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갈길 다가도록(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1

by 정태국 posted Jan 05, 2012 Likes 0 Replies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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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년 전에 저희 부친 고 정동심 목사의  회고록을 책으로 출판하기 위해 준비 되었던 것을 보류하다가

이제 Minchosda와 KASDA를 통하여 여러번에 나누어 글로 올리려고 합니다. 

감사 합니다.


정 태국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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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목사 회고록 연재) #1

 

아버님의 회고담(록)을 내면서.

 

우리 아버님께서 “나의 자녀들에게”라는 육성 녹음테이프를 남겨 주신 것이 우리에게는 큰 행운이었습니다. 

우리 기억에 아버님은 교회사역을 하시느라고 자녀들과 정다운 대화를 나누어 보신 적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그 육성 테이프들은 그간 밀렸던 우리와 하고 싶으셨던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아버님이 남겨 주신 육성 테이프는 90분짜리 테이프 20개나 되는 상당한 양으로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이 테이프들을 글로 옮겨보니 500여 페이지가 넘는 상당한 양이었습니다.

 

한편 자서전이나 교회역사에 관한 글을 남기시기를 거듭 사양하시던 아버님께서 미주시조사 편집인 

송순태 장로의 청을 받고 한동안 생각하시다가 교회지남에 연재하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아마 교회지남에 다 실렸다면 약 10년-15년 동안 연재가 될 만한 양의 원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원고는 꼭 1년간 미주 교회지남에 연재가 되고 편집인이 바뀌면서 중단 되었었습니다.

다행히 미주시조사의 송순태 장노님은 이 원고를 잘 보관하셨다가 저에게 돌려 주셨습니다.

이 원고는 아버님의 회고록을 완성하는데 큰 힘이 되었고 육성 테이프를 글로 옮겨서 회고록을 만들 때 

많은 부분 보완 하는 일을 가능하게 해 주었습니다.

 

이번에, 아버님이 남겨주신 육성 테이프와 미주교회지남을 위해 쓰셨던 원고를 합하여 아버님의 회고담(록)을 만들었습니다.

육성 테이프는 많은 부분이 가족간의 일들이나 가족들에게 남기고 싶었던 말씀들과 교회 일을 하시면서 어려웠던 

내면적인 일들을 말씀하셨고 시조사를 위한 원고에는 교회의 일들과 선교에 관한 글들이 수록되어 있었습니다.

두 가지를 편집하여 이렇게 어수룩하지만 아버님이 즐겨 부르시던 “나의 갈길 다 가도록”이라는 

찬미의 제목을 사용하여 “정동심 목사 회고록”을 꾸며 보았습니다.

 

가족에게 남기신 테이프는 거의 모든 사실들을 실명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실명 그대로 옮길 것인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많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실명으로 거론된 분들과 관계되는 일부 가족들이나 그 후손들게 원고의 일부를 드리면서 의견을 여쭈어 보니, 

매우 개방되신 분들이라 생각되는 분들도 필요 이상으로 예민한 반응들을 보이셨습니다.

역시 실명을 그대로 사용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체험하였고, 아버님께서 왜 자서전을 

그리도 쓰시지 않으려 했는지를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었습니다. 


예민한 반응을 보인 분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많은 사실들을 삭제하거나 또는 실명을 그대로 사용하지 못한다면

회고록 내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도 했지만 화평을 위해서는 익명을 사용해서라도

아버님의 생애 속에서 섭리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지혜와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함께 나누는 것이 더 유익하다는데 

의견을 같이 하게 되어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7년 만에 정리된 원고를 1년여에 걸쳐 처음부터 다시 편집,

정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육성 테이프는 연세가 많으신 분이 혼자 가정용녹음기를 처음 사용하셨기 때문에 많은 부분 녹음 상태가 불량하여

발음이 알아듣기 힘든 부분도 많았습니다. 

특히 인명과 지명은 불문명한 발음 때문에 글로 옮기기에 주저 되는 부분도 많이 있었습니다.

어떤 인명이나 지명은 몇 달이 걸려서 겨우 제대로 알아낸 것들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이름이나 지명이 아직도 많이 있으리라고 사려 되며, 읽는 분들의 양해를 바랍니다.

