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18

by 정태국 posted Feb 11, 2012 Likes 0 Replies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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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18


 

(일곱 식구가 살아가기가 참으로 어려웠지만 기도드리면서

합심해서 살자고 아내와 같이 의논하고 믿음으로

조반석죽(朝飯夕粥)이나 하면서 생활해 나갔다.

연말이 다가오기에 내년은 금년과 같이 많은 어려움이

오지 않도록 해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연재 #17 끝부분)


 

7. 교회의 수난



1943년 정월에

갑자기 예정에 없던 합회총회를 한다고 해서

나는 총회에서 내 월급이나 회복이 되었으면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참석했다. 나는 전과자라고해서

어떤 종류의 책임도 없이 평신도의 자격으로 뒤에

방청석에 앉아서 가만 듣기만 했다. 시국이 시국이니 만큼

형사의 감시는 옛날보다 더욱 삼엄한 것 같았다.

회의진행이 너무 어수선 한 것 같아서 언권을 청해

보았으나 언권도 주지를 않아 한마디 말도 못해 보았다.

이 총회에서 중요한 직분인 선거원장에 김예준 목사가

선출되어 모든 인선을 선거위원회에서 의논해서 가지고 나오는데

유감스럽게도 합회장으로 계시던 최태현 목사는 낙선이 되시고

대신 오영섭 목사가 새로운 합회장으로 결의가 되었다.

오영섭 목사가 자질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고

추진력도 계신 분인데 성격이 참 급하신 아직 젊은 양반이시었다.

 

 

나는 거의 2년간이나 수감되어 교회를 떠나있었고, 더구나

아무 의견도 발표를 못하게 하니 이유를 물을 수도 없었다.

곧 신임합회장의 인사가 있겠다고 발표가 되더니

오영섭 목사가 나와서 합회장취임사를 하시는데

“일본나라가 소위 대동아 전쟁”이라는 것을 일으켜 놓고

시국을 대단히 어렵게 만들어 놓은 이때에 이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희생도 각오가 되었다“고 하시었다.

아무리 성격이 급한 분이시지만 전쟁 중인 이 시국에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무사할 수도 없겠지만 앞으로

일본에 대해 잘 해 나갈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러나

합회총회는 삼사일 만에 은혜 속에 잘 끝난 것이 감사 했다.

당시에 우리 교회는 교인수가 많은 것은 아니었으나

상당히 융합하여 모든 어려움을 잘 극복해 나갔는데

특히 평양교회가 선두에서 모범이 되었다. 이때에도

평양교회가 보직이 없는 최태현 목사님을 평양교회

담임목사님으로 모셔가겠다고 했고 최 목사님도

승낙을 하시는 것을 보고 참 감사한 일이라 생각되었다.

이때에 평양교회 여신도 오신석 자매와 최매실 양씨가

최 목사님을 평양교회 담임으로 모셔가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주장을 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총회가 끝 난지 한 달이 되어 가는데도 최 목사님이

미처 평양으로 부임하시지를 않으셨다.

 

 

1943년 2월 4일,

합회총회가 끝난 지 한 달 정도 되었는데 갑자기

안식일교회 모든 중요한 지도자들에 대한 검거선풍이 일어나

최태현 목사, 오영섭 목사, 박창욱 씨, 김상칠 씨 등

중요한 분들이 다 검거되었다. 이성의 목사는 내 대신

중선대회장 직을 맡아 일하던 중 지방순회를 나갔다 들어오자

검거되어 종로경찰서에 다섯 분이 검거되었다.

최 목사님께서 좀 일찍 평양으로 가셨으면 화를

면하시지 않았겠는가 하는 아쉬움이 남아있다.

당시의 검거가 우리 관할인 동대문경찰서가 아닌

종로경찰서에 의해서 일어난 이유와 검거된 죄명은

오리무중(五里霧中)이었다. 중요한 지도자들이 함께 검거되니까

그러지 않아도 교회가 어수선해 지는데, 어쩌다 검거되신 분들의

가정에서 “누군가가 투서해서 이분들이 검거됐다.”라는 소리가

흘러나오자 잘 화합되던 분들이 서로 불신하게 되기 시작하니,

서울에서 거리를 지나다니는 것도 부담이 될 지경이었다.

 

 

검거되신 분들이 한 달이 지나도 안 풀려나서 교회의 일이

마비상태에 들어가자 우선 검거되신 분들의 일과 교회의 일을

진행하기 위하여 소위 합회장 대행위원회라는 것이 조직되었다.

