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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목사 회고록 연재)#9

 

 

(이때 개종하신 분이 김완식 선생이신데 이 분은

내가 남선 대회장이 된 후에 다시 극적으로 만나서

함께 일하게 되었다. 연재 #8 끝부분입니다.)

 

3. 용정 선교-제 2부


 

1926년 12월, 연년생으로 셋째 딸 정실이가 태어났다.

둘째 딸 충실이의 출생 때처럼 최마르다 전도부인이

또 수고해 주셨다. 두 번씩이나 신세를 져서 아내와 의논하여

광목으로 치마 적삼을 해 드렸다. 비록 광목옷이지만

최 전도부인의 새 옷을 보고는 같이 일하는 모 지도자가

칭찬을 한 모양이다. 칭찬을 듣게 된 최 마르다씨는

정 전도사 집에서 선물로 해 주었다고 대답을 했다는데

그 후로 이 지도자의 가정에서부터 정 전도사와 최 부인과

무슨 불순한 관계가 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일의 시종을 아는 교우들, 특히 젊은 층의 교우들은 나에게

“그런 누명을 쓰고 잠잠히 있는 멍텅구리가 어디 있는가?

교회 앞과 상부에 보고해서 이 일의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려내라”고 야단들을 했다. 나는 사역자와 사역자는

어떤 일이 있든지 충돌을 피해야 한다는 결심을 하고 있었기에

꾹 참고 지냈지만 청년으로서 이런 누명을 참아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산후조리를 하고 있는 내 아내와

토진간담으로 이 일을 의논하였다. 아내는 “다른 사람들이

무슨 소문을 퍼뜨리던지 나만 당신을 의심치 않으면 되는 것이니

아무 염려 말고 주님 사업이나 열심히 하라”며 용기와

신뢰에 가득한 말을 해 주었다. 별로 배운 것이 없는 아내로부터

이런 용기 주는 말을 들으며,

사람됨은 지식에만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최마르다 전도부인에게 선물을 준비할 때 아내와 함께

의논해서 한 것이 너무나도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지혜를 너희도 항상 기억하기 바란다.

 

 

마음으로 고생은 되었지만 한 1년간 지나가니

사실이 아닌 소문은 봄날에 스러지는 눈과 같이 없어짐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했다. 정실이의 이름에 정자를 붙인 것은

용정에서 정자를 따다 붙인 것이다. 용정으로 오기 전까지

큰아들 태혁이는 삼도구교회에 속한 삼명학교에 다녔다.

용정으로 와서 태혁이와 태영이 학교문제로 어려움에 부딪치게 되었다.

용정에 있는 일반학교는 사회주의 사상이 보편화되어 있어서

아이들의 사상이 어떻게 꼴 지어질지가 염려되었다.

그래서 안식일을 허락해 주었던 동흥소학교에 다니던 태혁이와

새로 입학하는 태영이를 장로교에서 경영하는 영신소학교로

전학과 입학을 시켰다. 그래도 기독교 학교가 안심이 되었다.

장로교학교라 안식일 문제가 어려웠으나 용정에 있는 동안

다행히 퇴학을 당하지 아니하고 학교를 다닐 수 있었으니

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였다.

너무도 어렵던 용정에서 조금씩 전도가 되어 교인들이 생기고

교회가 안정이 되어 가자 다른 지도자들에게서

내가 경원시(敬遠視)되는 계기도 되었다. 걸핏하면

전도하는 일은 물론 선교에 관하여 의논하는 일에도

나를 제외시키는 일이 점점 눈에 띌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일이 복이 되기도 했다.

 

 

1926년 겨울 초로 생각된다.

나를 제외한 다른 분들은 조선 땅 길주로 전도여행을 갔다.

이 전도회 기간 중, 나는 고국에서 오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대일보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우리교회가 경영하는 순안병원의 원장 되시는

허시모(C. A. Haysmer-편집자 주))의사가 자기 과수원에 들어왔던

어떤 소년의 이마에 염산으로 도적이라고 쓴 흉터가 발견되어

그 일을 비난하는 기사가 대서특필로 보도되었다.

