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 #11

by 정태국 posted Jan 28, 2012 Likes 0 Replies 3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11


 

( 정든 간도 용정을 하직하고 고국을 향해 떠났다. 중략...

하나님께서 모든 일에 협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고

길을 열어 주셨으니 감사를 드리었다. 회고록 연재#10 끝부분)

 

 

제 5 부. 조선(朝鮮)목회로 인도하신 하나님


 

1. 원산으로 부임

 

 

아내의 병 회복과 갓 난 태중이에게 생명이 되는

작은 형수님의 모유가 너무 귀한지라 나는

모든 가족을 고향집에 두고 임지인 원산으로 갔다.

교우 김진택 씨가 자기 집에 유하도록 허락하여

두 달 남짓 신세를 졌다. 부임을 하고 보니

분위기가 참으로 이상한 교회였다. 그간 이 교회는

수많은 사역자들이 면직을 당해 떠나곤 해서 결국

“사역자 없이 지나는 것이 교회에 훨씬 편안하다.”는

분위기가 형성된 교회였다.

그런 귀띔을 받았으나 성심성의껏 일을 하니

신자들도 조금씩 영적으로 안정이 되어 가는 듯 했지만

불안한 마음을 버릴 수가 없었다. 심지어 교인들은

교회의 관습이라 하며 매 화요일마다 모이는 삼일예배 후에는

전도사인 나를 제쳐놓고 자기네끼리 성경연구회로 모이고 있으니

불안한 생각으로 관망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는 자기들끼리 전도서를 공부하다가

“일천남자 중에서 하나를 얻었거니와

일천 여인 중에서는 하나도 얻지 못 하였느니라”

(전도서 7:28)라는 성경구절을 가지고 “이것은 하나님이

여자를 너무 무시한 것이 아니냐?”라고 토론을 하다가

서로 옥신각신 하게 되더니 심한 의견충돌로

거의 다투게 되었다. 그러다가 결국 나에게 묻기를

“정 전도사, 당신은 이 구절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기에 나는 “그 구절은 하나님께서 여자를

무시한 것이 아니라 남자 중에서 예수님이 탄생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했더니, 신자들은

“그러면 그렇지, 젊은 전도사가 무엇을 알겠느냐?”는

표정으로 인정은 커녕 비웃음에 가까운 모습들이었다.

결론이 없이 지나다가 얼마 지나서 어떤 유력한 목사가

교회에 오시자 이 구절을 가지고 그분에게 물으니

내 대답과 일치한 것을 보고는 드디어

나를 믿기 시작하는 눈치가 보였다.

정말 힘든 분위기의 교회였다.

 

 

두 달쯤 후에, 내 아내는 여섯 아이들과

조카딸 태실이를 데리고 원산으로 와서

아홉 식구가 되었다. 나는 원산 장촌동에

어떤 큰 기와집에 세를 들었는데 우리 외에

교인이 아닌 열 세대가 함께 살았다.

내가 살던 중 이렇게 큰집에 살기는 처음 이었고

또 평생 처음으로 전기를 사용케 되었으니

얼마나 편리하고 밝던지....온 가족이 좋아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는 여러 사람들이 나에게

“어젯밤에 당신 집에는 창문에 누가 모래를

자꾸 뿌려대지 않았는가?”하면서

“자기들은 모래귀신이 계속 창문에 모래를 뿌려

무서워서 한 잠도 못 잤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니 무엇 하는

사람이냐 물었다. 안식일교회 전도사라고 했더니

“아, 그러니 잡신들이 당신 집은 침해를 못했다!”고 했다.

그렇게 심하게 미신을 섬기면서도 하나님의 보호는

인정하는 순박한 마음들이었다.

 

 

하루는 우리 태혁이와 태영이가 뒤뜰에서 놀다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신주단지를 발로 차서

그 안에 서 나온 엽전들을 가지고 놀았다.

