 교묘한 세력들이 있다는 것이다.  때로는 예배의 형식, 음악의 종류, 혹은 서투르게 고안해낸 동화(assimilation)의 과정이나 환영하는 태도도 이유가 된다.  우리 예배 가운데로 사람을 환영하는 것과, 아이디어(생각)나 의사결정 과정 및 위험과 공동생활을 기꺼이 나눌 "완전한 동반자"로 낯선 사람들을 환영할 공간을 만들어 내는 것과, 이 둘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그러나 바로 이 점이 우리가 진정 하느님의 영역으로 가는 예수의 길을 따르기를 원한다면, 복음서의 예수가 우리들에게 실행하기를 격려하는 점인 것 같다.


요점 5: 우리가 서로 서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이 우리의 신앙을 표현하는 방식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진보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회원들이 교회내 기존의 회원들을 닮도록 변화하기를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그들이 도덕적 기준이 없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그들은 아마도 문화적 규범들과 윤리 도덕을 혼동하고 있는 듯하다. 신앙보다 행동을 가치 질서의 앞에 둠으로써 예수 따르미들은 동료 인간들을 친절과 존경으로 대하여야한다고 진보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주장하는 것이다. 예수의 처음 제자들은 예수 따르미들에게 기대되는 행동의 기준은 이웃을 향한 사랑이라고 확신하였다. 참된 사랑은, 심지어 자신을 희생하면서라도, 다른 사람들의 복리(well being)를 높이도록 행동하는 것이다. 예수 따르미에게 요구되는 변화는 교회와 사회 속에서 행동의 기준으로서, 자신의 탐욕과 강제와 착취와 억압을 포기하는 것을 포함한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주장하는 바로는, 우리는 예수가 한 말씀보다는 그가 한 행동에서 성경이 그려낸 예수에 대하여 더 많이 배운다는 것이다. 복음서들에서 우리가 만나는 예수는 행동의 사람이라, 그는 병을 치료하고, 동정을 베풀고, 불의에 대항하고, 조건 없이 사랑하고, 그리고 자기의 제자들에게 가서 똑같이 행동하라고 촉구한다. 아마도 이 때문에 공관복음서 기자들은 모두 예수가 믿은 가장 중요한 계명은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우리가 자신을 사랑하듯이 우리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라고 썼을 것이다.  누가복음 기자에 의하면, 예수는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는 누구나 "우리의 이웃"이라고 말했다.  이 중요한 단락 어디에서도, 우리가 남을 도우려고 하기에 앞서서, 혹은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기 전에, 우리는 신학이나 신앙체계에 대하여 먼저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예수가 주장한 곳을 발견할 수 없다.

또한 예수가 누군가를 돕거나 친구로 삼기에 앞서서 "리트머스 시험"(Litmus test)을 적용한 적은 결코 없다.  진보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사랑의 행동들이 우리의 신앙의 표현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요점 6: 절대적인 확신보다도 의미를 찾는데서, 그리고 해답들보다는 질문들에서 보다 많은 은혜를 발견한다.

복음서들에 의하면, 예수는 솔직한 질문에 대하여 솔직한 대답을 해준 적이 거의 없다. 그 대신 예수는 다른 질문을 하거나 어리둥절한 이야기로 응대한다. 질문자들이 실망할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는 그들 자신이 생각해보도록 한다. 인생의 가장 당혹스러운 문제들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해답을 제공하는 대신, 예수는 그들을 보다 모호한 깊이에로 인도한다. 산상수훈(The Sermon on the Mount)이라고 알려진 마태복음의 예수 어록집은 예수가 그의 제자들에게 모순된 반박으로 어떻게 맞섰는지를 잘 보여준다. 율법의 일점 일획도 변경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그는 기도, 구제헌금, 복수, 간음, 살인 등에 대한 당대의 율법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도록 가르친다. 예수는 절대적인 해답을 주지 않는데, 왜냐하면 헛된 자신감과 안전함을 제공하는 것이 오히려 하느님을 깨닫는데 장애가 될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해답이 하느님을 대치할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예수가 교회에 남긴 유산은 그를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한 상황을 제공하여 그 질문을 밀고 나갈 용기를 발견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요점 7: 우리들 자신들을 영적인 공동체로 보고, 그 안에서 이 세계를 위해 할 일에 필요한 자원들을 발견한다:  할 일이란, 정의와 평화를 위해 분투노력하고, 예수가 그의 형제자매들의 가장 작은 자들이라고 부른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의 가족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대한 책임과, 예수가 그의 형제자매들 가운데 가장 작은 자들이라고 부른(마태 25:31-35) 사람들에 대한 책임 사이에 긴장이 존재한다.  복음서들에 의하면 예수는 혈연의 가족에 대해 긍정적인 것을 말한 적이 없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와 형제자매들을 멀리하고 자신의 새로운 가족들을 택한다 (마가 3: 32-35). 그리고는 이런 가족 개념을 확장하여 가장 도움을 필요로 하는, 병든 자들, 굶주린 자들, 낯선 자들, 죄수들에게 적용한다. 사람들이란 혈연의 가족들을 돌보려는 자연스러운 본능을 갖고 있다.  이런 이른바 "친족 사랑(kin altruism)"은 태생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예수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관심의 영역을 넓혀 모든 사람들을 받아들이라고 촉구한다.

