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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15

 

(나는 이미 120여일을 가두었으면 죄인 취급을 한 것인데

그냥 빡빡 깎겠다고 우겼더니 정말 몽땅 밀었다.

이런 이발은 소년시절에 해보고 25년이 지나 처음이었다. ...연재 14번 끝부분)

 

 

3. 홍성 지방법원 지청


 

혼자 남은 나는 이제 정식으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기 위해

청양을 떠나 지방법원 지청이 있는 홍성으로 가게 되었다.

홍성으로 떠나는 날을 어떻게 알았는지 아내가 어린 아기를 업고

찾아와서 몇 달 만에 처음으로 만났는데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안본 것만 못했다. 서로 얼굴만 잠시 보고는 떠나야 했다.

얼마나 울면서 돌아갔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이제 홍성으로 간다고 생각을 하니 당시에는 참 힘이 들었지만

몇 달 간 청양 감방에 있는 동안도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신 일들이 생각나며 감사를 드렸다.

처음에 수감되어 이성찬 전도사가 나와 같은 감방에 있다가

취조 받은 일들을 나에게 이야기 했다하여 강제로 옮겨가자

나는 곧 감방에 혼자 있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를 알게 되었다.

절망할 만큼 외롭고 춥고 두려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런데 나 혼자 있게 된 첫날 아침에, 경찰서 순사 한사람이

어떻게 된 일인지 “조선신문”이라는 일본어신문을 내 방에

몰래 넣어 주었다. 만일 이일이 발각되면 직원이나 순사는

면직됨은 물론 큰 벌을 받게 되는 위험천만한 일인데

첫날 아침에 몰래 넣어주고 저녁에 갈 때는 달라고 해서 찾아갔다.

그 감방은 오줌 똥 누러 나가는 것도 못하게 하고 감방 한쪽구석에

변기를 놓아두고 거기다가 대소변을 보게 하는데 밑 닦는 휴지도

신문조각을 주지 못하게 하는 때였다. 그런 상황에서

신문이 들어온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라 기이한 일이었다.

신문을 들키지 않게 보는 방법까지 말해주면서 신문을 넣어 주었다.

감방 문 위쪽에 일본말로는 “마하리”라고 부르는, 밖에서 열 수 있는

작은 구멍 같은 문이 있는데 감방 안을 수시로 감시하거나

밥을 줄 때 사용하는 문이다. 나는 순사가 일러준 대로

누가 밖에서 이 “마하리” 문을 갑자기 열어도 들키지 않게

신문을 마하리 바로 아래에 세워두고 매일 몰래 읽는 낙으로

외로움을 견딜 수 있었다. 그래서 비록 감방에 갇혔지만

세상 소식은 신문을 통해 알게 되었다.

 

 

너무 감사해서 신문 넣어준 그 순사의 이름을 물은즉 일본말로

다까지마 라고 한다. 그때 창씨개명을 했으니 한국말로는

오수근 이라는 이름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너무 감격되어

그 순사에게 “신문을 몰래 넣어주니 너무 고마운데 이 일이 발각되면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봐 미안하기 그지없습니다.

만일 발각이 되면 어떻게 하려고 이러십니까?”하고 물었다.

그 순사는 “발각 되도 괜찮습니다. 내가 면직밖에 더 되겠습니까?

우리도 선생께서 이런 범죄를 하지 않을 어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신문만이라도 넣어 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넣어주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6월로 접어들었을 때의 일이다.

감방 문설주를 살펴보니 문설주에 빈대 껍데기가 얼마나 많은지

손으로 쓸어내릴 만큼 수북하지 않은가?

계절상 벌써 빈대가 나와도 한참이나 나왔을 터이며,

이 감방에 사람이라곤 나 하나인데 빈대가 다 나한테 덤볐다면

그 괴로움을 어찌 견딜 수 있었을까 하며 참 다행이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그냥 우연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하루는 감방 마하리 작은 문이 벌컥 열리며

누가 안을 들여다보기에, 자세히 보니 경찰서 외근부장 “신보치”라는

일본 사람이었다. 나보고 “난긴 무시나이까” (빈대 없나?!)하고

큰소리로 말했다. 나는“빈대가 한 마리도 없다!”라고 대답을 하니

신보치는 일본말로 “아야시이네!”(그것 참 이상하다!)라고 말하고는

가 버렸다. 나는 그제서 야 빈대가 없다는 것이 예삿일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빈대 껍데기가 많이 있는 것은

이 감방에 빈대가 얼마나 많이 나오는 것을 말해주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이 그전에 얼마나 빈대 때문에 많이 고생을 했는지

알고 있는 순사 부장은 “빈대가 없느냐”고 묻고는 빈대가

한 마리도 없다고 하니 “참 이상하다”고 말하고 간 것이다.

그 제서야 나는 성경 이사야에 있는 말씀, 즉 “내 백성이

물 가운데로 지날 때나 강을 건널 때나 불 가운데로 행할 때

너와 함께 하시겠다”는 말씀이 오늘 내게 이루어 져서 나를 위해

빈대의 활동과 입을 봉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두렵고 지루한 취조생활만 계속 되고 밖에서도 아무 소식이 없으니

점점 마음이 무겁고 답답해지며 절망이 엄습하곤 할 때였다.

하루는 신문을 넣어주던 다까지마가 내게 와서 말하기를

“선생께서 집이든지 다른 데로 편지 연락할 마음이 없느냐?

이것이 위험한 일이지만 내가 붓하고 종이를 드릴 테니

마음대로 써서 주시면 제가 봉투에 주소를 써서 우표를 붙여

보내 드리겠습니다”라고 하며 친절을 베풀었다.

