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씨가 계룡산에서

by 로산 posted Jan 28, 2012 Likes 0 Replies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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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씨가 계룡산에서



내가 어릴 때에 전봇대에 붙은 찌라시에서

태극기가 뒤에 있고 그 앞에 한복을 입은 어떤 건장한 남자가

턱 버티고 섰었는데

그가 성은 이씨지만 정감록이 예언한 계룡산에서 수도한 한국의 정도령인

재림 예수라는 것입니다


그 때 느낀 것은

왜 이씨가 정감록의 정도령인가?

왜 한국 사람이 자주 예수라 하며 한국이 동방이라 하는가?

정감록과 성경의 연관성은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도 인생의 황혼기를 맞으면서

수많은 정도령도 만나고 자칭 예수나 성령 그리고 하나님도 봤습니다

학교를 다닐 때 교수님께서

“미국 텍사스 사막에 가면 지금도 수백 명의 광야의 예수가 산다”는 겁니다

재수가 좋으면 한탕 할 수 있고 옴 붙으면 그렇게 사는 것이란 말입니다


정감록의 원전 격인 감결은 조선 시대 형제인 이심, 이연과

조선 멸망 후 일어설 정씨의 조상이라는 정감이

금강산에서 마주앉아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엮어져 있습니다.

그 내용은 조선 이후의 흥망대세를 예언하여 이씨의 한양도읍 몇 백 년

다음에는 정씨의 계룡산도읍 몇 백 년이 있고,

다음은 조씨의 가야산 도읍 몇 백 년,

또 그 다음은 범씨의 완산 몇 백 년과

왕씨의 재차 송악(개성) 도읍 등을 논하고,

그 중간에 언제 무슨 재난과 화변이 있어

세태와 민심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차례로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럼 왜 계룡산의 도사를 기다리는 것이냐 하면 아시다 시피

한양 도읍 시대가 지났기에 계룡산 도읍 시대를 기다린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일제 시대에 그 고난을 피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계룡산으로 갔습니다


그 책이 비록 허무맹랑한 도참설·풍수설에서 비롯된 예언이라 하지만,

당시 오랜 왕정에 시달리며 조정에 대해 실망을 느끼고 있던

민중들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하였습니다.

실제로 광해군, 인조 이후의 모든 혁명운동에는

거의 빠짐없이 정감록의 예언이 거론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반면 우매한 백성들이 이 책의 예언에 따라 남부여대하고

십승지지의 피란처를 찾아 나서는 웃지 못할 희극을 수없이 연출시킨 것은

이 정감록의 악폐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책인 정감록이 만들어지고, 민간에 숨겨져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은

이른바 반 왕조적 사회 구성원에 의하여 가능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즉, 사회 변동의 와중에서 몰락한 양반들이 풍수지리설이나

음양오행설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왕조 교체와 사회 변혁의 법칙을 우주론에 입각한 운세의 법칙과

결부시키려 하였다고 보는 분도 있습니다.

또한, 정감록은 억눌림 때문에 공식적으로 인쇄된 것이 아니라

사본으로 수전되어 내려왔으며, 그동안 이들에 의하여 첨삭이 가해졌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내용은 난세에 풍수설에 따라 복정된 피난처에서만 복을 누릴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정씨성의 진인이 출현하여 이씨 왕조가 멸망하고

새로운 세계가 도래할 것을 중심으로 하는 예언입니다만

아시다시피 그 다음은 왕조가 아닌 민주국가가 건설되었습니다


은둔 사상

입산 사상

이런 것들은 일종의 현실 도피입니다

나만 아는 예수

나만 알아야 하는 예수

나만 구원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기독교

이런 사상들이 우리 주위에 머물고

그리고 다른 의미로는 새로운 구세주를 만드는 시대가 된 겁니다


한국 사회에서 출몰한 종교운동은 거의가 동학을 기점으로 했고

또한 정감록과 한 맥으로 통하고 있다고 할 만큼

민중의 의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유명한 대진대학을 거느린 대순진리회 등은

바로 동학의 원조인 강증산교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감록은 신비하고,

어떻게 보면 황당무계하기 그지없는 전통사회의 예언서에 불과할지도 모르나,

실제는 조선시대의 사회사상사를 엮는데 불가결한 사료로 평가됩니다.


