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갈길 다가도록(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6

by 정태국 posted Jan 17, 2012 Likes 0 Replies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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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6

 

(같은 해 6, 서선대회에서 목회부 일을 하라고 나를 불렀다

섭섭해 하는 홍명학교 학생들과 교우들을 뒤로하고 정들었던 철도섬을 떠났다

이번에도 내 후임으로 고치주 선생이 오시게 되었다. 회고록 #5의 끝부분)

 

 

3 . 목양(牧羊)의 길로 인도하신 하나님

 

 

1. 목회사업의 시작-좌동(佐洞)

 

1923 6,

순안에서 열린 합회총회에서 스미스 목사가 서선대회장이 되면서

나를 대회 목회부로 부르기에 대회로 가니 보직은 아직 없는데

나를 조용히 불러서 이야기했다.

정동심 형제! 다 아는 대로 이번에 내가 서선 대회장이 되었는데

정동심 형제가 목회부에서 일을 해야 하겠소!”

스미스 목사님! 제가 그간 교사로 일 해온 것을 잘 아시면서

왜 갑자기 목회일을 하라 하십니까? 특별한 이유가 아니면

보직도 없는 것 같은데 그냥 교사로 일하게 해주십시오.

정 형제! 서선지방에서 좀 새로운 각도의 목회 일을

추진해 보려고 계획 중이요.

새로운 각도의 일이라니요?”

그것은 다른 목회자들도 함께 의논할 터이니

정 형제는 목회 일할 준비를 하시오!

마음에 준비도 없이, 일할 교회가 정해진 곳도 없이,

하루아침에 교사에서 목회부로 부름을 받게 된 것도

어리둥절한데 알지도 못하는 새로운 각도의 일을 하라니 난감했다.

그러나 당시에 내 생각은 “교회 책임자들의 말씀이

당장 이해가 안 되도 따르겠다.”라는 것이었다.

 

 

대회장 스미스 목사는 곧 목회부에서 일하는

사역자들을 불러놓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동안 목회자들은 교회가 있거나 교통이 편한 곳에서만

일했습니다. 이제는 사역자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에서

일정기간 목회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생각에 제일 어렵다는 지역을 택하면

나도 그곳으로 사역자와 같이 가서

처음 일주일을 함께 일하겠소.!

대회장 스스로 제일 힘든 곳에서 사역자와 함께 가서

일한다는데 누가 반대를 할 것인가?

, 그러면 여러분, 서선대회 지역 내에

가장 어려운 지역이 어디라고 생각이 됩니까?

이렇게 의논된 곳이 교인 세 명이 있다는

평안북도 옥산면(玉山面) 좌골(좌동-佐洞)이었다.

 

 

그러면 이곳에 이번 새로 목회를 시작하는

정동심 형제가 열심을 내어 시작해 보기 바랍니다.

학교 일을 열심히 하는 나를 불러, 새로 목회를 시작하라 하시고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목회경험이 전무(全無)한 나에게

제일 힘들다고 결론이 난 좌동을 의논도 없이 맡기니 기가 막혔다.

글쎄, 목회신참인 나의 태도를 보기 위함이었는지,

아니면 햇병아리 목회자인 나를 보내겠다고 하시고는

다른 목회자의 반응을 보시려는 것인지는 몰라도

정말 일방적인 결정이었다. 대답도 못하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어느 분이셨는지는 기억이 잘 안되지만

한 사역자가 대회장에게 이의를 제기 하였다.

스미스 목사님! 가장 어려운 지역에

목회초년생을 가라고 하는 것은 무리한 일 같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러면 누구를 결정해서 보내면 될까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을 하셨다. 그러나 어떤분이

목사님! 차라리 성경방식으로 공평하게 제비를 뽑아

그분을 보내는 것이 어떻습니까?”라고 제안을 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그렇게 합시다!”하며

제비를 뽑아 결정하자는 의견에 대부분 찬성했다.

좋습니다. 그럼 지금 곧 제비를 뽑아 결정해 봅시다.”하며

대회장도 동의하였다.

 

 

아마 대회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제비뽑아 사역자를 정하는 일이 시행되었다.

그 결과 좌골에 가는 사역자로 내가 제비에 뽑히는 것이 아닌가?