예수는 하느님을 "모든 피조물들의 어버이"로 심오한 친밀감으로 경험한다. 이런 비상한 관계의 결과로, 그런 경험을 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상호연결에 대하여 분명한 비전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예수는 모든 사람은 한 하느님의 자녀로 인정한다. 그에게는 사람의 정체성은 하느님의 자녀라는 점에서 시작하고 끝난다. 다른 요소들은 이 진리에 비하면 2차적이거나 오히려 혼란을 야기하는 것들(가령, 가족, 재물, 지위 등)이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모든 사람은 이 세상에서의 지위에 상관없이 존엄성과 의로움을 지닌다. 이 이하는 무엇이든지 하느님을 대적하고 죄를 짓는 것이다. 모든 생명의 상호연결성 때문에 하느님의 자녀들의 어느 누구에게 내린 불의와 고난은 결국 모든 사람에게 불의요 고난으로 된다. 현실에 대한 이런 유별난 이해 때문에, 존 도미닉 크로싼은 예수를 "급진적 평등주의자"(radical egalitarian)라고 불렀다.

그러니 예수의 제자들이란 자신을 하느님의 자녀로 정체성을 느끼는 자요, 다른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로 관계하는 자인 것이다. 영적인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그러므로 예수의 길을 따르는 자들이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런 관계의 모범을 삶으로 실행하기를 추구하는 곳이다. 교회는 서로 서로의 재능과 자질을 세계를 위하여 봉사하려는 공동의 노력을 나누고 인정하는 길을 조장하는 장소요 동시에 행태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를 언제나 둘러싸고 있는 불의를 대항할 용기와 관점을 공동체적으로 발견하도록, 그리고 세계 속에서 온전함과 치료를 추구하도록, 그리고 희망이 없는 곳에 희망을 제공하도록 부름을 받아왔다. 진보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의 도전은 가장 고매한 이상들, 가령 정의와 평화 같은 것들 속에 도사린 복잡성과 모순을 인정하는 것이다. 정의와 평화는 동시에 실현 가능한 것일까? 예컨대, 독재적인 정부들도 "평화"를 강제로 만들 수는 있지만, 거의 언제나 많은 사람들의 정의와 인권을 희생한 대가로 이루어진다. 자유를 주장하는 정부들은 개인의 권리와 정의를 높이기는 해도, 그 대가는 사회적인 혼돈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정의"(justice)의 의미에 대하여, 혹은 우리가 이해하는 삶의 맥락에서 "정당함"의 뜻을 알려고 애쓴다. 널리 알려진 그리스도교 윤리학자 카렌 레바쿠즈(Karen Lebacquz)는 "정의"라는 단어의 뜻을 정확히 말하기는 매우 복잡하고 어렵지만, "인간의 정의는 하느님의 행동과 분리될 수 없다"고 말한다. 같은 책에서 그녀는 말하기를, 비록 정의(正義)가  정의하기 어려운 이상(ideal)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정의에 대한 이해는 "불의의 현실에서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Justice in an Unjust World, 1987). 이런 문제들은 과거의 불의를 교정하는 것이 때로는 무죄한 사람들에게 불의를 저지르기도 하는 현실 못지 않게 복잡하다.

진보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이상들의 긴장과 씨름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데, 이는 우리가 우리들의 관점이 제한되어 있음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창조의 신비에 대한 믿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감히 그런 모호함에 대하여 동정하면서 씨름하는데, 이는 우리가 하느님의 진리가 그 모호함 가운데 존재함을 의심하기 때문이다.

요점 8: 우리들의 신앙이 값비싼 제자의 도리, 특권의 포기, 그리고 악에 대한  의식적인 저항을 수반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교회의 전통이 늘 그러하였듯이.

사람들이 관심의 영역을 넓힐 때마다, 그들은 자기가 소유한 자원들을 내어놓을 요청과 지위에 대한 위험을 감수해야함을 발견한다. 예수 따르미들은 예수가 그렇지 않았듯이, 마찬가지로 자기들도 성공과 인기를 기대해선 안 된다. 예수의 처음 제자들처럼 우리도 혜택을 얻거나 특별대우를 받을 희망을 포기하기를 배워야 한다.

한 이야기(마가 10:35-45)에서, 예수의 두 제자들(야고보와 요한)이 특혜를 바라고 왔다. "당신의 영광의 날에, 우리로 하여금 하나는 당신의 오른손 편에, 다른 하나는 왼손 편에 앉게 하여주소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특별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장소를 찾고자한다. 특별한 장소를 갖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의 두려움과 힘이 없는 두려움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된다. 하느님께 특별한 접근을 주장하는 그리스도교 그룹들은 그들의 아무 것도 아닌 존재와 힘없음의 두려움을 극복했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을 구별하려고 하는 다른 사람들의 부정적인 반응을 발생시킨다--비록 복음서 이야기들이 그들에게 적대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경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열 명의 제자들이 야고보와 요한이 부탁한 것을 듣자마자, 그들은 "화를 내기 시작했다." 예수는 두 제자의 요청을 듣고, 또 다른 제자들의 분노를 보고 나서 대화의 방향을 바꾸어 버렸다. 그는 야고보나 요한에게 그들이 특혜를 요청한 것이 나쁘거나 잘못되었다고 꾸짖지 않았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는 "누구든지 너희 가운데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자는, 먼저 남의 종이 되고, 누구든지 일등이 되고자 하는 자는 먼저 모든 사람을 섬겨라" 하고 말했다는 것이다. 예수는 그의 제자들이 특혜를 원하도록 몰아세운 두려움을 이해하였다.  예수는 또한 두려움이란 영적인 에너지로서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사랑의 관심으로 변환될 수 있음도 이해하였다.

다른 사람들을 향한 진정한 관심은 그들의 에너지를 소진시키고, 그들의 존재를 거부하고, 그들의 존엄을 박탈하고, 혹은 그들의 희망을 파괴하는 그 어떤 힘에 대항하는 것도 포함한다.  진보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사회적 위치를 고양시키기보다는, 사회 속의 악에 대한 저항하는 것이 언제나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의 의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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