대행위원회 위원장에는 임종회 목사가, 위원에는 김명길 목사,

고두칠 선생, 이근팔 선생, 곽종수씨 같은 분들이 결정이 되어

교회의 제반 일들을 진행하기로 했으나,

전무(前無)한 어려움을 당한 교회의 일들을 이끌어 나가기에

매우 벅차 하는 것 같았다. 교인들은 검거되신 분들과

대행위원들을 위하여 간절한 기도를 쉬지 않고 계속하였다.

대행위원들은 검거된 분들이 풀려나도록 하는 일을 우선으로 삼고

동분서주 하였으나 검거된 분들이 오랫동안 풀려나지를 않자

이래서는 안 되겠다 해서 변호사를 택하기로 했는데

소식을 들으니 변호사 선택문제에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해서

아주 어렵게 되어가고 있다고 했다. 왜냐면 검거되신

김상칠 선생의 친척 되는 심정섭 씨는 그때 사회출입도 꽤 하시고

경제신문도 만드신 분인데 그분이 추천하신 변호사가 있고,

대행위원이 추천하는 변호사가 있어서 서로 의견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심정섭씨 편에서 세우겠다는 변호사는 검거되신 분들의 가족들과는

좀 합심이 되지만 대행위원과는 잘 합심이 안 되어

결국은 대행 위원들이 추천한 변호사 신태학 씨가

안식일교회 고문변호사가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니 대행위원들과 검거되신 분들의 가족과는

화합이 되지 아니하고, 검거되신 분들은 풀려나지를 아니하니

점점 형편이 어렵게 되었다. 심지어 검거된 분들의 가족들과

대행위원은 물론 교회에서 사역하는 분들까지도 청량리에서

합회로 오가는 길에 만나게 되면 서로 피해서

길을 건너가 버릴 정도가 되는 마음 아픈 형편이 되었다.

형편이 이렇게 되니 서로 어떤 누구의 가정을 방문하기도

어렵게 되었다. 일본은 전쟁에 막바지에 군수물자 조달이

힘들어 지자 우리조선에 대한 탄압은 더욱 심해지는 것 같았다.

특히 친미적인 태도를 가졌다 하여 우리교회를 더욱 탄압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변호사도 아무 맥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변호사가 우리 검거된 분들을 돕기 보다는

일본총독정치를 따르면서 딴 궁리를 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살 정도였다.


 

1943년 4월경,

교회 책임자들이 검거되고 시국이 악화 되어가자

교회사역자들 중에 미리 퇴직 또는 사직하는 분들이 생겨났다.

대행위원이 생긴 지 한 달 쯤 후에 위생병원 총무로 재직하시던

오치운 씨가 사직을 하자 대행위원은 나에게 경성요양병원

(현 서울위생병원) 총무자리가 비어있으니 가도록 하라는

전달이 와서 병원총무의 일을 시작했다. 병원으로 가보니

옛날 분위기는 간곳이 없고 싸늘한 기분만 감돌기에

그리스도인의 분위기로 바꾸어 보려고 노력을 했으나

그리 쉽지가 않았다. 나는 기도를 드리면서,

“이미 징역을 살고 나온 나를 어떻게 하랴?”하는 마음으로

종로경찰서에 검거되신 분들을 면회가볼까 하고

고심을 하고 있었다. 내가 청양경찰서에 있을 때는

멀어서 그랬는지 면회 오는 사람이 없어서

견디기가 힘들었었는데 여기야 가까운 곳이니

한번 면회를 해 봄이 어떨까 생각을 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오히려 종로 경찰서에서 나보고

경찰서로 출두하라는 명령이 내렸다. 매우 긴장이 되었지만

태연한 척하며 종로경찰서로 걸어 들어갔더니 뒷문으로

가라고 해서 들어갔다. 그런데 뒷마당 저편을 바라다보니

경찰서에서 허락을 했는지 검거된 한 두 분이 나와서

식구들과 같이 앉아 계시는데 특별히 오영섭 목사가 나와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허락이고 뭐고 할 것 없이

오영섭 목사에게 달려가서 급하게 말을 했다.

“이번에 교회명예를 위해서 꼭 승리해 주십시오.

형무소로 넘어간다고 할지라도 아무쪼록 개의치 말고

승리하십시오! 내가 청양경찰서에서 잡혀서 징역하고 나왔지만

이렇게 전과 같이 살아있지 않소?”하며 이야기를 하니

오 목사는 하늘을 쳐다보면서 대성통곡을 하시는 것이 아닌가?

나는 말을 아니 한만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맞은 편 책상 뒤에 의자에 앉아 있던 자가 나를 불렀다.

