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목사 회고록 연재)#4

by 정태국 posted Jan 12, 2012 Likes 0 Replies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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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 #4

 

(어머니의 말씀을 따라 결혼 한 것이 잘한 일이라 생각되었다.

1915년 말경이었다. #3의 끝부분입니다.)

 

3. 순안 의명학교 졸업과 문서전도

 

순안 의명학교 5회 졸업이 1917년 3월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1월초에 서울에서 합회총회가 열리게 되었다.

대부분의 졸업반 학생들은 총회에 참석하고 싶은 생각은 간절했지만

우리의 형편으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런데 교회당국에서 3월에 졸업하는 졸업반 학생은

모두 합회총회에 참여하도록 결정이 났다.

그 결의에 따라 1917년 1월, 추운 일기였지만 우리 졸업생 13명은

그 총회에 참여하게 되어 내 일생 처음으로 서울에 가게 되었다.

요새말로 하면 꿈같은 졸업여행이 이루어진 것이다.

많은 기억은 없지만 총회 중에 대총회에서 다니엘스라는 목사가 와서

말씀을 하는데 많은 은혜를 받아 우리 교회에 대한 확신을

새롭게 하게 되었고, 교회를 통해 좋은 경험을 쌓아가며

“하나님의 사업을 내 일생 하겠다!”는 새로운 결심을 하도록

인도해 주는 힘 있는 설교였다.

 

 

1917년 3월(내 기억으로는 3월 21일 이었던 것 같다.),

드디어 13명의 학생이 의명 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제 5회 졸업생들은

김병직-평남 순안

박기석-평남 대천

박제정-경기도 인천

송찬오-평남 평양

유영순-평북 의주

이격원-평남 용강

정동성-평남 강서

정동심-평남 강서

최경선-평남 대동군

김은수-황해도 장연, 여학생

김일세-평남 용강, 여학생

민채희-경기도 용인, 여학생

최경신-함남 원산, 여학생

 

 

여학생 4명과 남자 9명, 13명이 가족처럼 공부하다가 졸업했는데

교회기관에 취직된 사람은 박재경 씨(순안병원 남 간호원으로)와

유영순(시조사 사원)씨 두 명뿐이었다.

그 외에 남자 졸업생은 권서원(지금의 문서전도자)으로

1년간 근무하라는 것이었다.

졸업하면 틀림없이 교회 기관에 일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실망이 컸으나 동생이 졸업을 한다고 100여리나 되는 길을 걸어 와서

졸업식에 참석하신 동로 형님을 뵈오니

실망대신 반갑고 감격된 마음뿐이었다.

내 나이는 21세가 되던 해이다.

졸업 후에 4년간 정들었던 학교를 뒤로 두고

패전한 군인처럼 착잡한 마음으로 집에 왔다.

어머님과 형님들, 친척들, 특히 어린 나이로 출가해 와서

내가 졸업하면 선생으로 가게 되기를 고대하면서

4년여를 기다리던 아내를 볼 면목이 없었다.

앞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참고 기다리기로 다짐했다.

 

 

같은 해 7월에 남 상익 권서 부장으로부터

권서사업(문서전도)에 참여하라는 편지를 받고

남상익 씨를 따라서 평안북도로 문서전도를 위해 떠났다.

이때 같이 졸업한 이격원, 송찬오, 정동성 제씨와

또 강서에 있던 소년 이근욱 씨가 같이 갔다.

나는 여비로 1원 70전 (미화로 1불쯤 될까?)을 가지고 떠났다.

그 당시 우리 민족의 독서열이 말할 수 없이 낮았고,

또 제1차 세계대전 중인지라 경제공황(經濟恐慌)으로 모든 가정이

너무도 힘든 상태였기 때문에 권서사업이란 고생 그 자체였다.

우리 일행은 주님께서 우리를 도울 것이라는 소박한 믿음을 갖고

안주, 박천, 연변, 휘천, 강계로 들어가면서 정성껏 문서 전도를 했다.

 

 

1917년 음력 8월 15일 추석이 왔다.

이날은 마침 안식일이었고 우리 일행은 강계읍 어떤 여관에서

안식일 예배를 드렸다. 예배 후 어느 분이 의견을 내었다.

“자! 오늘 추석이기도 하고 마침 쉬는 날이니

우리 산딸기나 따먹으러 나가 보세들!”

“와! 좋소! 오랜만에 외지에서 산딸기 맛이나 봅시다!”

모두 신이 나서 당장 나서기로 했다.

“저어..오늘 안식일이기도 하고 저는 다른데 갈 일이 있는데요...”