나는 이미 간도지역 사람들의 심리상태를 읽어 알고 있던 차라,

이 기사를 보는 공산주의 사상에 젖어 있는 사회주의 사람들이

무슨 일들을 벌일지가 눈에 선했고 이 병원과 같은 소속인

우리 안식일교회를 용정에서 몰아내려고 할 것이 눈에 뻔했다.

이 일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공산주의자들보다 먼저 손을 써야한다는 확신이 서서,

나는 간도선교 본부인 투도구교회로 달려가 투도구 지역 몇몇 교회에

이 소식을 전한즉, “아무리 우리교회 선교사가 한 일이지만

잘못 되었다.”고 하면서 “대책을 강구하자!”고들 했다.

그리하여 우리교회가 있는 노투구, 삼도구, 팔도구에 힘들게

전화로 이 사실을 알리니 그분들도 우리 교회의 일이지만

잘못 되었다 하며, 거리가 멀어 모임에 참여하지는 못하지만

투도구에서 결의하는 대로 따르겠다고 했다.

 

 

그래서 “간도 안식일교회 신도대회”라는 명칭으로 모임을 갖고

순안병원 허시모 원장을 징계하고 피해를 당한 소년에게

위로금을 주는 동시에 허시모 원장은 사회 앞에 사과하라는

결의를 했다. 나는 이 결의문을 당일로 가지고 용정으로 돌아와서

간도일보에 기사를 내게 하였다. 그 이튿날 용정 거리에 나가니

“허시모 성토강연”이라는 대서특필의 포스터가 여기저기에

붙어 있었다. 그러나 이미 우리교회의 이름으로 결의문이

나간 후였다. 내가 알고 있는 몇몇 용정의 유지들은

“안식일교회에도 민족애를 가진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구만!”이라고

칭찬의 말들을 했다. 나는 “당신들이 안식일교인들을

어떻게 보는 것이냐?”고 큰소리를 할 수 있었고

안식일교회에 대한 비난이나 공격을 막을 수 있었다.

길주전도회에 나만 빠진 것이 섭섭했지만

오히려 천만다행이었다는 생각으로 감사했다.

 

 

길주지역 전도회에서 돌아오신 최 목사님은 이 지역 책임자로서

이번 일이 걱정이 되셔서 “정 전도사가 간도지역 안식일교회 신도로써

허시모 원장에 대한 이런 결의를 한 것에 대해 아무래도

잘 못한 것 같다”고 하시고는 지도자로서 어쩔 수 없이 우리 교회

상부 기관에 보고하셨던 것 같다. 나는 최 목사님께

“조금 두고 보시면 아시게 될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다.

과연 우리교회 기관에서도 “간도에서 이런 결정을 해서

처리한 것은 잘한 일이다.”라고 기별이 왔다.

이런 기민한 결정이 없었더라면 간도지역에서 우리교회는

민족반역의 지탄을 받고 교회는 물리적인 공격도 당했을 것이 뻔했다.

하나님의 교회이지만 때로는 사회적으로 기민한 대처를

할 줄도 알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같은 해인 1926년 겨울인 것 같다.

용정에서 붉은 벽돌로 하늘을 찌를 듯이 높게,

현대식으로 지은 감리교회에서 김건수 목사의

특별전도 대강연회가 있었다.

나는 젊은 사역자로 흥미를 갖고 참석했다.

천명에 가까운 청장년이 모였는데 이 날도 예외가 없이

그 목사가 설교를 시작하자 곧 청중들이 발을 구르며

야유를 해대었다. 그렀지만 누구 한사람 감히 그 수라장을

수습하는 이가 없었다. 나는 이미 경험한 바가 있어

감리교 책임자를 불러 “왜 청중에게 호소하여

무마를 시키지 않느냐?”고 하니 “뭐라 말해서

청중을 조용하게 합니까?”라고 묻기에

“여기는 정치적 강연과 달라 교회에서 하는

전도 강연인데 상식이 있는 여러분이 이렇게 야유하고

발을 굴러서야 되겠습니까?

이렇게 상식 없는 일을 하지 마시고 물을 것이 있으면

강연 후에 아래층에서 강사와 같이 문답식으로 상론함이

정당한 일이라”고 호소하라 했다.

