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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7

 

(나는 영유 교우들과 별로 오래 사귀지는 못했지만 얼마나 섭섭해 하는지 

마음속으로 슬프기도 하고 교우들의 사랑이 감사하기도 했다. #6 끝부분입니다)

*(원래 회고록 원고가 "아래하 한글"로 완성이 되었는데 오래된 Version이 되어서 그런지

글을 올리기만 하면 글씨체가 같은 줄에서도 바뀌네요. 제 힘으로는 아무리 해도 안됩니다.

양해 부탁 드립니다. ^!^)

 

 

제 4 부. 북 간도로 인도하신 하나님

 

1. 첫 양복

 

당시에 북간도는 조선합회 직할 선교지였다.

그래서 합회의 특파목사로 1922년경에 최태현 목사님께서 감독으로

북간도 투도구(頭道構-간도에서 투도구라 불렀음)에 계셨는데

대회의 결정을 통고 받으셨는지 나에게 편지하기를

북간도의 수도격인 용정으로 와서 일하도록 초청하니

속히 오라고 하셨다.

나도 이왕이면 속히 가기로 하고

모든 것을 준비하는 중에 놀란 일은, 내가 반년정도

영유에 있는 동안 많은 손님이 지나 갔는데,

그 때마다 영유의 명물인 냉면을 외상으로 대접하곤 했었다.

이제 떠나면서 외상을 계산해 보니 나의 월급 두 달 분과

맞먹는 금액이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하고 입맛은 썼지만

“외상이면 소도 잡아먹는다.”는 속담이 사실임을 실감했다.

눈물을 흘리며 서운해 하는 영유 교우들을 뒤에 두고

1924년 4월 하순에 북 만주를 향해 떠났다.

 

 

어머님을 한 반년이라도 영유에서 모신 것은

흐뭇한 일이었지만, 이제 북간도로 가기 위하여

그간 특별히 기쁘시게 해드린 일도 없이 고향에

모셔드려야 되니 죄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평양에서 일박하며 당시 평양에 오직 하나인

“제일관” 극장구경을 시켜드리려고 하니 어머님 말씀이

“이미 다 구경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극장건물을

밖에서만 구경 하신 듯하여 강권하여 모시고

극장에 가서 활동사진을 구경시켜 드렸다.

어머니는 활동사진이 시작되자 너무도 재미가 있으셨는지

극장이 문 닫을 때까지 남아서 보시겠다고 하시지를 않는가?

나는 본래 극장에 별로 취미가 없는데다가 때마침 큰아이가

구토를 하기에 큰 아이를 데리고 여관으로 먼저 돌아왔다.

어머니와 아내는 두 아이와 함께 같은 영화를 마지막 회가

상영 될 때까지 몇 번을 구경하고 돌아오시더니

평생 그런 구경은 처음이라고 하시면서 흐뭇해하셔서

그나마 마음이 매우 기뻤다.

 

 

고향에 돌아와 친척집과 처가댁을 방문하고 나니

이제 정말로 고향을 떠나는 시간이 되었다.

어머니도 “다섯 가족을 한꺼번에 다 떠나보내기가

너무 섭섭하니 큰아이는 두고 가라.”고 하셔서

태혁이를 어머님께 두고 떠났다. 우리가 떠날 때,

모든 친척과 어머니는 우리를 다시는 못 만날 것 같이

눈물을 흘리시기에 우리 역시 눈물을 닦으면서 떠났다.

 

당시에 평안도에서 함경도로 가려면 서울로 가서

다시 함경도로 가는 기차를 타야만 했다. 나는 두 번째

서울행이지만 서울역에 도착한 시간이 밤이라

방향잡기가 퍽 어려웠다. 그런대로 동대문까지는

전차로 왔는데 여기에서 청량리 행 전차 타는 곳을

찾아 헤매다가 결국 막차를 간신히 타고 청량리에 오니

매우 늦었다. 원래는 떡전거리(회기동 근처)에 사는

권태산 씨의 집으로 가기로 했으나 밤길에 엄두가 나지 않아

할 수 없이 청량리역 근방 어떤 여인숙에서 일박하고

이튿날 일찍이 권태산 씨 집으로 가니 내 고향에 온 듯 기뻤다.