“아. 안식일이니까 그냥 소풍가는 기분으로 다들 감세..

그럼 동심이는 가볼 데를 가보게!”

내가 좀 고지식했는지는 모르지만 안식일에 소풍 겸 산딸기를

따먹으러 가는 것도 싫었지만 실은 누구를 꼭 만나야 했다.

몇 날 전에 이곳 우편국사무원이 나에게 매우 친절하기에

곧 사귀게 되었었다. 그 분을 오늘 만나기로 마음에 결정한 터라

우편국으로 발길을 향했다. 토요일은 반공일이라

오후에는 우편국 사무원들이 쉬는 날인데도

나를 반가이 맞아 주어 우리는 해가 지기까지

교회이야기와 학교 이야기를 하다 여관으로 돌아 왔다. 

그런데 이격원 형제가 여관 아랫목에서 신음하고 누워있었다.

“아니 격원이! 이게 웬일인가? 멀쩡하던 사람이..

산딸기 먹고 탈이라도 났는가?”

대답 없이 이 격원 형제는 신음만 하고 있었다.

누군가 대신 대답을 해 주었다.

“산딸기 따먹으러 갔다가 뱀에게 물렸네..그것도 독사에게!”

“아니 그러면 빨리 치료를 해야 되지 않겠나? 독이 퍼지면 어쩌지?”

“사람들이 독사에게 물린 데는 돼지고기가 약이라 해서

돼지 새끼 한 마리를 사서 썼네!”

이불을 들추어보니 독이 올라 발등으로부터 종아리까지

퉁퉁 부어 있는데 의사도 없고 약이라고는 돼지 새끼를 사서

내장을 긁어내고 그것을 독사에게 물린 발에 붙이고 있었다.

격원이는 “다리가 터지는 것 같다.”고 밤새 신음을 했다.

우리도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며 격원이를 위해 기도를 드렸다.


다음날, 음력 8월16일 아침,

지도자이신 남상익 선생은 우리들을 다 모이라 했다.

“자! 나는 이격원 형제의 치료를 위해 여기 강계에 남겠네!

그러니 네 사람은 여기를 떠나 우연 읍과 초산 등지로 다니면서

권서를 계속 하게!”

“남선생님! 독사에 물린 친구를 두고 어찌 떠나겠습니까?

우리 다 남아서 있겠습니다. 우연 읍이나 초산은

한번 도 가 본적이 없는 곳입니다.”

“초행길인줄은 나도 아네만 여기 다 남아서 무엇을 하겠다는 게야?

여기 일은 나한테 맡기고 빨리들 떠나서

친구 격원이를 위해서라도 열심히 권서들 하게!”

남상익 선생의 말씀은 거역할 수가 없을 만큼 진지 하셨다.

나와 정동성, 송찬오, 이근욱 네 사람은 신음하는 친구를 뒤로하고

평생 처음 가는 우연 읍을 향해 걸어서 떠났다.

교통수단이라고는 걷는 길밖에는 없었다.

반나절 가까이 걷다보니 배는 고픈데 추석 다음날이라

어디에도 먹을 것을 파는 곳이 없었다.

배고픔을 참고 걷다 보니 길옆으로 흐르는 시냇물에

기러기 너 댓 마리가 천연스럽게 헤엄을 치며 놀고 있었다.

우리는 일제히 기러기를 향해 돌을 던지니

한 마리가 누군가의 돌에 맞아 날지를 못하게 되어

그 기러기를 잡아 동네 이장 집을 찾아가 사정을 이야기하고

기러기를 내어 주니 점심을 잘해 주었다.

 

 

우연읍(邑)이 이렇게 먼 길인 줄은 아무도 몰랐다.

이날 해가 저물어 우연읍 뒷산을 넘게 되었는데

웬 산짐승 떼가 가까이 오는 것 같아서 우리들은

그 짐승들을 향해 돌팔매질을 해댔다.

저녁 늦게 여관에 들어가 손님들과 이야기 중에

우리가 짐승들에게 돌 던진 이야기를 했더니

사람들은 크게 놀라하며 ‘당신들이 사냥꾼이냐?

아니면 무엇 하는 사람들이기에 그리 겁도 없느냐“ 고 야단이었다.

그 사람들의 설명인즉 뒷산에 있는 짐승의 떼는

산돼지 무리인데 돌을 안 던져도 마구 사람에게 덤벼들어

크게 상처를 내곤 해서 어두워지면 그 길을 다니는 사람이 없는데

당신들은 돌을 던져 짐승들의 화를 돋워 놓고도 무사했으니

참 재수가 좋은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이 재수가 좋은 것이 아님을 알았다.