 

회고록 속에 대화체로 기록이 된 것은 분량을 줄이거나 또는 우리에게 주신 테이프를 듣고 어떤 문제나 사건들을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여러 가지를 여쭈어 보았을 때 그 때의 사건들을 마치 재생이라도 하시는 듯이

어떤 때는 기쁨에 찬 음성으로, 어떤 때는 감동에 젖어서 눈물겹게, 마치 대화를 하는 것처럼 이야기 해 주신 부분들이며 

특히 생의 마지막 부분을 저희 집에서 지내시면서 직접 이야기 해주시던 그 기억들을 되살려서 

대화체로 적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이 책은 역사도 아니고 자서전도 아닌 단순한 회고록입니다.

지명, 인명, 시간까지도 노년을 맞으신 아버님의 기억에 의존한 것입니다.

그러나 노년이심에도 불구하고 옛일에 대한 기억력은 놀라우리 만큼 정확하신 것이 많았습니다. 

그러하더라도 교회에서 출간된 교회 역사책들과 시간이 다를 수도 있지만 아버님께서 남겨 주신 그대로 적었을 뿐입니다.

 

많은 분들이 글을 잘 쓰는 분에게 위탁하여 회고록을 내도록 권유하셨지만 아버님이 육성으로 남기신 말씀이나 

쓰신 원고들이 비록 투박한 글체이지만 가능하면 그대로 옮겼습니다. 

어떤 부분은 우리가 알고 있거나, 또는 늦게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알게 된 일들을 함께 넣어서 편집하고 싶은 유혹도 받았고,

또 어떤 사건들을 추리하거나 또는 다른 분들의 증언을 통하여 아버님에 대한 오해된 부분을 옹호 하고 싶기도 했지만, 

그것이 결코 아버님의 뜻이 아님을 되삭이며, 주로 맞춤법이나 반복되는 부분들만 수정 또는 삭제하여 편집 했습니다.

교육을 많이 받으신 분이 아니신지라 아름다운 문장은 아니지만 솔직하고 투박함을 담은 말씀이나 글들 입니다. 

그 부분도 이해를 바랍니다.

 

아버님은 이름난 애국자도 아니요, 독립 운동가도 아니지만, 그렇게도 교회를 사랑한 한 평범한 인간으로, 

목사이면서 아버님 되시는 분의 회고록으로, 아버님이 섬겼던 교회와, 그리고 아버님을 인도하셨던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보탬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2002년 다섯째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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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녀들에게


 

나의 친구들이 종종 나에게 이제는 더 나이가 들기 전에 자기의 일생에 관한 무엇을 기록으로 남겨 놓으라고 권할 때마다 

나는 번번이 그것을 거절하였다.

오히려 다른 친구들이 자서전이나 회고록을 쓰겠다고 말할 때마다 한사코 말리곤 했다.

그 이유는 자서전이나 회고록을 쓰게 되면 정직하게 쓴다고 하면서도 나를 보호하거나 방어하는 방향으로 기록하다 보니 

사실이 왜곡되거나 남에게 상처를 주게 되는 것을 적지 않게 보았고, 반대로 어떤 경우에는 사실을 덮어두거나 

또는 외면하여 글을 쓰면서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하여 할 수 없었다" 하시며 변명을 하시는 분도 계셨기 때문이다.

사실 너무 정직하게 썼기 때문에 상처를 받는 사람들도 많이 보아왔다. 그래서 나 자신은 물론 그 누구도 이런 면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생각에 나의 회고록은 물론 남에게도 자서전을 쓰는 것을 적극 만류하곤 했다.

 

그러나 얼마 전에 친구들과 만난 자리에서 삼육신학대학의 이야기가 나와서 대화를 하던 중에 

나는 삼육대학의 이야기를 하려면 삼육신학원 때의 이야기부터 나와야 한다고 말을 하게 되었다. 

그랬더니 친구들은 말로만 하지 말고 글로 좀 남기라고 말을 하기에 좀 적어 보려고 하니 우선 청양 사건부터

생각이 나기에 몇 자 적기를 시작했다. 그래서 몇 자 적기 시작하다가 몇 가지 가족들의 어려운 일들을 겪으면서 

나는 글 쓰는 것을 몇 번이나 중단하곤 했다.