 

 

이때 나는 무슨 민족주의자나 된 것처럼 한복 위에다

포목 두루마기를 입고 서울에 왔다. 그런데 뜻밖에도

나의 선배인 홍신우 전도사를 만났는데 홍신우 전도사는

순안 의명학교 제 1회 졸업생으로 뛰어난 사역자였다.

이 분도 북간도로 가라는 지시는 피하셨고

나를 만주로 보내는데 찬성을 하신 모양인데

이 홍신우 선배의 말씀이 “정 전도사!

지금 만주에 선교사로 가면서 한복이 무엇이요?

양복을 사 입고 가시오!”라고 했다.

나는 젊은 나이에 그 말씀이 일리가 있다 생각이 되어

이튿날 아내와 같이 문안에 있는 유명한 백화점인

“정자옥”으로 가서 한참 만에 고른 것이 흑색 사지 양복이었다.

“저..여기 이 양복 한 벌 값이 얼마나 되나요?”

“네. 손님. 이 사지 양복은 한 벌에 55원입니다”

그 때 백화점이라고는 처음 갔는데 점원이

얼마나 친절한지 몰랐다. 그러나 값이 문제였다.

“자. 내 한달 월급이 45원인데 55원씩 주고 양복은

사기가 힘드니 45원에 해 주시오.”

“손님. 여기는 백화점 이예요.

백화점에서는 에누리가 안 됩니다.”

“자. 나는 만주에 선교사로 가는데 양복이 필요하오.

그러나 그리 많은 돈은 낼 수가 없소.”

“좌우간 손님. 바지저고리를 벗고

양복이 맞는지 입어나 보십시오.”

“저...저기 윗 적삼만 입었으니 벗을 수가 없는데...”

“그럼 그냥 옷 입은 채로 서 계시면

제가 대강 재어 보겠습니다. 손님.”

처음 사는 양복인데 입어 보지도 못하고

대강 크기만 재보고 사게 되었다.

“손님. 이 옷이면 잘 맞을 것 같습니다.”

만주로 선교사로 간다하니 조금 싸게 해 주어

나로서는 거금을 주고 양복을 한 벌 샀다.

“손님! 저쪽 옆에 가시면 양복 안에 입는

와이샤쓰와 넥타이 등을 파니 사시면 됩니다.”

 

 

드디어 양복 안에 입는 내복 일습(一襲)을 사기는 샀는데

제일 어려운 것이 넥타이를 매는 일이었다.

합회 본부와 시조사에서 일하시는 여러분에게 물어보아도

모두가 여출일구(如出一口)로 넥타이 멜 줄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양복을 그냥 싸 가지고 일루(一縷)의 희망을 안고

원산으로 왔다. 그 이유는 원산교회 박재경 전도사는

나와 의명학교와 신학과 동기 동창인데 박씨는 선교사와 같이

지난 경험이 있으니 넥타이 매는 것쯤은 알 줄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웬걸! 박 전도사도 넥타이를 맬 줄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나는 낙망이었다. 그때 교인되는 박마리아씨가 경영하는

원산 문화여관에 2일간 묵었는데 수없이 넥타이 매는 연습을

하고 또 하다가 뜻밖에 성공했다.

원산교회에서 안식일설교를 부탁받고 요한복음 5장 39절을 주제로

설교를 하고 다음날 원산서 배로 청진을 향해 떠났다.

상당히 빠르다는 배인데도 원산서 청진까지 19시간이 걸렸다.

이등선실에 탔으나 나와 내 아내는 뱃멀미를 하여 몹시 고생을 했다.