그 책임자는 곧 설교를 중단하고 나의 말대로 진지하게

호소하니 청중은 잠잠해지고 김 목사도 설교를 끝냈다.

이 교회의 책임자는 내게 와서 정중하게 고마움을 표했다.

비록 교파는 달라도 전도회를 위해 도움을 주고받아

서로 좋은 관계를 가질 수 있었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1927년 봄이다.

경성부 동대문구 회기동에서 조선합회 주최로

사역자수양회가 있어 참석했다. 합회평의원회(행정위원회) 위원이신

서선대회장 이근억 목사가 나를 찾아와 하시는 말씀이

“정 전도사가 그동안 간도에 가서 어찌 그리도

목회의 결과가 없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나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왜 그러시느냐”고 물었더니

“잘은 모르겠으나 아마 이번 사역자수양회 후에 정전도사는

우리교회 사역에서 아주 물러나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너무나 청천벽력(靑天霹靂)같은 말씀에 나도 인간인지라

상당히 기분이 좋지 않았으나 침착하게 “간도 같은 지방에서

얼마큼 해야 결과가 있는 것으로 인정이 되는지는 모르나,

아무 설명도 없이, 또 내가 설명할 기회도 없이 합회평의원회에서

사역자를 제명, 또는 면직할 수가 있는 것이냐?”고 물었더니

이 목사님은 아무 대답이 없이 돌아가셨다.

나에게 이렇게 조용히 전해 주시는 것은 늦기 전에 속히

무슨 대책을 세워 보라는 무언의 말씀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에게 이런 상황을 전해준 서선대회장 이 목사님께

감사를 금할 수가 없었다.

 

 

나는 기도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본 결과, “간도선교에 대하여는

한 점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모르는 잘못이 있다면 조언과 충고와 훈련이 있어야지

한마디 예고도 없이 이렇게 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뒷전에서 불평을 말하기보다는 전(全)간도의 지도자이신

최태현 목사님을 찾아가 전후의 사정을 알아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숙소로 직접 최목사님을 찾아갔다.

”최 목사님, 지도자들 사이에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모르나

합회평의원회에서 제가 목회자로 간도사업에 별로 결과가 없어

면직시키기로 했다는 것이 사실인가요? “

“정 전도사가 간도에 와서 별로 성과가 없었던 것이 사실 아니오?”

“목사님! 성과가 있고 없는 것은 목사님과 하나님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면 목사님께서 제 해임 안을 제출하신 것인가요?”

“나는 지도자로서 그곳에서 있었던 성과를 가지고

판단해서 결정해야 하오!”

“목사님, 선교가 잘 되었는지 못 되었는지를 숫자적으로 따지는 것은

저도 이해를 합니다. 그러면 제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물어 보시오”

“최 목사님은 1922년에 간도로 오셨고

저는 1924년 5월에 간도에 부임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정 전도사의 선교성과와 무슨 관계가 있소?”

“최 목사님은 제가 간도에 들어오기 전까지

2년 5개월을 선교하셨고 또 그 후 2년 반 해서

5년을 선교 하셨는데 그간 교회를 몇 군데나 세우셨나요?

또 다른 분들 중에 교회를 세운 분이 얼마나 계신가요?”

“......................” 묵묵부답(黙黙不答)이시었다.

“저는 용정에 전도사로 결정이 되어 간도로 갔으나

부임 초에 삼도구에 가서 몇 개월을 보내고 그 후에는

투도구 간명학교 교사가 부임하지 않는다고 저를 교사로

몇 달 동안 일하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 후 목사님이 몇 년씩 일을 하셨어도

교인 한 명 생기지 않은 용정에 와서 포교한지 일 년 만에

사 오십 명의 교인이 지금 모이고 있고, 용정 전도회를 통해

”훈출라자“라는 곳에도 70여명의 신도가 모이지 않습니까?”

“.............................” 역시 묵묵부답 (黙黙不答) 이셨다.

“목사님이나 다른 지도자들이 하신 선교결과를

저에게 말씀 좀 해 주십시오.”

역시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나는 내친 김에 더 말씀을 드렸다.

