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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16

 

(후에 조만두 씨가 출감하여 나를 찾아 왔었다. 이때에 도

간곡히 복음을 받도록 권면 했으나 생각해 보겠다고만 했다.

씨앗은 뿌려 졌으나 발아 되지는 않은 듯하다. 연재 #15 끝부분)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 된지 3개월이 지난 어느 날,

급기야(及其也) 복심법원에서 판결을 받는 날이 되었다.

재판정에 출정 한다고 사람들이 죄수들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하는 “용수”를 쓰라고 했다.

“이제는 정말로 죄인이 되는구나!”라고 생각이 들었다.

법정 유치소에 도착한 후에 밖을 보니 내 아내가 와있는

것이 보였다. 내 마음에는 온갖 생각이 다 스쳐 지나갔다.

재판관은 사건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질문을 했다.

그러나 무슨 이유로 그 질문들을 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피고는 일본천황을 어떻게 생각 하는가?”

“그는 일본영토를 통치하는 왕이고 내가 신봉하는 천황은

우주세계를 통치하는 분입니다.”

“서울 남산에 있는 조선 신사(神社)에는 무엇이 있는지 아는가?”

나는 곧 기독교인인 내가 일본에 대해서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는지를 검사하고자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서울 남산 신사에 가 본적은 없으나 일본 역사책에서

이들이 신으로 위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읽은 적이 있기에

아는 대로 대답을 했다.

“서울 남산신사에는 경고목이라는 거울과 검과 옥이라고 구슬이 있습니다.”

아마 내가 대답을 못했다면 트집을 잡으려 했다가 내 대답이

의외였는지 재판관은 말이 없이 검사를 쳐다보았다.

내가 한 대답을 가지고 구형을 하라는 뜻 같아 보였다.

여기서도 6개월의 징역을 구형받고, 판사는 구형대로

6개월의 징역을 선고했다. 그러면서 “이 판결이 합당치 않으면

상고하라!”고 하기에 또 다시 “상고하겠다!”고 선언을 하고 나왔다.

 

 

간수들은 “6개월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또 상고를 하느냐?”고 했지만

나는 “3개월을 선고 받았다 해도 순복할 수가 없으며,

상고했다가 잘 안되어 징역을 살지언정 하지도 않은 일을 한 것으로

간주한 판결은 그대로 복종하는 것은 우리교회의 수치라.”고 대답을 했다.

감방으로 돌아와 조 두만 씨에게 판결과 상고를 이야기했더니

자기 경험으로 보면 정 목사께서 상고하신 것은 곧 무죄판결이 날것이고

그 동안 감방에 있던 것을 다 계산하여 즉시 석방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웬걸!

내가 상고한 것을 심의하는데 만도 몇 달을 기다려야 했다.

뿐만 아니라 상고심에서는 재판장에 나가서 내 의견을

직접 이야기 할 수도 없고, 오직 상고이유서를 감방에서 써서 바치면

그것을 심의해서 징역이나 석방 중 한 가지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어이가 없었다. 나야말로 재판관의 미움을 산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되었다.


1942년 2월 19일.

나는 드디어 6개월의 징역을 선고받았다. 재판관 앞에

서보지도 못하고 받은 언도였다. 오늘, 2월 19일부터

8월 19일 까지 6개월의 징역을 하라는 선고이며

죄명은 보안법위반이었다. 그 당시에 보안법위반은

사상범에게만 적용하는 악질적인 법이었고 이 법보다

혹독한 법은 오로지 치안유지법위반으로 이 법에 걸린 사람은

사형까지 처할 수 있었다. 징역형을 받았으나 이상하게

그 쪽 형무소로 보내지 않고 그냥 미결수 감방에 있으니

조두만 씨는 아무래도 판결은 났지만 곧 석방해 주려는

것 같다 했다. 그러나 또 웬걸! 한 열흘 후 나를 불러내서

징역을 시키는 곳으로 끌고 갔다. 간수는 나를 포함하여

열 명의 기결수들을 데려 가면서 징역 하는 곳을

여기저기 보여주며 겁을 주기에 걱정이 쌓였다.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밖은 “사회”라 부르고

담장 안은 “저승”이라고 불렀다. 여러 별실을 지나가며

규칙을 어겼을 때에 주는 형벌을 설명하며 고문 기구들을

보여 주는데 정말 “저승”으로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에는 가죽조끼를 쭉 걸어놓은 곳이 있는데 간수는

“너희들이 징역 하는 동안 명령에 불복종 하면 이 가죽조끼를 입히고

물을 뿜는다. 그러면 가죽조끼가 점점 불어나서 몸통을 조이고 들어와,

결국 내쉬는 숨만 쉬지, 들이쉬는 숨은 못 쉬게 되고 만다.

이것은 죽는 것 보다 더 괴롭다“라며 겁을 주었다.