, 제비를 뽑아 보아도 정동심 형제가 좌골에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이 분명합니다. 나도 함께 동행 할 터이니

곧 가도록 준비하시오! 좌골에도 그리 연락을 하겠소!

한동안 그곳에 가서 목회를 한다는 것은

가족과도 생이별을 해야 한다는 말과 같았다.

목사님! 저도 이의는 없습니다만 제 가족을

고향에 데려다 놓고 떠나게 허락해 주십시오!

좋습니다. 곧 고향으로 갔다가 순안으로 다시 오시오

 

 

한창 더운 7월에 식구들을 고향에 데려다 놓고

전무후무한 제비뽑기로 결정된 사역자인 나는

좌동(좌골)으로 가기위해 고향을 떠나 먼저 순안으로 떠났다.

약속대로 대회장 스미스 목사를 순안서 만나 경의선을 타고

백마역에 내려 구의주로 가서 일박을 한 후에

구의주에서 청성진까지는 자동차로 갔다.

청성진에서 좌동까지는 걷는 길 밖에는 없었다.

초행길에, 또 평생 처음 미국 선교사를 모셔야 되니

도대체 보통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어찌 할 바를 몰라 당황하는 나에게 대회장은

어디 가서 짐 싣고 갈 말이나 한 마리 얻어 오라하시었다.

처음 와보는 곳이라 어디서 말을 구할지를 몰라

청성진 경찰관 주재소를 찾았다.

 

삼일운동 이후인데다 이곳 청성진은 국경지대인 까닭에

더욱 삼엄하게 무장한 경관들이 파수를 보고 있었다.

금방 이유도 없이 잡힐 것만 같은 공포심이 일어났으나

마음속으로 기도하면서 주재소에 들어가 내가 온 사정을 말한즉

의외로 모든 것을 자세히 가르쳐 주었다.

여기서 좌동까지 50리가 되며 말과 말꾼을 세내려면

삯이 4원 가량 된다.”는 것이었다. 이미 오후 1시경인데,

시골이라 점심을 먹을 곳도, 먹을 만한 음식도 없었다.

그런데 말꾼이 절름발이 말을 가지고 오면서

아무 문제가 없다고 우기는 것이 아닌가?

사정사정해서 다른 말을 가져와 우리의 행장을 싣고

좌골로 가는 방향도 모르니 말꾼만 따라가는데 길은 멀고

배는 어찌나 고픈지 대회장이 좌골에 가서 앞으로 사용하려고

준비한 음식을 둘이 걸어가면서 거의 다 먹어 버렸다.

 

 

얼마나 길이 험한지 목적지에 도착하니

이미 밤 12시가 되었는데도 얼마 안 되는 신자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나 반갑고 감사했는지....

서양 사람을 평생 처음 보는지라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이

대회장에게 허리를 굽혀 절들을 하니 스미스 목사는

어떻게 처신을 할지 몰라 나만 쳐다보니 나도 난감했다.

 

 

한 밤중에 저녁상을 받고 보니 좌골은 깊은 산중이라

강냉이밥에 갓김치와 토장(土醬)을 차려왔다.

스미스 목사는 어떤 선교사 보다 유달리 우리식사에

익숙지 못한지라 한술도 못 드시는데 보기가 너무도 딱했다.

이튿날도 마찬가지였다. 스미스 목사가 준비해 가지고 온 음식은

길에서 다 먹어버렸고 이 벽촌에서 서양선교사가 먹을 만한 음식은

구할 길이 없으니 답답하기만 했다.

 

 

그래도 방문은 시작을 해야 하는데 이곳은 깊은 산중이라

한 십리는 가야만 인가가 한 집씩 있는 곳이었다.

우리가 묵은 교인 집에서 알아보니 “동편으로 산을 하나 넘으면

우리 신자의 집이 하나 있다.”해서 먼 길을 걸어서 그 집을 찾으니

한 자매가 반가이 영접을 한다.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려 하니

그 자매가 점심을 잡숫고 가라고 간곡히 권하기에 앉았더니

역시 강냉이와 좁쌀 섞은 밥에 갓 김치와 고추장을 내왔다.

스미스 목사도 이제는 워낙 배가 고프셨는지 밥을 한 숟가락

입에 넣고는 말릴 사이도 없이 고추장 한 숟가락을 가득 떠서

입으로 넣는 것이 아닌가?

고추장을 무슨 과일 쨈 정도로 생각하신 것이 틀림이 없었다.