“목사님. 제가 어떤 정신을 가지고 교회 일을 하고 있는지

그 정신만은 참작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사역을 하시는 분들도

다 그런 정신일 것이라 생각되지만 저 정동심,

의식문제(衣食問題)나 해결하려고 사역하는 인간이 아닙니다.

그만큼 아시고 목사님 생각하셔서 처리하시기 바랍니다.”

 

 

그 자리를 물러나오며 이것이 사역의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답답하고 무거웠다. 내가 전(全)간도 책임자이신

최태현 목사님께 말씀드린 다음날, 서선대회장 이근억 목사님이

다시 나를 찾아 오셔서 “최 목사님께 무슨 말을 드렸는가?”물으셨다.

나는 자초지종(自初至終)을 말씀드리고 “왜 그러시는가?”하고 물으니

“최 목사님과 평의원회의 분위기가 전혀 달라졌고 정전도사도 사역자로

유임이 될 것”이라고 말씀 하셨다.

너무도 하나님의 은혜와 이 근억목사님의 사랑이 감사했다. 또

한창 젊은 나이에 있는 나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결정하셨던 일을

그대로 진행하지 않으시고 나에게 다시 목회의 길을 걷게 해 주신

최목사님께도 감사한 마음을 잊을 수가 없다.

한편 어떤 일이던지 사람이 자기 할 일을 떳떳하게,

정직하게 최선을 다하면 누가 무엇이라고 하던 간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함께 하신다고 생각이 되었다.

이날의 일은 후일에 내가 지도자가 되었을 때에

많은 생각을 하게했고,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27년 5월경이라 생각된다.

조선합회 총회가 열렸다. 이번에는 사역자 부인을

동반한다기에 나는 아내와 충실, 정실 두 딸을 데리고 참석했다.

태혁, 태영, 진실이는 이영수 씨 부모에게 돌보아 달라고 부탁을 했다.

이번 총회에는 어머님도 아이들이 보고 싶다고 오셨다.

총회기간 중 간도선교부의 총 책임자 최태현 목사님은

중선대회장으로 영전되시면서 우리에게 간도지역 후임을

추천해 보라는 지시를 하시기에 간도에서 함께 일하는

이준래 씨, 김하서 씨, 최마르다 여사 등이 모여 후임에 대해

의논해 보았으나 이 분들은 누가 누구인지 잘 알지 못한다며

나보고 추천을 해 보라 했다. 나는 김규혁 목사나

홍신우 목사를 추천하니 모두 이의(異議)가 없다하여

두 분을 추천했다. 두 분 중에 김규혁 목사가 될 것 같다는

말이 들렸다. 총회기간 중, 결과가 아직 나지 않은 상태에서

김규혁 목사는 나를 찾아와 간도지역 선교 상황, 사회적 상태,

의료시설 등에 관하여 속속들이 물으셨다.

나는 이분에게서 어떤 일을 결정하기 전에 모든 것을 자세히 알고

유감없는 결정을 해야 한다는 것을 깊이 느끼고 배웠다.

내가 3년 전, 1924년에 간도로 전임될 때 그저 젊은 기분으로

“100만 동포가 사는 곳에 다 안 간다고 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큰소리로 말하면서 무모한 용기만 갖고 훌쩍 간 것이 퍽 어리석은

처사였음을 느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나에게

만 3년이 넘게 모든 일에 함께 하신 것이 너무도 감사했다.

총회에서 김규혁 목사가 간도 책임자로 결의되었다.

 

 

총회 후에 어머님과 함께 고향도 잠깐 방문하여 3년 만에

친척들을 기쁘게 만나고 다시 간도로 향했다.

고향에서 충실이가 산길에 넘어져 이마가 터져 조금 고생을 했다.

용정에 돌아오니 교우들과 세 자녀가 모두 평안하여 하나님께

감사했다. 두 분 노인의 말씀이 “철모르는 세 아이가 오늘 부모님이

용정에 몇 시에 도착한다는 말을 듣고는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다며

시계를 몇 시간 빠르게 돌려놓고 기다렸다.”고 했다.

이 말을 듣고 우리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이런

천진난만한 자녀들을 더욱 정성껏 키워야 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먼 간도 땅에서 나를 지도하시던 최태현 목사님이 떠나시게 되니

마치 부모님이 떠나시는 듯한 마음이었다.