나는 여관에서 성공한 넥타이를 풀었다가 다시 매기가 힘들까보아

안식일은 물론 배에서도 풀지 못하고 있었더니

풀을 잔뜩 먹인 와이셔츠의 칼라에 내 목이 얼마나 쓸렸는지

내 목은 멍이 여기저기 들었었다. 지금 생각하면 쓴웃음이 절로 난다.

 

 

청진은 산을 깎아 만든 항구이라 여관까지 올라가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우리는 인력거를 타고 가긴 했지만

많은 짐과 아이 둘을 데리고 고생을 많이 했다.

사람들에게 들은 대로 여관에 도착해서는 장국밥과 곰탕을

한 그릇씩 시켜 먹었더니 멀미가 곧 없어졌다.

다음날 청진에서 회령까지 가는 회령선 열차를 탔는데

협궤(挾軌)를 이용하는 조그마한 경편열차 이였다.

이 경편열차의 찻간은 아주 비좁아서 두 아이와 아내는

겨우 자리를 얻어 앉히고 나는 손잡이 줄을 붙잡고 서서 갔다.

내 앞에 어떤 점잖은 양복 입은 신사가 서서가고 그 옆에는

굵은 베로 만든 상복을 입은 상주가 서서 가고 있었다.

그런데 열차가 매우 심하게 흔들리자 앞에 서있던 상제가

손잡이를 놓치면서 엉겁결에 옆에 있는 신사의 손을 잡았다.

그 상제는 효자노릇 하느라 손톱을 너무 길게 길렀는데

그만 신사의 손을 긁어서 유혈이 낭자하게 되었다.

모두 당황하기에 나는 곧 여행 짐에서 상비약으로 가지고 있던

맨솔리담(안티플라민 종류-편집자주)을 꺼내서 그 신사의

상처에 발라 지혈과 소독을 해 주었더니 두 분이 모두

매우 감사해 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 사람들과 친해져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행 시에는 비상약 등을

가지고 다니면 큰 도움이 될 수 있음을 절실히 느꼈다.

 

 

기찻길 오른편은 험한 산이고 왼편은 두만강 물이 흘러

좋은 경치를 보며 회령역까지 왔다. 이 곳에서 두만강을

건너가게 되었는데 건너가기 전에 일본 세관에서 통관하느라고

짐을 다 조사받았다. 두만강 건너면 개산돈이라는 중국 땅이 되는데

거기서 또 중국세관에서 조사를 받느라고 큰 어려움을 당했다.

더구나 국경을 건너본 경험이 없어 더 고생이 심했다.

여기서 최종 목적지인 용정으로 가는 기차를 탔는데

여기도 경편철도(輕便鐵道)로 아주 작은 열차였다.

세 시간 남짓 여행 후에 북간도 용정에 도착했다.

 

 

2. 삼도구

 

반갑게도 최태현 목사와 용정에 계신 진윤삼 씨라는 분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처음 오는 먼 북간도 땅에서

이렇게 동포이며 교우되는 사람의 영접을 받을 때

그 기쁨과 감사함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최태현 목사님은 우리를 북간도 선교본부가 있는

투도구로 인도하셨다. 간도의 명물인 말 네 필인지

여섯 필인지로 끄는 마차를 타고 떠났는데 길이 나빠

몹시도 덜컹거렸다. 한 세 시간 가량 걸려 투도구에 도착하니

최 목사님 가족과 간명학교 직원들이 따뜻하게 맞아주어 감사했다.

간명학교 직원 중에 나의 의명학교 선배인 강태석 선생과,

나와 동기동창인 여선생 최경신 씨도 계셨다.

모든 교우들이 젊은 우리 내외와 가족을 사랑으로 대해 주셔서

너무 감사했다. 나의 이삿짐이 오기까지 일주일 동안

최 목사님 댁에서 지내면서 물심양면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래서 나는 밀가루와 그 외의 물품들을 사서

최 목사님 댁에 감사의 뜻을 전했다.