이 집에 함께 사는 모든 사람들이

“이제는 벌 받게 되었다”고 난리가 났다.

나는 “이 기회다”하고는 참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이야기 해 주었으나 어느 누구도 믿지 않고 불안해하더니

며칠이 지나도 아무 일이 없으니 모두 안심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신앙을 받아 드리려고 하는 자는 없었다.

 

 

우리가 이 곳에 사는 동안 가능한대로 아이들을

예의 있게 가르치고 규칙 있는 생활을 하도록

습관을 길러 주었더니, 좋은 감화를 끼친 모양인지

인근에 있는 까다로운 일본 집에서도 “그 집은

조선 사람이지만 아이들을 잘 기른다.”하면서

자기네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갖도록 허락을 했다.

이러한 허락이 반가운 것이 아니라 이 곳에서의 경험을 통해

목회자는 말보다 실생활로도 다른 사람에게 감화를 끼쳐야 된다고 느꼈다.

 

원산 남산동에 있는 우리예배당은 비가 새고

지붕에는 노랙이 버러지가 들끓는 이십 년도 더 된

누추하기가 짝이 없는 초가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인들이

가난하니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데 열세 째 안식일연금 중에

한 몫이 우리 조선에 배당이 되면서 중선대회에 분배되어

원산에 예배당을 건축하라는 통지가 왔다.

온 교인의 기쁨은 말로 형용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건축업자 구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물론 대회장도 경험이 없어서 건축위원을 정하지고 않고

대회장이 직접 서울과 원산을 내왕하시면서

예배당을 건축하기로 했다. 하루는 대회장님이

직접 청부업자와 의논하다가 의견충돌이 생겨

청부업자는 대회장에게 “이놈!, 저놈!”하며

언성을 높이더니 멱살까지 잡는 사태가 되었다.

대회장은 당황하여 말도 못하시게 되고,

나와 교인 두 명이 나서서 힘을 다하여

막무가내인 청부업자를 겨우 뜯어 말리고는

잘 타일러 위기를 모면하였다. 결국 대회는

오까무라라는 일본사람과 건축 계약을 해서

원산 남산동 27번지에 근 30평의 아담한

시멘트 블록으로 양옥집을 건축하기로 했다.

계약을 하고 나서 알고 보니 이 일본 건축가는

나쁜 쪽으로만 이력이 나서 돈을 받고도 건축을 질질 끄는,

좋지 않은 평판을 가진 자라했다.

우리가 경험이 없는 탓이니 어찌 하겠는가?

 

 

모든 교우와 의논을 하여, “이미 계약은 끝난 일이니

간절한 기도로 하나님께 의탁하자” 하여 모두

기도에 매달렸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건축의 완결을 보던 날 모든 교우의 기쁨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교회건축은 물론

 

 

이런 경험을 통해 사역자와 교우들이 하나가 된 것이야말로

가장 귀한 하나님의 은혜라 생각이 되었다. 양옥교회당이

들어서자 신자들이 너무 기뻐서 예배당 낙성(落成)기념으로

에스더에 관한 연극을 하자고 계획하면서 전도부인 오홀다 씨를

에스더로, 나를 아하수에로 왕으로 배역을 정하였다.

나는 이일만은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아 사양에

사양을 거듭하여 겨우 모면하였다. 나는 내 배역을 면한 것만

다행이라고 생각한 것이 실수였다. 교우 중에서

예배당에서 이런 연극을 한 것이 좋다, 나쁘다 하여

의견대립이 생겼다. 당시 교인들의 생각을 감안하여

연극을 할 것이면 반대하는 교우들을 이해시키던가,

아니면 연극을 하려던 사람들을 설득시켜 중지하게 했던가

했어야 하는데도 나만 그 배역을 모면한 것이 감사해서

실수를 했던 것 같다. 무슨 일이던지 교회의 평화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과 교인들의 영적인 정신연령에 따라

심사숙고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당시에 웬만한 교회는 종각에 큰 종을 매달고 집회 때마다

종을 울리는데 우리 교회는 경제형편이 빈약하여

종을 마련하지 못했다.