웬걸, 곧 입을 딱 벌리고 어쩔 줄을 몰라 하시기에

체면이고 뭐고 할 것이 없이 빨리 밥을 뱉으라고 하고

물을 마시게 했다. 내가 맛을 보아도 얼마나 매운 고추장이었데......

얼마나 혼이 나셨을까?!!

돌아 올 때는 길가에 열린 산딸기를 씻지도 않고

얼마나 정신없이 따서 맛있게 잡수시는지

말릴 엄두가 나지를 않았다.

 

 

이 지역은 모든 길이 오솔길이었는데 대회장을 앞세우고

나는 뒤따라가다가 그분을 어른 대접 한다고 한문 글귀를 사용하여

어른은 앞서가고 젊은이는 뒤에 떨어져 간다.”는 말이 있다고 했더니

무슨 오해를 하셨는지 대뜸 “당신이 앞서시오!

나는 어른 될 맘이 없소!”하는 것이었다.

어른을 앞서게 해야 예의가 된다는 한문 문구를 말해놓고는

어린 내가 앞서 가자니 내 입장이 참 곤란했다.

우물이 있는 곳에 와서 대회장을 앞세우기 위해 물을

마시는 척하며 비켜서 있으면 목사님도 꼭 서서 기다렸다.

할 수없이 앞서 가시기를 권했지만 그럴 수 없다고 하여

결국 숙소까지 내가 앞서오는 곤란을 당했다.

성경에 “경우에 합당한 말을 은쟁반에 금 사과와 같다”는 말씀이 있는데,

일이 반대로 되어 곤혹스러운 하루가 되었다.

과연 성경이 진리라는 것을 재삼 느꼈다.

 

 

숙소에 돌아와 스미스 목사님께 피곤하니 일찍 자자고 했다.

잠자리라는 것이 산촌 시골이라 흙 온돌방에 피 나무 껍질로 만든

삿자리를 깔아 놓은 것이었다. 거기다가 빈대까지 있으니

스미스 목사의 고통은 말할 수가 없었다.

자리에 눕자 산딸기 덕분인지 스미스 목사의 배 끓는 소리가

시작하는데 조금 후에는 우뢰치는 소리가 나면서

당장 무슨 일이 날 것만 같아 딱해 보여서 말씀 드렸다.

목사님! 대회에 할 일도 많을 터이니

내일 아침에는 대회로 돌아가시지요?

아니 정말 그래도 되겠소?”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기다렸다는 듯이

반색을 하시면서 되 물으셨다.

그럼요! 목사님이 힘들어하시니까 저도 일하기 힘드니

걱정 말고 먼저 돌아가십시오!

! 그래요? 그러면 아침이 되는대로 나 먼저 돌아가겠소!”

목사님, 그러면 저는 여기서 얼마나 있다가 갈까요?”

, 정동심 형제도 일주일만 있다가 돌아오시오!”

감사합니다, 목사님. 우리가 돈도 많이 쓰고

고생도 많이 했으니 한달은 일하겠습니다.

고맙소! 고맙소. 그렇게 하도록 하시오!”

 

 

한 달을 남아서 일하겠다고 했더니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다음날, 배탈까지 나신 분이 먼 길을 도보로 가시게 할 수가 없어

여기저기 수소문하여 결국 당나귀를 세냈는데

목사님이 나귀를 타시니 발이 땅에 닿고도 남는 것이었다.

배탈 나신 외국인 혼자 백마역까지 70리 길에,

또 순안 까지 가셔야 되는데 걱정이 되어 함께 간절히 기도드리고

가시는 대로 소식을 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이 삼일 후에 순안까지 무사히 가셨다는 소식이 왔다.

막상 산간벽지(山間僻地)에 혼자 남아 외롭고 힘들었지만,

이곳 신자들은 처음 맞이한 사역자라 하여 여러모로

나를 위로해 주고 도와주어 감사했다. 깊은 산중이라

때로는 노루나 짐승을 잡아 그 고기를 먹으라고 가져오기도 했다.

