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14
(나의 첫 번 며느리를 맞는 결혼식인데 두 아버지 되는 사람만이
참석하여 결혼식을 하게 되니 착잡한 생각으로 결혼식을 끝냈다.
그러나 두 아이가 지금까지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잘 살고 있으니 하나님께 감사하다. 연재 #13 끝부분)
제 6 부. 수난(受難)속에서 인도하신 하나님
1. 수난(受難)의 시작-화강리 지방회
(*여기에 실린 글의 내용 중 일부는
연재 #1과 중복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나는 원산에 1935년에 왔다가 1939년에는
중선대회장의 책임을 맡고 서울로 전근하게 되었다.
얼마 후, 1940년에 서울에서 중선대회 총회를 열게 되었다.
나는 글을 배우기 시작한 때부터 편지나 어떤 특별한
문제들을 다룬 글들은 존안(存案)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교회의 중책을 맡고부터는 거의 모든 서신들과
중요 문건들을 존안 했다.
이번 일도 존안(存案)의 습관으로 덕을 본 이야기이다.
나는 설교나, 총회 같은 집회에 말하게 되면
성경책을 들여다보거나 또는 머리를 자주 숙이며
얘기를 하기보다는 앞에 앉아 있는 회중(會衆)의
눈을 보면서, 또 어떤 태도를 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면서
설교도 하고 회의도 진행하는 습관이 있다.
이번에 열린 중선대회 총회 때에도, 하룻밤은
앞을 보면서 회의를 진행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맨 뒷자리에 들어와 턱 주저앉으면서
양복 윗저고리를 벗어 의자에 내 걸면서 앉는 태도가
완전히 시비조였다. 그래서 집회를 필하자
곧 그이에게 가서 악수하면서
“어디가 불편 하십니까? 아니면 이집회가
어디 마음에 드시지 않습니까?”고 물어보니 다짜고짜로
“이놈! 네놈이 무언데 지금 내가 제수를 맞이하는 일에
방해를 하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큰 소리로 욕을 하고 나오니 대표자로 왔던
많은 사람들이 “우리 대회장이 매 맞는다.”라고
전전긍긍(戰戰兢兢)하며 돌아가지 못하고
예배당 근처에서 서성거리고 있게 되었다.
그때 무엇인가 집히는 것이 있어서
나는 그이에게 말했다.
“여보시오, 예배당에서 떠들면 무엇이 해결되겠소?
내 사무실이 바로 옆이니 그리 갑시다!”
그래서 이 분을 예배당 옆에 있는 대회사무실로
인도하고 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당신이 조금 전에 말하기를 제수를 맞이한다고 하는데
그러면 당신동생이 지금 아무개 전도사가 있는 그 곳에 살고 있소?”
“그렇소? 왜 당신은 남의 가정 사를 방해하는 거요?”
“내가 남의 가정 사를 방해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요?
자, 여기 그 전도사에게서 온 편지를 보시오!”
그 전도사는 “이 교회에 아무개 목사의 딸이
약혼을 하려고 하는데 그 약혼 상대자는 교회도
나오지 않는 사람이며 그리스도인의 사상도 별로 없는
사람이라면서 전도사인 저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하고 의논을 하러 온다는데 목사님 생각에는 제가
무어라 말해주면 좋겠습니까?” 라는 내용이었다.
편지를 읽더니 대뜸 나에게 무서운 얼굴로 소리쳤다.
“그래서 하지 말라고 방해를 한 겁니까?”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시오? 여기 내 답장
존안(存案)해 놓은 것이 있으니 보시오?”
그 때야 복사기도 없으니 편지를 쓸 때
먹종이를 넣고 써서 보관한 것을 다 읽게 했다.
“당신이 보는 대로 나는 그 전도사에게 당신이
그 지역 전도사이니 그 목사의 딸이 교제한다는
사람을 찾아가 방문을 해서 성경공부도 시키고
또 침례도 받게 해서 우리 교회의 예식으로
결혼식 주례를 할 수 있도록 인도하라고 하지 않았소?”
“음, 그랬구먼, 그랬구먼!”
할 말이 없으니 “음, 그랬구먼!”만 계속 말해댔다.