정감록적인 예언

그런 예수 재림이어서는 안 됩니다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했다고 꼭 구름을 타야 하는 성경해석

시대적 모순을 그대로 대입 시키는 예언해석은

잘못하면 성경을 정감록 수준으로 낮추는 일을 하고 남을 겁니다

우리 주님이 구름 타고 오신다고 구름을 탄다고 해석하는 학자는 없습니다

우리 교단의 성경 주석에서도 그런 해석은 하지 않습니다

정씨가 온다고 이씨가 정씨 흉내 내는 세상에서

구름을 탄다고 했다니 꼭 구름을 타는 것이 아님을 아셔야합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예언을 연구합니다

그것 잘못하면 추배도 비슷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계 22: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그런데요

그 예언서를 필사하던 어떤 이가

이 말씀만으로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다시 이렇게 가필합니다

계 22:18-19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그 가필로 인해서 더 오랜 시대의 어떤 사본에는 이 구절이 없는 겁니다


예언서는 이렇게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주관적으로 해석 하면 자기주장이 항상 옳아 보입니다

한 백 년 전에 우리 선구자들이 신학적 지식 없이

저들이 가진 지닌 것만으로 예언 해석했던 것이

우수한 성적(?)으로 우리에게 전해 질 수 있습니다

그것 가감하는 것 반역으로 몰리는 교회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교단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도 그 소설 같은 정감록을 지녔습니다

누가 날 보고 그럴 겁니다

“장로라면서 성경의 예언서를 정감록에 비교하다니...”


사람들은

정감록 읽고 충청도 산 속으로 들어갑니다.

우리도 예언서 읽고 전국의 산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예언서는 산속으로 이끄는 마력을 지녔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마력의 힘을 이겨내지를 못합니다.

원래 산은 산당을 짓듯이 이방신을 섬기는 장소였습니다.

산 속 기암절벽 아래에는 촛불을 켰던 모습으로 더러워졌습니다.


우리는 예언의 연대가

한 귀퉁이도 엇박자 질 하지 않고

딱딱 맞아 떨어지는 것인 줄 압니다

저들 자신도 그런 것 기대하지 않으면서

남들 이야기는 그렇게 해야 하는 줄 알고 있습니다

신출귀몰하듯 성경절 몇 개 조립해서 이상한 것 만듭니다

그리고 쉽게 천기누설을 합니다

1844년에 날짜 잡고

1994년에 날짜 잡고

2000년에 6000년설 날짜 잡았습니다

이젠 무슨 명목으로 날짜 잡을지 구경해야 합니다

그랬더니 요즘은 우리들이 쉽게 아는 어떤 이가 나와서

2018년을 지구 멸망으로 잡았습니다

그리고 종종 하는 말이 “내 당대”라는 말입니다

내가 죽기 전에 재림하신다는 말입니다

간이 솥뚜껑처럼 부었습니다

안 그러면 그런 소리 함부로 못 하기 때문입니다


추배도

그 이상한 책으로 세상을 판단하는 사람들처럼

우리도 다니엘 계시록으로 그런 판단을 한다면

그들과 다를 것 뭐겠습니까?


성경은

도적같이 오신다고도 합니다

내 마음에 들어 와서 먹고 마시겠다고도 합니다

재림은 영원한 숙제이지만

내 마음에는 언제나 재림이 이루어지고 있음도 아셔야 합니다.

그분의 현현을 기다리는 분들은

먼저 그분과 함께하는 경험부터 쌓아야 합니다

기본을 잊고 결과만 기다린다면 실패할 것입니다


계룡산으로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감람산으로 가시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야곱의 우물가에서 말씀하시던 예수를 기억해야합니다


요 4:20-21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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