나도 처음 시작한 목회 일이라 밤낮으로 열심히 방문하고 전도하여

한 달쯤 되자 신자들이 많이 늘었다. 깊은 산골이라 공기도 맑고

냇가에 흐르는 물도 맑았다. 그래서 이른 아침마다 냇가로

나가곤 했는데 이상하게도 냇가에는 일본말로 지까다비 라고 하던

신발 자국이 여기저기 있었다. 신자들에게 물어 보니 독립군과

그들을 뒤따르는 경관들의 발자국이라고 한다. 독립군은 때로는

동네의 청년들을 강제로 납치하여 간다는 것이었다.

나도 27세의 청년이라 슬그머니 겁도 났으나 내색은 못했다.

 

 

한 달이 지나니 1주일만 일하라던 대회본부에서 한 달만

더 일하라는 연락이 왔다. 그래서 일 개월을 더 지나기로 했다.

그런데 내 월급 날자가 지나도 오지를 않아 알아보니

큰비로 강물이 많이 불어 우체부가 강물을 건너다

우편물이 물에 떠내려갔다는 것이었다. 내 월급봉투도

함께 떠내려 간 것이 확실했다. 여기는 산간벽지라

우편배달부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오곤 했다.

강물이 줄어든 후에 배달부가 왔기에 나는 “전번 비에

강물이 불어 배달부가 강을 건너다가 나의 우편물들을

잃어버린 듯하니 사실을 알아보아 달라”는

우편 통신사고라는 것을 우편국에 보냈다.

 

 

얼마 후 우편국에서는 그때의 배달부를 알아내어

나에게로 보냈는데 거의 해 질 무렵에 왔다.

당신이 우편 통신 사고를 보낸 정동심이가 맞소?”

, 그런데요! 제 편지들을 찾았나요?”

여기에 그때 우편물들을 다 받았다고 쓰고 당신 도장을 찍으시오!”

아니, 받지도 않은 우편물을 어떻게 받았다고 증명서에

도장을 찍는단 말입니까? 거기엔 내 월급이 있었단 말이오,

나는 받았다는 증명서에 도장을 찍지 못합니다.

이봐요! 이번에 그 증명서가 없으면 나는 면직된단 말이요, 알겠소?

웬 말이 그리 많소?

그 큰 덩치에 험상궂은 얼굴을 하며 큰 소리를 치는지라 황당하였다.

그 뿐이 아니었다.

그리고 밤이 늦었으니 오늘밤은 당신 방에서 자고 가야겠소!

밤새 잘 생각해 보시오!

내게 허락도 없이 그냥 방에 들어와 눕는 것이었다.

이 벽촌에서 험상궂은 우체부로부터 변을 당하는 것이 아닌가? 해서

밤새 뜬눈으로 기도하며 보냈는데 아무 탈 없이 다음 날 떠나갔다.

당시에 관청에서 일한다고 하면 우편국 말단 직원까지도

이렇게 소박한 사람들에게 군림하는 것을 실지로 체험했다.

이럭저럭 또 한 달이 되어오기에 좌골에서 나가겠다고

대회에 편지를 내었더니 또 한 달만 연장하라는 명령이 왔다.

나는 대회의 명령을 따르겠다는 마음으로 또 한 달을 열심히 일했다.


 

2. 수자골과 군모루

 

여기 온지 석 달쯤 되는 어느 안식일,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던 신자들이 “어떤 목사님이 오시고 있다”고 전해주었다.

뜻밖의 일이라 의아해서 나가보니 영유교회에서 시무하는

나의 12촌 형님 정동필 전도사가 오셨기에 반갑게 만나

이 벽지에는 웬 일이냐고 물은즉이 벽촌에서

수고하는 자네를 찾아보고 싶어 왔네!”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별말씀 없이 주무시고 이튿날 아침,

돌아가신다는 것이었다. 불쑥 왔다 그냥 가시는 것도 이상했지만

젊은 때라 깊은 생각 없이, 대회가 두 번이나 연장한 3개월도

끝났기에 나도 함께 가고 싶어 근처에 사시는 몇 신자 분에게만

말씀을 드리니 얼마나 섭섭해 하는지 몹시도 미안했다.

 

 

정동필 형님과 칠 십리 길을 걸어서 경의선 백마역을 거쳐

신의주로 가서 하룻밤 쉬고 이튿날 압록강을 건너

가보고 싶던 중국 땅 안동현에 이르렀다.