“그랬구먼!”이 뭡니까?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서
그게 무슨 행동입니까? 대회장인 내가 당신에게
매라도 맞는 줄 알고 소동이 났으니 잘못하면
험악한 일을 볼 뻔하지 않았소?”
“나는 누가 와서 이일에 대해 아주 좋지 않게
이야기를 전해 주어서 그만 이렇게...”
“그러면 조용히 사무실로 찾아와서 내게
자초지종을 알아보아야지 이게 무슨 일이오?”
“.............................. ”
가능하면 편지나 답신을 보관해 놓던 습관으로
다행히 어려운 일과 창피를 면하게 되었다.
요즘은 좋은 복사기도 나오고 했으니 중요한 서신이나
서류들은 복사해 놓는 습관을 갖도록 하기 바란다.
시국은 점점 힘들어져가고 있었다.
일본은 "대동아 전쟁"을 일으키려고
조선을 억지로 일본에 합방 시키고 조선에 대한
모든 정책도 전쟁준비 정책을 펴느라 미국선교사들을
무슨 구실을 부처서라도 다 내 보내려고 했다.
그래서 모든 기독교를 친미파로 몰아세우고 탄압을 시작했다.
우리교회도 예외는 아니어서 대 부분의 선교사는
1940년 11월까지 다 귀국하고 이시화 목사만
1941년 2월 26일까지 계시다가 마지막으로 귀국했다.
전쟁의경험이 별로 없는 우리들에게 전쟁의경험이 많은
선교사들이 모든 일들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이런 때를 대비하여 우리를 교육하고 떠났었다면
교회는 여러모로 혼란이 적고 또 많은 도움을
받았으리라 생각이 되지만 선교사들도 비상 귀국하라는
국가의 명령을 듣고 떠났으니 아마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떠났으리라 생각이 된다.
나는 당시 중선대회장직을 맡고 있었기에
선교사들이 떠나는 모습들을 잘 볼 수가 있었다.
아직 일본이 미국에 대하여 선전포고도 아니 한 때인데도
몹시 삼엄하게 굴었다. 선교사들이 떠날 때에 작별의 악수도
못하게 하고, 선교사들이 타고 떠나는 배 근처에 줄을 쳐놓고
경찰을 배치하고는 아예 접근도 못하게 했다.
젊은 나이에 포교하러 왔던 원륜상 목사를 위시해서
대부분의 선교사가 아무런 준비도 못한 채로 떠날 때에
우리의 마음은 무엇이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원륜상 목사는 급거 귀국하면서 합회장직을 임시로
최태현 목사에게 맡기고 떠났다. 아마 곧 돌아 올 것이라고
생각 했는지는 모르나 결국 이들은 5년이 지나서야 돌아 올수 있었다.
선교사가 없는 교회의 행정은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서선대회장으로 있던 최태현 목사가 합회장 일을 맡게 되어
서울로 전근 오셨다. 공석이 된 서선대회장은 누가 할 것인가를
의논 하다가 내가 가는 것이 어떠한가 하고 말이 나왔다.
생각 끝에 나는 지금 많은 식구가 다 서울에 있는데
그 대가족을 이끌고 가기가 좀 무엇하기도 했거니와,
어떤 분이 그쪽으로 가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식구가 다 서울에 있으니 서울에 가족이 없는 분으로
보내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회의를 인도하시던 최태현 목사님은
“그러면 누구를 추천하고 싶은가?” 말씀하기에
“청진에서 수고하시는 조치환 목사를 서선대회장으로
추천한다.”고 하자 회의에 함께 계시던 조치환 목사님은
즉석에서 “내가 기꺼이 가겠다.”고 하셔서 그렇게 결정되고
나는 그대로 중선대회장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그 일을 집에 와서 이야기하니 내 안사람은 순안이 고향인지라
“왜 그런 좋은 곳에 안가겠다고 했냐?”고 하며 나의 결정에 대해
매우 서운해 했다. 나는 아내에게 “나의 결정에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이라.”고 말하며 위로했다.
그래서 1941년에 조치환 목사가 서선대회장으로 가시고
최태현 목사는 서울로 와서 합회장으로 계시게 되었고
나는 중선대회장으로 유임되었다.