이듬해인 1931년에 합회총회가 소집되는 기회에

전도부인 오홀다 여사가 모금을 하여 큰 종을 구입해서 달았다.

그런데 문제는 예배당은 건축했는데 사택이 없으니

예배당 관리가 막연했다. 예배당과 내가 살고 있는 장촌동은

이 십분 이상 걸리는 거리였고 나보다 더 가까이 사는 교인이

없었다. 그 추운 겨울밤에도 교회 방면에서 불이 났다하면

자다가도 일어나서 교회로 뛰어 가곤 했다. 교회를 건축할 때는

항상 건물관리도 생각하여야 할 것을 배웠다.

원산교회는 관리문제로 많은 애를 먹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배당을 잘 보호하여 주신 것을 감사드린다.

 

 

한 가지 잊을 수 없는 일은 건축에 관한 경험이 없는지라

예배당에 전기를 가설할 때 전구를 몇 촉(와트)짜리를

사용하는 것이 좋은지 아는 이가 없었다. 그저 촉수가 높으면

밝다고 하는 것만 알아서 모두 백 촉 짜리를 쓰자 해서 그렇게 했다.

그러나 첫 달 전기 요금이 팔 원 이상이 나와 모든 교우가

깜짝 놀랐던 일은 지금도 어이가 없고, 그저 쓴웃음이 난다.

촉수 높은 전구가 전기를 더 많이 사용한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당시에 각 대회는 “지방목사” 제도를 만들어서 한 목사가

그 지방 여러 교회를 담당케 했고 전도사는

그 지방 목사의 지도를 받게 되어 있었다.

원산교회는 함흥지방 목사인 남상익 목사의 관할 하에 있었는데

교회건축 등 몇 가지 일을 마무리하고 생각해 보니

내가 원산교회에 부임한지 일 년이 되도록 지방목사가

한 번도 원산교회를 방문한 일이 없기에 그 연유를

신자들에게 물은즉 원산교우들과 지방목사 사이에

감정이 좋지 않아서 그렇다고 말을 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마음이 철렁 했다.

처음에도 말했지만 원산교회는 “사역자가 없는 것이 더 좋다.”는

사상이 편만하여 대회나, 대회가 보낸 사역자와 감정이 좋지 않았다.

내가 전도사로 부임했을 때에 3일 저녁 예배 후에는

나를 무시한 채 교우들만 앉아서 성경 공부를 해댈 지경이었으니

말해 무엇 하겠는가? 이제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 문제를

해결 짓지 않고는 영적부흥이 없다고 판단되어 이를 위해

결심하고 기도 드렸다. 얼마 후, 연중행사인 사경회 시기가 되었는데

사경회 강사는 대회에서 결정하여 각 교회에 통보를 하는데

원산 교회는 교회에서 사경회 강사를 택하라는 통지가 왔다.

얼마나 원산교회가 대회에서 다루기 어려운 교회였는지를

말해 주고도 남았다.

 

 

원산교회는 이 사람, 저 사람에 관해 이야기 하다가

결정을 못보고 드디어 전도사의 의견은 어떠냐고 묻기에

나는 기도의 응답이라 생각하고 “여러분도 저와 같은 생각이라

믿고 말씀드리는데 교회도 건축을 했으니 우리가 지방목사와

특별한 문제가 없다면 이번에 지방목사를 모시고 사경회도 하고

어떤 문제가 있다면 이번 기회에 푸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의외에도 그렇게 해 보자고 의견이 통일이 되었다.

아마 교회건축 등을 통하여 우리가 한 마음이 되었고

또 기도의 응답이라 생각이 되었다.

그래서 지방목사인 남상익 목사를 사경회 강사로 모시게 되었다.