 

 

최 목사님 댁에 묵는 동안 하루는 의명학교 선배

강태석 선생의 인도로 조선청년 유지들의 모임에 갔더니,

투도구에서 곧 정구대회를 개최하게 되는데 그 후원을

동아일보 지사와 조선일보 지사 중에 어디에서

받을 것인가를 놓고 심하게 옥신각신 하기 시작했다.

나는 처음 참석했지만 생각되는 바가 있어 발언권을 받아

“지금 국내에서는 외국에 계시는 여러 분들이 얼마나

단결하여 살고 있는가 하며 주시하고 있는데 비록 작은 일이지만

외지에서 단결한 모습을 보이면 좋지 않겠습니까?

제 생각에는 사이좋게 동아, 조선 두 지국의 후원을 다 받아서

진행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자 모두들

“그것이 좋겠다.” 해서 만장일치로 가결이 되어 마음이 흐뭇했다.

 

 

며칠 지나 나의 짐을 찾고 보니 조선인의 짐이라 그랬는지

모든 짐을 다 열어 본 것이 확실했다.

짐이 도착하고 나서 최 목사님은 우리를 용정에 있게 하려 했으나

사정상 투도구에서 서북으로 130리가량 더 들어가는

화룡현, 삼도구(三道構-忠信市)로 가게 되었다고 하셨다.

원래 나는 일본인과 한국 사람들의 중심지인

용정에서 목회를 하기로 되어 있었고, 또 최 목사님도

나에게 보내신 서신에 “용정에 와서 사역을 하라”고 하시었는데,

지금 투도구에 온 것도 의아한데, 백리길이 더 되는 벽촌인

삼도구로 가라 하시니 좀 당황하는 마음이 생겼다.

이곳 교우들까지도 “용정은 북간도의 수도나 다름이 없지만

삼도구는 본토인들이 살기에도 무서운 곳이라” 하며 문제를

제기하라고 했다. 더구나 투도구 교인 강동댁에 저녁을 초대받아

갔다가 내 편상화(編上靴)를 잃어버려 나의 마음은 간도라는 곳이

이런 곳인가 하는 느낌을 가지고 있는데 삼도구는 여기보다도

사람 살기에 더 무서운 곳이라고 말들을 해대니

어린 아내와 자녀들을 데리고 사지로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기도하며 내가 교회 일을 시작할 때 “어디를 가든지

지도하시는 분이나 또는 사역자들 사이에 충돌은 피하기”로

결심하였던 일과, 또 이렇게 윗분이 이야기하실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대로 따르기로 했다.

그래서 최 목사님과 웃는 얼굴로 의견을 나누고는 삼도구로

가겠다고 말씀 드렸다. 그곳에는 우리교회 학교인

삼명여학교가 있으며 박윤순 전도사가 주재했던 곳이라 한다.

며칠 후, 나의 가족은 우리를 사랑으로 돌보아 주신 최 목사님 가족과

다른 교우들을 떠나게 되어 섭섭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특히 최 목사님 자당께서는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극진한 사랑을 보여 주셨다. 이 연로하신 어머님의 사랑은

“나도 남에게 사랑을 베풀며 살자”라고 생각하도록 하는 힘이 되었다.

투도구만 해도 연길현에 있는 꽤 큰 도시로 일본 총영사관 분관도

있는 곳이다. 그러나 삼도구는 투도구에서 서북쪽으로 130리가량

떨어져 있는 화룡현에 있는 소도시로서 그곳으로 가는 길이

상당히 위험하여 당일에 가려면 매우 일찍이 떠나야 했다.

 

 

아침 7시경에 중국 사람이 부리는 마차에 이삿짐을 가득 싣고

우리 네 식구는 그 짐 위에 탔다. 이 마차는 말 여섯 필이 끄는데

길이 어찌나 울퉁불퉁하고 돌이 많은지 마차가 곧 넘어질 것만 같았다.