돌아가는 시국을 보니 교회가 점점 힘들겠다고 생각이 되어
최태현 목사님께 한 가지 의견을 말씀 드렸다.
“아무리 보아도 전쟁이 나던가 아니면 일본과 어려운 사건들이
많이 일어 날 것 같은데 우리끼리만 하나님이 도와주신다고
하지 말고 일본합회장을 우리 조선합회의 고문으로 두어서
어려울 때는 일본합회장이 와서 우리를 좀 돕게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내용의 건의였다. 잘한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최 목사님도 가만 들어보시더니 그게 좋겠다고 해서
1941년 1월경에 일본합회장 오구라 목사를 조선합회의 고문으로
결정을 해서 일본으로 통고를 했다. 그분도 즐거운 마음으로
한국연합회에서 필요할 때마다 함께 일하자고 해서
그 일본합회장이 조선연합회 고문으로 결정되었다.
당시에 우리는 종종 “지방회”라는 것을 갖곤 했다.
그 지방사역자와 교회책임자들이 자리를 같이하여
교회사업을 토의 결정하곤 했다. 중선대회에서는
1941년 4얼 7일부터 10일까지 충남 화강리교회에서
“충남지방회”를 하기로 결정하고 추진 중이었다.
중선대회장인 나는 물론 회의에 참석하여 주재해야 했다.
그런데 그 “지방회”가 개최 될 즈음, 조선합회에서 통보가 왔다.
합회장 최태현 목사께서 “급박해가는 이 시국을 타개하고
교회사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대회장회의를 소집하여
교회 각부사업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의논하고자 한다.”고 하셨다.
중선대회의 지방회가 시작할 때가 되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이때에 최태현 목사, 조치환목사, 정붕상 목사 그리고 나,
이렇게 네 사람이 모였다. 정붕상 목사는 당시 남선 대회의
대회장이었다. 의논된 일중 어려웠던 한 가지는 시조사를
독립 기관으로 결정하고 사장을 선출하는 문제로 4월 9일까지
끌었다. 시조사를 독립기관으로 하면 시조사 사장을 택하여야
하는데 서울에 있는 합회장이나 중선대회장이 시조사 사장을
겸직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택하여 맡기자는 의견이 나와
회의를 인도하시던 최태현 목사께서 "누구를 시조사 사장으로
하는 것이 좋겠느냐"라고 물으셨으나 다들 가만히 있기에
내가 "시국이 이럴 때는 좀 신중한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좋을 것 같으니 유영순 목사가 어떻겠습니까?" 라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최 목사님은 이미 생각하고 계신 분이 있으셨는지
"내 생각에는 김창집 씨가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라고 말씀하시기에
"아, 목사님생각에 그분이 좋다면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그러나 책임을 맡으실 분을 위해 여기 모인 네 명이
회의형식을 갖추어 다함께 합의한 것으로 함이
좋을 듯 합니다"라고 해서 회의형식을 취하여 그 분으로
시조사 사장이 되도록 했다. 그래서 사장을 택하는 회의는
아주 간단히 끝났다. 4월 9일 오전의 일이었다.
나는 이 회의가 끝나자 곧 청양으로 갈 차비를 했다.
청양군 화강리 회에서 열리는 지방회의에는 조선합회
안식일학교부장 겸 선교회 부장인 오영섭 목사, 공주교회
담임사역자인 오석영 전도사, 중선대회 안식일학교부장 겸
선교 부장인 박원실 목사, 충남 당천교회 담임인 이성찬 전도사,
중선대회 회계겸 서기 유철준 씨가 참석하여 도와주고 있었다.
4월 9일 오후,
나는 서둘러 충청남도 청양으로 떠났다. 차에서 내려서
삼 십리를 걸어 밤 8시 반경에 청양 화강리 교회에 도착하니
지방 회는 끝나고 다 헤어지려고 하는 때이었다.
교인들 수십여 명이 "와! 대회장님이 오셨다!" 라고
큰 소리로 환영하여 서로 인사를 나누는데 얼핏 보니
형사가 와 있었다. 시국이 좋지 못한 때인지라
작은 회가 있어도 형사들이 내놓고 따라 다니면서
감시를 해 대었다. 많은 회의를 하다보니 형사들의 얼굴도
기억할 정도가 되었고 내 기억에 이 형사는 남영우라는 형사였다.
