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설교 한 편

by 김원일 posted Jan 11, 2012 Likes 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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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율(調律)
창세기 1:1-5 마가 1:9-11

 

곽건용 목사

 

생각의 지평

 

옛날 메소포타미아 지역, 지금은 중동의 이라크와 인근 나라들에는 오래 전에 지은 높은 탑들이 남아 있습니다. 높다고 해봐야 사람 키의 배도 되지만 2 5 년쯤 전에는 그것을 짓기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지구랏’(Ziggurat)이라고 부르는 사다리꼴 모양의 거대한 건축물입니다. 건축물은 위로 올라갈수록 면적이 작아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꼭대기가 뾰족하지는 않습니다. 꼭대기가 평평한 사다리꼴을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학자들은 지구랏의 성격을 두고 오랫동안 논쟁해왔는데 아직까지 가장 광범위한 지지를 받는 학설은 그것이 신에게 제사지내기 위해 만든 거대한 제단이라는 학설입니다. 제단을 높이 쌓은 이유는 가능하면 하늘에 가까이 가기 위해서였을 거랍니다.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바벨탑 얘기에도 이와 비슷한 대목이 있습니다. 그들도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탑을 쌓자!”면서 탑을 건축했습니다.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가리켜 사람의자기이해라고 부릅니다. 물론 이것은 개인에 따라서 다르지만 같은 시대에 같은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공통된 자기 이해가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사람의 자기이해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많지만 그것이 과학 지식의 발달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습니다. 중에 특히 우주가 얼마나 광대한지를 알게 이후에 사람의 자기이해에는 변화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사람의 자기 이해는 우주의 광대함을 알기 전과 후로 나눌 있다고까지 말했습니다.

 

저도 믿어지지 않는 사실인데 지금도 미국에는 태어나서 번도 자기가 태어나 살고 있는 () 바깥으로 나가보지 못하고 죽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지구촌시대에 여행수단이 매우 발달한 가장 부강한 나라 미국에 이런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지만 사실이라네요. 그런데 우리 모두는 한국에서 태평양 건너 이곳 미국 땅까지 왔으니 그들보다는 훨씬 광대한 세상을 경험한 셈입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자기 마을을 벗어나본 적이 없는 사람과 직업 때문이든 취미가 여행이어서든 지구촌 방방곡곡을 다니는 사람의 자기이해는 어딘가 달라도 다를 것임은 충분히 짐작할 있습니다. 올해부터 우주관광이 시작된다는 뉴스를 들었습니다. 물론 엄청난 부자들에게만 가능한 얘기겠지만 좌우간 우주관광을 해본 사람은 전과는 자기이해가 달라질 것입니다. 넓은 세상을 보고 경험한 사람의 생각의 지평은 그렇지 않는 사람의 그것과는 어디가 달라도 다르겠지요.

 

우리는 우주가 얼마나 광대한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피부로 느끼기 어렵습니다. 시간이든 공간이든 우주와 관련된 현상을 표현하는 사용되는 숫자 단위가 너무 커서 잡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항성이 태양인데 거기까지의 거리는 1 5천만 킬로미터랍니다. 킬로미터 단위는 단위를 넘어가면 감을 잃습니다. 그런데 우주에는 태양 같은 항성이 수없이 많습니다. 태양계는 은하계에 속해 있는데 은하계를 끝에서 끝까지 가로질러 가려면 빛의 속도로 갔을 10 년이 걸린답니다. 상상도 없이 빠른 빛의 속도로도 10 년이나 쉬지 않고 달려야 은하계 끝에 도달한다는 것이지요. 은하계라는 것이 이렇게 큰데 우주에는 이렇게 은하계 같은 성운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게다가 우주는 지금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팽창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광대한 우주 안에서 작은 별에 불과한 지구, 그리고 지구에 살고 있는 수많은 종류의 생명체들 하나인 사람, 그리고 68억 명이나 되는 사람 하나가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광대한 우주와 비교하기도 멋적을 정도로 미미한 존재입니다. 과학이 발달하기 전에는 우주가 지구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믿었습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었던 것이지요. 그때는 과학지식이 없어서 그랬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심지어 우주가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는 조화와 질서에 대한 이야기

 