그래서 당시 합회장이신 최태현 목사에게 감방에 갇히게 된

전후의 사정과 현재의 형편을 써서 그 사람에게 내어 주었다.

평생 처음 경찰서 감방에서 만난 사람이 이런 호의를 베푸니

너무 감사하고 오히려 이상했다. 다음날, 그 사람은

내가 쓴 편지를 다시 가지고 와서 “선생님 대단히 미안합니다.

어제 쓰신 편지를 받아 가는 것을 본 사람이 있는 듯하여

오늘 우편통에 넣지 않고 살펴보니 정말 그 우편통에 와서

모든 편지를 다 검사하고 있었습니다.

검열이 너무 심하기에 못 보냈습니다.”하는 것이다.

나는 감사하다고 말해 주었다. 비록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가

좌절이 되기는 했지만 그 위험을 무릅쓰고 도와주는 이가 있다는 것은

큰 안위가 되었다. 아무 때고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나를 절망에서 지켜주었다. 하나님의 은혜였다.


 

감방에 있으면서 내게 고통스러운 것은 식사문제였다.

사람이 입맛은 왜 이리도 극복을 못하는지!

나는 조밥은 잘 먹으면서도 이상하게 보리밥을 먹지 못했다.

더구나 감방에서 주는 것은 말이 보리밥이지, 보리를 삶지 않고

그냥 통보리 밥을 주는데다가 내가 싫어하는 거센 마늘종 반찬을

수시로 주니 더더구나 먹기가 괴로웠다. 나의 아내가 넣어주던 사식도

더 이상 허락이 안 되어 갑자기 다시 감방의 밥을 먹으려니

죽을 지경이었다. 정말 연약한 것이 사람이었다.

너무 힘들어 “죽고 싶다.”라는 엉뚱한 생각이 나다가도

나를 위해 어린아이를 데리고 힘들게 이 감방까지 쉬지 않고

방문 오는 고마운 아내와 기다리는 자식들을 생각하며

또 하나님의 종이라는 목사가 감방에서 밥 먹기 힘들어

죽었다 하면 교회 체면이 어찌 되겠나?하는 별의별 생각이

다 나도록 식사문제가 나에게는 힘이 들었다.

그런데 하루는 나 혼자 있는 감방 문이 덜커덕 열리더니

한 깨끗한 청년이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들어왔다.

어떻게 이 감방까지 오게 되었는가 물으니 “나는 이 청양읍에서

잡화상을 하는 사람인데 경찰서에 충분한 돈을 기증하지 않는다고

밉게 보여서 잡혀왔습니다. 집에서 손을 써서 며칠 후에

나갈 것 같습니다”라고 눈물을 흘리며 겁에 질려 말을 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들어온 그날 저녁부터 사식으로 떡과 국수,

과자 이런 것들이 들어 왔다. 그런데 이 사람은 밖에서

잘 살던 사람이고 겁에 질려 그 좋은 사식도 먹을 수가 없다면서

“선생님이 잡수시라.”고 했다. 꽁보리밥을 먹지 못하던 나는

이 음식을 먹게 되면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감사했다.

그런데 곧 나갈 것이라 하던 이 청년이 무슨 연유인지

한 달이 되어도 나가지 못했다. 물론 계속 음식이 들어와서

나를 살렸고 나아가 그 음식을 나 혼자 먹을 수가 없어서

순사들에게 부탁하여 다른 동료 사역자들이 있는 감방으로

보내달라고 해서 그 사람들과 나눠먹게 되었다.

감방에서 있으면서도 생각지도 못한 일들을 통해 부어주신

하나님의 기이하신 은혜는 큰 힘과 위로가 되었다.

청양을 떠나면서 생각해 보니 지난일이 모두다 하나님의 인도요,

은혜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앞으로도 인도 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보증이었다.

 

 

홍성으로 가는 날, 나를 취조하던 고등계주임인 가등이

나를 데리고 갔다. 버스를 기다리며 잠시 쉬는 동안

시국담이 나와 나도 몇 마디 했더니 역시 형사출신은

무서운 사람들이었다. 당장 나에게 “감옥에 갇혔던 사람이

어떻게 그런 것을 다 알고 있는가?”하고 추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신문을 보았다”했더니 더 크게 놀라면서

“어떻게 신문을 구했냐?”고 다그쳤다. 만약 바른말을 하면

틀림없이 신문을 넣어주던 그 친절한 오수근 순사는

면직이 될 판이었다. 나는 “변소용지로 준 신문 조각을 보았다”고 하니

가등은 안심을 하면서도 “이 어리석은 순사 놈들이 신문을

변소용지로 쓰지 말라고 그리 말했는데도 이런 잘못을 한다.”며

노발대발(怒發大發)을 했다. 겨우 위기를 모면하고 홍성으로 끌려가

홍성경찰서 감방으로 들어갔다. 경찰서 규모도 크거니와

유치장 방도 훨씬 많은 것이 사람을 위축되게 만들었다.

감방으로 가면서 보니 두 째 감방에는 “살인수들이 갇혀 있으니

조심하라!”고 써 있었다. 청양경찰서 보다 얼마나 무섭고

위험해 보이는지! 내 감방에는 수감자가 무려 아홉 명이나 되어

시끄럽기 짝이 없었다. 그 날 이곳도 역시 보리밥이었다.

그날 밤, 이 감방 안에 이미 계급이 정해져서 먼저 들어온 사람이

방장 노릇을 하며 좋은 자리에 눕고, 신참인 나는 공기가 제일 나쁜

변기통 바로 옆자리를 배당 받아 잠을 잤다.

한 방에 수감자가 아홉 명인데 그것도 제일 공기가 나쁜 구석이니

다음날 벌써 감기가 들고 말았다. 간수에게 나의 감기 들린 사정을

이야기 했더니 대답도 없이 가버리더니 약을 구해다 갖다 주었다.

