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19

by 정태국 posted Feb 13, 2012 Likes 0 Replies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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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19

 

 

(그 보다는 “아무리 시대가 험악해 졌다고 해도,

같은 교회의 교인이 목사가 결혼주례한 일까지

고자질 하는가?”하는 마음이 생기면서 “인간은 정말

믿기가 힘들고 그저 믿을 분은 우리 주님 밖에는

없다.”고 생각이 되었다. 연재 #18 끝부분입니다.)

 

8. 서울 동부 여관 조합

 

 

병원에서 일하던 분들은 계속 일하게 되었으나 식구가 많은

나의 직업 문제는 해결되지 않아 앞길이 막막했다.

다음날 사무인계를 위해 병원사무실에 나가 있는데

서울동부 여관조합에서 조합장으로 일하고 있는

손재목 씨가 내게 전화를 했다. 손재목 씨도

우리 교회에서 사역자로 계시던 분이시다.

“목사님, 저 손재목 입니다. 소문에

병원도 다른 데로 넘어 간다는데 사실입니까?”

“네, 이미 넘어 갔고 이름도 이미

서광장으로 바뀌었습니다.”

“목사님, 이제 병원도 서광장으로 되어 버렸으면

직원들이나 간호원들도 다 흩어지겠군요?”

“어제 새로 오는 서광장 총무라는 사람과 협상을 하여

우리 병원의 모든 직원과 간호원들은 그냥 서광장에서

일하기로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왜 묻는거요?”

“아, 다 내보낸다면 목사님이 추천하여 한 명을

우리 동부여관조합으로 보내주시면 일자리를

줄 마음이 있어서 그런 답니다.”

“모든 간호원과 직원들은 다 채용되었는데,

나만 갈 데가 없으니 내가 가면 어떻겠소?”

“목사님이 오셔도 좋은데 목사님이 하실만한

일이 아닙니다. 막일도 하셔야 합니다.”

“내가 지금 어디 갈 곳도 없으니 내가 가겠소,

허나 한 가지 약속을 좀 해 주어야 하겠소.”

“무슨 약속입니까?”

“교회는 없어졌어도 내가 목사이니 안식일은

지키도록 해 주어야 하지 않겠소?”

“아, 목사님. 아무리 시국이 이렇다 할지라도

목사님 안식일이야 지키도록 해 드려야지요,

그러나 목사님이 여기서 일하시는 문제는 조합간사

몇 분과 의논을 해야 하니 다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잠시 후 다시 전화가 와서 “안식일에는 직장에 안 나와도

좋으니 내일부터라도 곧 직장으로 나오라”고 했다.

손재목 씨의 알선으로 1944년 7월부터

동부여관조합으로 일을 나갔다. 조합장 손재목 씨 외에

서무를 보는 사람 두 명, 배급품을 타오고 배달하는

심부름꾼 두 명, 나까지 여섯 인데 손재목 씨의 호의로

나는 여관조합 총무라는 직분과 재무의 직을 맡게 되었다.

모두 친절하게 맞아 주어 매우 감사했다. 교회가 해산당한

형편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불법이었다.

손재목 씨가 이미 허락을 했지만 다른 직원들은

안식일에 일을 하니 이 사람들이 당국에 이야기하면

또 붙들려갈 것이 뻔한 일이라 좀 걱정도 됐지만

아무도 이일을 토설(吐說)하는 이가 없었다.

 

1941년 12월 8일에 소위 대동아 전쟁을 일본이 일으키고

3년이 지난 1944년에도 전쟁은 계속되고 있어 전쟁 물자를

조달하기가 어렵게 될 수록 우리생활도 점점 힘든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우리 여관조합에서는 동부지역 여관들이

사용할 쌀과 국수와 그 외의 많은 물품들을 배급받아

배달 해 주었다. 배급하는 직원들이 어떻게 하는지

자세히 모르지만 가끔 쌀과 국수는 물론 장작도

남았다고 하면서 꼭 같이 나누어 직원들에게 주어

사용하곤 했다. 교인들이 아니었지만 남들을

자기 가족처럼 여기고 있었다. 가족을 부양하기에는

병원에 있을 때보다도 여유 있게 되었으니 감사를 드렸다.

 

 

내가 일하게 된 여관조합은 종로 5가에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여관조합 뒤에 우마차조합(牛馬車組合)이 있었는데

조선교계(敎界)에서 유명한 분이 우마차조합장으로 왔다고

하는 말이 들렸다. 그래서 인사도 드릴 겸해서 찾아가 보니

이분 역시 풍채가 좋으신 분이신데 얼굴을 보니 얼근 자국이 많아

좀 험상궂어 보였고, 그래서 첫 인상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저는 이 앞에 있는 동부여관조합에서 총무로 일하고 있는데

새로 우마차조합장님이 오셨다 하여 인사를 드리려고 왔습니다.”

“아, 그렇소? 나 백낙준 이라 하는 사람이오.”

나는 이 분에 대한 말은 말이 들었다.