이사야 43장 1-3절에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함께 하신 것을 알고 감사를 드렸다.

 

우연읍과 초산지방의 권서는 유난히 더 어려웠다.

하루는 네 사람이 하루 종일 권서 했으나 숙박비도 안 되어

사람들에게 그 지방유지 댁을 물었더니 면장 댁을 알려 주었다.

당시의 풍속은 길손들이 그 지방 유지의 집에 가서 하룻밤 신세를

지고 가는 아름다운 풍속이 있었다. 그래서 이 면장 댁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고 다음날 아침 떠나려 하니

그 면장이 나와서 “밥값을 안내고 가려 한다.”고

노발대발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면장 댁에서는

이만한 정도의 손님은 그냥 대접하는 아름다운 풍속이기에

여기도 그럴 줄 생각했다"고 말했으나 그의 말이

점점 거칠어지면서 마치 싸움이라도 할 기세이기에

주머니를 털어 식사대를 계산하여 주었다.

인심이 고약하다고 생각되었다.

 

 

온 종일 기분이 풀리지 않은 채로 권서를 하다가

이날 밤은 이 지역 이장 댁에서 1박하며 이장에게

오늘 아침에 면장 댁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한 즉

이장 말씀이 “이 지방에서도 웬만큼 사는 댁에서는

손님에게 식사대를 받는 일이 없다.”고 하며 오히려 미안해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그 면장은 얼마 전에 서울 공진회에

구경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어떤 여관에서 밥을 시켜 먹다가

남긴 밥값을 안 내겠다고 우기며 다툰 사람이라.”고 웃지 못 할

이야기를 해주면서 우리들에게만 그러한 것이 아니니

“너무 섭섭해 말라.”고 위로해 주었다.

이 이장 댁에서는 “밥값을 받지 않겠다.” 함으로

시조 월보 2부를 드렸더니 아주 감사히 받는 것이었다.

 

 

우연, 초산은 압록강 변 7개 읍중에 포함된 지역이었다.

시간이 좀 지나자 어느덧 진눈 개비가 내리기를 시작하며

추워지기 시작했다. 입고 간 옷이라곤 여름의복 뿐이니

따뜻한 남쪽을 향하여 차츰 차츰 고향 쪽으로 발걸음이 향했다.

나한테는 처음으로 객지에 나왔다가

2-3개월 만에 집으로 돌아가는데 빈손으로 들어가기가 뭣해서

기념물로 샀다는 것이 작은 형님의 방한모자 하나와

아내가 쓸 바느질가위 하나를 사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와서 계산하여 보니 남은 돈이라는 것이 35전이었다.

집을 떠날 때 가지고 나갔던 것이 1원 70전 이었으니

결국 1원 35전을 손해를 본 셈이었다.

그리고 남은 돈도 없었지만 나를 키워주신 어머니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사오지 못한 것이 한없이 죄송스러웠다.

그러나 어머니는 조금도 서운해 하시는 기색을 보이시지 않으셨다.

철없던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의 한 면이었을 것이다.

돈은 벌지를 못했으나 처음해본 권서사업은 나에게 많은 교훈을 남겨주었다.

 

 

4. 소학교 (희명학교) 교사

 

평안북도 몇 고을에서 권서를 마치고 돌아와서

나의 집 근처에서도 권서를 하였다.

그 것은 가족 보기가 미안하기도 하고 또

시간을 허송하느니 보다 이렇게라도

하나님의 사업을 해야 한다는 단순한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하루는 누가 나에게 엽서를 한 장 전해주었다.

“이 엽서 얼마 전에 우체부가 주라고 했는데

이제 생각이 나서 가져 왔는데요!”

“아! 감사해요. 그런데, 아니 이렇게 오래 되었는데

이제 전해 주시 다니오?!”

“미안합니다. 너무 바빠서 고만 깜빡해서...”

순안 의명학교 교장 이희만 선생님의 엽서였다.

순안의명 소학교 교사 자리가 하나 났으니

시급히 오라는 것이었는데 이렇게 오래 가지고 있다가

이제야 주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나의 마음은 순안에 가기만 하면 선생노릇을 하게 될 것이라는

흐뭇한 마음에 동로 형님에게로 달려갔다.

“형님! 동로 형님! 순안 의명소학교에서 저보고 와서 선생을 하랍니다!”

“아니 무에야! 그거 정말 반갑구나. 정말 대견하구나!”

“그럼 내일 순안으로 가보겠습니다.”

“그럼, 그럼! 내가 같이 가 줄 터이니 함께 가자. 정말 흐뭇하구나!”