그나마 미결수가 되어서 대접을 해 준 것이 아닌 가 생각된다.

 

 

그런데 나흘째 되는 날, 또 이밥이 들어왔다. 내 식성을 아는

내 아내가 여기까지 찾아와 사식을 차입해 준 것임을 알았다.

아내가 청양에서 홍성이라는 곳으로 옮겨진 나를 찾아오느라고

얼마나 애를 썼을까 생각을 하니 밥을 보는 순간 오히려 목이 메었다.

아홉 명중에 사식이 들어오는 사람은 나 혼자밖에 없으니 그 이밥을

혼자 먹을 수 없어서 한 숟가락씩 여덟 사람에게 떠 주고 나니 내가

먹을 밥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졌다는 것이 무엇인지,

혼자 먹기가 미안하여 이밥 한 숟갈씩 나누어 주었는데 그 날부터

나를 가장 좋은 곳에 잠자리를 내 주는 것이었다.

통성명을 하다가 내가 목사라고 하니 그때부터 잠자는 시간에도

“정 목사님, 이 자리에 와서 주무십시오!”하며 아무리 사양을 해도

제일 공기가 좋은 자리를 내 주었다. 바늘방석에 앉은 기분이었으나

재판을 받기까지 한달 여가 걸렸는데 아내의 고생덕분에

차입된 밥을 나누어 먹으며 잠도 좋은 자리에서 잤다.


 

이 감방에도 다까모또(高本)라는 처음 보는 순사가 있는데

종종 사탕이나 엿 같은 것을 나에게 넣어 주었다.

나는 “왜 이렇게 위험한 일을 하느냐?”고 물어 보니

“가만히 보니 선생께서는 이렇게 잡혀올 분이 아닌데

갇혀 있다는 것을 알았소. 여기서 지나다가 당분이 부족하면

병이 생기기 십상이오, 그것이 염려가 되어 조금씩만 드리니

염려하지 말고 드십시오.”라고 했다.

여기저기 나를 지키는 천사가 있는 듯 했다.

하나님께의 보호하시고 인도하심이 너무 감사했다.

나중에 가끔 그 순사와 이야기 해보니 이 사람은

장로교회도 다닌 적이 있어서 찬송가도 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순사 앞에서 찬송가를 한 두 곡 부르기도 하고

더 이야기를 해 보니 내 고향인 강서군 사람이었다.

그러자 그는 더욱 친절을 베풀었다.

조선 이름으로 그냥 “고 순사”라고 불러 달라고 했다.

고 순사는 내게 이 감방에는 살인죄로 들어온 사람이

두 사람이 있는데 오촌 조카 되는 남자가 오촌 숙모를 범하여

간음죄를 짓고 나서 오촌 숙모와 힘을 같이해서 오촌 숙부를

죽여 버린 죄수들이었다. 그 여자가 있는 감방은 내가 있는 감방에서

가까이 있으며 죄는 졌으나 임신 5 개월이 되었는데 감방에서 주는

음식을 잘 먹지도 못하고 있어서 불쌍하다고 했다.

내 생각에도 임신 5 개월이나 된 여자가 나처럼 감방의 밥을

잘 먹지도 못하면, 아이나 어미가 다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

없다고 생각이 되었다. 그래서 고 순사와 다른 숙직하는

당번 순사들에게 “내게 차입되는 밥을 좀 덜어서 그 여자에게

줄 수 있겠는가?”하니 쾌히 승낙을 했다. 그래서 내 사식이

들어올 때마다 내 밥을 좀 덜어서 그 여자 죄수에게 보내주니

그 여자는 자기에게 나오는 감방의 밥을 우리에게 보냈다.

그 여자의 밥을 같은 방에 있는 죄수들에게 나누어주니 밥을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고 싶은 이 사람들은 얼마나 기뻐하는지 몰랐다.

 

 

일본은 전쟁준비의 한 과정으로 방공연습(防空演習)이라는 것을 시켰다.

이것은 집안의 불빛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 천이나

검은 종이로 모든 창문이나 문 틈새를 막아야 했다.

감방에서 불빛이 나갈 리가 없지만 연습은 철저히 시켰다.

그래서 감방 문 안쪽에다 검정 색종이를 붙이게 했다.

그런데 경찰서에서 살인범 여자의 방에 사람들이 들어가기를 꺼려하며,

또 젊은 여자가 있는데 젊은 죄수가 들어갔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안 된다고 나보고 들어가 종이를 바르라는 것이었다. 나도

죄인의 몸이지만 그 방에 들어가니 그 여자는 이미 내가 자기에게

밥 주는 사람인 줄을 알고 한편 옆에 얌전히 앉아서 내가 일하는

것을 쳐다보았다. 여자는 매우 잘 생기고 순진하게 보였다.

“어쩌다가 저런 험한 일을 저질렀을까?” 하는 생각이 들며

또 “사람의 생김새와 범죄와는 상관이 없다.”라는

감상(感想)이 들었다. 그 후에도 나는 계속해서

그 임신한 여 죄수에게 밥을 나누어 주었다.

조금 지나자 내 방에 있던 죄수들은 다 공주형무소로 이감되고

두 명의 미결수만 남아 있게 되었다. 한 명은 면 서기로

일하던 사람이고 한 명은 어느 절에 중으로 있었다는데

둘 다 사기 횡령죄로 체포되어 공판을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갑자기 10여명이 있던 유치장에 세 명만 남으니 8월인데도 냉기가 돌았다.


 

고린도전서 14장의 말씀을 보면 범사에 질서대로 하라는 말씀이 있다.