 

 

3월 초순,

징역 하는 곳으로 가서 푸른 죄수의 옷을 벗고

붉은 죄수의 옷을 입었다. 처음 선고를 순순히 받아 드리고

가만있었다면 짧은 기간 안에 간단히 끝났을 수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어이없게도 중죄인이 되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비록 붉은 죄수의 옷을 입어 중(重)한 죄수가 되었지만,

우리교회는 정치에 관여를 아니 하며 나도 교회의 뜻을 따라

정치적인 선동이나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 보려고

모든 가능한 방법을 다 해 보았으니 별로 원망스러운 것은 없고

믿음으로 교회 일을 하다가 시험 당한다.”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다소 편안했다. 이런 고생은 앞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다가 받을 더 큰 고생을 위한 준비라고 마음으로 위로했다.

실제로 나는 형무소에 들어와서 많은 수양을 받았다고 생각되었다.

미결수로 있을 때 내가 일본어 책도 여러 권 읽게 되었고

한 달에 한 권씩 내가 원하는 책도 차입할 수가 있어서

비록 일본어로 된 것이지만, 집에 있는 창조시대와 부조의 생활이라는

책을 들여보내라 해서 그것을 여러 번 읽고 감동을 받았다.

징역 하는 동안도 틈틈이 책을 많이 보았으니

불행 중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5. 제 7동 담임 목사-제 1 부


내가 수감된 제 7동은 48개의 감방이 있었는데 경범자들의

감방이었다. 붉은 죄수복을 입고 징역수의 감방에 들어가니,

죄수들을 홀수로만 배정을 했다. 이유는 감방에서 문제가 생기면

그 감방 사람들이 증언을 하게 되는데 그 증언이 둘로 나뉘어

양쪽의 숫자가 같아져서 결정하기 힘든 결과를

초래(招來)하지 않기 위함이라 했다. 내가 그 방에 들어가니

두 사람이 붉은 죄수복을 입고 앉아 있었다. 내가 들어와서

이 감방도 홀수가 되었다. 두 죄수 중 한명은 장님이었고

다른 죄수는 젊은 사람인데 과거에 면서기를 하다가 형을 받고

수감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면서기가 심심하면 소경 죄수에게

침을 뱉곤 했다. 그러면 이 장님은 이 젊은 죄수를 잡겠다고

소리를 지르며 감방 속을 뛰어 다니며 소란을 피웠다.

나는 그러지 않아도 죄수의 생활이 힘든데, 이 두 죄수 때문에

이곳으로 오면서 보게 된 고문 기구로 고문을 당하게 될까보아

마음이 조마조마 하여 2중고(二重苦)를 치르게 되었다.

한 열흘을 그렇게 마음고생을 하며 지내다가 갑자기 이런 생각이 났다.

“내가 왜 2중으로 마음고생을 하고 있지? 어려우면 주님께

기도로 맡길 일이지!” 나는 이 힘든 상황 속에서 피할 길을 달라고

주님께 간절히 기도드렸다. 기도의 응답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기도를 드린 바로 다음날,

갑자기 간수가 와서 “산주이찌방!”하고 큰소리로 불렀다.

그때 나의 죄수 번호가 1831번인데 감방에서는 앞의 두 숫자,

즉 18은 빼고 31번만 부르는데 일본말로 31번이 “산주이찌방”이니

나를 찾는 소리였다. 나도 큰 소리로 대답을 하고 나갔다.

간수의 손에는 미야리라는 문패처럼 생긴 명패를 들었는데,

미야리 한 면에는 죄수의 이름을, 다른 면에는 이 죄수가

무엇 하던 사람이며 무슨 죄명으로 들어 왔는지가 다 쓰여 있었다.

이 간수는 미야리를 들고 그 명패를 뒤집어 보고 나보고 말했다.

“산주이찌방! 사회에서 목사 노릇 했구만! 몇 년이나 목사 노릇 했나?”

“한 10년 되었습니다.”

“여기는 왜 들어 왔는가?”

“재판관이 들어가 징역 하라 해서 들어 왔습니다!”

그 간수는 내가 한 이 말에는 아무 반응이 없기에

말을 잘못 했나 해서 가슴이 덜컹했다.

“그래, 산주이찌방!(31번), 밖으로 나와 다닐 마음 없어?”

“말씀은 고맙지만 이렇게 감방에 갇혀 징역사는 내가

어떻게 밖에 나가 다니겠습니까?”

“그러면 내가 나오게 해 주겠어!”

하면서 나를 감방에서 나오게 했다.

나는 반신반의(半信半疑)하면서 감방을 나섰다.

 

 

48개의 감방이 복도를 중심으로 해서 양 옆에 있는데

복도 바닥을 얼마나 잘 닦았는지 반짝반짝하게 윤이 났다.

비록 감옥 안이지만 11개월 만에 감방에서 나와 바깥바람을 마시니

마음이 한결 풀리면서 자유가 얼마나 귀한지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었다.

나는 지금까지 두 감방 동료의 소란 때문에 걱정을 하면서,

“성경에 나오는 요셉이 감옥에서 모든 일을 맡아 했다면 아마

밥 주는 일도 했을 터인데, 나도 감방 밖으로 나가서 밥 주는

일이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간수가 나를 데리고 나가서 복도에 서있는 몇 명의

배식담당 죄수들 앞으로 데려가서 하는 말이 “산주이찌방도

오늘부터 7동 감방죄수들에게 밥 주는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일이 얼마나 특전인지도 모르면서,

요셉이 했을지도 모르는 이 배식당번이라도 했으면 하고

생각을 했었는데, 막상 나와서 밥 주는 일을 해보니

신참(新參)에게는 이일이 보통 특전(特典)?이 아니었다.