거기다 평생 처음 들어보는 중국 사람의 말 모는 소리는 괴상하다 못해

두렵기까지 했다. 한참을 달려 “추산자”라는 곳에 있는 주막집에서

점심을 먹자는 것 같았다. 우리 젊은 부부는 무섭기만 해서

점심도 못 먹고 그냥 짐 위에 앉아 있다가 떠났다.

여기서부터는 정말 심심산곡(深心山谷)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좌우를 살펴보니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갈라진 홍해를

건너던 길이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연상되면서 겁이 났다.

이런 깊은 골짜기에 들어서니 벌써 해는 서산에 걸리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마차꾼은 마차를 사정없이 빨리 몰았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겁먹은 채로 중국인이 하는 대로 있을 뿐이었다.

어린 아내와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처음 가는 중국 땅,

그것도 무섭다고 알려진 이 산 속 길을 안내자도 없이

말도 안통하고 거칠기만 한 중국 말 몰이꾼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가야 하니 어느 듯 원망하는 마음까지 생겼다.

 

 

하루가 일년은 된 듯한 기분이었다. 급기야(及其也) 삼도구에

도착하니 벌써 캄캄해 졌는데 의명학교 선배인 장병삼 선생이

학생 몇 명을 데리고 동구까지 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는 순간 모든 걱정과 고생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장병삼 선생은 우리가 오는 확실한 날짜를 몰라 학생들과

우리 가족을 맞으러 매일 10리 길을 나왔다가 이삼일을 허탕치고,

행여 오는 중간에 무슨 어려움이나 있었는가? 해서 염려를 하면서

다시 마중을 나와 있다가 우리를 만나자 너무도 기뻐했다.

오는 길에 점심을 먹자던 “추산자”부터 이곳까지는 아주 위험한 산속으로,

날이 저물면 태반(殆半)은 마적을 만난다는 것이었다.

그제야 나는 그 중국 마차꾼이 그렇게도 사정없이 마차를

빨리 몰던 이유를 알게 되었고 하나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렸다.

이삿짐은 삼도구교회 손성철 형제의 집에 풀었는데,

전 가족이 다 교회에 나오는 평신도 집안은 이 가정뿐이었다.

장병삼 선생도 이 댁에 세 들어 살고 있었다.

이 때가 1924년 5월 중순이었다.

 

 

손성칠 형제의 집은 잘 꾸려놓은 집은 아니었지만 언어가 통하는

교우의 집에서 하룻밤 잠을 잘 수가 있다는 것이 너무 감사했다.

다음날 장 선배는 나에게 우리가 앞으로 이 집에서

함께 살 것이라 하면서 집주인 되는 손 형제는 오래전에

출타하였는데 삼일 후면 돌아올 것이라고 했다. 과연 삼일 만에

손 형제가 돌아 왔는데 서로 이야기를 하면서 이 분이 모든 일을

기도와 신앙으로 해나가는 매우 신실한 형제임을 알게 되었다.

“아이고, 정 전도사님! 여기 오신 것을 정말 환영하고 감사합니다!”

“손 형제님! 정말 반갑습니다. 주인도 안 계신 집에

이렇게 며칠을 묵었습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저는 목공 기술로 먹고사는데

두만강 건너 함경북도 무산에 어떤 집을 개축(改築)하다가

정 전도사님 오시기 전에 다 끝날 수 있는 일이었는데도

어쩌다가 끝도 못 내고 이렇게 전도사님 오시는 날

제때 출영(出迎)도 못해서 매우 미안하구 만요!.”

나를 환영하려고 일도 끝내지 못하고 오셨다니

너무 미안하고 마음이 뭉클했다.

“손 형제님! 저 때문에 일도 끝을 못 내고 오셨군요.

너무 죄송합니다.”

“그게 아닙니다. 일을 하던 중 갑자기

앞을 잘 볼 수가 없게 되어 그랬답니다.”