그는 마당에 나와 있던 피의자들을 감시하던 형사였다.

“당신은 어디서 온 누구요?”

“나는 경성요양병원에서 온 정동심 이라는 사람입니다.”

“아, 그렇소? 내가 바로 당신을 오라고 한 고등계에 있는 형사요!”

그 순간 “내가 또 이자들에게 걸려드는 것이 아닌가?”해서

가슴이 철렁하고 입안이 말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 형사는 내게 2심과 3 심에서도 묻지 않았던 일을 묻기 시작했다.

“당신이 저 청양에서 설교할 때 마쯔오까(송강)외상이

유럽 로마에 갔던 얘기를 했소?”

“그렇습니다. 무엇이 잘 못 된 것이라도 있나요?”

“시국이 이러한데 그런 말을 무엇 때문에 한 것이오?”

“아니, 그 때 모든 신문에 외무대신 송강(마쯔오까)이

이탈리아에 있는 법왕청을 방문한다는 기사가 대서특필로

보도 되었는데 그 일을 말한 것이 무엇이 잘못입니까?

또 그때 말한 것을 잘못 했다고 누가 증언하여

청양 경찰서에서 검거를 해서 징역까지 살고 나왔는데

왜 또 그 문제를 들추어내십니까?”

”시국이 그러하니 당신은 전과자로 앞으로 다시

또 그런 얘기하면 안 되오. 그리고 지난번에 말한 것에 대해

사실 확인하기 위해서 불렀던 것이니 이제는 집에 가도 좋소!”라고

엄포를 놓으며 집으로 가라고 했다. 싱겁기 짝이 없지만

또 걸리는 가해서 마음을 졸였다. 일본 고등계 형사들의 끈질김은

이루 말할 수도 없지만 할 일도 그리 없는지 이미 끝난 일을 가지고

이렇게 사람들을 못 살게 굴곤 했다.

 

 

그 후에 심정섭 씨가 손을 썼는지 김상칠 씨는 치료한다고

종로 4가에 있는 병원에 나와 병실구금이 되어

치료와 취조를 받는다 했다. 시국도 점점 어려워지고,

교회 내에서는 투서를 했느니 말았느니 하며 사정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데,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위생병원장 정사영 박사, 대행위원장 임종회 목사,

곽종수씨 등도 검거되어 종로경찰서로 끌려갔다.

심지어 시조사 사장 김창집 씨와 또 박창욱씨와 함께 일하던

큰아이 태혁이까지도 체포되어 본정 경찰서로 검거되어 들어갔다.

지방에서도 황해도 사리원에서는 이명준 선생 같은 분이

그곳 교회에서 장로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들어갔다.

교회가 전국적으로 어렵게 되어 가는 것이 눈에 보이는 듯 했다.

 

 

나는 위생병원 총무로서, 체포되신 병원원장 정사영 박사를 위해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다가

청양경찰서에 체포되었을 때의 경험이 생각이 나서,

병원직원들과 간호원들을 불러 “만일 경찰이나

형사 같은 사람이 찾아와서 당신들에게 정사영 박사에 대해서

무엇인가 묻는다면 그저 모른다고 대답하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것이 문제가 되어 그 집 가족들과, 친척들이 찾아 와서

“왜 정 목사는 가만있지, 여기 직원들과 간호원들에게

그런 얘기를 했냐?”고 언성을 높여서 야단을 했다.

나는 “아하, 당신네들이 몰라서 그렇지, 나는 경찰서에 끌려가서

이런 일로 크게 고생을 한 사람이오.

만약 여기 있는 사람들이 한 말과, 정사영 박사가

경찰에서 취조 받으며 한말이 틀리면,

정사영 박사의 입장만 곤란하게 되어 큰 고생을 할 것이며,

여기서 한 말을 교묘하게 왜곡(歪曲)하여 틀림없이

올무를 만들어 정 원장님이 크게 어려움을 당할 것이 뻔한데

그 일을 막으려면 이 방법이 최선의 길이 아니겠느냐?”고 물으니

그제야 오해를 풀고 ”아, 그 말씀이 옳습니다!” 했다.

한번 불신의 씨가 교회 내에 뿌려지니

모든 좋은 동기까지도 오해에 오해를 불렀다.

 

 

한 이주일 후에 김창집 씨와 우리 태혁이 등은

본정 경찰서로부터 풀려 나왔다. 또 임종회 씨, 정사영 박사,

곽종수 씨 등도 종로경찰서에서 풀려났다.