배식 담당 죄수들에게 인사를 하니 “31번! 너 몇 년짜리야?”

하면서 몇 년 형을 받았는지를 물었다. “6개월 입니다!”라고 하니

서로 얼굴들을 쳐다보면서 의외라는 표정들이었다.

그들은 대수롭지 않은 죄목이지만 다 4, 5년에서 10년 이상

형을 받은 사람인데 나는 6개월짜리가 배식 당번이 된 것이다.

나는 이 일이 정말 주님의 섭리라는 것을 깊이 깨닫고 감사를 드리면서,

요셉의 본을 따라 최선을 다해 봉사하기로 결심했다.

 

 

7동 감옥에는 48개의 감방이 있었고 죄수는 적게는 250여명에서

보통 300여명 이상이었다. 나까지 여섯 명이 매일 세끼를

제공하는 배식이 그리 간단치가 않았다. 밥은 목판에

이미 양이 정해져 나오니까 하나씩 주면 되는데,

반찬이나 국은 일본된장이나 간장을 담던 큰 나무통에 담아서

두 사람이 메고 다니며 나누어 주는데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가끔 북어 꽁지나 대가리를 소금물에 끓여서 나오는 날은

무거운데다가 뜨거운 국물이 출렁 거려서 매우 힘이 들었다.

배식하던 죄수들은 산주이찌방이 나이도 많고 노동도

안 해본 사람이라며 국통 메는 것은 면제해 주었다가

나중에 6개월짜리는 곧 감옥에서 나갈 것이니 모든 것을

경험해야 실감나는 감옥살이를 해 보는 것이라며 나에게도 시켰다.

그러나 큰 사고 없이 감당한 것도 주님의 은혜와 돌보심이라 생각 된다.

그런데 이 감옥에서 밥 주는 일에도 부정이 있었다.

감옥 밥은, 보리쌀과 좁쌀에 약간의 입쌀을 섞은 것인데

몇 알 안 되는 흰쌀을 먹을 때는 ”야, 이 흰쌀로 만든

죽이라도 한번 먹어보면 정말 참 좋겠다!”라고 말들을 한다.

그런데 감방에 환자가 생기면 흰죽을 만들어 내려 보내는데

배식당번들이 가끔 환자수를 거짓으로 보고하여 흰 쌀죽이

여분으로 나오게 된다. 환자에게 흰 쌀죽을 배식하고

나머지는 배식하는 죄수들이 먹게 된다. 배식하는 죄수들에게

이 부정은 알려진 비밀이었다. 나는 이런 일에 공범이 되었고

양심의 가책도 들었지만 그 흰쌀 죽의 맛은 가히 일품이었다.

처음에는 이일에 할 수없이 동조하면서 가책도 되고

가슴이 조렸지만 곧 간수들이 배식당번들의 이런 행위를 묵인하여

배식당번들의 수고에 대해 보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전은 그 뿐이 아니었다. 이곳의 반찬은 경찰서 감방보다는 좋아서

가끔 북어 대가리 같은 것으로 국을 끓여 나오면 북어 대가리들은

대부분 통 아래 갈아 앉았기 때문에 밥을 늦게 먹는 우리의

차지가 되었다. 밥 주는 일을 하는 덕분에 내 체중은 점점 늘었다.

또 원하면 전기 목욕탕에서 매일 목욕을 할 수도 있었다.

사회에 있을 때도 목욕은 한 달에 한 두 번이나 했을까 말까 했는데...

 

 

그러나 이런 특전에 관계없이 나는 감방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해 봉사하기로 했다. 각 감방에서 무슨 필요가 생기면

감방 안에서 손으로 탁하고 나무패를 치면 그 나무패가

밖으로 튀어나오는데 이것은 죄수들이 봉사하는 사람을

부를 때 사용되었다. 이 나무패가 튀어나온 감방에 가서

원하는 바를 물어본 후 허락된 심부름을 하게 되는데

대부분 물을 달라는 요청이었다. 배식죄수들은 이것이 귀찮아서

튀어나온 나무패를 보면 가까이 가서 탁 쳐서 안으로 밀어 넣고는

무엇이 필요 한지 묻지도 않고 가 버리곤 했다.

나는 나와 같은 죄수들의 필요를 위해 최선으로 봉사해야

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그 사람들의 필요를 최대한 들어주었다.

날씨가 점점 더워지면서 물을 달라는 방이 매우 많아져서

나는 아예 물을 통 채로 메고 이리 저리 자주 뛰어 다녔다.

그러면 간수들은 “산주이찌방”은 뭐 그리 열심히 물통을 메고

부지런히 다니느냐고 묻곤 했다. 가끔 간수들에게 핀잔을

들어가면서도 각 감방에 잘해 주려고 노력했다. 곧 많은 죄수들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심부름을 하자면 상당히 어려울 터인데

잘 해주어 고맙다! 31번 참 좋다”하며 감사해 했다.