남 목사는 사경회에서 하고자 할 욕(欲)자(字)와

욕심 낼 욕(慾)자를 가지고 창세기 2장과 3장을 강의하여

온 교우들이 전에 없는 감동을 받는 동시에, 숙제로 내려오던

감정 문제도 봄눈과 같이 스르르 녹는 경험을 보았다.

온 교회가 기뻐하고, 지방목사도 기뻐하고,

대회도 기뻐하게 되었다. 그 후 지방목사는

원산교회를 자주 방문하게 되어 교우들과 더욱 친근하게 되어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했다.

한편 원산교회 소속 원명학원이라는 학교가 있었는데

교사 두 분이 다 총각으로 매우 다루기가 힘든 상태였다.

교인수가 워낙 적어 재정이 넉넉하지 못해

제대로 대우를 해 주지 못한 이유라 생각되었다.

그러나 모든 교우들의 마음이 일치단결하게 되자

큰 어려움 없이 유지해 나가게 되었다.

 

 

1930년 하반기에 중선대회장과 서선대회장 두 분이 서로 바뀌면서

서선대회장 이근억 목사가 중선대회장으로 오셨다.

그리고는 곧 내가 합회평의원으로 선정 되었다. 내 생각에는

이근억 목사의 강력한 추천이 있었던 것이라 생각이 된다.

대회는 곧 나에게 서울 청진동 교회로 전근하라는 통지를 보냈다.

누구나 바라는 좋은 기회이며 나도 물론 서울 근무가 싫을 리 없었다.

그러나 “나는 본래 시골 태생이라 서울 같은 도시로 가기가

적당치 않다”는 구실로 거절하는 해답을 보냈더니 대회장은

“내가 도와 줄 터이니 아무 염려 말고 오라”고 서신을 다시 보냈다.

이번에는 “내 아내가 건강이 좋지 못하여 서울로 못 가겠다”고 했더니

“그러면 더욱 서울로 와야 할 것이 아니냐? 서울은

경성 요양병원이 있으니 서울로 오는 것이 아내를 위해서도

좋을 것이다.”라는 서신이 또 왔다.

다시 나는 “내 아내가 서울로 가기를 원치 않으니

그대로 원산에서 목회를 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했더니

이 목사님은 더 이상 아무 말씀도 아니 하셨다.

나로서는 대회의 전근명령에 대하여 이렇게 고집스럽게

거역하여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더구나 이런 중대한 문제를

아내와 일언반구(一言半句)의 의논도 없이 내 독단적으로

선결(先決)한 것은 옳은 일은 아니지만 나로서는 중대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에 누구나 서울 가기를 희망하는 때인지라

아내에게 말하면 서울로 가기를 원할 것이며,

나는 소신을 굽힐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이같이 대회의 명령을 피한 이유는 이때 우리 교회 안에도

당파가 생겼고 두 대회장님도 대회 내에 당파를 구성했다는 이유로

서로 전근케 되었다는 말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그 당파의 핵심지역으로 알려진 서울에 가서

휘말리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당파가 생겼을 때에

어떤 파에 속하지 않고 일 한다는 것은 매우 외로운 일이지만,

특별히 교회 내에서 당파를 만드는 일이나 또 거기에 속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이 되어 그리했고 지금도

그렇게 확신하고 있다. 내가 서울로 가기를 계속 거절하자

천만 뜻밖에도 우리나라 북쪽 끝인 함경북도 청진으로 전근하라는

의외의 통지를 받게 되었다. 이것까지 거절할 수 없어서

명령에 순복(順服) 하기로 결심했다.

말썽 많다는 원산교회에 와서 예배당도 신축하고 부흥이 시작되며

특히 온지가 1년도 못 되는데 전근이라니 너무 의외였다.

이제 모두 정이 들고 한마음으로 일할 때가 되었는데

떠난다니 너무 섭섭했다. 그러나 대회의 명령을 따라

떠나기로 다짐하였다. 외로운 결심이었다.