특히 최 목사님의 자당님은 성격이 남성다워서 통이 크시고

특별히 우리 가족을 사랑하시던 분이셨고 최 목사님 사모님도

매우 어지시고 현숙하신 분으로 우리를 가족처럼 사랑해 주시던

분인지라 섭섭한 마음을 표현하기가 힘이 들었다.

최 목사님도 가끔 교회 일로 의견을 달리 한 적은 있으나 그것은

어디에서, 누구하고나 있을 수가 있는 일이었고 그분에 대한

존경심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제 나를 간도로 불러 주시고 지도해 주신 분이

막상 떠나게 되니 마음이 무너지는 듯 했다.

1927년 7월, 최 목사님은 영전되어 떠나시고

후임인 김규혁 목사님은 3개월 후에 부임 하셨다.

그 공백기간에 다른 목회자도 없고, 나에게 임시로

책임을 맡긴 것도 없는데 교회들은 무슨 일만 생기면

나에게 연락을 했다. 당시 간도지역에는 투도구, 용정, 삼도구,

노투구, 팔도구, 훈출라자, 청진 및 길주 등에 교회가 있었다.

 

 

하루는 삼명학교에서, 여선생의 문제가 심상치 않으니

곧 와서 처리하라는 연락이 왔다. 이 여선생도 의명학교

출신이었는데 젊은 과택(寡宅)으로 몸 바쳐 학교를 위해

많은 수고를 했었는데 어찌하다가 이 여선생이 불신자와

이성관계가 있었다는 소문이 교회 내에 퍼졌다.

교회직원회는 나를 투도구로 불렀다. 교회직원들을 만나

의논을 해 보니 일이 심각했다. 그들은 교회직원회에서

결정하여 면직시키기를 원했다. 나는 또 다시 기도를 드리고

이 여선생을 만나 진지하게 상의를 하니 이 여선생 스스로

삼명학교를 사직하겠다고 했다. 교회 직원들은 직원회를 통해

일방적으로 면직을 시키려 했는데 사임을 못 하겠다고 하면

참 일이 커질 뻔했으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크게 다투거나

마음상하는 일이 없이 해결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 드렸다.

역시 기도의 힘이었다.


 

1927년 10월경,

학수고대하던 김규혁 목사님이 간도 땅으로 부임하셨다.

우리 교인들은 전임자와 후임자를 비교하는 폐습 때문에

영적으로 항상 손해를 본다고 생각한다.

전임자이신 최태현 목사님은 부지런히 심방을 하시는 분이었고

김규혁 목사님은 이론 즉 가르치는 일을 잘 하시는 분이었다.

교인들 중에서 방문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또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두 사역자를 비교해 가며

서로 상대방을 비난하며 교인들 사이가 자꾸 벌어졌다.

이 두 사이에서 거중조정(居中調整)할 이는 나밖에는 없었다.

그리하여 둘로 갈라진 교우들의 문제들을 무마하느라고

왔다 갔다 했다. 그러나 서로 자기주장이 옳다고 생각하며

비방을 일삼는 교우들을 단시간에 화해시킨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았다. 생각 끝에 지금 오신 분이 전임자의 장점을

일부라도 취하는 길밖에는 없다고 생각되었고 다만 김 목사님이

오해하시지 않도록 그 뜻을 전하는 길을 찾아야 된다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김 목사님 부부는 이곳으로 부임하시면서 나에게

무슨 일이든지 토진간담(吐盡肝膽)하라 하셨다.

그래서 가끔 두 분이 함께 계실 때에 “김 목사님! 이런 것은

이렇게 바꾸심이 좋겠고 저러한 것은 아니 하심이

좋을 듯 합니다”라고 간곡히 말씀드리면 사모님이 듣기가

거북하신 지 “정 전도사는 그런 잘못이 없소?”라고 하셨다.

나는 젊은 혈기에 솔직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일부러 사모님께

“그 일에는 제가 잘못하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하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무례하고 실례되는 태도였는지..