사실 물을 통째로 메고 뛰어 다니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갈증을 푸는 그들의 모습에서 보람을 느꼈다.

하루 아침에는 나에게 배식 당번을 시킨 조선인 간수가 아침

더 일찍이 감방에서 나와서 자기 하는 일을 거들어 달라고 했다.

즉 재판에서 형을 받고 형무소로 넘어오는 죄수들의 이름과

직업 등을 적은 후에 이 죄수들을 일렬로 앉혀놓고 밥그릇과 숟가락,

변소에서 쓸종이를 나누어 주는 일이었다. 감방에서 한 시간이라도

밖에 나와 있을 수가 있다는 것은 큰 특전이었다.

 

 

하루는 부자지간(父子之間)되는 두 죄수가 왔는데

이름과 직업을 물으니 옥계승 이라 했다. 나는 아직

만나 본적은 없지만 그 이름을 기억을 하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황해도 사리원 사람으로 사리원교회

김진제 장로와 가깝게 지나던 신실한 교인이었으나

여호와의 증인 즉 만국성경연구회(萬國聖經硏究會)의

유혹을 받고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었다.

그 당시에 여호와의 증인도 우리교회처럼 나라의

미움을 받고 있었음으로 잡혀 들어 왔으리라 생각되었다.

비록 우리교회를 떠나 다른 교도가 되었으나 내가 정동심이라고

소개하자 옥계성 씨는 나보다 더 반가워했다.

자기부부와 아들부부가 다 체포되어 4년형을 받고

모두 감옥으로 오게 되었다고 했다. 이 사람들이

차라리 진리를 위해 박해를 받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에 여호와의 증인들은 특히 안식일교인들을

찾아다니면서 유혹을 했는데 그 몇 가지는 다음과 같다.

우리 교회가 “죽으면 영혼이 없다.”라는 교리를 가진 것을

칭찬하면서 이들은 아예 “영혼은 처음부터 없는 것”이라고

주장을 했다. 또 군대에 가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우리와 비슷하나

그들은 십일금 제도를 부인 했는데 많은 안식일 교인들이

여기에 유혹을 받곤 했다. 거기다가 안식일 제도는 안식일뿐만 아니라

일주일 동안 매 날이 다 거룩하니 아무 날 예배를 드려도 좋다고 해서

유혹을 했다. 여러 가지 잘못된 주장중 제일 잘못된 한 가지는

1914년 1차 대전 때에 예수가 재림했다고 주장하면서

“파수대”라는 잡지를 가지고 각 가정을 방문해서

안식일 교인들을 유혹했다. 내가 그들에게 “만일 1914년에

예수가 재림 하셨다면 우리가 무엇을 바라고 살아야 하는가?”하고

질문하면 그들은 묵묵부답이었다.


이곳에 “다까야마에이다로”, 즉 고산 영태랑(高山永太郞) 이라는

30세 가량 된 조선인 젊은 간수가 있었는데 하루는 나를 불렀다.

“산주이찌방 (31번)!”

형무소 안에는 간수가 최고인지라 아무리 죄수가 나이가 많아도

하대(下待)를 했다.

“왜 그러십니까? 무슨 할 일이라도 있습니까?”

“오늘 이 형무소에 있는 모든 죄인을 다 나오게 할 터이니 연설 한번 하시오!”

“아니 내가 지금 붉은 죄수복을 입은 사람인데 무슨 연설을 하라고 하십니까?

“아! 내가 한 번 시킬 터이니 하시오!”

내 의견을 묻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명령이었다.

그리고는 큰소리로 말했다.

“자, 잘 들어라. 한 사람도 남김없이 다 나와서 복도에 앉아라!”

정말 48개의 감방 문을 전부 열고 300명 이상의 죄수들이

전부 나와서 감방 복도에 앉혔다. 나는 너무 놀라 한편에 가서

가만히 숨었다. 이 간수가 다시 소리쳐 말했다.

“지금은 ”산주이찌방“(31번)이 나와서 연설을 할 터인데

사회에서 목사 노릇하던 사람으로 좋은 말로 연설 할 터이니 다들 잘 들어!”

“네! 잘 듣겠습니다!”

300여명 이상이 모두 큰 소리로 대답을 하니 기가 더 죽었다.

“자, 산주이찌방! 나와서 연설해!”

 

 

바로 그때 금테 모자를 쓴 높은 간부급(幹部級)사람들이 지나가며

무슨 일이 생겼냐고 묻자, 이 간수는 “여기 사회에서

목사일 보던 사람이 있는데 이들에게 좋은 말을 할 수 있을 듯해서

다 나오라고 했다”고 설명을 하자, “아, 그러냐?”고 하면서

다른 말없이 지나갔다. 이것을 보고 나는 “이 조선인 간수가

꽤 신망을 얻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산영태랑” 간수가 죄수들에게 한마디 훈시의 말을 하면서 사회를 했다.

“너희들은 지금 서대문 형무소 7동 복도에 앉아 있지만,

담장 저 밖에 있는 훌륭한 예배당에 앉았다고 생각을 할 것이며

훌륭한 목사의 설교를 듣는다고 생각해야한다. 알겠나?”