이 분들이 종로경찰서에 구금된 동안에 경찰서 안에서

이미 체포된 분들과 무슨 이야기가 오간 것이 있었는지,

아니면 무슨 이야기를 들은 것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풀려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연합회 대행 위원장으로

수고하시는 임종회 씨가 날 찾아 오셨다.

“정 목사, 우리 교회 그 그림을 좀 얻어다 갖다 주면

최태현 목사가 풀려 나올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그림이 어디 있어야지요, 걱정이오!”

“교회 그림이라니, 무슨 그림말이오?”

“아, 거 다니엘 해석한 그림, 묵시록 해석한 그림,

그거 광목 같은데다 서양서 인쇄된 것이 있지 않소?

그것만 있으면 풀려 날수도 있겠는데...그것이 없어 걱정이오.”

 

 

그런데 그게 불행인가, 다행인가? 내가 그 그림이 있었다.

실은 내 것이 아니라 나의 의명학교 은사이신 김봉걸 은사의

것이었는데 이분은 김선억 목사의 부친 되시는 분이다.

하도 당시에는 귀한 그림이라 나는 김봉걸 은사께

“여름방학 동안 빌려주시면 그림을 그린 후에

돌려 드리겠다.”고하니 쾌히 승낙을 하셔서 빌려 온 것이다.

그런데 방학 동안에 그림을 다 못 그리고 한참 지나서

갔다 드리려하니 김봉걸 은사님이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다.

그때부터 그 그림을 마치 은사님의 유품(遺品)이라 생각하고

20여 년이 넘게 내 장롱 속에 잘 간수해 온 그림이다.

그런데 지금 합회장대행위원장인 임종회 씨가

“그 그림이 있으면 최 목사가 풀려날 것 같다.”하며

그림을 찾아다니다가 내게까지 오신 것이다.

이미 말 한 대로 임종회 씨는 내 큰아들 태혁이의

장인이 되시는 분이며 또 임종회 목사와 최 태현 목사는

여간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임종회 씨가

북간도에서 최태현 목사의 인도함을 받아 교회에 잘 나오게 되고

또 그 분의 인도로 신학교도 가서 목사까지 되셨기 때문이다.


 

나는 오랫동안 간직했던 소중한 이 그림을 속한 시일 내에

돌려 달라고 부탁을 하면서 기꺼이 빌려 드렸다.

붙들려 간 분들이 풀려난다면 그 그림 아니라

무엇이라 한들 드리지 않았겠는가?

이 그림을 나는 대행 위원장이신 임종회 목사에게 드렸고

임종회 목사가 아마 종로경찰서에 가져다 주셨으리라고 생각이 된다.

당시에 이 그림이 있어야만 풀려나실 것이라 확신한 임종회 목사는

그 그림을 찾기 위해 여기 저기 수소문 하다가 내게까지 왔던 것이며

나도 그 말을 듣자 그렇게 소중하게 간직해온 그림을

선뜻 내 준 것이다. 임종회 목사가 아니라 누가 왔었다 해도

이 그림으로 우리의 지도자 목사님들을 구할 수 있다하면,

그 그림 아니라 무엇이라도 내어놓았을 것이다.


 

*(내가 그 그림을 가지고 있던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라고 말한 것은 그 당시에 그렇게 귀중하게 보관하던 그 그림을

최 목사님이 풀려나시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하여 선뜻

빌려 드린 것인데 후에 미국에 와서 교우들과 및 최 목사님의 가족들과

이야기하는 중에 그 그림으로 인하여 최 목사님께서 심하게

고생을 하셨다 하여 하는 말이다.

나성에서 어떤 가정에 식사 초대를 받아서 최 목사님의 후손들과

함께 사석에서 이야기하다가 그 그림이 어떻게 경찰에 입수되었는지가

의문인 듯 하기에 나는 서슴없이 “내가 가지고 있다가

내어 준 것”이라고 사정 그대로를 이야기했다.