 

 

2. 청진

 

 

1931년 5월, 정들었던 원산을 떠났다.

내가 갑자기 전근케 된 청진교회는 신자들이

사역자를 가운데 두고 편당(偏黨)이 생겨 결국 교회가

두 쪽이 나 버린 곳이었다. 아무 것도 모른 채

청진교회로 부임하여 본 즉, 40여 명되던 교인이

교회가 두 쪽이 나면서 사역자를 배척하고 따로 나간 신자가

근 삼십 명이고 교회를 지키는 신자는 불과 십여 명 밖에 없었다.

이런 형편이니 나를 맞이해 주는 신자도 별로 없고

따라서 당장 들어 갈 집도 없었다. 그 당시에는

교회에 속한 사택이 없으니 사역자들이 전근할 때에는

교우들이 도와주지 아니하면 거할 집 문제로 고생을 많이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간도에서부터 나를 도와주다가 떠나버린

손성칠 씨가 이곳에 계신 것이 아닌가?

내 가족을 그의 집에서 함께 지내자며 데리고 갔다.

나는 당장 거할 집이 없으니 감사 하기는 한데,

그 집 식구도 많은데 내 집 여덟 식구가 들어가게 되니

얼마나 미안하고 내 마음이 괴로웠는지 몰랐다.

그러나 그 어려운 때에 서슴없이 내 가족을 맞이해 준

손성칠 씨가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르겠다.

 

 

이때에 조선합회 안식일학교부장은 왕대아 여사이고

부부장은 오영섭 씨였는데, 알고 보니 청진교회가

둘로 나뉘어있으면서 각각 자기편의 성적을 좋게 하려고

안식일학교 기말보고를 따로 하면서 숫자는

교회가 갈라지기 전의 전체 교인 숫자를

서로 적어 보내고 있는 형편이었다.

합회 안식일학교부에서는 이러한 기말보고를 받아서는

두 가지 보고를 합쳐 청진 교회 상황이라고 통계보고에

발표하고 있었다. 그러니 실제보다 두 배가 불어나 있었다.

나는 부부장 오영섭 형제에게 부탁하여, 나를 믿고,

내가 청진교회에 부임한 때부터는 교회를 떠나서 따로 모이는

그 들의 보고는 우선 통계보고에 넣지 말라고 부탁했다.

그러니 내가 부임하여 처음으로 제출한 제 2기 말 보고는

숫자가 형편없이 떨어진 보고이었다.

1931년 제 2기말보고를 받은 왕대아 부장은 나에게

추상(秋霜)같은 질책의 서한을 보내왔다. “사역자를 파송할 때는

교회를 발전시키라고 보내는데 당신은 청진교회에 가자마자

안식일학교학생이 그렇게 줄게 되다니 무슨 사역을 그렇게 하고 있으며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당장 알리라”고 하는 편지였다.

나는 “당신이 합회의 부장으로 숫자가 줄어드니 그럴 것이지만

파견 받은 사역자가 그런 감축된 보고를 하기로 결정하기에는

정신적으로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나 생각하여 보았는가?

누군들 좋은 숫자를 보고하기가 싫겠는가?”라고 하면서

이번 기말보고에 대한 사정을 설명하면서 “그간 당신께서는

청진교회가 두 파로 나뉘어 있으면서 서로 계속

잘못된 보고를 하는 것을 알고 있었는가?

내가 정식 사역자로 임명을 받아 와있으면서 교회를

반대하고 떠나 간 이들의 보고를 그대로 합회가 통계에 넣고

있는 것을 시정해 달라는 것이 잘못인가?” 라고 설명을 하면서

“앞으로도 이렇게 보고 할 수밖에 없으니 그렇게 알라!”고

부탁을 했다. 나는 교회에 남아있는 이들과 의논하여,

교회를 나간 분들에 대해 한마디도 비난하지 말고

힘을 합하여 열심히 일하자고 했다.