나는 감방에서 규칙을 지키지 않아 변을 당했다.

감방마다 철문에 밥 주는 구멍이 있는데 하루는 옆방 살인수가

그 구멍으로 얼굴을 내밀고는 건너편 방에 있는 사형수에게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나는 얼굴을 좀 내밀고 그 옆방

살인(殺人)수에게 이름을 물었다. 그가 중학교를 다닌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기에 “사형집행을 받기 전에 예수님의 복음이라도

이야기 해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달려온 간수가 입 싸움을 벌리고 있는 두 살인수의

방문을 열고는 거칠게 다루면서 발길질을 해 대었다.

그 간수는 내방에도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서는 말 한마디 없이

내 정강이를 걷어찼다. 나도 그 발길질에 바지가 찢어지면서

고통으로 주저앉고 말았다. 생각지도 못한 봉변을

죄수들 앞에서 당한 것이다. 이유는 감방에서는 옆방 사람과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규칙을 어겼던 것이었다.

나는 범사에 질서를 지켜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생각하며

나의 경솔 했던 점을 뉘우쳤다.

 

 

1941년 8월 하순,

드디어 내 공판일이 되자, 친절한 고 순사가 나를 데리고

홍성지방법원을 오가게 되었다. 법정에는 재판장과 검사,

나의 변호사 향산(香山)씨와 어떤 여자가 앉아 있기에 누구인가 물으니

고 순사 말이 “장로교회에 다니는 전도부인인데 기독교 교회목사가

재판을 받는다 하니 와서 방청을 하는 것 이라.”고 말해 주었다.

무슨 일이 생길까 보아 겁이 나서 그랬는지 우리교회에서는

오히려 아무도 나온 사람이 없었다.

재판장은 나에게 “피고는 조선독립자금을 많이 거출해야 한다고

선동을 한 것이 사실인가?”하고 엄중하게 물었다.

나는 “청양에서 나와 함께 검거되어 붙들려온 동역자 다섯 분들과

교우 두 분이 농사도 못하고 나 때문에 갇혀 고생하는 것을 보다 못해

내가 다 책임을 지겠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말했을 뿐입니다.

이제 법정판결 앞에 섰으니 사실을 말씀드립니다.

나는 정치적인 발언을 한 적도 없고 독립운동자금

운운한 적도 없습니다.” 라고 항변(抗辯)했다.

나의 변호사도 “피고의 신분이 목사입니다. 모든 진술이

사실일 것이니 십분(十分) 고려해 달라!”며 무죄를 주장했다.

그러나 검사는 피고에 관한 증거와 증인이 확실하며 또 시국이

시국인 만큼 적어도 6개월의 처형을 받아야 한다며 구형을 했다.


 

그날 나는 보안법위반이라는 죄명으로 6개월의 징역형을 언도 받았다.

재판장은 “이 판결에 불복하는 마음이 있으면

공소(控訴)할 수 있다!”하기에 나는 “공소한다.”고

공소선언(控訴宣言)을 하고 감방으로 돌아왔다.

내가 공소를 선택한 이유는 첫째, 내가 교회 목사로서

설교에 하지도 않은 독립운동자금 격려를 한 것으로 복역을 한다면

우리교회에 누를 끼치는 것이라 생각 된 것이고,

다음은 내 가족에게 나의 무죄를 알리고 싶어서 그리했다.

그런데 재판 날에 누가 알려주었는지 내 아내가 아이를 데리고 와 있었다.

그 친절한 고 순사는 재판이 끝나자 법원의 규율을 무시하고

나에게 아내와 마음껏 이야기하도록 허락을 해 주었다.

4월 11일에 잡혀 와서 지금이 9월 초순이니 다섯 달 만에

아내와 같이 얘기를 할 수 있는 특전이 주어 졌으나

갑자기 얼굴을 마주하게 되자 할 말을 잃었다.

너무 고맙고 미안할 뿐이었다. 나는 “그동안 서울과 청양을 다니느라고

고생이 많았겠다.”고 위로하고 “이제 항소해서 불원간 서대문형무소로

갈 것이니 믿음을 지키며 아이들 양육에 힘쓰면서 너무 걱정 말고

기다리라!”고 말하고 감방으로 돌아왔다.

 

 

공소선언을 하면 그 공소장은 언도를 받은 날부터 1주일 안에

복심법원(覆審法院)이 있는 서울로 보내져야 하는데 1 주일이

거의 다 되어 오는데도 나를 서울로 보낸다는 말이 없기에

나는 간수에게 “내가 공소를 했는데 왜 아직 내가 여기를

떠난다는 말이 없는가?”하고 계속 물었다.

나는 법에 관해 공부한 사람으로 1919년 3월 1일의

만세사건으로 검거되었던 주요 인물들이 일심선고에 불복하고

공소한 일이 있었는데, 그 당시 시골도 아닌 서울에 있는

지방법원인데도 공소장을 소홀히 하여 기간 안에 수리되지 않아서

큰 파문이 일어났던 것을 기억하기에 자꾸 확인을 재촉 하였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간수가 홍성재판소와 연락했더니,

평소에 공소하는 사람들이 워낙 없었던지라,

공소장을 잊어버리고 수리(受理)하는 것을 잊어버렸다 한다.

그래서 급히 공소서류를 다시 해서 9월 초순에

홍성경찰서 감방을 떠나 서울로 오게 되었다.