그러나 후에 나성 한인 안식일교우들이 사역자 문제로

의견이 갈라지고 그룹이 조성이 되면서 나에게

“왜 그 그림을 내어 주어 최 목사님이 돌아가시게 했는가?”하고

그 후손들로부터 심한 원망과 질책을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도, 시간이 아무리 흘러갔다 한들

최 목사님을 잃은 가족의 마음에서 어찌

그 슬픔이 없어지겠으며 또 모든 것이 원망스러울 것임은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런데 그 그림 때문에 더 고생을 하셨다니

그 애석한 마음과 유감스러움을 금할 길이 없는데,

몇 십 년이 지나 작은 나성 교회 사역자 문제로 감정이 상했다고,

좋은 동기로 이루어진 그때의 일을 곡해하여 최 태현 목사님을

고생시키기 위해 그림을 일부러 경찰서에 전했다고 비난을 하더니

후에는 최목사님 죽게 하기 위하여 그림을 일부러 주었다고 하니

너무 마음이 내려 앉는듯했다. 좋은 동기도 이렇게 곡해가 되거늘

만약 그 그림을 교회 내에서 구할 수가 없었거나

또는 가지고 있으면서도 내어주지 않아서 돌아가셨다면

얼마나 한이 맺히고 원망을 들었을까? 참 마음 아픈 일이다.)


*( )안의 글은 아버님의 회고록 테이프에는 없는 말입니다.

아버님이 그 그림을 가지고 계셨던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왜 불행인지라고 말씀을 하셨는지에 대한

이유가 없어서 아버님이 생존해 계실 때에 왜 불행인지라고

말씀을 하셨는가 하고 여쭈었더니 ( )에 해당하는 답을 주셨기에

여기에 글로 옮긴 것임을 밝힙니다. 이에 관한 자세한 말씀은 회고록

끝 부분에 “나성 교회”라는 곳에서 다시 언급이 됩니다. -편집자주 )

 

 

1943년 6월 2일,

종로 경찰서에서 최태현 목사님께서 서울 위생병원으로

풀려 나오신다는 전갈이 왔다. 거의 넉 달 만에

나오시는 것인데 내가 그때 마침 병원총무로 있었음으로

최 목사님 맞을 준비를 했다. 차가 도착했다는 소리를 듣고

뛰쳐나가니 자동차는 마당에 와있고 조금 후에

최태현 목사 사모님도 허겁지겁 달려 오셨다.

간호원들과 함께 목사님을 입원실로 옮겼으나

이미 혼수상태이신 최 목사님은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생각건대 경찰서에서 온갖 악독한 방법으로 고문하며

취조를 하다가 최 목사님이 혼수상태에 이르자

자기들의 야만적인 고문의 책임을 피하기 위해서 혼수상태에서

위생병원(경성요양병원)으로 보낸 것이라 생각이 된다.

최 목사님을 보니 너무 고문을 많이 당해서인지 얼굴과 몸이

많이 부어올라 있어서 도저히 최태현 목사님이라고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되어 있었다. 이런 상태로 누워계신

최 목사님을 보는 나는 어느 때 보다도 쓰라린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이 분은 나의 은사 이셨고,

나의 목회 시절에는 5, 6 년간을 극진한 사랑으로 인도해 주셨고,

나의 재혼 때는 결혼식 주례까지 해 주신 어른 이셨다.

지금도 그 당시의 모습을 생각하면 눈물이 고이곤 한다.

옆에서 모두들 목사님! 최 목사님! 하고 불러도 대답 없이

침대에 잠깐 계시다가 그날 저녁 8시경에 그만 숨을 거두시고 말았다.

옆에는 간호원 한 사람, 최 목사님 사모님, 그리고 내가 있었다.

나는 최 목사님의 눈을 쓰다듬어 감기게 하였다.

 

 

1943년 6월 2일, 저녁 8시경.

최태현 목사님은 안식일교회의 첫 번 순교하신

목사님이 되신 것이다. 이미 온 몸이 붓고 날씨도 더운

6월이라 옷을 벗기려고 목사님의 팔만 들어도 물이 주루룩

흐르는 형편이라 최 목사님 사모님께 소렴과 대렴을 함께

하자하니 사모님께서도 옆에서 보시고는 그렇게 하자하시어

간호원도 없이 나와 최 목사님 사모님, 둘이서 그냥 입었던

옷 위에 새 옷을 덧 잎혀서 병원에 시신을 잘 모셨다.

그때 이해성? 선생이 와 계시다가 “내 작숙님이 이렇게

돌아가셨는데 가족들이 있는 집을 두고 병원에 모시면

아니 된다”하셔서 시신을 집으로 모셨다가 며칠 후에

최 목사님 자택 앞에서 발인식을 하고 무사히 장례식을 치렀다.

 

 

최 목사님이 그렇게 혹독한 취조 끝에 순교 하신 것에 대해

우리는 여러모로 생각하고 배울 점이 많다.