적지 않은 사람들이 구약성경이 이와 같이 생각한다고 믿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늦게 잡아도 지금부터 2 5백년 전에 쓰인 창세기 1장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매우 흥미로운 우주관을 보여줍니다. 창세기의 우주관은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흥미로울 있습니다.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셨다. 땅은 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고 아무것도 생기지 않았는데 어둠이 깊은 위에 뒤덮여 있었고 위에 하느님의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셨다.”라는 말은 하느님의 우주 창조 이야기 전체를 요약하는 선언입니다. 구체적인 창조 얘기는 다음에 펼쳐지는데 마디가땅은 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고 아무 것도 생기지 않았다.”라는 말입니다. 저는 우주 탄생에 대한 현재의 과학지식과 성경의 진술을 억지로 조화시키려 하지 않습니다. 이른바창조과학 전혀 과학적이지 않다는 말에 저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하지만 성경의 창조 이야기는 우주 탄생에 대한 현대과학과 묘하게 상응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우주 탄생을 설명하는빅뱅 이론 의하면 우주는 엄청나게 질량이 무엇인가가 대폭발을 일으켜 시간과 공간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창세기가 빅뱅 이론을 없습니다. 하지만땅은 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고 아무 것도 생기지 않았다.” 말과 빅뱅 이론이 묘하게 상응하는 느낌이 듭니다. 우주가 생겨나기 전에는 모양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고 아무 것도 생기지 않은 상태였다니 말입니다.

 

요즘 창세기 1장을 읽고 제가 놀란 까닭은, 얘기가하늘 아니라에서 시작된다는 점입니다. “땅은 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았고......”라고 애기하니 말입니다. 구약성서는하늘어딘가에 하느님이 계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것이 딱히 공간적인 개념은 아닐지라도 하느님은 하늘에서 땅으로 오시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1 2절은땅은 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았고.......”라고 서술합니다.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는 하느님 계시는 하늘이 아니라 사람과 온갖 생명체들이 살아가는 땅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다음에는어둠이 위에 뒤덮여 있었고......”라고 말합니다. 저는 어둠일까? 창세기는 창조 이전의 상태를 어둠이란 말로 표현했을까?’라는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은블랙홀이란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블랙홀이란 질량이 너무 크기 때문에 엄청나게 강한 중력이 모든 것을 안으로 끌어당기기 때문에 아무 것도 빠져나갈 없는 지점을 가리킵니다. 안에 빠지면 아무 것도 빠져나가지 못합니다. 심지어 빛도 빠져나올 없습니다. 창세기 기자가 블랙홀을 염두에 두고어둠이......”라는 말을 쓰진 않았겠지만 저는어둠이란 말에서 블랙홀을 연상했습니다. 어둠이 위를 뒤덮고 있었다는데 하필 라는 표현을 썼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마 창조 이전의 혼돈상태를 표현하는 가장 좋은 이미지가 출렁이는 물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위에하느님의 기운’(원어는하느님의 또는하느님의 바람’[루하 엘로힘]입니다) 휘돌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출렁이는 혼돈의 위를 휘돌고 있는 하느님의 ! 이것이 창세기가 말하는 창조 이전의 상태입니다.

 

하느님의 창조행위는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모든 창조행위가 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 했습니다. 여기서 빛은 태양과 같이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존재로서 빛을 발하는 물체가 아니라 자체를 가리킵니다. 하느님께서 제일 처음에 만드신 것은 빛이었습니다. 빛이 만들어짐으로써 하느님께서는 빛과 어둠을 나누실 있었습니다. 그리고 빛이 하느님 보시기에 좋았다.” 했고 빛을이라고, 어둠을이라고 부르셨다고 했습니다. 우주 창조 날에 일어난 일입니다.

 

우리는 1절에서 5절까지만 읽었지만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 전체를 마디로 요약한다면조화와 질서 됩니다. 혼돈의 상태에서 조화가 탄생했고 만물이 하나씩 질서를 잡아가는 과정이 바로 창세기 1장의 창조이야기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대립이나 갈등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있다면 빛과 어둠의 대조인데 창세기 1장은 둘이 서로 맞서고 있다고, 편이 다른 편을 지배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빛은 낮이고 어둠은 밤입니다. 빛과 어둠이 모두 있어야 하듯이 낮과 또한 그러합니다. 빛은 선이고 어둠은 악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아직은 선도 없고 악도 없습니다. 빛과 어둠 둘이 모두 있어야 비로소 조화가 이뤄지고 질서를 갖습니다. 인간이 자리 잡고 있는 세상은 이렇게 조화로운 세상이고 질서를 갖고 있는 우주입니다.

 


시편 시인이 명상하는 사람의 자리

 

시편을 보면 창조세계 안에서 인간의 자리가 무엇인지를 명상하는 편의 시가 있습니다. 시편 8편과 144편이 그것입니다. 먼저 시편 8편의 시인은당신의 작품, 손수 만드신 하늘과 달아놓으신 달과 별들을 우러러보면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생각해 주시며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보살펴 주십니까?”라고 노래합니다. 시인은 하늘을 우러러 빛나는 달과 별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때 떠오른 생각은 자기가 도대체 무엇이라고 하느님께서 그렇게 생각해주시고 돌보아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시인이 하늘이 얼마나 크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우리가 아는 대로 우주가 그렇게 광대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겠지요.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넓은 하늘과 거기 달려 있는 달과 별들을 보면서 자신의 자리가 얼마나 미미한지, 자기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깨달음은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렇게 미미한 존재인 자신이 하느님의 마음에 그토록 깊이 박혀 있음을 깨닫고 그는 말로 표현할 없이 깊은 감사의 마음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생각해 주시며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보살펴 주십니까?”