안동현 시가지를 구경하면서 중국과 러시아의 명물이라는

멋진 탄자(담요)하나를 샀다. 이렇게 함께 다니면서도

동필 형님은 나를 방문한 사연을 말씀하지 않더니,

경의선 기차를 타고 순안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음 어파역에서 내려 자기가 맡고 있는 영유교회로 가서

하루를 묵고 가라고 했다. 나는 예감이 이상하여

그 호의를 마다하고 바로 순안으로 와서 대회장을 만나니

나를 영유교회 목회자로 결정했다면서 내일 그 교회를

한번 보고 오라 하시니 입장이 참 난처했으나

말씀대로 이튿날 영유교회로 갔다. 그곳에 도착하니

그 전부터 알고 있는 신도들이 나를 대하는 것이 아주 이상했다.

 

 

마침 이날이 화요일이라 정동필 전도사는 나에게 설교를 하라고

하시는데 신도들의 이상한 태도를 생각하여 사양했다.

그러면 사회라도 하라기에 그것까지 거절할 수 없어서 사회를 맡았다.

기도회 시간이라 여러 신도가 기도하는 중에 두 신도가 늦게 들어와서

갑자기 크게 기도하기를 “정동필 전도사가 전근가지 않고

유임케 되니 기쁘고 감사하다”라고 했다.

무엇이 어떻게 되어 가는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은 정동필 전도사는 공석중인

대회교육부 서기직분을 맡겠다고 신청을 했는데

이 문제를 논의하는 중에 “그러면 영유 교회는

누가 목회자로 갈 것인가?”하는 질문에 정동필 형님은

나를 영유교회 목사로 추천하여 그렇게 결정이 되었다 한다.

그런데 무슨 연유인지 정동필 전도사가 대회 교육부 서기로

신청한 것이 부결되었고 공중에 뜬 정동필 전도사는

영유교회에 그냥 있고 싶어 화요일에 크게 기도를 드리던 두 분을

정동필 전도사 유임운동을 위해 대회로 보냈던 것이다.

정동필 전도사도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설득해 보려고

그 먼 길을 걸어 좌동까지 찾아 왔다가 말도 못 꺼내고

그냥 온 것이다. 이 두 분은 대회에 가서 유임운동이

관철되지 못했는데도 돌아와서는 정전도사 유임이 되었다는

거짓 감사기도를 드렸던 것이다.

 

 

이런 전후 사정을 모르는 나는 다시 순안으로 가서

대회장에게 영유교회를 다녀온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니

대회장은 일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를 알고는 나에게 속히

영유교회로 취임하여 거짓말하는 그런 교인들은 다 내보내고

새로운 교인을 얻으라고 했다. 나는 그러한 상태에서

교회에 부임한다는 것이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말씀을 드리며

내 고향으로 가서 내 아내와 의논하기로 하겠으니 대회에서도

다시 깊이 생각해서 결정해 달라”고 말씀드리고 고향 운북리로 갔다.

석 달이 넘게 떨어졌던 가족을 기쁘게 만났고

온 가족이 평안히 지낸 것을 하나님께 감사했다.

며칠 후 대회에서, 나의 은사 되는 정기창 전도사와 같이

용강군 수자골로 가서 2주간 전도회를 하라는 편지가 왔다.

다행히 용강 경찰서로부터 전도 집회허가가 나와

우리 두 사람은 전도회를 시작해서 한창 열심히 하는 중인데,

대회에서 나에게 평남 대천 군모루로 가서

그곳 전도회 뒷수습을 하고 그 곳에서 일하던 다른 전도사를

이곳 용강 수자골로 오게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도 그 처사가 의아했지만 대회의 명령이라

말없이 따르기로 하고 혼자서 군모루로 갔다.

 

 

후에 들은즉 서선대회 부회장 이모목사와 군모루 전도사는

막역한 사이로 전임 군모루 전도사가 군모루에서 고생을 많이 한다하여

이런 결정이 났다고 한다. 막상 대천 군모루에 가보니

이곳 교회에 주인 노릇을 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전도회 뒷수습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군모루에서 전도회가 열렸던 것도 어려서부터 독실한 신앙을 가진

최매실이라는 여자의 열성 때문이었는데, 이 최 여사는

박의창이라는 경찰관의 아내였다.

이 경찰은 부인의 신앙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있어서

최매실 여사는 자기 남편이 출근한 후에 자기 남편의

동관(同官)의 부인들을 모아 놓고 전도하여 그들과

안식일은 지키며,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웠다.