그러자 전 죄수들이 일제히 “네!” 하고 큰소리로 대답을 했다.

곧 다시 명령이 떨어졌다.

“산주이찌방! 빨리 나와서 연설 시작해!”

조금은 겁에 질린 채로 나가니까 한 300명이 넘는 죄수들이

시뻘건 죄수복을 입고 쭉 앉았는데 몇 마디 되는대로 말을 했는데

한두 가지 외에는 기억이 없다. 사실 한번 죄수들에게

설교를 해 보았으면 하는 불가능한 생각을 해 보기는 했지만

막상 붉은 죄수복을 입은 300명 이상의 죄수가 복도에 앉아

나를 쳐다보니 좀 기가 질렸다. 막상 이렇게 서니 16년 전인

1926년 8월 북 간도, 용정에서 가졌던 천막 전도회가 생각이 났다.

당시 용정 시내 복판에 1000여명의 사람이 왔었는데 여자나

아이들은 거의 없이 40세 미만의 청장년들이었다.

당시의 만주 사회는 반 종교, 반기독교 운동이 심한 때인지라

너무도 조심스럽고 긴장이 되었었는데 지금 바로 그런 심정으로

죄수들 앞에 선 것이었다. “나는 제 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회에서

목사 노릇하다가 죄 있다고 해서 들어온 사람입니다.

연설보다는 한 가지 묻고 싶습니다.

혹시 제 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회를 아는 사람 손 들어보십시오!”

300 명 넘는 죄수들 중에 불과 두서너 명밖에 되지를 않았다.

“그러면 다시 묻겠는데 시조(時兆)라는 월보(月報)를 아는 사람

손 좀 들어보시오!”

이번에는 300여명 가운데 거의 다 시조월보를 안다고 손을 들었다.

나는 “아하, 우리가 목사나 전도사로 나가 일하는 것도 중요하나

우리 교회의 좋은 서적을 통하여 전도하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하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5-60여 년 전에 그것도 죄수들 사이에서 시조를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전부라는 것은 굉장한 일이 아닌가?

나는 “우리 서적을 가을바람에 나는 낙엽처럼 뿌리라!”는

화잇 부인의 권면이 새삼스럽게 생각이 났다. 나는 또 물었다.

“지금 이 형무소로 징역언도를 받아 넘어온 것이 억울한 죄명이나

또는 억울한 재판 때문에 공연한 징역을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얼마나 됩니까?”

놀라운 것은 거의 다가 손을 들었다.

자기가 죄수라고 생각하는 이가 없단 말이었다.

“여러분처럼 나도 징역 하러 왔지만 억울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찌하겠습니까? 이미 징역하려고 들어 왔으니 잘 순종하고

명령에 복종해서 복역기간이 더 늘지 않도록 노력하고 이 징역생활을

다 마치고 나갈 때는 좋은 사람 되어 우리 안식일교회 같은

교회들을 찾아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성경에 보면

잘 하느라고 한 사람들이 잘못 재판을 받기도 했는데,

그것은 하나님만이 알고 계십니다. 언젠가 우리를 잘못판결해서

우리를 징역 보낸 사람들까지, 누구나 다 하나님 앞에서

심판 받을 것이니 너무 억울해 하지 맙시다.”

“옳소!” “그렇소!”라고 소리치며 그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는 것을 보았다.

“그런 소망의 하나님을 잘 공경 하도록 하십시오!”라는 말로

대강 이야기를 끝냈다.

 

 

이 일이 있고 나서부터는 감방에 있는 300여 명이 나를 31번이라

부르지 않고,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손으로 패를 쳐서 밖으로 내밀고는 “

정 목사님! 이리로 좀 오세요!” 하고 부르는 것이다.

그래서 “제발 나를 31번이라 부르고 정 목사라고는 부르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했으나 막무가내(莫無可奈)였다.

“우리가 정 목사인지 몰랐을 때야 31번이라 불렀지만

이제 정 목사인지 알았는데 어찌 31번이라 부르겠소?”라고 하더니

다른 한 쪽에서는 교회에 대해 뭔지 좀 아는지 “정 목사가 7동 감방의

담임 목사가 되었는데 담임 목사를 어찌 31번이라 부르겠느냐?”

하는 것이었다. 붉은 죄수복을 입고 정 목사님! 목사님! 소리를 들으니

매우 민망스러웠지만 목사라는 소리는 나로 더 열심히 봉사하라는

음성으로 듣고 더 성의껏 봉사해 주었다.

 

 

하루는 조선인 간수 다까야마에이다로가 하는 말이 “

이형무소 안에 미성년 죄수가 몇 십 명 있는데 31 번은

그들에게도 몇 마디 해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라고 했다.

나에게 그런 부탁을 할 때 처음에는 사양하는 척 했지만 속으로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일을 하라고 나를 들여보내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쾌히 허락하고 갔다. 그곳으로 가보니 미성년자 죄수가

한 30여명 있는데 모두 20세 미만 이었다. 미성년자 죄수를 구분하기

위해 이들에게는 푸른 죄수복을 입혀서 징역을 시키고 있었다.

몇 마디 젊은이들에게 적당한 말을 해 주니 역시 상당히 좋아했다.