 

한편 시편 144편의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야훼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알아주시옵니까? 인간이 무엇이기에 염려해 주시옵니까? 사람은 한낱 숨결에 지나지 않는 , 한평생이래야 지나가는 그림자입니다.” 시편 8편의 시인이공간 관련해서 자신의 위치를 봤다면 144편의 시인은시간 관련해서 스스로의 자리를 보고 있습니다. “야훼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알아주시옵니까? 인간이 무엇이기에 염려해 주시옵니까?”라는 대목은 시편 8편의 노래를 연상시킵니다. 다음에 시인은 사람은 순간에 지나가버리는 숨결이나 그림자와 같다고 노래합니다. 하고 불면 날아가 버리는 바람 같은 것이 사람의 일생이랍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찮은 사람을 도대체 하느님은 알아주시고 무엇 때문에 염려해주시냐는 것입니다. 시편 8편과 144편의 시인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사실 그것은 수도 없고 필요도 없습니다. 역사 이래 노래를 불러온 수많은 사람들 모두가 시편의 저자들이라 있습니다.) 이들은 광대한 우주의 조화와 질서 안에서 사람의 자리를 묵상했던 사람들이고, 그런 가운데서 하느님의 숨결과 특별한 돌봄을 느꼈던 사람입니다.

 


조율하는 삶을 삽시다

 

완벽하게 조율된 악기는 바람소리에도 공명한다고 합니다. 바이올린이 됐든 첼로가 됐든 해금이 됐든 어떤 악기든지 완벽하게 조율이 되면 바람만 불어와도 소리를 낸다는 얘기입니다. 비단 악기만 그럴 같지는 않습니다. 사람의 삶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자연의 질서에, 또는 하느님의 의지에 제대로 조율되어 있다면 그의 삶은 아름다운 음악 소리를 만들어낼 거라고 믿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조율 작년에 듣고 감동받았던 한영애 씨의 노래 제목입니다. 노랫말은 이렇습니다. “알고 있지 꽃들은 따뜻한 오월이면 꽃을 피워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 철새들은 가을하늘 때가되면 날아가야 한다는 것을.” 자연은 자기 자리와 자기 때를 압니다. 그래서 꽃들은 오월에 꽃을 피우고 철새들은 가을 하늘을 뒤덮으며 길을 갑니다. 그런데 사람은 어떻습니까? “무엇이 문제인가 가는 곳도 모르면서 그저 달리고만 있었던 거야 지고지순했던 우리네 마음이 언제부터 진실을 외면해 왔었는지.” 사람도 달립니다, 철새가 날아가듯이. 하지만 사람은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면서,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면서 내달립니다. 한때 지고지순했던 마음이 지금은 진실을 외면하고 탁해졌습니다. 그래서 노래는정다웠던 시냇물이 검게 검게 바다로 가고 드높았던 파란하늘 뿌옇게 뿌옇게 보이질 않으니 마지막 가꾸었던 우리의 사랑도 그렇게 끝이 나는 아닌지라고 걱정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늘을 향해 호소합니다. “잠자는 하늘님이여 이제 그만 일어나요 옛날 하늘빛처럼 조율 한번 해주세요.” 노래는 마지막으로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미움이 사랑으로 분노는 용서로 고립은 위로로 충동이 인내로 모두 함께 손잡는다면 서성대는 외로운 그림자들 편안한 마음 서로 나눌 수 있을 텐데.”

 

우리는 하늘이 얼마나 넓은지 압니다. 우주가 얼마나 광대한지, 시간이 얼마나 장구한지 우리는 과학적으로도 알고 있고 정서적으로도 느끼고 있습니다. 이런 지식과 느낌을 이제는 종교적인 깨달음으로 연결해야 때입니다. 이제는 서로 조율하면서 삽시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과 조율하며 삽시다. 그가 내쉬는 숨결에 나의 악기가 공명하게 합시다. 멀리 있는 사람들과도 조율하며 삽시다. 너무 많이 가지는 것이 죄라는 사실을 깨달으십시오. 너무 많은 것을 누리는 삶은 결코 남과 조율할 없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혼자만 내달리지 말고 천천히 주위를 살펴가면서 남들과 조율하며 사는 2012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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