최 여사의 요청으로 전도회를 했지만 최 여사가 앞에 나서서

교회의 주인 노릇을 못하고 있으니 전도회의 뒤처리를 한다는 것이

매우 힘이 들었던 것이다. 어느 안식일, 최 여사를 만나니

20세 중반의 얌전해 보이는 여성이었다.

가정을 방문하겠다고 하니 남편의 반대 때문에 자기에게

큰 시험이 될 수도 있다하며 사양을 해서 이곳에 한 달간 있으면서도

최 여사의 집을 한 번도 방문치 못했다.

 

3. 영유 교회

 

한 달간 대천 군모루에서 뒷수습을 하고 있는데

대회에서 “정동필 씨를 대천으로 전임케 했으니

영유교회로 부임하라.”고 통지가 왔다. 무거운 마음으로

영유로 가보니 정동필 전도사도 새 임지로 떠나신다고 했다.

나도 식구들을 데리려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이번에는

나의 어머님이 우리와 같이 사시기를 원하셔서

어머님을 모시고 새 임지인 영유로 떠났다.


 

1923 11월 초순,

우리 여섯 식구가 영유에 도착했는데 우리를 환영하러 나온 교우가

단 한명도 없었다. 처음 모시고 간 어머님 보기가 얼마나 민망한지,

섭섭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하루 밤 어떤 신자 댁에서 지나고 그 이튿날 내가 손수

셋집을 얻어 부엌에 솥을 거는 등 살 준비를 했다.

생소한 이곳에서, 나는 물론 온 가족이 고생을 했고 심적으로

타격을 많이 받았다. 며칠 후, 첫 번 맞는 안식일에 교회를 가니

어느 한 사람 따뜻하게 인사하며 맞아 주는 교우가 없었다.

이런 형편에 신자들이 사는 집도 알아낼 도리가 없어

방문조차 할 수가 없었다. 몇 안식일이 지나도

신자들이 우리를 대하는 태도는 계속 냉냉(冷冷)했다.

그렇다고 이일은 대회에 알릴 일도 아니고

내가 해결을 해야 될 문제였다.

나는 우리교인 방문하는 것은 아예 포기하고

이 지역 장로교 목사와 천주교 책임자들을 사귀게 되었다.

타 교파(他 敎派) 지도자들을 만나보고 나니

타 교파 사람들이 사귀기가 훨씬 쉬웠다.

그 결과 다른 교파 사람들 몇 명이 우리 교회로 개종했다.

사실 전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인도하기보다

다른 교파 사람들을 우리 교회로 인도하는 일이

쉬울 수도 있다는 것을 체험했다.

 

 

이곳에 온지 한 달 좀 지난 어느 안식일 늦게

이곳 예배소 소장인 방효신 씨가 우리 집을 찾아 오셨다.

이유는 고사하고 부임한지 한 달 만에 처음 이 곳 교인을

개인적으로 만나는 것이니 그 기쁨을 어찌 잊을까?

“아니 소장님! 이게 웬일이십니까?

여보! 소장님 오셨소! 저녁 준비 빨리 하시오!

“네! 곧 준비할게요! 소장님! 어서 들어가서 이야기들 나누십시오!

나의 아내도 얼마나 기뻐하며 저녁을 준비 했는지!

우리는 준비된 저녁 식사를 즐거운 마음으로 함께 시작했다.

식사 중에 나는 말씀을 드렸다.

“소장님! 모처럼 오셨는데 집은 누추하지만

오늘 저녁은 저희 집에서 주무시지요?

“정 전도사! 좋습니다. 나도 그렇게 하려고 생각하고 왔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밤이 깊어가자

소장님이 말씀을 하셨다.

“정 전도사! 그간 나와 모든 교인이 정 전도사에게

너무 무정하게 했소. 대단히 미안하오!

.............

“사실 그렇게 된 데는 이유가 있소!

“네? 이유라뇨? 제가 부임해 와서 뭐 잘못한 것이라도...

“아니 그런게 아니라,

여기에 먼저 계시던 전임전도사가 가시기 전에 하는 말이

자기 대신 오는 신임 전도사는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없고 목회 할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을 해서...

“네. 그랬었군요.

“그런데 실상 여기 와서 일하시는 것을 보니

전임 전도사의 말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소!

이제 모든 교인들이 협력하여 교회를 위해

다 열심히 일을 할 터이니 힘을 내시오!