최태현 목사님의 순교를 보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다 다를 수도

있겠지만 목사님을 가까이에서 모시고 일했던 사람으로

최 목사님의 성격과 마음을 조금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 당시에 검거된 사람들 중에 비록 새로 선출된 신임 합회장

오영섭 목사가 계시기는 했지만 어느 모로 보나 가장 원로이시고

아직 교계의 지도자의 입장에 계신 분은 최 목사님이셨고

특히 종로경찰서 내에서도 피검된 모든 분들의 정신적

중심이 되는 분은 최 목사님이었을 것이 틀림이 없다.

일본은 고등계형사들을 통하여 안식일교회해산에 대한 서명을

강요 했겠지만 강직한 최 목사님이 거절하시고 있는 동안은

그 누구도 교회해산명령에 찬성할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교단에 대한 철저한 감시를 해온 일본이나 고등계형사들이

최 목사님의 이런 영향력을 모를 리가 없었을 것이다.

다급해진 형사들은 최 목사님에게 최고의 고문을 주기위한

무슨 구실이라도 찾아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을 것이고,

아울러 계속 교회해산에 서명을 하는 일에 동의하도록

최고의 잔인한 고문과 협박을 최 목사님에게 중점적으로

했을 것이 틀림이 없으리라 생각이 된다. 그러나 자기 생명보다

교회를 더 사랑하시는 최 목사님이 교회 해산하는 일에

응했을 리가 없고 잔인한 고문은 그 심도를 더해

결국 죽음에까지 이르렀을 것이라 생각 된다.

 

 

내가 이러한 생각을 갖는 이유는 교회해산사건을 보면서

갖게 되었다. 최 목사님이 순교하신지 약 7개월 후인

1943년 12월 27일 밤,

최 목사님과 함께 검거 되었던 모든 분들이 일시에 풀려났는데

그분들의 건강을 생각해서 모두 위생병원으로 모셨다.

환자를 위해서는 양식을 배급 받을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분들이 풀려난 바로 그날 밤, 경기도 경찰부원과

종로경찰서 책임자 입회하에 회의를 하고는 모든 분들이

비통하게도 제7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 해산 선언서에

함께 서명을 하신 것이다. 즉 그간 교회 해산 서명에

끝까지 거절하신 최 목사님의 뜻을 따라 나머지 분들도

계속 거절함으로 그간 풀려나지 못하고 고생을 하다가,

고등계의 잔인함에 더 이상 견디기 힘들고 또 정신적 지도자이신

최 목사님도 더 이상 함께 계시지 않은 상태에서 결국은 교회해산에

동의하고 풀려 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되기 때문이다.


 

나중에 다른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 재림 교인은

너무 순진 하고도 순진 하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즉 최태현 목사님이 순교 하신 다음에 고등계 형사들은

검거된 사람들에게 안식일 교회 내에 최 목사처럼

오래된 목사로서 교회내력을 알만한 분이 없느냐고

물어 본 모양이다. 그냥 “최 목사 같은 분은 더없다.”고

했으면 되겠는데 경험이 없어서 그랬겠지만

김례준 목사를 지명하고는 그 분이 지금 진남포에 있다고 해서

김례준 목사는 최태현 목사님께서 세상 떠난 후에 검거되어서

서울 종로경찰서에 구금 되었다. 그래서 종로 경찰서에

검거된 분은 다시 다섯 분 즉, 김례준 목사, 오영섭 목사,

박창욱 씨. 김상칠 씨, 이성의 목사로 12월 27일까지

많은 고생들을 하셨다. 교회는 합회장대행위원회가 결정한

신태학 고문 변호사의 지도아래 겨우 명목을 유지하고 있었다.

 

 

종로경찰서에 검거되어 있는 다섯 분이 12월 27일에

나온다는 말이 들려왔다. 나는 병원장 정사영 박사와 의논해서

이분들이 나오신 다면 곧 우리 병원으로 모시자고 했다.

왜냐하면 우선 몸도 많이 상했을 것이고 또 집으로 가봐야

식량이 별로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병원 직원들에게

의논을 해 보니 우선 환자를 위하여 배급 받아둔 식량이

다소 있고, 앞으로도 나는 병원 환자의 수만큼 보고하고

내가 직접 양식 배급을 받아 올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사영박사도 좋은 생각이라고, 그렇게 하자 해서

병원으로 모시고 오기로 했다.

 

 

1943년 12월 27일.

다섯 분이 종로경찰서에서 풀려나서 위생병원으로 오셨다.