 

그러나 이제 내 나이 구십 세가 가까워 오면서 내 마음속 한 모퉁이에서 "너는 조물주 하나님께로부터 

누구 못지않게 축복을 받은 자로서 다른 이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적어도 나에게 축복으로 주신 자녀들,

즉 너희들에게 나의 일생을 통해 넘치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말해 줌으로 다소라도 거친 세상을 헤치고 나아감에 

보탬이 되게 하였으면" 하는 생각이 계속 나를 권하여 결국 자녀들을 위한 회고록을 남기고 싶게 되었다.


나의 가정을 통하여 이 세상에 출생한 적지 않은 자여손들은 물론, 후에 태어날 후손들이 나의 살아온 이야기들을 통해서 

다소라도 도움을 받는다면 다행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시작해 본다.

 

이것은 교회의 역사도 아니오, 자서전도 아니라 내 나이 많아지면서 지난 일을 돌아보는 회고록임을 알려 두고 싶다. 

내가 기록했던 수첩들도 많은 도움이 되었지만 그보다는 하나님께서 내게 과거의 일들을 

비교적 정확하게 기억하게 해 주신 것을 감사드린다.


내가 이것을 정리하여 쓰기가 힘이 들어 녹음기를 이용하여 녹음을 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 이들에게 감사한다.



아버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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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부. “유복(遺腹)”이를 인도하신 하나님.

 

1. 수난(受難)-화강리교회 지방회

 

나는 1935년에 새로 생긴 북선대회의 대회장으로 임명되어 원산으로 왔다가 1939년에는 중선대회장의 책임을 맡고 

서울로 전근하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소위 "대동아 전쟁"을 일으키고자 해서 시국은 점점 힘들어져가고 있었다. 

일본이 조선에 대한 모든 정책도 전쟁준비 정책을 펴느라 미국선교사들을 무슨 구실을 만들어서라도 다 내 보내려고 했다. 

우리 교회도 예외는 아니어서 대부분의 선교사는 1940년 11월까지 다 귀국하고 이시화 목사만 1941년 2월 26일까지 

계시다가 마지막으로 귀국했다. 합회장이 공석이 되자, 서선대회장으로 있던 최태현 목사가 합회장 일을 맡게 되어 

서울로 전근 오셨다. 공석이 된 서선대회장 후임을 의논 하던 중에 나보고 가는 것이 어떠한가 하는 말이 나왔다. 

회의 전부터 친구 되는 조치환 목사가 북선대회에 가고 싶다고 내게 말씀도 하셨지만 나는“내게 딸린 식구가 너무 많고 

그 많은 식구가 다 서울에 있으니 서울에 가족이 없는 분으로 보내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회의를 인도하시던 최태현 목사님은 “그러면 누구를 추천하고 싶은가?” 말씀하기에 “청진에서 수고하시는 

조치환 목사를 북선 대회장으로 추천한다.”고 하자 회의에 함께 계시던 조치환 목사님은 즉석에서 

“내가 기꺼이 가겠다.”고 하셔서 그렇게 결정이 되고 나는 그대로 중선대회장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내가 서선대회로 갔었다면 나의 일생은 전혀 다르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


1941년,

시국은 점점 어수선해 가고 있었다. 선교사가 없는 교회의 행정은 조금 혼란에 빠졌다. 

나는 당시에 중선대회장직에 있었기에 돌아가는 교회 사정들을 보면서 전쟁의 경험이 별로 없는 우리들에게 

경험이 많은 선교사들이 모든 일들을 지혜롭게,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떠났었다면 교회는 여러모로 도움을 받았을 터인데 

별로 말도 없이 모두 너무도 급하게들 떠나 너무 아쉽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당시에 우리는 종종 “지방회”라는 것을 갖곤 했다. 그 지방의 사역자와 교회 책임자들이 자리를 같이하여 교회사업을 

토의 결정하곤 했다. 중선대회에서는 1941년 4얼 7일부터 10일까지 충남 청양군 화강리 교회에서 “충남 지방회”를 하기로 

계획하고 추진 중이었다. 그런데 조선합회장 되시는 최태현 목사에게서 갑자기 통보가 오기를 “급박해 가는 이 시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교회사업을 구체적으로 의논할 필요가 있어서 대회장회의를 개최 하신다.”고 하는데 날자가 “지방회”가 

개최 되는 날이었다. 중선대회장인 나는 물론 그 지방회를 주재해야 했지만 참가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때 최태현 목사, 조치환목사, 정붕상 목사 그리고 나, 이렇게 네 사람이 모였다. 