나는 미성년자들이 어떻게 이렇게 감옥까지 왔을까 해서

여러 가지 질문을 통해 조사를 해보니 대부분 어머니의 사랑을

느껴보지 못한 아이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가정에 취미를

갖지 못하고 집을 뛰쳐나와 돌아다니며 범죄자가 되고

결국 체포되어 형무소에 와서 고생을 하는 불쌍한 아이들이었다.

미성년자 죄수를 보고 나니 나의 아이들 생각이 났다.

“내가 지금 전실 소생이 6명이나 있는데 이들을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일까? 내 아이들을 잘 돌아보지 못하면

나의 여섯 자녀도 이 소년들과 같이 될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 생각하니 이 미성년 죄수들도 내 자녀들과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이 되었다. 내가 이제 나가면 내 자녀들을 최선을 다해

돌보아서 어떻게 해서든지 이와 같은 사람들이 되지 않도록

지도해 보겠다고 굳은 결심을 했다.

 

 

미성년 감방을 다녀온 후, 조선인 간수 다까야마에이다로는

내게 감방 밖 한 구석에 있는 책상 하나를 주었다.

그곳에는 그림도 한 장 있고, 거울과 연필과 종이도 있었다.

이 간수는 나에게 날마다 이 책상에 가서 거울도 보고 그림도 보고,

또 미성년 죄수들과 간담(懇談)한 것들을 기록해도 좋다고 했다.

그 덕분에 나는 14개월 만에 처음으로 내 얼굴을 보게 되었는데

내가 검거되기 전보다 얼굴 모양이 더 좋아 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은

이렇게 역경에 처해도 최선의 결과를 얻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이렇게 특전을 받으니 나는 감옥소에 온 것이 아니라

무슨 연구소에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앉을 의자는 허락이 되지를 안아서 감옥소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정말 형무소 안에서 죄수인 나에게 이런 유래에 없는

파격적인 혜택들을 허락한 것을 보고 또 한번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고산 간수에게 정말 감사한 마음이 많았다. 고산 간수는,

나에게 죄수들의 밥 심부름과 물심부름을 할뿐만 아니라 밥 주는

구멍에 가서 그들과 이야기 할 자유까지도 허락해 주었다.

나는“좋은 기회다”라고 생각하고 고산 영태랑 간수에게

내가 미결수로 있을 때에 차입되었던 고대사화 책을 읽게 해 달라고

부탁을 했더니 아무 소리 없이 그 책을 내개 돌려주었다.

나는 그 책을 가지고 감방을 돌며 원하는 사람에게 설명해 주니

재미있게 듣고는 이런 소리를 평생 처음 듣는다면서 더 말씀을

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어떤 죄수는 31번이 이 감방에서

우리 담당목사가 되었으니 무척 기쁘다고 진심어린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내 설교 후에 많은 사람들이 나를 신용하게 되어서

신상에 관한 개인 상담이나 신앙에 관한 상담도 많이 해 왔다.

그렇게 되니 7동 감옥소의 각 감방들은 마치 성경공부 교실이 된듯했다.

 

 

여러 가지 사정들을 알게 되면서 형무소라는 것이 죄수들을

교화시키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나쁜 짓을 더 연구하게

만드는 곳이 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어떤 죄수들은

의기투합하여 “이번에는 이런 실수 때문에 잡혀 왔으니

다음번에는 이렇게 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하면서

범죄에 대하여 더 많은 연구를 하는 것도 보았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사회적인 무관심이 이런 일을 더 하게

만든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한 번은 보기에는 얌전하게 생긴

중년의 남자가 7동에 있는 독방에 들어 있기에 가서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시작했더니 내개 이런 말을 했다.

“저는 마흔한 살인데 형무소에 무려 여섯 번 째입니다.

목사님이야 한 점 부끄러울 것이 없으시겠지만 나는 여섯 번씩이나

감옥을 들락거리고 있으니 내가 생각해도 참 한심합니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여러 번 들어왔소?”

“나는 절도범인데 이렇게 상습범이 되고 말았습니다.

처음 도적질을 하니 2개월 형을 주었는데 그 다음에는 5개월 정도,

그러다가 이번에는 상습범이라 하여 4년을 받았습니다.”

“아니, 그래도 한두 번 들어왔다 나갔으면 잘 생각해서 살지 그랬소?”

“목사님, 모르시는 말씀이십니다. 한 번 형무소에 들어왔다 나가면

아무도 신용을 해 주지 않으니 취직도 할 수 없고, 결국은

또 도적질밖에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어디를 지나가다가 씀직한 물건이 보이면 반드시

그것을 도적질 하고야마는 인간이 되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사람의 습관이 이렇게 형성 되는구나!”라는 생각과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또 한 번은 자칭 평안도 출신이라고 하는 자로서, 감옥 내에서도

흉악범으로 알려진 자가 독방에 수감되어 있었다. 하루는

고산 간수가 순시를 하는데 손을 내밀어 고산 간수의 눈을 찔렀다.