다섯 분들에게 저녁식사를 대접하자마자 곧 손님들이

들이 닥쳤다. 경기도 경찰부에 있는 고관이라는 이들과

종로경찰서의 고위층 인물들이라는 것이다. 경찰서에서

이 분들을 풀어 주기 전에 어떤 협박으로,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는 모르나 모진 힘든 일을 당하고 나온 이분들은

쉴 틈도 없이 그날 밤으로 경무부와 종로경찰서에서 나온 사람들과

난상토의(爛商討議)를 하는 것이었다. 그날 밤 의논한 결과인지,

아니면 이미 해산에 동의를 했기 때문에 모두 풀려 날수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나 1943년 12월 28일부로 조선에는

제7일안식일 예수재림교회의 포교권(布敎權)은 전부 박탈당하고

이날 이후 조선에는 안식일교회 교인은 한 사람도 있을 수가

없을 뿐 아니라 누구든지 안식일교회 교인이라는 말도

할 수가 없다는 결의가 이루어 진 것이다.

완전한 교회해산의 결정이었다. 이미 말 한대로 이러한 것이

경찰서 내에서 이미 합의가 되어서 풀려 난 것인지,

또는 이날 밤 회의에서 결정 된 것 인지는 알 길이 없다.


 

12월 28일에 교회 일을 하던 모든 사람과 교회의 모든

책임자들에게 이 교회해산문이 전해졌다. 나도 12월 28일에

이 교회해산문을 받아 드니까 뭐라고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마음이 아팠다. 이 교회가 한국에 들어온 지 39년째요

내가 이 교회에 몸담은 지 33년째인데 이것이 무슨 일인가?

정말 여기서 이렇게 해도 되는가?

최 태현 목사는 고문 받으시고 세상 떠난 지가 6개월밖에

안 되는데 교회해산을 거부하고 배겨내시는 분이 없었단 말인가?

내 마음에 섭섭하기가 짝이 없었다. 당시로서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이렇게 교회가 어이없게 해산한다는

선언문을 받아 쥘 때는 너무도 섭섭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교회해산선언문을 지방으로 쭉 보내게 되니 교회 전체가 마치 속담에

“벌집 때려놓은 것 같다”는 것처럼 난리가 난 듯 했다.

모든 사역하던 분들은 “그 선언문 한 장에 직장도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걱정 한 사람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일생을 바쳐서 헌신하기로 한

하나님의 남은 교회가 무너져 내려 버린 것이다. 그러나

뜻있는 교인들은 비밀리에 교회를 위해 기도드리기 시작을 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검거된 동안 있었던 교회의 어지러웠던 일은

후일 교회 역사를 정직하게 쓰는 사람들에게 맡겨야 하겠지만

내가 느낀 점 중 한 가지는, 검거되었던 가정들의 근심과 걱정은

당해 본 사람이 아니고서는 이해를 못하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어려울 때 일수록 더 믿음으로 서로 믿고, 붙들어 주고

도우며, 이 난관을 헤쳐 나갔어야 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사실 교회의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지방교회나 기관의 책임자들도 꽤 많은 분들이 검거되어 짧게는

2주에서 한두 달 이상씩 험한 고생을 하면서도 신앙을 지키신

분들도 많이 계셨다는 것과 그 어려움 속에서도 포교하신 분들이

많았음을 우리는 알아야 하고 또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한다.


 

종로 경찰서에 갇혔던 분들, 대행위원들, 변호사들이

교회해산에 따른 모든 문제를 처리해 나가는 것을 본 신자들은

“마음이 너무 쓰라리다.”고 했다. 나는 병원총무로서 우리사업의

오른팔이라 하는 병원을 차지하여 보려는 인간들이 계속 내왕을

하는 것을 보려니 더욱 힘들었고 더욱 마음이 쓰라렸으며,

우리교단본부의 모든 기관들이 이리저리 처분되는 것을 보는 것은

고통중의 고통이었다.

교회의 동산이나, 부동산이 처리되기 시작했다.

부동산들은 팔고 동산이 얼마나 있었는지 모르나 다 처분하여

사역하던 분들에게 퇴직금이라고 얼마씩 나누어 보냈다.

나도 그 얼마를 받았다.

당시에 지방에는 안식일교회가 가진 훌륭한 건물은 별로 없었고,

서울에 있는 시조사는 일본 기관지로 발행하는 매일 신보사에서

임대 관리하게 되었고, 경성요양병원(서울위생병원)은

총독부 결핵예방협회에서 매입하여 관리하게 된다는

마음 아픈 소문이 들려왔다. 나는 경성요양병원 총무로서

병원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걱정하며 하회(下回)를 기다렸다.