이 지방회는 이미 정해진 순서에 따라 4월 10일 안식일
설교예배까지 순서대로 다 잘 진행이 되었다.
그런데 설교가 필하면서 교인들이 "오늘로서 회는 필했지만
대회장이 왔으니 한 번 더 집회를 해서 우리다
은혜를 받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의논이 되었다.
1941년 4월 10일 저녁,
약 100여명의 교우가 참석을 했는데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참석한 분들도 많기에 누가복음 2장 52절을 가지고
아이들을 위해 먼저 이야기를 하고, 그 다음에
급박하게 돌아가는 시국을 이야기하면서 마태복음 16장과
누가복음 21장을 가지고 "때가 가까이 왔으니 때를 잘 분별하여
모두 잘 준비하도록 하자"라는 설교를 했다.
이상한 것은 이날 저녁 집회에 남영우 형사가
보이지를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날 저녁집회는
갑자기 진행이 된 것이라 원래 제출한 집회계에는 포함되어 있지가
않다는 것을 염두에 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 같다.
2. 청양 경찰서
교회에서 청양경찰서는 30리 길이며 설교도 밤늦게 끝났는데
벌써 누군가 "이 사람들이 집회허가도 없이 불법집회를 하면서
아주 불온(不穩)한 말을 했다"는 보고를 이 경찰서에 제출한 것이
확실했다. 왜냐하면 4월 11일 이른 아침에 고등계형사 두 명이 나와서
우리가 잠에서 깨기도 전에 우리가 자는 방문을 세차게 열고는
우리를 체포하기 시작했다. 자다가 일어났으니 변소를 가야 하는데
변소까지도 형사가 따라 붙을 지경이었다. 전부 옷을 입으라 하더니
오영섭 씨, 오석영 씨, 이성찬 씨, 유철준 씨, 박원실 씨, 나까지
6명을 체포하여 청양경찰서로 끌고 갔다. 그리고는 아무 취조도 없이
우선 우리 모두를 감방에 집어넣는 것이 아닌가?
모두들 평생 처음으로 감방에 들어 온 것이다.
그리고는 아침 늦게 어디서 가져 왔는지 설렁탕을 먹으라고
넣어 주었다. 배고픔 앞에는 장사가 없다더니 돼지고기
설렁탕 국인지도 모르고 모두들 깨끗이 비웠다.
나는 모든 분들이 나 때문에 감방에 왔다는 걱정에
설렁탕을 먹을 생각도 못했다.
우리교회 역사 사십여 년 만에 6명이나 대량으로 검거되어서
청양경찰서에 수감된 이 일이 바로 청양 화강리사건으로
우리교회 역사에 첫 번째 수난사건으로 남아 있게 된다.
감방에는 오영섭 씨, 오석영 씨, 유철준 씨, 박원실 씨가
한 방으로 배치가 되고, 나와 이성찬 씨가 같은 방에 배치되었다.
감방으로 집어넣을 때 허리띠나 저고리 고름, 버선 매끼 등
모든 끄나풀은 혹시 자살이나 폭력에 사용될까 하여
다 압수해 버려서 고름 없는 저고리나 허리띠 없는
양복을 입으니 얼마나 부자유스럽고 힘이 들었는지 모른다.
양력 4월 11일이니 아직 이른 봄인지라 감방은 매우 추웠다.
밤에 누워있는 것은 뼈를 부스러뜨리는 것처럼 맵고 추웠다.
그래서 밤에 둘이서 등을 맞대고 온기를 서로 얻어가면서 지냈다.
추운 감방에서 나에 관한일도 불안하지만 함께 들어온
사람들에 대한 걱정이 더욱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처음당하는 일인지라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단지 지나간 일들이 하나 둘 생각나면서 나의 갈 길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하며 이번에도 인도하시리라는 생각이, 나를 위로했다.
감방은, 헌 걸레조각 하나와 목침과 대소변 통만 때 묻은 마루위에
덩그러니 있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그때서야
왜 사람들이 감방을 “돼지 막”이라고 부르는지를 알게 되었다.