“법대로 하자!”는 사람들도 인간인지라 이렇게 실수를 하지만

하늘 법정에서는 이런 일이 절대로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4. 서대문 형무소-제1부


 

1941년 9월 초순,

홍성 미결수감방을 떠나면서 사기 횡령죄로 먼저 들어와 있는

면서기와 승려에게 “우리 모두 앞으로는 양심을 따라 살자.”고

권면 겸 인사를 하고 나왔다. 감방을 떠나려 할 때

어떻게 소식이 전해졌는지 내 밥을 얻어먹고 기운을 차리던

그 임신한 살인범 부인은 밥 주는 구멍으로 얼굴을 내놓고

얼마나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지 보기가 딱했다.

홍성경찰서 감방을 뒤로하고 서울로 떠났다.

나를 데리고 가는 형사는 기차 내에서 아는 사람들의

인사를 받곤 했다. 그 사람들은 형사를 보고

“어디 가는 길인가?”하고 묻다가는 옆에 내가 수갑을 차고

앉아있는 것을 보곤 혀를 차면서 “그렇군, 그래”하면서

목사인 내가 무슨 악독한 죄나 중대한 법을 범한 줄로 알고

호송하는 형사에게 고생한다는 듯이 동정을 표할 때는

마음이 섭섭하고 눈 둘 곳을 몰랐다. 천안에서 기차를 갈아타고

영등포역에 왔는데 어찌 알았는지 내 아내가 깨끗한 의복을 입고

둘째딸 충실이와 함께 내가 있는 기차 칸으로 올라왔다.

6개월 만에 보는 충실이는 얼마나 키가 컸는지 몰랐다.

아내는 내가 이 차로 올라오는 것을 알기 위해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 생각하니 감개무량하였다. 복숭아도

사 가지고 와서 차 중에서 좀 먹고 곧 서울역에 내려

서대문형무소로 가게 되었다.

“형무소에 가서 곧 연락을 하겠다.”고 하는

말 한마디만 나누고 나는 형무소로 갔다.

 

 

경성부 서대문구 현저동 1번지에 있는 서대문형무소에 도착하니

미결수라 하여 중의(中衣)적삼 등 입고 간 옷을 다 벗으라 하더니

광주리 하나를 밀어 넣어 주는데 그 속에는 홑겹의

푸른 죄수복이 담겨 있었다. 내가 머뭇거리자 간수가

얼마나 무서운 얼굴로 대하는지 기가 질려 곧 순순히

죄수복으로 갈아입었다. “1831” 이라는 나의 죄수번호가

큼직하게 써진 푸른 죄수복을 입으니 신기하게도

정말 죄인이 된 느낌이 들었다. 서슬이 푸른 간수를 보면서

“이제 정말 본격적인 형무소생활이 시작 되는구나!

더욱 조심하고 규칙을 잘 지키자.”라고 생각을 했다.

푸른 죄수복을 입고 감방으로 들어가니 청양경찰서의 감방이나,

홍성경찰서 감방에 비하니 얼마나 깨끗하고 좋은지

그야말로 천국엔 가보지 못했지만 천국에 온 기분이었다.

“감옥이 깨끗하기만 해도 이러하니 천국이야 말로

얼마나 좋으랴? 꼭 가야 하겠다.”라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형무소가 얼마나 큰지 이리저리 한참을 끌고 가더니

어느 감방 앞에 섰다. 쇠창살 안에는 나와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남자가 이미 들어 와 있었다. 먼저 들어와 있다고 내게 또 어떤

행패를 부릴까 염려 했으나 의외로 친절하게 나를 보고 환영을 했다.

“고생이 많소! 어서 들어와 앉으시오.”

조선말로 인사를 하기에 조선 사람인 줄을 알았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선생님은 이 감방에 계신지가 얼마나 되셨나요?”

“아, 나는 4년째요. 내 이름은 조두만 이라 하고 고향은 평양이오.”

“아, 그러십니까? 제 이름은 정동심이고 고향은 평안남도 강서입니다”

고향이 같은 우리는 곧 친숙해 졌다.

“조 선생님은 무슨 죄이기에 4년째 이곳에 계시게 되었는지요?”

“아. 언도를 받은 것이 아니라 나는 미결수로

재판 받기를 기다리는 중이오.”

나도 재판을 받으려고 온 미결수인데

4년이나 기다렸다니 갑자기 걱정이 되었다.

“아니 어떻게 미결수로 4년씩이나 기다리게 되었습니까?

사실 저도 미결수로 왔습니다. 저도 그렇게 오래 기다려야 하나요?”

“아, 그것은 서울처럼 큰 곳은 재판 받으려고 기다리는 사람도 많지만,

나는 법관들에게 미움을 받아서 재판을 빨리 해주지 않아 그렇소!”

나는 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무슨 법관이 판결도 안 된 미결수를 미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나는 사실은 평양부청(平壤府廳)에서 일하던 공직자인데

내 친구 되는 사람이 주권(株券)을 가지고 사기를 하다가 붙잡혔는데

하필이면 그 친구의 몸에서 내 명함이 나왔단 말이오.

그래서 내가 공범으로 몰렸는데 공직자가 사기에 연루되었다고

이리 미워하지를 않겠소? 하나 판결만 받으면 곧 석방이 될 거요.

그런데 선생은 무엇 하는 분인데 감옥에를 왔소?”

“네. 저는 목사노릇을 하던 사람인데 홍성지청에서 6개월의

판결을 받았으나 도저히 그 판결에 복종할 맘이 없어서

공소해서 이리로 왔습니다.”하고 나는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형무소에 4년이나 있어서 그런지

조두만 씨는 아는 것이 많은 듯 했다.

“정 목사께서는 여기서 얼마의 형을 판결 받을지는

자세히 모르겠으나 지금까지 갇혔던 기간을 다 계산하면

과히 고생 안하고 나갈 터이니 걱정 마시오”라고 위로해 주었다.