소문대로 총독부 결핵예방협회에서 경성요양병원을 완전히

맡게 된다고 결의가 되었고 이름도 경성요양병원에서

서광장(瑞光莊)으로 바뀌었다. 서광장의 원장 될 사람이라는 자는

보이지가 않고 총무 될 사람이라는 자가 나와서 나를 만나자 했다.

“이제 경성요양병원을 우리가 경영할 터인데 그 동안

총무로 지나던 사람으로 생각이 어떠합니까?”

“생각이 어떠냐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아, 다른 말이 아니라 다른 일하던 모든 간호원들이나

직원들을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나는 낫살이나 먹은 사람이고 또 당신이 총무로 오는 모양이니

나는 총무를 더 바라지도 않고 나가겠소. 허나 여기 모든

간호원들과 직원들은 취직하기도 어려을 것이오. 당신네도

이 사람들을 그대로 쓰면 모든 일이 순조롭게 되어 나갈 것인즉

그리함이 좋을 것 같소”

“아, 총무다운 말씀이오. 그러면 총무는 나가고 직원들과

간호원들은 우리가 맡겠습니다.”

이 말 한마디에 나는 무직자가 되었다.

그러나 간호원들과 다른 모든 직원들이 취직하기 힘든 때에

이렇게 일하도록 결정이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 드렸다.

다만 “교회가 해산된 이 마당에 남아있게 된 이 분들의 신앙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하는 염려가 매우 컸지만 하나님께 맡기기로 했다.

 

 

병원 총무의 일을 그만두면서 병원에서 지내면서

있었던 일들이 생각이 났다. 내가 목회자로 일을 할 때도

항상 그렇게 생각했지만 병원도 정치와 분리해서 나간다는

원칙은 옳은 것이라고 생각이 되었다. 각 나라에서

이 원칙을 따라 우리 교회병원이나 교회 기관이

정치의 색채 없이 순수한 종교적 입장으로 나가기 때문에

정치에 관계되는 사람들이 어려운 형편이 되면

우리 병원을 찾아오는 경우가 많이 있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내가 병원 총무로 있는 동안에 여운형 선생이 경성요양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 분이 원했다기보다는 정치적 색채가 없는

병원이기 때문에 허가가 된 것이다. 여운형 선생께서

연설하는 것을 들은 적은 있지만 이렇게 친히 만나본 즉

풍채도 좋고 담배나 술도 안 하시고 그 행동이 단정하신 것이

목사라는 나도 그런 분과의 이야기 속에서 배울 것이 많았다.

그분도 우리 병원에 계시면서 우리 교회병원에 대해

아주 좋은 인상을 갖게 되신 것은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정치성이 없는 우리병원에 입원하도록 허락을 해 놓고도

총독부 경무국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병원으로 전화를 해서

“여운형이라는 사람이 병실에 있는가?”

잠시만 자리를 떠도 “어디에 갔는가?” 하면서

계속 뒤에서 조사를 하곤 했다.

 


하루는 이 지역을 관할하는 파출소의 일본인 주임이

나를 파출소로 불러 들였다. 매우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어느 때라고 명령을 무시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파출소에 가니 놀랍게도 우리 신자가 앉아 있다가

나의 갑작스러운 나타남을 보고는 민망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그때 창씨개명에 의한 나의 이름이 “구니모도”였는데

나에게 의외의 심문을 하는 것이었다.

“구니모도상, 당신이 결혼식을 주례한다는 보고가

들어 왔는데 몇 사람이나 주례를 했소?”

“예, 글쎄...한두 명 정도 주례를 해 준 것 같은데

그게 잘못 되었나요?”

“구니모도상! 당신이 음성도 좋고 해서 당신에게

여러 사람이 주례를 받았다는데 두 사람 뿐 이라니

그게 웬 말이오? 당신 거짓말하면 어찌 되는지 아시오?”

“정말 한두 명밖에는 생각에 없는데.......”

“좋소! 구니모도상! 여기서 나가면 다시는 앞으로 서양식이나

교회식으로 주례하면 안되오! 만약 결혼주례를 하게 되면

일본 불교식으로만 하고 남이 주례를 한다 해도

그렇게 하도록 지도하시오, 알겠소?”

일본은 안식일교회 해산만이 아니라 이 땅에서 서양의 문화,

특히 기독교의 생활방식까지 말살하기로 한 것이다.

그 보다는 “아무리 시대가 험악해 졌다고 해도,

같은 교회의 교인이 목사가 결혼주례한 일까지

고자질 하는가?”하는 마음이 생기면서 “인간은 정말 믿기가

힘들고 그저 믿을 분은 우리 주님 밖에는 없다.”고 생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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