그 이튿날 나는 형님과 함께 순안으로 가는 길에 친정에 가있는

아내를 찾아가서 순안 의명소학교 선생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니

정말로 기뻐했다. 급하게 순안에 당도하여

엽서를 보내 주신 이희만 교장 선생님을 찾아갔다.

“교장 선생님! 그간 안녕 하셨습니까?

엽서를 보내 주셔서 엽서를 받자 곧 이렇게 달려 왔습니다.”

“아니 그 엽서 보낸 지가 언젠데! 그간 기다리다

더 기다릴 수가 없어 다른 사람을 이미 채용했소!”

하늘이 무너지는 듯이 섭섭한 심정은 말로 표현 할 수가 없었다.



나를 데리고 갔던 형님도 무척 섭섭하신 모양인지

돌아오면서 별 말씀이 없으셨다. 그 이튿날 집으로 돌아오면서

아내가 실망을 할까봐 들리지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 왔다.

이미 음력 10월경이라 날씨가 무척 추워졌지만

형님을 더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무슨 일이나

닥치는 대로 적극적으로 도와드렸다.

그리고 친정에 가있는 나의 아내도 찾아가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아내는 오히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그 동안 공부하고 권서 한다고

객지생활만 하다가 이제 집에 돌아와 이렇게 같이 지나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어요!”하며 나를 위로했다.

나이는 어렸지만 실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나를 위로해 주는

말을 해 주는 아내의 마음이 고맙기도 하고 또 안심도 되었다.

1918년 3월 하순경,

이희만 교장께서 다시 편지를 보내셨다.

내 집에서 한 40여리 떨어진 강서군 성태면 대마리에 있는

희명학교에 교사자리가 생겼으니 그리로 가라는 것이었다.

이희만 교장은 우리 교회본부의 교육부서기를 겸했던 까닭에

이런 교사임명 편지를 하셨다.

이번에도 동로형님이 희명학교까지 동행해 주셨다.

 

 

이 학교의 교장은 이희만 교장이 겸직을 하고 계셨고

나의 동창선배인 이근팔 씨가 주무교사로 일하고 계셨다.

그는 나보다 나이가 한 달 가량 어린데 나의 선배이었다.

이근팔 씨는 약 2년 전에 부임해서 부인과 딸 진복 양,

아들 성찬 군, 두 자녀를 데리고 재미있게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이분 댁에서 기거하면서 4년제인 이 학교에서

두 학급을 맡아서 일했다. 나의 새로운 시작이었다.

4월 한 달 동안 열심히 일했다.

매달 25일 경에 사역자의 월급이 오는데,

설명서를 보니 내게 매달 7원을 주는데

십일금을 미리 감한 6원 30전이 월급 액수였다.

내가 거하고 있는 이 선생의 댁의 한 달 생활비를

사람 수대로 나누었는데, 나와 이 선생 부부,

아이 둘은 한사람으로 쳐서 4등분하여 내 몫이 5원 70전이었다.

내 월급에서 십일금과 생활비를 빼니 60전이 남았다.

교회에 연금 내기에도 부족한 금액이었다.

이런 어려운 형편 가운데서도 일하는

그 재미란 말할 수 없이 좋았다.

내 월급이 적어서 그렇다는 말이지,

나를 가족처럼 대해주면서 함께 지내게 해 주신

이근팔 씨 가족에게는 감사한 마음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2개월 남짓 지난 6월 어느 날,

학생들이 쉬는 시간에 교실밖에 나갔다 들어오면서

“학교에 어떤 젊은 부인이 들어왔다.”기에 나가보니

천만뜻밖에도 나의 아내였다.

나의 아내는 시집온 지 5년 만에 (실은 태어나서 처음이라 했다)

처음으로 혼자 집을 떠나본 것인데 그것도 처음 와보는 외지에서

나를 만나게 된 것이 너무나 대견스럽고 기뻤던 모양이다.

이때 나의 아내는 임신 5개월의 몸으로

남편과 같이 있고 싶다는 생각에서 나를 찾아온 것인데

나는 봉급이 나 혼자 살기도 태부족이니 어쩌면 좋을까 하고

근심이 태산같이 밀려 왔다. 생각다 못해 아내를

다시 돌려보내면서 여름 방학까지만 기다리라고 달래었다.

임신한 몸으로 나를 남편이라고 먼 길을 처음 찾아온 아내에게

돈 한 푼도 못 주어 보내는 서글픈 심정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아내를 돌려보내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분가하여 생활하는 것이 아내의 바람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또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드디어 내가 철이 들기 시작을 했던가 보다.

그러나 7원의 월급을 가지고는 도저히 불가능 한 일이었다.