그런데 홑겹의 죄수복을 입고 맨 바닥에 누우니 얼마나 추운지

조두만 씨와 등을 맞대고 잠을 청했지만 찬 기운이 뼛속 깊이

파고들어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음식은 홍성이나 청양보다 훨씬 나았다.

조밥에 콩과 흰쌀도 셀 수 있을 정도로 섞여있고

북어꼬리를 우린 국물을 한 그릇 주니 먹을 만 했다.

그런데 형무소 주먹밥은 목판에 눌러서 주기 때문에

그 밥덩이에는 크기를 말하는 몇 호(戶)라는 숫자가 찍혀 있어서,

형무소 안에서는 “무자식(無子息)이 상팔자”가 아니라

“무자식(無字食:글자 없는 밥)이 상팔자!”라는 말이 있었다.

며칠 후에 내 아내가 바지저고리를 넣어 주어서 추위를 면할

수가 있었다. 얼마나 반갑고 고마웠는지 지금도 코가 시큰 한다.

더구나 푸른색갈의 옷이 아니라서 죄수라는 기분이 훨씬 덜했다.

그날 저녁에 사식까지 차입이 되니 아내가 서울서 홍성까지

가는 것 보다야 낫지만 여자 몸으로 아이들까지 데리고

서대문 형무소까지 왕래할 생각을 하니 목에 넘어 가지를 않았다.

한방에 있는 조두만 씨보고 함께 먹자하니 미안해하면서

며칠 그렇게 먹더니 자기도 사식을 들여와서 함께 먹자고 했다.

 

 

서대문 형무소에서는 미결수로 있는 동안은 한달에 한번

밖으로 편지를 보낼 수 있고 받는 것은 제한이 없었다.

형무소 내에서는 편지 받는 일이 최고의 낙이며,

유일한 소식통이었다. 또 편지가 많이 오는 사람은

밖에 아는 사람이 많다는 것으로 인정이 되어

형무소 사람들이 대하는 것도 달랐다. 나는 아내와

아이들에게서 편지가 가끔 올 뿐이었다.

아마, 하도 세월이 험하니까 교회지도자나 신자들이

몸들을 사리느라고 편지 왕래하기도 겁을 내고

면회는 생각도 못하는 듯 했다. 그래서 이방 저 방에 배달되는

편지뭉치를 보면 부럽기가 한이 없었다. 더구나 1학년짜리

우리 집 아이가 보낸 편지를 받으면 아무리 억제를 해도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내가 눈물을 흘리면 조두만 씨가

매우 민망해 하기에 하루는 결심을 하고 감옥에 있던

바울과 실라의 경험을 생각하며 기도와 찬미를 부르기로 하고

곧 실천에 옮겼다. 이때부터 나는 비록 감옥 안에 갇혀 있지만

영혼의 열매를 달라고 기도 드렸다. 그리고 열심히 생각나는 대로

찬미를 불렀는데 그 때 잘 부르던 찬미 중에 하나는 356장

“이 죄인을 완전케 하옵시고” 이었다. 2절까지는 어려움 없이

찬미를 부르곤 했는데,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3절이

생각이 나지를 않아서 3절을 기억나게 해 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그런데 하루는 아주 깨끗하고 준수하게 생긴 20대의 청년이

우리 방에 들어 왔다. 그 청년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외로웠던 우리는 새 사람이 우리 감방으로 들어오니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만큼 사람이 그리운 곳이 감옥이었다.

거기다 나는 원래 청년들을 좋아 하는지라 그 청년을 반갑게 맞으면서

감옥에 들어온 이유를 알아보니 사회주의 사상에 감염되어 살다가

검거되어 초심에 4년을 언도받고 공소중이라 했다.

 

 

나는 그에게 혹시 교회에 나가느냐고 물으니 어릴 때는

열심히 다녔고 주일학교 교사까지 했었다고 하며

지금은 교회에 안 나간지가 꽤 되었다고 했다.

나는 목사로써 보안법 위반의 누명을 쓰고 선고 받은 후에

공소중이라 했다. 나를 신임하는 눈치이기에 신앙의 필요성을

이야기해 주며 찬미와 기도를 함께 하면서 복음을 전하니

아주 잘 받아 드렸다. 매일 찬미를 부르다가 “내가 좋아하는

356장 3절을 기억 못하겠다.”고 했더니 이 청년은 큰 소리로

3절을 시원하게 불러 주었다. 너무도 신기해서

“어찌 아느냐?”고 했더니 자기가 주일학교 교사였다는 것을

벌써 잊었는가 하면서 빙그레 웃었다.

나는 영혼을 보내 달라는 기도와, 이 찬미 3절을 기억나게 해 달라는

나의 기도가 이렇게 응답받게 된 것을 깨닫고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고 약속을 지켜주시는 그 분의 사랑이 감사해서

숙연한 마음이 들어 그 청년과 이 찬미를 힘차게 부르고 기도 드렸다.



못 박히신 발아래 엎드려서 이 은혜를 받고자 구합니다.

날 정결케 하신 피 믿사오니 흰 눈보다 더 희게 하옵소서.

눈보다 더욱 희어지게 곧 씻어서 정결케 하옵소서.

 

 

며칠 후에 간수가 와서 그 청년을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갔다.

그 청년에게 어디에 가든지 하나님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고

기도를 드리고 아쉽게 작별을 했다. 그 후에 그 청년이 어찌

되었는지는 모르나 그 영혼을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보통 감방에 먼저 와 있던 사람은 고참의 티를 내느라고

모든 일에 간섭하고 감방의 모든 일들을 결정을 하는데

이 방의 최고참격인 조두만 씨는 감사하게도 우리 감방의

모든 일을 나에게 처리 하도록 맡겨 주었다. 그래서

새로 들어오는 사람에게 내가 위로의 말과, 주의를 주는 말이나

선교를 해도 일체 간섭 없이 묵인해 주었다. 묵인 정도가 아니라

자기는 손님인 양 행세를 해 주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 분의 인격에 감사를 드린다.