사모님께서 얼마나 마음이 상하셨을까 생각이 되며

얼굴이 뜨거워진다. 그러나 김 목사님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실 뿐 아니라 언제나 “고맙네!”하시고는 젊은 혈기의 나를

책망하신 적이 없다. 김 목사님은 원래 주관이 강하신 분이시라

“고맙네!” 하시고서 실제로 받아 드리시는 일은 적었지만

젊은 나를 항상 용납하시던 인자한 모습은 언제나 나에게

무언의 교훈을 주셨다. 좋은 선비 같으신 호인이셨다.

 

 

1927년 12월 경.

삼도구에서 교사로 일하시던 장병삼 선생이 주안에서 잠이 드셨다.

장 선생님은 의명학교 2회 졸업생으로 나의 선배이며

박봉에 고생하실 때는 나의 월급을 나누어 쓸 정도로

형제처럼 지나시던 분인데 요절을 하시니 너무 마음이 아팠다.

간도로 막 부임하신 김규혁 목사님과 같이

이분의 장례식을 치렀다. 당장 삼명학교의 교원문제가 대두하자

김 목사님은 후임을 택할 때까지 나에게 삼명학교 일을 보라 하셨다.

나는 170리 길이나 되는 용정에 살고 있었으니 이 부탁은

경우에 합당한 일이 아닌 줄 알면서도 지도자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생각으로 가족은 두고 혼자서 가서 일을 보았다.

먼 거리를 왕래하느라 무리를 했는지 뜻밖에 심한 몸살감기에

걸리게 되었고 소식을 들은 내 아내가 남자들도 오기 꺼려하는

170리 위험한 길을 찾아 왔던 일은 평생 잊을 수가 없다.

김규혁 목사께서도 미안하신지 나의 아내의 내왕 여비를

주시겠다고 하셨지만 내 아내가 나를 찾아온 것은 병문안을 위한

사적인 일인데 그것을 공금에서 받는다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 사양을 했다. 

  • ?
    명지원 2012.02.14 20:02

     

    교회의 모습은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군요. 사람 사는 곳이니까요. 마지막 부분에 있는, 사모님의 일처리 자세를 통한  '자녀에 보내는 지혜의 말씀'이 마음에 깊이 와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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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71 또 다른 새로운 예언 1 로산 2012.02.08 1305
2770 또다른 예언 바이블 2012.02.08 1218
2769 또하나 예언 바이블 2012.02.08 1262
2768 나는 오늘 예언한다. 1 바이블 2012.02.08 1250
2767 성경에 빠져 죽을 수도 있다 10 김주영 2012.02.07 1637
2766 솔직하게 말하면 사람들이 드리는 대부분의 기도는 응답받지 않습니다. 5 김원일 2012.02.07 1647
2765 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16 1 정태국 2012.02.07 1539
2764 박원순한테 개××? 이게 울나라 극우목사 수준입니다! 9 서프라이즈 2012.02.07 1546
2763 소망에 대하여 - 천국이 아니다 3 아기자기 2012.02.06 1643
2762 다시 재림운동을 해야 할 때 I ,II - 저는 하용판 전도사님이 침례요한의 마음과 합한 분같읍니다. 1 J J 2012.02.05 2390
2761 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15 1 정태국 2012.02.05 1543
2760 낚시하는 노인네 5 강철호 2012.02.04 1476
2759 제발 좀 배워라 ! 3 김주영 2012.02.04 1940
2758 평화교류협의회 총회를 알려드립니다. 2 명지원 2012.02.04 1620
2757 박명호가 마귀라고? 우끼고 자빠졌네 4 유재춘 2012.02.03 1857
2756 "조중동" 의 실체 2 필리페 2012.02.03 1676
2755 안식일에 대한 명 설교(퍼옴) 김기대 2012.02.03 1491
2754 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14 2 정태국 2012.02.03 1336
2753 사랑에 대하여 - 에로영화 촬영불가 상영금지 4 아기자기 2012.02.01 2224
2752 소금만 먹다 병이 난 사람 돌베개 2012.02.01 1453
2751 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13 2 정태국 2012.02.01 1469
2750 가인과 아벨 로산 2012.01.30 1655
2749 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12 1 RayC 2012.01.30 17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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