평생에 처음 들어온 감방이라 무서움도 있었지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두 주일이 지나도 말 한마디 없이 가두어 두는데 너무도 많이 두려웠다.
나중에 안 것은 그 동안 증인을 얻기 위해서 교인들 중에
청, 장년들, 심지어는 어린아이들까지 십여 명을 불러서
우리 모르게 심문을 한 것이었다. 교인들 중에서는
가장 일이 바쁜 김병두 형제와 오대식 형제 두 사람도 체포되어
취조를 받는 것을 알고 나니 미안하기가 짝이 없었다.
그 후부터 오영섭, 오석영, 박원실, 유철준, 제씨들을 불러내어
취조하다가 이성찬 씨까지 불러내어 취조를 해대면서 왜 그런지
나는 불러 가지를 않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4월 10일 저녁에
내가 한 설교에 대해서 자기네가 원하는 증거를 얻고 나서
나를 정식으로 고소하기 위함이었다. 그 때에 고등계주임
가등이라는 사람과 고등계형사 김장협 이라는 두 사람이
우리들을 취조하였다. 처음에는 “나와 동역자들이 무슨 잘못으로
이렇게 고생을 하나?”라고 생각되다가, 기도드리며 생각해 보니
“믿는 사람은 악한 사단에 의해서 까닭 없이도 어려움을
당할 것”이라는 말씀을 기억하게 되었다.
그 후부터는 힘든 매일의 감방생활에서 나를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견디어 나갈 수가 있었다.
가만히 생각할 때 유복자로 태어나 하나님을 알게 된 일부터,
어려운 교사시절, 위험한 간도지역에서 보호하신 하나님의 은혜,
적은 일에서부터 나를 인도하시어 의명학교 졸업생으로는
처음으로 대회장이라는 큰 직분까지 나를 인도하신
나의 하나님께서 끝까지 나와 함께 하실 것이라는 생각으로
위로함을 받았다. 감옥에 갇힌 지 두 주일이 된 후에
고등계주임과 형사는 나를 불러 호되게 취조를 해대기 시작했다.
“네가 4월 10일 저녁 설교에서 이제 우리가 다 나가서 웨치면
사람들이 우리말을 듣고 독립운동을 할 수 있도록 자금을 보내서
도울 것이니 다 같이 그리하자고 말했다지?!!”
전혀 상상도 못한 생트집이었다.
“이보시오, 내가 한 두 살 난 아이도 아니고,
열 살이나 스무 살 난 청년도 아닌,
벌써 장년을 넘은 사람인데 그런 어리석은 말을 하겠소?
나는 설교에서 그런 말을 꺼낸 적도 없소!”
“이 사람이! 증인이 다 있는데 실토하지 못하겠나?”
이렇게 닦달하면서 도무지 본 기억이 없는 청년을
대면시키고 증언을 하게 했다. 그 청년은
“당신이 그날 저녁 설교에 우리 교인들이 한번 모두 나가서
모든 사람들에게 독립 운동에 대해 이야기하면 많은 사람들이
돈을 보내서 독립운동을 도울 수 있다고 하지 않았소?”
“이보게 청년, 그날 내 설교에 참석했다면
내가 그런 말을 하지도 않은 것을 잘 알지 않소?
나는 그런 말을 하지도 않았고 그런 생각을 해 본적도 없소!”
내가 강하게 이야기하자 그 청년증인은 그만하고 그날은 나가 버렸다.
알고 보니 그는 4월 10일, 설교를 들었던 소위 “끄나풀”일을 하는
사람으로 그날 밤에 청양경찰서에 가서 거짓말로 연락을 한
장본인이었다. 유치장으로 돌아와 생각해 보니 우리가 갇히게 된 것이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교회를 탄압하기 위한 거짓이유들을 만들거나
허위신고와 거짓증인들을 만들어 사건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며
우리에게 독립운동자금을 만들려 했다는 가장 나쁜 죄목을 만들어
씌운 것임을 알게 되었다.