 

아직 미결수로 있을 때 이유도 모르게 30세쯤 되는 젊은 청년이

갑자기 다른 감방에서 우리 방으로 와서 며칠간 있게 되었는데

그이는 충남 공주사람으로 국민학교 선생 노릇하다가 들어온

유제경이라는 사람이었다. 이 사람 역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4년 징역을 받고 공소하여 서대문 형무소에서 있는 중이었다.

그러고 보니 형무소에 들어온 사람들은 죄과가 별 것도 아닌데

4년씩 형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내가 6개월 받은 것을 가지고 항소 했다면

잘 믿기지가 않는 표정을 짓던 것이 이해가 되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유제경 씨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교실에다 몇 가지 급훈(級訓)을 써 부쳐놓고 아이들을 교육했다.

즉 “너희는 끓는 피가 있는 사람이 되라! 땀 흘리는 사람이 되라!

열(熱)이 있는 사람이 되라!” 이 세 가지를 써 놓고 교육하니,

교장 선생이 전근을 가면서 경찰서에 아이들에게 민족 교육을

시킨다고 유제경 교사를 취조해 보라고 고자질을 했던 것이었다.

그 교장이 떠난 후 경찰은 그 글을 증거로 잡고는 그 세 가지

말 중에 특히 피가 있는 사람이 되라고 한 것을 트집 잡아,

이는 일본이 아니라 조선을 생각하라는 민족 교육을 선동했다 하여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4년 징역형을 받고 공소하여 이곳에 수감되었다.

내가 생각해 보아도 그 글들은 나라를 생각하게 하는 깊은 뜻을 가진

글들로써 청년교사의 민족적 기개가 엿 보이는 일이라 생각이 되며

감명을 주는 급훈이었으나 나라를 잃은 백성이 당하는 탄압과

서러움이 바로 이런 것 이었다.

 

 

나도 목사로써 누명을 쓰고 왔다고 서로 인사를 나누자

젊은 유제경 선생은 공주에서 선생 일을 하며 감리교회에 다녔고

자기 어머니도 신실하게 감리교회에 다닌다면서 나보고

어느 교회의 목사인가 물었다. 나는 안식일교회의 목사라고 소개하고

며칠동안 같은 감방에 있으면서 성경책도 없이 교파를 초월한

성경공부가 시작 됐다. 비록 성경책은 없었지만 젊은 교사로

교회를 다니던 사람이라 아주 이해가 빨랐다.

나는 안식일문제에 관해 주로 이야기를 했더니 매우 감사하다고 하며

자기가 이제 깨달았으니 이곳을 나가면 안식일교회에 다니겠다고 이야기했다.

나는 계속해서 윌리암 밀러의 재림운동과 하늘지성소에서

대제사장으로 우리를 위하여 봉사하시는 예수에 대하여 설명하자

가뭄에 단비처럼 잘 받아 들였다. 나도 조금씩 사도 바울의

옥중전도의 기쁨을 맛보기 시작했다.

 

 

형무소 안에서는 방 안에 있는 변기를 사용하는 일에 조심을 해야 했다.

그래서 새로 죄수가 들어오면 소변이 벽에 묻어 그 악취가 계속

방에 남기 때문에 주의를 주곤 했다. 그런데 어쩌다가 하루는

오물이 가득 찰 때까지 가져가지 않아 우리 방에 악취가 심했다.

나와 유제경 선생은 할 수 없이 형무소 뜰에 걸으러 나가는 시간에

변기통을 들고 나갔다. 막상 변기통을 들고 나와 보니 오물을

어디다 버려야 되는지 난감했다. 여기 저기 살피다가 한 곳이

푹 파인 곳이 보이기에 그곳에 오물을 쏟아 버렸다.

그 순간, 어디에 있었는지 간수가 뛰어나와서 그곳에

더러운 대변을 쏟아 부었다고 소리를 지르며 펄펄 뛰었다.

특히 유제경 씨에게 더욱 가혹하게 책망하며 곧

큰 벌을 줄 것 같았다. 곁에 서있던 나는 어찌나 걱정이 되는지

안절부절 못하고 “잘못했다!”고 말하는데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한줄기 소나기가 세차게 내리기 시작을 했다.

간수는 비를 피하려고 집 모퉁이에 있는 처마 밑으로 들어가기에

“옳지! 이때다!”라는 생각이 들어 간수가 미처 우리를 부르기 전에

우리는 변기를 든 채로, 그야말로 번개같이 달아나 방으로 돌아 왔다.

만약 이 때 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그 간수에게

엄청나게 맞았을 것인데 우리의 난처함을 보시고 주님께서

비를 내려 주셨다고 아니 믿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이것이 바로 옛날에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인도하던

구름기둥이 아니고 무엇이냐?”라고 말 하면서 감사 기도를 드렸다.

이일로 우리는 더욱 친구가 되어 성경 공부를 더 열심히 하게 되었다.

결국 침례문제까지 이야기가 되자 유제경 씨는 아무 거부함 없이

“출감하는 대로 침례를 받겠다.”고 약속 하였다.

 

 

대개 미결수들은 가족들이 면회를 올 때 세수 비누 같은

일상 용품들을 가지고 오는데 우리는 이것들을 감옥 내에서

선물로 사용하곤 했다. 나에게도 아내가 세수 비누를 가져오곤 해서

감방을 담당하여 돌아다니며 일하는 죄수에게 그 비누를

선물로 주었더니 그 후로는 우리 방에 대하여 관심을 써주면서

변기를 전보다 자주 비워주어 더 이상 변기로 인한 고통은 없게 되었다.