“소장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힘을 다해 일을 할 터이니 많이 도와주십시오.

 

 

그날 밤의 기쁨을 어찌 말로 표현을 할 수 있을까?

이때부터 나는 사역자가 교체될 때 전임사역자는 후임사역자를,

신임사역자는 전임사역자를 극구 칭찬해야 한다는 것이

목회생활의 신조가 되었다.

예배소장이 집에 다녀간 그 다음 안식일부터

모든 신자들이 어찌나 우리를 친절히 대하여 주는지,

어려움 뒤에 오는 그 기쁨은 정말 눈물겨운 경험이었다.

그간 당한 설움이 보답 받고도 남았다.

신자들과 화합해서 열심히 일을 하니 내가 부임한 지

불과 수개월 내에 신자는 배 이상이나 증가되어

나도, 교인도, 모두 힘이 났다.

 

 

6개월가량 교우들과

힘을 합하여 열심히 목회생활을 하고 있는데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나의 은사인 정기창 전도사가 일부러 찾아오셔서

“자네를 북간도로 보내려 하니 아예 가지 않겠다 말하고

조선에서 나와 뜻을 같이 하여 전도 일을 하자”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내가 이곳에 온지

겨우 반년밖에 안 되었고 또 짧은 기간 동안

교인들과 한 마음이 되어 교인수도 배나 증가되었는데

설마한들 그럴 리가 있으랴?”하고 생각했다.

며칠 후에는 정동필 전도사도 찾아와 말하기를

“아무래도 자네를 북간도로 보내기로 하는 것 같으니

아예 거절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대회에서 나를 그곳으로

보낼 리가 없다고 생각이 되어 정동필 전도사에게

“만주에는 백만 동포가 있다는데 다 안가겠다 하면 그들에게

누가 복음을 전하겠느냐”하고 잘난 듯이 큰소리로 대답을 했다.

 

 

그러나 정말 며칠 후에, 대회 본부로부터 나를 북만주로

보내기로 결의했으니 속히 가도록 준비하라는 명령을,

그것도 일전 오리짜리 간단한 엽서로 받았다.

이제 막 재미있게 일 한지 반년도 안 되어

막상 이런 명령을 받게 되니 어안이 벙벙하고 기가 막혔다.

그래서 나는 “이곳에 부임한지 반년도 못되었는데

이렇게 전근케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라는 내 의견을

일전 오리짜리 엽서에 써서 대회로 보냈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뜻이니 가시오!”라는 대회 부회장으로 계신

이 모 목사의 무뚝뚝한 단 한마디가 적힌

일전 오리짜리 엽서 명령이 다시 왔다.

나는 대회명령은 지상명령으로 알고 떠나기로 했다.

얼마 후에 왜 이런 명령이 나에게 떨어지도록

결의가 되었는가를 알게 되었다.

 

나보다 선배인 박윤선 전도사가 만주에 가있다가

다른 곳으로 전근하며 만주에 대해 여러 가지

어려운 점들만 말을 하셔서 고참 사역자는 누구든지

만주 가기를 거절하여 결국은 나같은 신참에게

만주로 가라는 결의를 한 것이었다.

나는 대회를 찾아가 대회의 결의를 따라 만주를 가겠으나

이제 막 정든 영유교인들에게 내 입으로

차마 떠난다는 말을 못하겠으니 대회에서 어느 분이

영유교회에 오셔서 나를 전근시킨다는 통고를 해달라고 했다.

내가 부임한 후에 대회에서 아무도 영유교회를 방문한 분이 없었기에,

누군가 안식일 예배시간에 오셔서 발전된 교회도 보시고

교인들에게 후임도 소개해 주시는 것이 초년병 목회자인

나의 바램이었다.

 

그러나 대회장 스미스 목사는 안식일도 아니고

어느 금요일 밤에, 교인도 얼마 없는데, 사전 통고도 없이 오셔서

“정 전도사가 떠난다.”는 한마디 통고만 하고 그날 밤으로

사 십리가 넘는 순안으로 돌아가시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것을 볼 때에 스미스 목사의 고집을 한 번 더 알게 되었다.

이 통고를 받은 영유 교우들은 나와 별로 오래 사귀지는 못했지만

얼마나 섭섭해 하는지 마음속으로 슬프기도 하고

교우들의 사랑이 감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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