정붕상 목사는 당시 남선대회 대회장이었다.

그 중 한 가지는 시조사를 독립기관으로 결정하고 사장을 선출하는 문제로 4월 9일까지 끌었다. 

서울에 있는 합회장이나 중선대회장이 시조사 사장을 겸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택하여 맡기자는 의견이 나와 

회의를 인도하시던 최태현 목사께서 "누구를 시조사 사장으로 하는 것이 좋겠느냐?"라고 물으셨으나 다들 가만히 있기에 

나는 "시국이 이럴 때는 좀 신중한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좋을 것 같으니 유영순 목사가 어떻겠습니까?" 라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최 목사님은 이미 생각하고 계신 분이 있으셨는지 "내 생각에는 김창집 씨가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라고 

말씀하시기에 "아, 목사님 생각에 그 분이 좋다면 그렇게 하도록 하시지요, 그러나 책임을 맡으실 분을 위해 

여기 모인 우리가 회의형식을 갖추어 정식으로 결정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라고 해서 회의형식을 취하여 

나머지 분들도 다 좋다고 결정이 되어 그 분으로 시조사 사장이 되도록 했다. 

그래서 사장을 택하는 회의는 아주 간단히 끝났다. 4월 9일 오전의 일이었다. 

나는 이 회의가 끝나자 예정에는 없었지만 곧 청양으로 갈 차비를 했다. 청양군 화강리 교회에서 열리는 지방회의에는 

조선합회 안식일학교부장 겸 선교회부장인 오영섭 목사, 공주교회 담임사역자인 오석영 전도사, 

중선대회 안식일학교부장 겸 선교부장인 박원실 목사, 충남 당천교회 담임인 이성찬 전도사, 

중선대회 회계겸 서기 유철준 씨 등이 참석하여 도와주고 있었다.


4월 9일 오후,

나는 서둘러 충청남도 청양으로 떠났다. 차에서 내려서 삼십 리를 걸어 밤 8시 반경에 청양군 화강리 교회에 도착하니 

지방회는 이미 끝나고 다 헤어지려고 하는 때이었다. 교인들 수십여 명이 "와! 대회장님이 오셨다!"라고 큰 소리로 환영하여 

서로 인사를 나누는데 얼핏 보니 형사가 와 있었다. 시국이 좋지 못한 때인지라 작은 집회만 있어도 형사들이 내놓고 따라 

다녔다. 많은 회의를 하다보니 형사들의 얼굴도 기억을 할 정도가 되었고 내 기억에 이 형사는 남영우라는 형사였다.

이 지방회는 이미 정해진 순서에 따라 4월 10일 안식일 설교 예배까지 순서대로 다 잘 진행이 되었다. 

그런데 설교가 필하면서 교인들이 "오늘로서 회는 필했지만 대회장이 왔으니 한 번 더 집회를 해서 우리 모두 다 

은혜를 받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의논이 되었다.


1941년 4월 10일 저녁,

약 100여명의 교우가 어린아이들도 많이 데리고 참석하셨기에 누가복음 2장 52절을 가지고 아이들을 위해 먼저 이야기를 

하고, 그 다음에 급박하게 돌아가는 시국을 이야기하면서 마태복음 16장과 누가복음 21장을 가지고 

"때가 가까이 왔으니 모두 잘 준비하도록 하자"라는 설교를 했다. 