우리교회가 한국에 들어온 때는 역사적으로는 노일전쟁 때이고,
갑진년으로 서기 1904년이다. 우리교회는 정치와 선교를
분리하는 원칙을 신앙생활의 기본으로 하고 있는데,
우리교회가 조선에 들어 온지 37년 만에 우리교회 역사상
처음 이렇게 정치적인 트집으로 대량 검거되고 그 이유가
마치 정치적인 것처럼 되어 버렸으니 교회에 걱정을
끼치는 것 같아 마음에 미안한 생각이 그지없었다.
그 이튿날도 역시 같은 말로 취조를 해 대기에 나도 같은 말로
대답을 해댔다. 그랬더니 “네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을 여러 사람들이
인정했고 또 증인 중에는 너희 교인 가운데 어린 사람들도 있는데
어린 사람들이 무슨 거짓말을 하겠는가?” 하며 내게 소리 질렀다.
그러면서 데리고 온 증인은 어린아이가 아니라 20세 가량 된
청년인데 놀랍게도 우리 교역자의 아들이었다.
그 청년은 정말 섭섭하고 기가 막히게도 나와 취조하는 형사 앞에서
그날 저녁설교시간에 내가 독립운동 운운하는 것을 들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네가 그렇게 말을 하니 너무 기가 막히지만
내가 하지도 않은 말을 했다고 할 수는 없다”라고 말해 주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오영섭 씨, 오석영 씨, 유철준 씨, 박원실 씨,
이 분들 모두 다 고등계 형사들에게, 내 설교를 억지로 변조시키기 위하여,
얼마나 심하게 취조를 받았을까? 하고 걱정이 되었다.
하루는 같은 방에 있던 이성찬 전도사가 불려 나갔다가 매까지 맞고
들어와서는 화가 나서 “세상에 이보다 괘씸한 사람들은 없다.”고
경찰관들과 고등계형사들을 심하게 원망하며 크게 소리쳐 댔다.
그러면서 취조하던 내용들을 큰소리로 내게 이야기 했다.
이성찬 전도사가 내게 취조내용을 말하는 것을 다 듣고는 그 이튿날
즉시 이성찬 씨를 내 방에서 빼내어 옮겨버렸다. 그러지 않아도 춥고
견디기 힘든 이 감방에 결국 나 혼자 남아있게 되었고,
마주 보이는 것은 벽밖에 없으니 정말 두렵고 외로웠다.
“묵시록 20장에 있는 대로 세상 끝에 사단이 결박되어
옥에 갇히면 이 모양이겠구나!”하고 생각되었다.
화강리교회 예배소장은 성희수 씨라고 하는 분인데,
그분은 발도 넓고 교제를 잘 하는 분이라서 그런지 무사히
나가게 되어 안심이 되었지만, 참기 힘든 것은 그 교회 교인 중에
나이 많은 오대식 씨와 김병두 씨가 붙잡혀 왔는데 이 두 분을
아직 나에게 증인으로 대면시키지를 않는 것이었다. 그 말은
지금까지 증인으로 이용된 어린 사람들이나 청년들은 경찰서에
처음 잡혀 와서 겁이 나있는데다가, 협박을 하거나 한 두 대만 맞아도
곧 묻는 대로 그런 것 같다고 거짓증언을 하지만 이 두 분은
도무지 나에 대해 불리한 증언을 하지 않고 있음으로 아직도
심하게 취조를 당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제는 아예 의도적으로 내가 볼 수 있는 장소에 김병두 형제와
오대식 형제를 세워놓고는 심하게 때리는 것을 볼 때 내 마음이
찢기어 나가는 듯 했다. 내가 볼 수 있는 곳에서 이 분들이
심하게 맞는 것을 보니 “이제는 내가 안한 설교지만 그렇게 했다고
하고서 저분들의 가족을 위해서라도 두 분을 속히 나가게 하는 것이
좋지 않겠나?”하며 내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분들이 매를 맞는 것을 보며 “내 아내나 아이들은 나로 인해
얼마나 걱정할까?”하는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을 했다.
또 “나를 포함해 감옥에 있는 여섯 가정에서 얼마나
걱정을 하겠나?”하며 마음이 흔들렸지만, 아직은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를 않고 어떻게 하는 것이 나와 교회를 위해서
옳은 것인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감방에 있으면서 나는 음식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
어릴 적에 가난하여 조밥은 많이 먹었으나 보리밥은
별로 먹지를 않았다. 그런데 감방에서는 보리를 삶지도 않고
통보리 그대로 만든 보리밥을 주어 고생이 많았다.