 

 

선배 몇 분과 의논을 하니 그 분들 말씀이

“부부가 함께 살림을 하면서 사역을 하면

월급을 올려 줄 것”이라는, 내게는 새로운 소식을 알려주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분가하여 아내와 함께 살면서

사역을 해야 되겠다는 무모한 배짱을 갖게 되었다.

여름방학이 되었다.

거의 4개월간이나 일을 했는데 돈 한 푼 없이

빈손으로 집으로 돌아가자니 참 막막하였다.

그런데 무슨 배짱인지 학교 근방에 작은 초가(草家) 한 채를

주인이 팔려고 내어놓았다는 말을 듣고 돈 한 푼 없으면서도

그 집을 사고 싶어 집주인을 찾아갔다. 주인을 만나

선금이나 잔금을 방학이 끝나고 와서 함께 내겠다고 했더니,

내가 희명학교 선생이라는 말에 그리하라고 했다.

그 당시 인심들이 그렇게 후했다.

몇 달 동안 일했는데 돈이 한 푼도 없으니

가족을 만나 볼 염치가 없지만 집으로 돌아 왔다.

그래도 어머님, 형님, 형수님 등 모든 집안사람들이 내가 선생으로

일하다 돌아 왔다고 얼마나 흐뭇해하시는지 나는 좀 안심이 되었고

“이런 것이 가족의 사랑이구나!” 하고 생각이 되었다.

몇 날이 지난 후에 어머님과 형님에게 조심스럽게 분가문제를 제의하였다.

“어머님, 형님, 제가 이제는 선생 노릇을 하고 있고 아내도 임신해서

해산달이 가까우니 학교 가까운 데로 분가를 하면 어떠할까요?”하고

제안을 하자 형님이 일언지하에 반대하셨다.

“유복아! 네 뜻은 일겠지만 농사철에는

한사람 몫이 얼마나 큰지는 잘 알지 않냐?

네가 분가한다는 생각은 안하고 이미 농사계획을 다 해 놓았는데

분가를 한다면 어쩌란 말이냐? 나는 반대한다!”

나는 형님의 심정을 얼마든지 이해 할 수 있었다.

“형님! 형님 마음 저도 잘 알고 있고

그 동안 저를 위해 얼마나 잘 해 주셨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 집사람은 분가를 안 해도 조금 있으면 해산달이 되어

오히려 짐만 되고 앞으로 농사일도 거든다는 것이 힘들겠으니 하는 말입니다.”

“하긴 유복이 말도 일리가 있다!”

어머님이 나를 거들자 형님도 어머니 말씀을 듣고는

내 말에 동의를 해 주셨다.

“어머님, 형님! 감사합니다. 개학이 될 때까지 제가 힘껏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그리고 집사람은 학교가 개학하는 9월에 데리고 가겠습니다.”

분가의 동의를 얻기는 했지만 월급 7원이 문제였다.



선배들의 의견을 따라 나는 교회본부 앞으로

오는 9월부터 아내를 데리고 근무지로 간다는 서신을 보내었다.

얼마 후, 아내를 데리고 근무지로 가면

매달 5원씩을 더 주겠다는 답신을 받았다.

우리 부부는 물론, 어머님과 형님도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안심했다.

7원으로는 분가하여 살림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8월 하순이 되어 아내를 데리고 근무지로 떠날 시간이 되자

어머니가 말씀을 하셨다.

“유복아. 네가 분가한다니 내가 학교까지 따라 갔다 오겠다.”

“아니 어머니!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여기 일도 바쁘신 데 걱정 마세요!”

“아니다! 그래도 네가 선생이 되어 분가한다니

내가 가서 너희가 살집이라도 자그마한 것을 사주고 싶고

여기 살림도 조금 가지고 가야겠다. 둘째도 같이 갔다 오자!”

“네. 어머님! 그러지 않아도 제가 갔다 오려고 했습니다.”

“어머님, 형님! 너무 너무 고맙습니다!”

아무것도 해 드린 것이 없어도 나를 이렇게 사랑하는

어머니와 형님의 사랑에 목이 메었다.

“하나님의 사랑도 이런 것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부부가 떠나는 날, 어머니와 형님은 팥과 좁쌀 몇 말, 솥과

몇 가지 살림을 소에다가 싣고 희명학교까지 우리와 함께 가셨다.

그리고 계약금도 없이 배짱과 구두로만 계약된 작은 집을 사서

이사하게 해 주셨다. 이때의 감격은

수 십 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비록 유복자이지만 형님과 어머님의 크신 사랑을

너무도 많이 받았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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