다행히 고산 간수가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그 흉악범은 끌려 나와

무참히도 매를 맞는 것을 보니 참 안되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감방은 서로 사람대접하기도 힘들고, 받기도 힘든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남은 기간동안 최선을 다해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의 상을 보여 주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루는 조선인 간수 “다까야마에다로”가 “이 7동에

새로운 죄수가 하나 들어왔는데, 꽤 유식하고 점잖은데

안식일교인이라고 한다.”라고 말해 주었다. 나는

“우리교회의 어느 분이 들어 왔나?”하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해서 찾아 가니 그 분은 몸집이 크고

용모도 준수한데 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

“선생님이 안식일 교인이라는데 어느 교회에서 오셨나요?”

“아, 나는 안식일 교인이 아니고 내 부인이 안식일 교인인데

순안 의명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렇다면 필시(必是) 나의 동창일 것이라 생각이 되어

부인이 누군가 하고 물었다.

“내 안사람보다 내 이름을 말하는 것이 더 빠르겠군요.

제 이름이 김동인입니다.”

그는 당시에 문제작으로 꼽히던 “운현궁”이라는 소설을 쓰는

유명작가, 김동인이었다. 비록 형무소 안이지만 이렇게

훌륭한 문인을 만나게 되어 무척 놀랐고 한편 몹시 기뻤다

“아니, 김 선생님이 어쩌다 이렇게 어려움을 당하시게 되었습니까?”

“내가 치안유지법에 걸려서 이렇게 되었소!”

조선인에게만 적용한 악질적인 법으로 치안유지법은

보안법보다도 훨씬 악독한 법이었다.

“아니, 김 선생님 같은 분이 어쩌다가 치안유지법에 걸리게 되셨나요?”

“내가 취중에 친구들과 환담(歡談)하다가 일본천황은

만세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말한 것이 밀고 되어 체포당하고

황실모독죄에 몇 가지 죄가 부가되어 4년형을 받고 들어 왔습니다.”

이미 말한 대로 일본은 전쟁을 일으키려고 나라에 협조하지 않는

종교인이나 문인들은 어떻게든 얽어매서 형무소에 들여보내던 때라

김 선생도 억울하게 걸려든 것이 확실했다. 또 이 분의 이야기를

듣자니 내가 6개월 형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크신 도우심이라는

생각이 다시 들어서 감사를 드렸다.

“그러면 김 선생님 부인은 누구이신지요?”

“아, 저 구로동 교회 김시희 씨의 누님 되는 사람이 제 아내올시다.”

“저는 목사를 하던 정동심 이라고 합니다.”

“아, 반갑습니다. 제가 들어오기 전에 정 목사가

구속되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분은 매우 미안해하면서 실은 자기가 몸집만큼

식사양도 큰데 감옥에 들어오면 적은양의 식사로

어떻게 견딜까 걱정을 했는데 정 목사가 형무소에서

배식당번을 한다기에 만나고 싶었다고 실토를 했다.

나도 전에 그랬지만 감옥 안에서는 밥 문제가 심각한 것이기에

얼마든지 이해 할 수 있었다. 나는 이 분에게

“부서진 밥”이라도 드리기로 했다. “부서진 밥”이라는 것은

목판에 찍혀 나온 밥을 배식하고 나면 목판에 숱한 밥알들이

흩어진 채로 묻어 있는 것을 말하는데 나는 그 밥알들을 모아

제법 큰 주먹밥을 만들어 김동인 씨에게 주었다.

그 분은 그것으로 허기를 메우곤 하시며 너무도 고마워했다.

죄수의 몸이 된지도 4개 월 가량 지나자 출옥할 때가 가까웠다고 하며,

규정대로 출옥하기 전에 죄수를 불러서 위로와 부탁을 한다하며

나를 호출하기에 교화사(敎化師)사무실로 갔다.

교화사는 나의 죄수번호를 부르지 않고 “정동심 목사”라고 하면서

하고 싶은 말들이 있으면 하라고 했다.

나도 정중하게 그간의 경위를 설명했다. 설명을 다시 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으나, 누구에게라도 나의 신앙과 복음을 전하고 싶고,

또 우리 교회의 입장을 설명 하는 것이 앞날을 위해 좋을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었다. “나는 독립자금을 호소한 죄로

형을 받았지만, 그런 사실이 전혀 없으면서도 이로 인해

체포 구금된 동료 사역자들과 교우들을 위해 할 수없이

고등계형사에게 시인 한점, 1심에서 6개월을 언도받고 항소하여

다시 신문을 받을 때에 사건과는 관계가 없는 일본천황에 대한

나의 사상과 인식을 조사 하는 등의 부당함과 억울한 점”을 이야기 했다. “

또 일본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이렇게 무고한 사람을

고생 시키는가?”를 물었더니 대답은 없이 “사람이 운(運)이 나쁠 때는

그런 수도 있다!”라고 하면서 “앞으로 석방이 되면 국가에 대해

원망이나 반대하지 말고 훌륭한 황국신민이 되라!”고 말했다.

함정은 자기들이 파놓고 사람을 이렇게 고생시키고는 이제 와서

“눈감고 아웅 하는 것” 같아 몹시 얄미웠다.