그런데 하루는 이밥에다가 물고기반찬 한 토막 등 전혀 다른
식사가 들어오기에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어보니 아내가 와서
사식차입을 했기 때문이며 오늘부터 사식을 먹게 된다고 한다.
눈물이 핑 돌았다.
내 아내는 시집 온지가 불과 5-6년 밖에 안 된 젊은 여자로
집안에 돌볼 아이들도 많아서 고생도 극심한데
서울서 청양까지 어린아이를 업고 내방을 하려면 얼마나
먼 거리에 고생을 했겠는가? 그 먼 길을 고생하며 와서
만날 수도 없이 밥이나 차입해 주고 가는 것을 생각 하니
마음이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하루는 유치장 뒤편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나기에 무엇인가 하여
감방에 있는 목침을 세워 놓고 가까스로 올라서서 뒷벽으로 높이 있는
창문으로 내다보니 꽃이 만발한 것이 5월임을 알 수 있었다.
웅성거리는 소리를 자세히 들으니 아마 몇 분이 면회를 온 것 같은데
면회가 허락이 되지를 않아서 큰소리들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깜짝 놀란 것은 그 사람들 속에서 내 큰 아들
태혁이를 본 것이다.
태혁이를 보니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확연했다.
나는 볼 수가 있는데 태혁이는 나를 볼 수가 없으니 답답하기가
이루 말 할 수가 없었다. 태혁이와 다른 사람들은 곧 그곳을 떠났다.
내 마음은 너무 안타깝고 더구나 얼마나 갇혀 있어야 할지
마음이 매우 괴로웠고 두려웠다.
나는 모두 속히 풀려 나갈 줄 알았는데 어느새 두 달이 지나더니
곧 석 달이 되었다. 경찰서 사람들은 내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남편을 만날 수 있을까 하고 여러 번 왔었지만 면회도 못하고
돌아갔다고 말해주었다. 한번은 그 사람들이 “지금 네 아내가 왔다”기에
어떻게 볼 수 없을까 하고 발을 뻗치고 문틈으로 내다보니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그러니 다른 동역자들의 가족들을 생각하면 너무도 미안하고
견딜 수가 없어서 이제는 어떤 결단을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자꾸 들기 시작을 했다.
더구나 오대식 씨와 김병두 씨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매를 맞는 것을 볼 때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벌써 6월이 지났는데 저 사람들은 농사도 못하고 심한 매를
맞고 있는 것을 보니 더는 이렇게 지낼 수가 없었다.
“내가 하지 않은 일이라도 내가 했다고 해서
다른 분들을 나가시도록 해야 한다.”고 결심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독립자금을 모금했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으로
앞으로 크나큰 어려움이 나에게 닥치게 된다는 말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길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 나는 “당신네가 하는 말들이 옳소!
내가 그렇게 설교를 했소! 이제 모든 것을 다 책임 질 터이니
김병두 씨와, 오대식 씨를 더 이상 때리지 말고 방면시키고,
또 다른 다섯 사람도 나 때문에 갇히었으니 다 석방해 달라.”고 간청했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고등계 형사들이 기다리고 바라던 일이었다.
1941년 7월21일이 되었다.
내 안사람, 오영섭 목사의 부인, 그 외에 몇 사람이 먼 길을
찾아 왔는데 다섯 형제는 100일을 채우고 석방이 되어 돌아가고
내 아내만 그냥 돌아가야 했다. 얼마나 애가 탔을까
생각하니 눈물이 흘렀다. 할 수 없이 내가 책임을 지겠다고 했지만,
혼자 남는다는 것이 이렇게 힘들고 견디기 외로운 것인지를 깨닫는 데는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더구나 김병두, 오대식 두 형제는
아직도 풀려나지가 않아 나를 더 안타깝게 만들었지만 이틀 후에
다까지마라는 순사가 와서 그 두 분도 석방이 되었다고 알려주어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부터 모든 것을 내가 책임을
지게 되는구나!”하고 생각하니 두렵기 시작했다.