이 사람들은 이렇게 받은 선물들 중에 일부를 더 높은 사람에게

상납을 한다는 것을 후에 알게 되었다.

감옥 안도 감옥 밖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나는 이것을 보면서

앞으로 나는 그리스도인으로 이런 선물을 받지 않고도 언제나,

어디서나 대가 없이 봉사를 하여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얼마 후에 유제경 씨는 다른 방으로 이감이 되었는데

마치 나의 혈육을 떼 내어 보내는 것처럼 마음이 아프고 섭섭했다.

내가 출감을 하자 유제경 씨의 자당께서 내 집까지 찾아 오셨기에

유 선생의 안부도 알려드리고 감옥소 내에서 혈육처럼 지내던

이야기와 우리의 기별도 함께 말씀드렸다.

내가 출감하고 알게 된 것은, 유제경 선생이 결국 4년간의 옥고를

다 치루고 대동아 전쟁이 다급해 지자 위생병으로 끌려가서

고생을 한다고 했다.

다행히 유 선생은 전쟁 중에 살아남아, 해방이 되자 고향으로 돌아와

우리교회에서 침례를 받고 신실한 교인이 되었고,

또 공주 사범대학의 교수가 되어 열심히 제자들을 가르치며,

종종 그곳을 찾아오는 우리교회 문서전도인 들을 보살펴 주고

동료 교수들에게도 소개해 주곤 한다고 했다.

당시에 서대문형무소에 있으면서, 나나 유제경 씨 본인도

이유를 모른 채 간수의 명령에 의해서 며칠 함께

같은 감방에서 지냈지만, 후일에 나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유제경 씨를 당신의 백성으로 삼기위하여 기이하신 방법으로

나의 감방으로 인도하셨음을 절실히 깨닫고 크게 감사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렵고, 외로울 때에 우리 자신의

어려운 문제에만 연연하게 하지 않으시고 다른 영혼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사 나와 남이 모두 축복받고 구원받게 하심이

얼마나 감사하며 그 사랑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지 알게 되었다.

나는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유제경 씨와 나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 주신 것이라 확신하고 있다. 이 때 감방에서 겪은 이 경험들은

항상 내 생애에 크나큰 도움이 되었다.

후에 알고 보니 이 청년은 유관순 열사의 조카 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감방에 먼저 들어와 있던 조두만 씨와는 거의 반년이나

같은 감방에 지내면서 복음 안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여러모로

힘써 보았지만 평양부청에서 일하던 공무원이라 그런지

남의 말에 귀를 기울려고 하지 않았다.

형무소에서 미결수에게는 매달 읽고 싶은 책을 신청하라는

통문이 오는데 그 책 명단 중에 단권으로 된 “에스더”서가 있기에

나는 조두만 씨를 위해 신청하여 그 분에게 읽기를 권했지만

흥미를 보이지 않더니 내가 하도 간곡하게 권하니

“그럼 한번 읽어 보지요.”하고는 읽기 시작을 했다.

다 읽고 나서는 “정말 하나님께서는 자기백성을

이렇게 구원하시는가?”하고 물으며 몇 번을 계속 읽었다.

그리고는 “우리민족도 이렇게 하나님이 구원을 해 주시면

좋겠다!”라고 하시기에 신앙적인 측면에서 이야기를 해 보니

일본에 대한 복수심으로 하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계속 신앙을 권하자 “하나님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요.”하고는 그만 이었다.

내가 오기 전에 4년이 넘게 감방에 있던 조두만 씨는 나와 5, 6 개월

함께 있었는데 나에게 차입되는 의복을 매우 부러워했다.

그 중에서도 나의 딸아이가 만든 털실조끼를 특히 부러워하기에

나는 딸아이에게 부탁하여 털실조끼 하나를 더 만들어 드리니

얼마나 기뻐하는지 몰랐다. 후에 조만두 씨가 출감하여

회기동에 있는 나를 찾아 왔었다. 나는 이때에 도 간곡히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권면 했으나 생각해 보겠다고만 했다.

씨앗은 뿌려 졌으나 발아 되지는 않은 듯하다.

 

  • ?
    명지원 2012.02.14 20:18

    가족들과의 생이별. 보안법이라는 익숙한 단어가 그 때도. 검사들과 순사들. 많은 것을 생각게합니다. 감옥 안에서도 복음을 전하시는 목사님. 그리고 사모님과 자녀들에 대한 애틋함과 그리움. 일제가 저지른 영혼말살에 대하여 깊은 생각에 젖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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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49 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18 6 정태국 2012.02.11 1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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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46 인문적(人文的) 가슴이 없는 대통령 이명박 2 인문 2012.02.12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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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44 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19 1 정태국 2012.02.13 1280
12943 곽목사님 설교 속편 2 기다리는이 2012.02.14 1219
12942 안식교의 종말.. (수정) 김 성 진 2012.02.14 1486
12941 기도에 관한 가장 훌륭한 설교 하나 4 김원일 2012.02.14 3783
12940 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20 정태국 2012.02.15 1213
12939 '로폼'이란 말이 무슨 말임니까 ? 6 무식자 2012.02.15 3083
12938 - 후천 개벽(開闢)은, 어느누가 하나 -...《해월유록에서》 문 명 2012.02.15 1351
12937 ◐ 북두칠성(北斗七星)이 , 인간(人間)으로 오다 ◑...《"해월유록(海月遺錄)에서》 1 문 명 2012.02.15 1945
12936 투서에 관하여 - 고 김관호 목사님의 자서전에서 발췌 (하문님께) 4 도우미 2012.02.15 2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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