그러자 정신적으로 교회가 점점 안정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떠나갔던 이들의 대표 격인 사람이 찾아와서

“우리가 다시 본교회로 돌아올 마음이 있는데 받아주겠느냐?”라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대답하기를 “내가 알기에는 어느 누구도

당신들에게 나가라고 한 이가 없으니 물을 필요도 없이

다시 들어오십시오.”라고 했다. 얼마 후에 나갔던 그네들

전부가 다 돌아왔다. 이런 기쁨은 어찌 말로 표현 할 수가 있으랴?!

서로 마음 아프게 지내다가 진심으로 자원하여 돌아 왔으니

우리 모두는 손을 마주 잡고 눈물을 흘리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교회는 갈라지기 전보다 더 한마음이 되고

완연(宛然)히 갱신된 느낌을 갖게 되었다.

 

 

어느 안식일 아침, 예배당에 가기 위해 온 가족이

아침밥을 바쁘게 먹는 중에 누가 문을 두드렸다.

사연인즉 자기는 포항동에 있는 장로교인인데

자기 교회목사의 말씀이 묵시록은 안식일교회에서

잘 알고 있다하여 찾아 왔다는 것이다.

잠시 담화를 한 후에 그분 말씀이 이제는

안식일 교회의 사역자를 찾았으니 다음 토요일에는

틀림없이 교회로 찾아오겠다고 말하고 돌아가셨다.

그리고 그 분은 약속을 지켰다. 그리고

두 번째 안식일에도 교회를 찾아 오셨다.

중선 대회장 이근억 목사는 나를 억지로 청진으로 전근시킨 것이

미안해서인지 내가 전근된 후 곧 청진교회를 방문하여

안식일설교를 하시게 되었는데, 바로 그 장로교인이

두 번째 참석하시던 날이었다. 설교가 끝난 후,

나는 그간 침례를 받기 위해 준비한 분들을 상대로

광고하기를 “오늘 침례식이 있으니 침례 받으실 분들은

준비를 해서 나오라”고 하면서 침례 터로 가는 길 안내광고를 했다.

그런데 이 장로교인이 모든 준비를 갖추고 침례를 받겠다고

침례장소에 나와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 일을 대회장에게 말씀드리니

“나는 대회장으로서 청진교회의 일은 청진교회에서

처리하는 대로 따라 갈 뿐”이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침례 터에서 임시 교회직원회를 열고 의논을 했다.

몇 명 안 되는 교회 직원들이지만 모두 여출일구(如出一口)로

사도행전에서 내시가 침례 받게 된 실례를 들면서 갑자기 나오신

그 분에게도 침례를 베풀자! 라고 의논이 되었다.

이 근억 목사도 전례는 없지만, 좋다고 하시면서

기꺼이 그 분에게 침례를 베푸셨다.

나는 물론 온 교인이 기쁨과 감사함으로 감동을 받았다.

 

그 다음 안식일, 나는 교인의 특권이자 의무인 십일금에 대한

설교를 했다. 설교가 끝나자 침례를 받으신 그 장로교인이

50원이 넘는 금액을 십일금으로 드리는 것이 아닌가?

교사의 월급이 십여 원 할 때이니 50원은 대단히 큰 금액이었다.

오히려 내가 걱정이 되어 “왜 이렇게 많은 십일금을 드리는가?”하고 묻자

“내가 예수의 이름을 알게 된 때부터 수입을 생각해 보니

이만큼은 드려야 되겠기에 이렇게 기쁨으로 드립니다.”하는 것이었다.

이일로 온 교우가 또 한번 감동을 받게 되었다.

이분은 교육을 많이 받은 분은 아니지만 할 수 있는 대로

성경의 지시를 따라서 살겠다고 하시더니 청진교회에서

물질적으로는 물론 영적으로 사표(師表)가 되는 형제가 되었다.