너무 외롭고 너무도 갑갑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어떻게든
감옥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바라야 하는데도, 혼자 있기가 얼마나 힘든지,
때로는 어떤 사람이 내가 있는 감방으로 들어오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이 얼마나 모순인가?
얼마나 연약한 인간인가?
하루는 나 혼자 감방에 남아 있을 때 일본말로 미깡이라고 하는
큰 귤 두 개가 차입(差入) 되었다. 알아보니 아내가 먹으라고
넣어 준 것이다. 너무도 고마운데 혼자 내왕하며 애쓰는 아내 생각에
먹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감방문턱에 놓아두었는데 감방검사를 하는
순사들이 “저것을 왜 먹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먹는 것보다 냄새 맡는 것이 더 좋다.”고 하니
그들은 일본말로 “부다가요”에 있는 놈이 무슨 냄새 타령이냐?
빨리 먹어 치우라!”고 소리치며 비웃고 나가 버린다.
“부다가요”는 “돼지의 집”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차마 먹을 수가 없어서 그냥 두었는데 하루는
어떤 영감이 절도혐의로 체포되어 내 방에 들어 왔다.
이 영감에게는 미안하고 모순 된 생각이지만 같은 방에
죄수가 들어온 것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통성명을 하고 보니 같은 정씨에 본도 같은 “진주 정”씨였다.
“비록 감방이지만 만나서 기쁘다.”고 하니 이 영감님은 다른 말없이
“왜 저 미깡을 안 먹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냄새가 좋아
여기 둔지가 열흘정도 되었으니 맛이 다 없어졌을 것이라.”하니
이 영감은 “내가 먹겠다.”고 하더니 한번도 미깡을 먹어본 적이
없는 듯이 너무 맛있게 잡수셨다.
함께 검거되었던 분들이 석방된 지 열흘쯤 되었을까?
수감 된지 거의 넉 달이 되어 가는데 순경이
중의(中衣)적삼을 갖다 주며 옷을 갈아입으라 했다.
날씨는 덥고 옷은 땀에 절어서 냄새가 나고 답답하였는데
새로 세탁된 바지저고리를 갈아입으니 정말 얼마나 감사한지!
얼마 후에 나를 나오라 하기에 어쩌면 석방을 시키는 지도
모르겠다는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나갔다. 120일 만에 보는
바깥세상의 공기가 이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몇 번이고 계속 심호흡을 했다. 밖의 바람을 쏘이는 것이
이렇게 감사할 줄은 내 미처 몰랐다. 비록 경찰서 구내지만
정말 밖의 세상은 눈부시게 밝고 시원했다.
“행여 석방이 되려나?”했던 희망은 곧 사라지고 순사는 나를
고등계 형사실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는 고등계주임인 가등과
김장협 형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첫 마디에
“당신은 이제 재판을 받기위해 홍성으로 간다!”라고 했다.
나의 석방이 아니라 법정기일 문제로 나를 더 이상 구류할 수가
없게 되자 이제는 나를 감옥으로 보내기 위해 재판을 하려고
지방법원이 있는 홍성으로 데리고 가려는 것이었다.
바깥세상의 공기의 시원함도 잠시였다. 나의 석방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는 식구들을 생각하니 앞이 캄캄해 졌다.
김장협 형사는 내게 홍성으로 가는 이유를 설명하며 머리가 길어
이발을 해야 한다고 하면서 어떤 이발을 원하는가 묻기에
몽땅 빡빡 밀어달라고 했다. 그는 당황해 하면서 수염은 몽땅
밀어 주지만 머리는 하이캍라로 깎자고 제안을 했다.
구치소에 수감된 사람으로 아직 죄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죄수처럼
머리를 빡빡 밀면 자기들이 오해를 받을까 염려하는 듯 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120여일을 가두었으면 죄인 취급을 한 것인데
지금 와서 하는 짓이 매우 못마땅해서 그냥 빡빡 깎겠다고 우겼더니
정말 몽땅 밀었다. 이런 이발은 소년시절에 해보고 25년이 지나
처음이었다. 길게 늘어졌던 머리와 수염을 몽땅 밀고 나니
매우 초라하고 슬프게 보였지만 마음만은 시원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