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마을에서 답답한 글이 올라와서

by 지경야인 posted Dec 19, 2011 Likes 0 Replies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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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재림마을 게시판의 정치적 의견이 담긴 글들을 보면, 우리나라 젊은 층이 좌향좌 하는 작금의 트렌드를 반영 하듯 온통 현 정부를 비판하는 글들뿐입니다.

그리고 그 글들은 여지없이 추천 수가 올라가고 지지하는 댓글들이 주렁주렁 매달리지요.

이번 서울삼육중 역사 교사 관련 파문 또한 교회 내 젊은 층의 그런 정치적 성향을 반영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런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자연스럽게 그간 현실 정치에 관해 침묵한 우리 교단의 과거와 현재를 비판하곤 합니다.

아래 이광진님의 글을 인용하겠습니다.

“어쨌든 우리 교회는 너무 보수성이 강하다 못해 정권의 부도덕한 일에 대해서도 입을 다물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런 정권을 옹호하곤 하는 것 아닌가요? 그것이야말로 정치적인 태도 아닌가요? 이런 점은 우리가 반성해야 할 일이라 생각됩니다.”

이런 글들이 오래 전부터 이 게시판에 올라왔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학자도 없고, 잘못을 꾸짖는 어른도 보이지 않습니다.

현실정치에 관해 우리가 취해야할 바람직한 모습은 과연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과연 현실정치에 관한 어떤 모본을 우리에게 보이셨을까요?

예수님 당시는 우리가 모두 알다시피 유대는 로마의 식민지 시대였고, 로마에서 파견되거나 로마가 임명한 관리들에 의한 착취와 탄압이 정치였던 시대였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되자 사람들은 기대하기 시작했죠. 밉살스런 저 로마인들을 다 몰아낼 것이라고..

그러나 예수님은 은혜의 왕국을 선포하고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 는 등의 말씀만 하셨을 뿐 현실정치에 관한 비판은 일언반구 하지 않으셨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메시야로서의 길을 예비하고 자신에게 침례를 준 침례요한이 억울하게 투옥되고 목베임을 당하는 중에도 헤롯에게 직언하거나 구출하려 하기는 커녕 면회조차 가시지 않으셨습니다.

한 번은 바리세인들이 정탐꾼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물론 시험하기 위해서였지요. 로마의 압제의 상징인 세금문제를 거론하며 예수님을 현실 정치에 끌어들이려는 의도였습니다.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고만 말씀하시고 더 이상 정치적인 발언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예수님의 관심은 하나님의 영원한 왕국의 건설이었습니다. 고작 권불십년의 세상 정치는 비판할 가치조차 없었던 것이었고, 오히려 비판함으로써 하나님의 왕국 건설에 그들의 불필요한 방해의 빌미를 제공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세상의 현실정치에 관하여 어떻게 처신할 것인지를 몸소 보여 주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현실정치에 침묵하고, 우리 교회가 걸어온 방향의 이유일 것입니다.

또한 잘못된 세상 정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나서서 비판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며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지나온 역사가 그러한 사실을 말해 주고 있지 않습니까?

당시 제자들도 의아해 했을 만큼 침례요한의 죽음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는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침묵이 하나님의 왕국 건설에 오히려 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침례요한은 믿음으로 순교했고, 그의 죽음은 후년에 감방에서 죽음을 당할 수다한 사람들에게 용기가 되었습니다.(시대의 소망 참조)

불필요하게 나서는 것 보다 믿음의 침묵이 더 위대한 위대한 결과를 낳는 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지요.

여기서 한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침례요한은 헤롯을 책망하여 그의 순교를 자초했을까요? 침례요한의 현실정치관은 예수님의 그것과 달랐던 것일까요?

성경과 시대의 소망을 보면 침례요한이 그를 책망한 것은 정치인으로서의 헤롯이 아니라 구도자로서의 헤롯이었습니다. 성경에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 하여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들음이러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대의 소망에는 침례요한이 헤롯을 책망하면서도 그를 신실하게 대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침례요한의 책망은 구도자 헤롯의 회개를 호소한 것이지, 현실정치에 관해 비판한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야기가 길어졌네요.