참으로 감사하고 귀한 일이었다.

이런 일들을 통해 교우들의 마음이 점점 하나로 되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 드렸다. 청진교회가 이렇게 갱생 부흥케 되고

헤어졌던 교우들이 돌아와 모든 교우들이 화기애애한 가운데

지나게 되니 점점 신자수도 늘어났다. 이런 보고를 받은

합회 안식일학교부에서는 감사하다는 편지를 보내 주었다.

교회가 화합하고 보니까 부흥하는 일은 저절로 따라온 결과였다.

가정이나, 교회나, 사회가 모두 잘 화합할 때는 반드시

부흥과 융성(隆盛)이 있게 됨을 깊이 느꼈다.

그래서 앞으로 할 수 있는 대로 어디를 가든지

평화스러운 교회를 만들기 위해 힘쓰기로 다짐했다.

 

 

1931년 제4기 어느 안식일,

나는 설교를 마치고 교우들과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리가 분열된 쓰라림에서 이제 이렇게 융합케 되는

기쁨을 보았으니 이 보람된 일을 기념하는 무슨 표시를 함이

좋지 않겠는가?”라고 이야기하자 모든 교우들의 반응은 매우 좋았다.

그러나 어떤 일을 할 것인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여

시간이 꽤나 지났다. 그러자 한 형제가 전도사는 어떤 좋은

의견이 있는가 물어왔다. 나는 “시간도 많이 지났으니

다음에 정하자.”고 이야기 했으나 모든 교우들이

“이렇게 좋은 회의는 연기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이었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있는 서울 회기동교회, 순안교회를 가보니

의자를 만들어 편안한 자세로 예배를 드리는데 우리도 한번

열심을 내어 의자를 만들어 모두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어떠한가?”라고 한즉 모든 교우가 찬성을 했다.

그래서 의자를 만들기로 결의 중인데 한 형제가 일어나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나는 이렇게 반대되는 두 가지 의견이 나오면

다수결로 정할 것이 아니라 모든 교우가 다 찬성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에

그 분이 동의하기까지는 결정을 보지 말아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반대한 그 형제는 그렇게 유식한 분은 아니나

신실하신 분으로 그냥 이유 없이 반대하실 분이 아니라는 생각에

그 형제의 의견을 물었다.

그분은 ”우리는 재림교인으로 재림을 고대하며

또 불원(不遠)하여 재림하실 것이라고 믿는 우리가 재정을 들여

의자를 만들 것이 아니라 초석(草席)에 앉아 예배하다가

주님을 맞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라는 의견이셨다.

뿐만 아니라 의자를 만들려면 몇 달이 걸릴지도 모르니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참 난감했다.

 

 

사람은 말 한마디에도 생각이 바뀔 수 있다고 느껴진 나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 형제의 말씀에 공감을 나타냈다.

그리고 “과연 주님은 속히 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실 때에 금전은 가지고 갈 것이 못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가지고 갈 수도 없는 돈으로 의자를 만들어서 온 교우들이

편하게 쓰다가 버리고 가는 것이 어떠하냐?”고 했다.

그러자 그 형제가 갑자기 두 손을 높이 들면서,

큰 소리로 “의자를 만드는데 동의합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맘 상하지 않고 만장일치로 의자를 만들기로 하니

반대했던 그 형제가 제일 앞장서서 일을 주장하여

4인용의자 삼십여 개를 밤낮으로 일하여 단 이주 내에 완성했다.

교회일은 다수결로만 처리하지 않아야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기쁜 마음으로 완성한 의자에 앉게 된 모든 신자들이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이렇게 의자를 놓고 예배드리는 교회가

한국재림교회로서는 청진교회가 세 번째이고

청진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의자를 만든 교회가 되었다.

아직도 기억에 흐뭇하게 남아있는 감사한 일이다.