이상한 것은 이날 저녁 집회에 남영우 형사가 보이지를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날 저녁 집회는 갑자기 진행이 된 것이라 원래 제출한 집회신청서에는 포함되어 있지가 않았다는 것을 

염두에 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1941년 4월 11일 이른 아침,

교회에서 청양경찰서는 30리 길이나 되며, 또 설교도 밤늦게 끝났는데 벌써 "이 사람들이 집회허가도 없이 불법집회를 하면서 아주 불온(不穩)한 말을 했다"는 보고가 경찰서에 접수되어 4월 11일 이른 아침에 고등계형사 두 명이 나와서 잠에서 깨기도 전에 우리가 자는 방문을 예고도 없이 세차게 열고는 우리를 체포하기 시작했다. 자다가 일어났으니 변소를 가야 하는데 

변소까지도 형사가 따라 붙을 지경이었다. 전부 옷을 입으라 하더니 오영섭 씨, 오석영 씨, 이성찬 씨, 유철준 씨, 박원실 씨, 나까지 6명을 체포하여 청양경찰서로 끌고 갔다. 그리고는 아무 취조도 없이 우선 우리 모두를 감방에 집어넣는 것이 아닌가? 모두들 평생 처음으로 감방에 들어 온 것이다.

그리고는 아침 늦게 어디서 가져 왔는지 설렁탕을 먹으라고 하며 넣어 주었다. 배고픔 앞에는 장사가 없다더니 

돼지고기 설렁탕 국인지도 모르고 모두들 깨끗이 비웠다. 나는 모든 분들이 나 때문에 감방에 왔다는 걱정에 설렁탕을 먹을 생각도 못했다. 우리교회 역사 사십여 년 만에 6명이나 대량으로 검거되어서 청양 경찰서에 수감된 이 일이 

바로 청양 화강리 사건으로 우리교회 역사에 첫 번째 수난사건으로 남아 있게 된다.


감방에는 오영섭 씨, 오석영 씨, 유철준 씨, 박원실 씨가 한 방으로 배치가 되고, 나와 이성찬 씨가 같은 방에 배치되었다. 

감방으로 집어넣을 때 허리띠나 저고리 고름, 버선 매끼 등 모든 끄나풀은 혹시 자살이나 폭력에 사용될까 하여 

다 압수해 버려서 고름 없는 저고리나 허리띠 없는 양복을 입으니 얼마나 부자유스럽고 힘이 들었는지 모른다. 

이 때가 양력 4월 11일이니 봄이라고는 하지만 시멘트 바닥의 감방은 매우 추웠다. 그래서 밤에 잘 때는 이성찬 전도사와 

둘이서 등을 맞대고 온기를 서로 얻어가면서 지냈다. 나는 추운 감방에서 나에 관한 일도 불안하지만 함께 들어온 사람들에 대한 걱정이 더욱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처음 당하는 일인지라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단지 지나간 일들이 하나 둘 생각나면서 나의 갈 길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하며 이번에도 인도하시리라는 생각이, 나를 위로했다.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1904년에 우리 교회가 한국에 들어와서 지금이 1941년이니 우리교회가 한국에 들어온 지 37년째 되는 해이며, 내 나이 15살 때, 즉 1910년에 내가 우리 교회에 들어왔으니 교인이 된지 31년 되는 해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나같이 산중에서 자라난 사람이 이 도리(道理)를 받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살게 된 것도 너무 큰 은혜인데, 도리를 전하러 

다니는 전도사요, 목사요, 대회장이라는 직분까지 맡기신 것을 생각하니 과연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축복하셨음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내 어머님은 배운 것도 없으시지만 아주 현명하게 나를 인도하여 집안에서 공부한 사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글을 배우게 허락해 주시고 또 구학문 배우던 것 다 버리고 신학문, 그것도 모든 가문의 반대에도 불구하시고 

나를 교회학교에서 배울 수 있게 해 주신 은혜 때문이라" 생각하니 새삼 어머님의 은혜가 감사했다. 

또 이만큼 된 것이 아내 되는 이가 모든 일에 대해 적극적으로 도와주었기 때문임을 생각하니 모든 것이 은혜요 

감사할 뿐이었다. 비록 춥고 어두운 감방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나의 생애가 한 가지씩 내 마음에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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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처음으로 제 1회분의 글을 올렸는데 1회분으로는 너무 길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듭니다. 

너무 길다는 생각이 드시면 의견을 주십시오. 의견을 듣고 조정을 하겠습니다.

으견은 제 이멜주소 raychung2004@hotmail.com으로 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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