앞으로 이 재림마을 게시판에 그리고 우리 삼육학교 교단에 현실정치에 관한 살벌한 비판의 글들이, 교육이 사라지길 기대합니다. 그리고 그 대신 하나님의 왕국의 선포가 재림성도가 있는 모든 곳에 울려 퍼지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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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푸른나무 [2011.12.19 23:24:38]

작금의 젊은 세대가 SNS를 통해 소통의 장을 늘려가고, 현실비판과 정치참여를 하게된 이유는 그동안 그들이 그러한 부분에 대해 무관심하고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치도 세상도 변하지 않는다는 반성에 기인한 것입니다.

빈궁한 세대가 아무리 [반값 등록금 공약]을 지키라고 외쳐도, 최저임금 신세를 벗어나게 해달라고 요구해도, 젊은 세대가 현실정치에 무관심하고 투표에 불참하는 한 결코 개선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탓입니다.
또 그러한 변화를 이끌어내게된 큰 요인 중 하나는 소위 [소셜 테이너]들의 활약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설가 이외수씨는 개인적으로 트위터 Folower를 100만 명 이상 확보하고 있습니다.
탤런트 김여진씨나 김제동씨의 활약도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현실정치 참여를 통해 자신들이 처한 어려운 현실을 타개하고자 하는 변화는 시대의 트렌드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그들 뿐 아니라 기성세대가 건전하게 참여하고 현실을 비판할 줄 아는 안목을 갖추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며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자칫 신앙적 측면으로 재단하여 그러한 현실을 부정적으로 판단하고, 침묵을 강요한다면 이 시대의 젊은 세대와 소통할 길을 스스로 제한하는 현실세계와 동떨어진 고루한 신앙이 되고, 결국 외면 당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양노원이나 박물관과 같은 상황의 교단의 모습이 될 수도 있음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좁은 울타리 속에서 자기 신앙을 고수하고자 하는 분은 그렇게 하면 될 것이며, 좀 더 넓은 관심과 참여를 통해 젊은 세대의 고민도 함께 끌어안고 갈 아량이 있는 분들은 역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세상은 넓고 사람들의 욕구와 생각도 다양합니다.
우리 스스로의 유용성과 활동 범위를 지나치게 제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광진 [2011.12.20 01:43:46]

도약을 꿈꾸는 님

염려걱정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저도 글을 쓸 때 제가 과연 정치적인 색채를 띄진 않는가 늘 고민하고 되새겨봅니다.

전 사실 어느 누구보다 정치에 대해 무관심했습니다. 정치인에 대해서도, 대통령에 대해서도 저는 무조건 존중하고 그들에게 복종하는 것이 국민의 도리요 그리스도인의 정신이라 생각했습니다. 교회 지도자에 대해서도 역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분들이니 잘못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실 일이라고만 믿었고 누가 그분들을 비판하면 저는 차라리 귀를 막고 싶어 했습니다. 저는 그런 일에 신경쓰는 것은 어떤 성역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정도로 정치(혹은 행정)에 관해서라면 저는 순진한 작자였습니다.

그러던 제가 정치에 눈을 뜨게 되고, 교회 행정에 관해서도 뭔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보면 볼 수록 추악하고 불의한 모습들에 저는 실망하고 분노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런 반응이 과연 정당한가? 내 자신의 모습은 얼마나 의롭기에?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여전히 그런 고민을 하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

제가 앞에서 이미 언급했지만, 정치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은 분명 다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비판하는 것은 대개 정치적인 것보다 도덕적인 문제라고 보여집니다. 정치인, 혹은 지도자의 정치적 성향에 대해선 호불호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들의 도덕적인 문제에 대해선 시비가 붙게 되겠죠.

어떤 사람들이 지도자를 비판할 때 정치적 성향에 대해 말하는지, 도덕성에 대해 따지는지 잘 살펴보고 조언을 하든지 꾸짖든지 하십시오. 지도자의 도덕성도 하나님이 알아서 심판하실 일인가요? 그렇긴 하지만, 우리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바르게 지적해 줄 필요도 있는 것이죠. 그것이 사람사는 세상 아닌가요? 저는 하나님이라도 잘못하신다면 따질 태세입니다.

예수님이 현실정치에 대해 침묵하신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정치인의 도덕성에 대해서도 침묵으로만 일관하셨을까요?
교활한 헤롯왕을 일컬어 “저 여우”(눅 13:32)라고 지칭한 사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맹비난하신 일에 대해서는요?