 

청진은 함경북도에서 손꼽히는 대도시로 큰 예배당들이

여기저기 서 있었다. 그 중에 장로교회당은 청진에서

가장 좋은 위치에 크게 지어져 있었고, 성결교회는

우리교회 위에 높은 자리에 크게 지어져 있었다.

우리교회는 청진 신암 1동에 나지막한 곳에 조그마한

재래식 건물로 보잘것없는 교회당이었지만 이제는 지저분하던,

짚으로 된 초석(草席)은 없고 깨끗하게 의자를 갖추어놓아

아담하게 보였다. 그래서 다른 교파 청년들이

많이 내참(來參) 하게 되었다. 다른 교파의 청년층을 통해

각 교회에 대한 평이 돌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놀기 좋은 장로교회”, “도깨비교회 성결교회”,

“변호사 교회 안식일교회”라는 평이었다.

또 안식일교회는 “예배당에 의자를 만들어 놓고 잔뜩 다리 내 뻗고

예배드리는 불경스러운 교회”라는 질투 섞인 평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교회에 대한 평은 어느 정도 좋은 편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다른 교회 청년들이 우리 교회로 오게 되어 교인 수는

근 백 명으로 늘었으니 참 기쁘고 감사했다. 교회당은

사치스러워서는 아니 되겠지만 모든 시설을 깨끗하고

편하게 해 놓고 예배를 드린다면 다른 사람에게 좋은 감화를 주는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이 되었다.


 

큰아들 태혁이, 둘째 아이 태영이, 맏딸 진실이,

이 세 아이는 원산에서 원명학원이라는 우리교회에서 경영하는

사설기관에서 공부했었는데 이곳 청진 보통학교에

입학시킬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또 입학이 된다고 해도

안식일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아이들 교육문제 때문에 걱정이 태산 같았다. 그러나 기도하고

힘써 알아보니 청진에서 한 오리를 걸어가서 기차를 타고 가면

수성이라는 곳에 수성사립보통학교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곳을 찾아가서 교장과 다른 선생님들과 의논해 본즉

입학과 안식일 문제를 허락해 주었다. 세 아이들도 청진에서

그 학교까지 거의 한 시간이나 걸리지만 안식일을 지키게 되고

또 나라에서 인정하는 사립학교에 가게 되었다고 기쁜 마음으로

다니는 것을 보니 원칙대로 살려는 사람의 앞길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감사하면서 아이들을 수성사립보통학교에 보냈다.

 

 

청진교회에서도 한때는 “함명야학원”을 경영했던 일이 있었다.

청진교회가 부흥함에 따라 함명야학원을 다시 열고 학생을 모집하니

삼사십 명의 여학생들이 모집되었다. 많은 수의 학생이 지원하니

선생이 부족하여 어려움을 당했지만 많은 교우유지들이

적극적으로 도와 이문제도 해결이 되었다.

그러나 전부 여학생이고 야학이라서 하학(下學)후에 밤길을 가야 하는데

길가에 난폭한 무리들이 있어서 문제가 되었으나

선생들이 희생하여 거리가 먼 학생들은 집에까지 데려다 주어

문제도 해결되고 또 학생들은 교사들을 전적으로 믿고 따르게 되었다.

결혼할 연령에 달한 학생들은 선생들을 믿고 결혼문제도 의논하고

선생들도 이런 학생들을 잘 지도하여 좋은 결과를 얻고

그 중에 훌륭한 교인이 된 사람도 적지 않았다.

우리는 아무도 신문사에 연락한 일이 없는데,

청진에서 유일한 일간지인 “북선일보”에서

우리 함명학원에 대해 아주 칭찬하는 기사를 실어 주었다.

그 결과 청진사회에서 우리 교회와 학교가 발전하는데

상당히 좋은 영향을 끼쳤다. 학부형 중에서 누군가

신문사에 연락한 것이라 생각이 된다. 교회는 그 지역 사회를 위해

항상 무엇인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Artic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