“아니, 그래 지금은 괜찮으신 가요?”

“네, 지금은 눈이 좋아 졌어요. 제 이야기 좀 들어보십시오.

전도사님 오신다는 날은 되어오는데 일은 안 끝나고

눈은 안보이고....그래서 이왕 늦었으니 눈이 밝아지면

일을 끝내고 가자했는데 눈이 회복이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라도 눈을 밝게 해 주시면 일은 다음에 할 터이니

집에 가서 전도사를 맞게 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를 드렸답니다.

그랬더니 바로 그 날 이렇게 눈이 밝아져 하던 일은

그냥 두고 이렇게 왔답니다.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감사는 제가해야지요. 좌우간 저희 가족이

손 형제 집에 살아도 되겠습니까?”

“무시게 소리를 그리 하십니까? 물론 이지요! 걱정 마십시오!

제가 전도사님 가족이 지낼 방을 곧 새로 만들 터이니 조금만 참으십시오!”

“손 형제,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마 가난한 살림에 영양부족으로 잠시 눈이 나빠졌던 것이라

생각되지만 그분의 순진하고 마음 씀씀이가 너무도 감사했다.

우리에게 얼마나 잘 해주시는지 “천사인들 이만큼

대접받을 수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손 형제는 그 이튿날부터 우리가 있을 방을 꾸렸는데 1주일 이내로

부엌 한간, 방 두간을 얌전하게 만들어 놓았다. 대단한 기술이었고

그 정성에 우리는 너무도 감동을 받았다. 비록 그분 자신의 집을

증축 한 것이라 하시며 극구 사양 하셨지만 나는 너무 감사해서

40원을 사례금으로 드렸다. 얼마나 감사해 하는지....

이렇게 해서 손 형제의 집에 삼명학교 교사 장병삼 선생 가족과

나의 가족을 합해 세 가족이 살게 되었다.

손 형제 부부는 본래 침례교회에서 개종한 형제인데

아들 셋, 딸 둘, 홀 아버님, 이렇게 여덟 식구가

넉넉하지 않은 살림을 하면서도 신실한 신앙을 갖고 있었다.

단지 부친이 신앙을 받아들이지를 않아서 퍽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삼도구는 생활수준이 퍽 뒤떨어진 곳이었다.

민가(民家)가 700호 가량 되는데 변소 있는 집이 거의 없어서

아침저녁에 나가보면 그 근처 밭에서 남녀노소 불문하고

마구 대소변 보는 사람이 수도 없이 많았다.

이런 곳에 우리교회와 삼명여학교가 있었다. 교회에는

이화배 씨, 김산진 씨, 장병삼 씨, 손성철 제 씨와 그 가족,

그리고 남녀 학생 3-40명이 다였다.

학교의 이름은 삼명여학교인데 학생 태반이 남학생이니

학교이름 자체가 모순이었다. 그래서 나는 학교 이름을

“삼명학교”로 고쳐 부르게 했다. 교사라고는 나의 선배인

장병삼 선생 한 분뿐인데 그분은 7원을 월급으로 받고 있었는데

그것도 정식사역자가 아니어서 학생들 월사금이 들어와야 주는

딱한 형편이었다. 나는 매월 45원을 받는데 나의 선배 장병삼 씨는

월 7원을 받고 그것도 정식 사역자도 아니라니!

나는 이런 형편을 보고 내가 처음 교사 일을 시작했을 때

힘들었던 일이 생각나서 나의 급료에서 거의 일 년 동안 매달

12원씩을 떼어 장 선생께 드렸다. 한편, 교회 본부에

장 선배를 정식 사역자로 채용하도록 요청했다.

거의 일 년이 되자 장병삼 씨는 정식 사역자가 되었고

월급도 매월 35원씩 받게 되어 그분은 물론 나도 그분을 위해

탄원한 일이 이루어져 매우 기뻤다. 장병삼 씨는 3.1운동 피의자로

간도로 피신했다가 동창인 박윤선 전도사를 만나 삼명여학교를 설립했다.