최근에 연합회 차원에서 국시일이 안식일로 지정된 일을 두고 다른 날로 옮겨달라고 청원하는 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 것은 정치적인 차원 아닌가요? 우리 입장에선 종교적인 차원이라고 해야겠죠. 하지만 정치인에겐 그것이야말로 정치적인 문제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이 우리 신앙양심을 저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를 타개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쓰고 있는지요? 그런데 이 문제는 우리 교인들의 신앙양심에만 관계된 것이지 타 종교인들의 신앙에는 무관한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복리를 위해선 간절하게 기도하고 정치적인 방법을 동원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정권의 비도덕인 문제는 모든 국민들에게 고통과 좌절감을 주며, 자신들의 부도덕을 정당하다고 주장할 명분을 주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건 정치적인 문제야 라며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합니까?

지경야인 [2011.12.20 11: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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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답답하고 깝깝한 이야기를 하셔서 이런 무지몽매한 사상을 버젓이 이교회의 전통처럼 묶으려는 한심한 작태를 도저히 용납할수 없도다
예수 당시의 정치 참여 현재의 정치참여는 어떤 의미인가
다시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침례요한은 왜 감옥과 목배임을 당했나요
그런 침례요한을 예수께선 여자로 태어난 자중 최고라 한이야기는 왜 빼버리시나요
예수의 이땅 봉사 사업이 단지 님이말한 그런일을 위한 사업뿐이었다면 당연히 그렇게 하셨을겁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업은 모든 인간 역사의 구원과 상관이있어서 그러하였습니다.
제발 외곡 좀 하지맙시다.
예수께서 누구와 함께 할것인가를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과연 유대인600만명을 죽이는 정권과 함께 했겠습니까?
아니면 그걸 막고자하는 사람과 또한 그들을 숨겨 주고자 하는자들과 함께 하셨겠습니까
세계경제 통합이라는 기가 막힌 명분을 통하여 우루과이라운드협상 WTO FTA등을 통하여 서로에게 이익이 된다고 설득하지만 자본가들과 그 배후세력(사단)에 의하여 무슨 음모가 진행되는지 알고있다고 자부하는 안식일교회의 입장에서 예수는 누구와 함게 할까요
뒷짐지고 먼 산만 바라보고 계실까요 아니면
음모를 밝히고자 하는 자들과 고통받을 민중과함께 하실까요?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교묘한 술수로 교인들을 우매화하고자 하나 무지하고 몽매하던 시절엔 그게 통했을지 모르나 전혀 아니라는것이죠.
성경역사에서 주님께서 직접 정치를 하셨습니다.
그 주님은 누구란 말입니까?
지도자가 배도하고 우상숭배를 하면
선지자를 보내서 엄중히 문책하고
그도 안되면 포로의 혹독한 시련을 맛보게 하신일은 무엇인가요?
주께서 하신일을 아니라고 말하렵니까?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다르다고 말하렵니까?
일반 개신교인들 말하는것 처럼 구약은 폐했다고 말하시지요.
지도자가 목사가 장로가 이런 사상들로 물들어 있어서 너무나 한심합니다.
누군가 군수선거에 나서면
어?
우리 교회는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데?
국회의원에 출마하면
어?
우리 교회는 정치 참여하지 않는데
어쩌다 고위 공무원으로 부지사나 부시장 등에 오르면
대서특필해서 무슨 교회 무슨 장로 칭찬하고 무슨 청탁이 있으면 몰래몰래 다하고
그 사람들이 앞에서 뛰지는 않았어도 뒤에서 함께 뛴것은 언급없고

구약의 하나님이 신약의 하나님과 동일하다면
모세는 억압 받는 자기 백성을 위해 애굽의 장자까지도 희생시킨 무서운 인물이며
모르드게는 자신의 민족적 생존을 위해서 하만과 다른 민족을 무참히 죽이고 희생시킨 악한이고
요나는 남의 나라 니느웨에가서 회개를 외친 내정간섭자라 할것이다.
이런이야기를 하면 신정시대와 다르다고 말들 할 것이다
법 집행 방법론적이지 그 정신은 신약이나 구약이나 언제나 동일하다는 것이다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시고 그림자도 없으신 주님이 구약과 신약이 다르다고 말하지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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