허나 그 이상 따진다 해서 무슨 보상이 되는 것도 없거니와

보상 능력도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니 그 사람에게

나와 우리교회의 입장만 전한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어느 날 아침, 갑자기 7동 감옥 남쪽감방에 있던 모든 죄수를

북편감방으로 옮기고 누구도 감방에서 나올 수 없다고 했다.

밥 주는 죄수들도 잠깐 밥 주는 일만 하고 다시 감방으로

들어가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경비도 매우 삼엄하고 다른 감방에 있는

죄수들도 내 방으로 몇 명이 옮겨오고 7동 전체가 긴장으로

휩싸이게 되었다. 조선인 간수 다까야마가 오후에 나왔기에

무슨 일인가 물었더니 고산간수도 어두운 얼굴로

이것은 기밀이라고 하면서 “오늘 12명의 죄수가

사형집행을 당하게 된다.”고 알려 주었다.

“7동 남쪽감방 옆에서 사형이 집행이 되기 때문에

사형집행 당하는 죄수의 얼굴이나 그 장면을 보지 못하게 하고

또 그 소리를 듣지 못하도록 북쪽감방으로 모든 죄수들을

이동시켰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한 없이 무거워 졌다.

12명의 생명이 바로 이 7동에서 사형을 당한다는 것이 믿겨 지지도 않고

어쩌면 나처럼 억울하게 재판을 받아 정당한 항소도 못 해보고

죄를 뒤집어쓴 채 사형을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라 없는 백성의 설음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보는 듯 했다.

이런 사실은 감옥 내에서는 기밀에 속하는 것이지만 나를 믿고

알려 주는 것이 고마웠다. 내친김에 무슨 죄로 사형을 받는가 물었다가

북간도 용정에서 체포된 사상범중 12명을 처형한다.”는 간수의 대답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지금부터 약 15년 전, 1927년 8월,

내가 북 간도 용정에서 전도사로 일하던 때,

당시 제2의 헤스멀 사건이라 하여 일본사람이

조선처녀를 잡아다가 기둥에 묶어서 사형(私刑)을 가한 것이

발단이 되어 간도에 있던 모든 조직이나 교회대표들이 모여서

“재간도 조선인협회”가 조직되었다. 당시 분위기로

그 회의에 참석하지 않으면 민족의 배반자로 취급되어,

전도라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기에 억지로 그 회의에

참석했다가 내가 집행위원에 선출이 되고 끝내는

“재간도 조선인협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어 우리 집에서

제1차 회의까지 했었다. 곧 이 조직이 수 만 명의 회원으로 커지며

불온한 사상도 개입되는 것을 보면서 안식일교회의 전도사로

그런 일은 맡는 것이 적절치 못하다 생각이 되어 일방적으로

사표를 제출하고 사표사본만 가진 채로 출장을 갖다 오니

형사가 체포하러 나왔다. 그 사표의 사본을 보관하고 있던 덕분에

겨우 체포를 면했으나 그때 700명 이상이 검거되어 결국은

90명 정도가 간도에서 서대문 형무소로 넘어왔고 오늘

그 중에 12명이 사형을 당하는 것이다.

그 단체에서 회장이 되었던 내가 그냥 회장 직에 있었다면

어찌 이 화를 면할 수가 있었겠는가? 가만히 생각해 본즉

“하나님께서는 분명 나, 정동심이라는 사람의 생명과

길을 열어 주셨구나!”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왜 재림교회는 정치와 신앙을 분리하고 있는지를

다시 한번 깨달았다. 간수에게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지만

그야말로 나는 간담이 서늘했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재간도 일본영사관은 그 사건 직후 조선인들이 단체를

결성하려고 하는 것을 알고는 뒤에서 흥분된 조선인들을

부채질하여 오히려 이 조직이 결성되도록 기다리면서

조선인들 중에서 누가 정말로 영향력이 있는 인물인가를

알아내려고 했다고 한다. 일단 “재간도 조선인협회”가

조직이 되고 거대한 기구로 발전하여 확실하게 표면화 되자

영향력 있는 조선인 700여명을 일시에 검거하고 그중 90명을

조선으로 이송하여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하고 온갖 고문과

부당한 재판을 하는 동안 사망한 사람도 있고

오늘 12명이 사형집행을 당하는 것이다. 나라와 지도자 없는

처참한 결과였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 화를 피한 것이다.

 

  • ?
    명지원 2012.02.14 20:19

    억울한 재판, 보안법보다 더 악랄한 치안유지법. 감옥에서의 봉사를 보면서 요셉이 생각나는 것은 저만의 생각이 아닐 것입니다. 김동인 선생과의 만남. 그 부인이 우리 교인이었다니요. 가슴이 찡합니다.

     

    간도에서의 그 단체 결성 건과 관련하여 체포되었던 분들이 십 수 년이 지난 후에도 감옥에 있다가 처형되었군요. 우리 역사 속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을 품고 돌아갔군요. 아내와 자녀들, 가족들이 있었을텐데...... 정치와 종교의 분리. 잘 못 인식하면 역사의 책임을 회피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정동심 목사님의 그때의 사표 사본 건은 그러한 판단을 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줄기찬 재림교회 역사의 물줄기 속에 정동심 목사님의 삶은 믿음의 후예들에게 힘과 지혜가 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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