 

 

삼도구에서 서쪽으로 30리쯤 가면 조선독립군과 일본군이

격렬한 전쟁을 치른 청산리가 있다. 삼도구에는

일본영사관에서 보조하는 “명신학교”가 있었는데

이 학교의 조선인교사 대부분은 동족을 괴롭히는

스파이의 역할을 하면서 특히 교회활동을 감시하기에

전도사는 항상 이 사람들을 조심해야 했다. 이런 형편이니

주민들은 기독교에 대해 매우 냉담했다. 그러나 노력 끝에

두 가족을 교회로 인도했으나 새 교인 한 집이 화재를 당하게 되자

“교인이 되더니 그렇게 되었다.”라고 주위에서 많은 조소와

핍박을 해서 전도는 더욱 힘들어 졌다. 얼마 후, 투도구에 있는

간명학교에서 일하던 강태석 선생이 고국으로 전근되자

나에게 삼도구 교회일과 투도구의 간명학교일을 함께 보라는

지침이 내려와 4개월 동안 간명학교 일도 도왔다.

간명학교의 일을 성의껏 도와 학부형과 학생들이 감사해했지만

거리가 먼 관계로 삼도구 교회는 손해를 많이 본 셈이다.

 

 

내가 간도로 올 때 먼저 일하던 박연순 전도사는

“간도의 좋은 점은 곡식 값이 싼 것이다.”라고 했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내가 부임해온 그해에 간도에는

몇 십 년 내에 처음 보는 대 흉년이 들었다.

35전 하던 콩 한 되가 열 배 가까운 3원 20전까지 하게 되니

생활고가 심했다. 내가 이곳으로 온 이듬해 3월경에 내 둘째 딸

충실이가 태어났는데 투도구에 임시 전도부인으로 수고하던

최마르다 씨가 많은 수고를 해 주었다. 이곳 이름이

삼도구 충신장이어서 “충” 자를 넣어서 “충실”이라고 지었다.

흉년으로 모두 고생을 했다.

이곳에 온 다음해 즉 1925년 5월에

한국 연합회총회에 참석한 후에 서울 종로양복점에서

여름양복을 한 벌 맞추었다.

그리고 고향에 가서 어머님과 지내던 큰 아이

태혁이를 데리고 삼도구로 돌아왔다. 비록 벽촌이지만

이곳의 사정도 알만하게 되고 전도하는 일도 자리가

잡힐 듯 해 가는데 북간도의 수도격인 용정으로

전근을 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1925년 8월경이었다.

  • ?
    admin 2012.01.19 18:35

    정목사님, 글씨체가 일정하지 않아서 굴림으로 수정하였습니다.

    그리고 Internet Explorer 로 글을 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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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agraph 사이에 뜨는것을 삭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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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고록 연재를 읽으며 많은 감동을 받고있습니다.


  • ?
    명지원 2012.02.14 19:58

    가라면 어디든지 가시는 목사님의 목회 자세에 깊은 감명을 받습니다. 교통이 그렇게도 불편했던 그 시절, 그 먼길을 오가시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당시 함경도를 가기 위해서는 기차로 서울로 왔다가 가야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요, 일제의 핍박과 먹을 것을 찾아 떠났 우리 백성들이 모여살 던 간도, 용정 등 친숙한 지명들이 가슴에 와닿습니다. 삼명여학교, 장 선생에게 12원을 주시면서 정식으로 채용되도록 도우신 것, 큰아이 태혁이를 데려오신 것 등 그 삶의 과정 하나하나가 역사이군요.

     

    제가 사는 현재의 삶에서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믿음의 선조들의 삶에 비춰보면 그 어떤 불평과 불만을 가질 수 없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교회의 과거의 역사를 아끼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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