당시에 보기 힘든 박사학위를 가지고 계신 분으로 기독교계에서

유명한 이분이 우마차조합장으로 오셨다니 내심 대단히 놀랐다.

“아이고, 박사님께서 여기로 오셨습니까? 저는 정동심이라고 합니다.”

“그럼 당신이 안식일교회목사로 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있었던 그 정동심이란 말이오?”

“네! 그렇습니다. 그것을 박사님이 어찌 아시고 계시지요?”

나는 작은 안식일교회 목사로써 일본의 생트집으로

16개월의 감옥생활을 하고 나와, 우리교회 내에서는

한갓 전과자 정도로 인정받고 있었지만, 백낙준 박사 같은 분이

관심을 갖고 기억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일이라

마음에 크게 놀라고 한편 벅찼다.

백낙준 박사는 말을 계속했다.

“참 시국이 이러니만큼 어떻게 하겠소? 이 사람들이 어쩌자고

나를 교회와는 관계도 없는 우마차조합 조합장으로

이렇게 끌어다 앉히니 안 할 수도 없고, 할 수 없이 오기는 왔소.

우리 아무쪼록 모든 것을 참고 때를 기다립시다.

기도드리면서 때를 기다립시다.”

 

 

당시에 “때를 기다리자”라는 말 때문에 얼마나 많은 목사들이

감옥생활을 하고 교회까지 해산 당하지 않았는가?

작은 우리교회 내에서도 불신이 만연한데, 이런 말을

백낙준 박사는 처음 보는 나를 믿고 서슴없이 하고 계시는 것이다.

역시 큰 사람이었다. 병원에 있을 때는 여운형 씨 같은

유명한 분을 만나서 배웠고, 이제는 동부여관조합에 와서는

우마차조합에 조합장으로 와 계신 백낙준 박사를 만나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으니 이 역시 감사한 일이었다.

그 후로 종종 이 분을 만나서 많은 귀한 말씀을 듣곤 했다.

이분과 교파를 초월한 교제를 하면서 그리스도인의 교제가

이렇게 아름다운 것인가 하는 것을 비로써 느끼게 되었다.

작은 교회 안에서도 서로 믿지 못하고 비방을 일삼는데

교파도 다른 나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당시로는 할 수 없는

기독교에 관한 많은 귀한 말씀을 들을 수가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여관조합에 어떤 청년 둘이

갑자기 찾아 왔다. 때가 때이니 만큼 이유도 없이

가슴이 철렁했다. 청양사건 때에도 형사 한명과

앞잡이 한명이 와서 나를 체포한 적이 있는지라

두려움이 앞섰다. 좌우간 자리에 앉기를 권하자

그 두 청년이 먼저 말을 했다.

“정 목사님 되시죠?”

“예, 그런데 제가 여기에 있는 것을 어찌 아셨고

무슨 일로 찾아 오셨습니까?”

“네, 제 이름은 주수록이라 하고 같이 온 사람은

유용기라 합니다. 저희는 조선에 우리교회가 해산 된 것도

모르고 만주에 있다가 나와서 알고 보니 교회는 해산이 되어

아무도 만날 수가 없고 정 목사님이 여관조합에

들어와 계신다는 말씀을 듣고 찾아 왔습니다.”

“나를 이렇게 찾아주어 매우 고맙소. 시국이 이러하니

조심해 다니셔야 합니다. 안식일교회의 어떤 활동도

위법으로 되어 있습니다.”하고 알려주고,

그제야 안심하고 친절하게 맞았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이제 며칠만 있으면

안식일인데 예배는 어찌 합니까?”

“그동안 나는 집에서 가족과 몰래 안식일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지금 이렇게 나를 찾아 왔으니

이번 안식일은 OO산에서 안식일을 지키도록 합시다.”

“예, 목사님, 그럼 안식일에 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래서 그 안식일에 그 청년들과 같이 어느 산중에 가서

참 감사하게 예배를 드렸다.

 

 

예배드리고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유용기 씨가 내게 부탁을 했다.

“정 목사님, 사실은 이 주수록 형제가 조선에서

안식일 교회에 다니던 처녀와 사귀었는데 그 처녀가

북간도까지 찾아와서 이번에 북간도에서는

세 사람이 함께 나왔습니다. 실은 조선에서

결혼식을 하려하는데 목사님께 주례를 부탁드리고 싶어서

이렇게 청을 드립니다.”

유형제의 부탁을 듣자 나에게 결혼식 주례를 가지고 트집을 잡던

파출소(派出所)소장의 얼굴과 그의 명령이 떠올랐다.

또 고자질을 하던 신자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런데 지금 유용기 형제가 내게 안식일교회 방식의

결혼주례를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나를 찾아와 결혼주례를 부탁하니 참 감사한데,

시국이 이러하니 어려울 것 같소.”

나는 파출소주임의 이야기를 하며 주례를 하는 것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잘못 걸리면 결혼은 고사하고 부부 될 두 사람이 다

곤욕을 치러야 될 판국이라고 자세히 설명을 했다.

“목사님, 그래도 믿음을 가지고 해 주십시오.”

 

 

두 평신도가 목사보고 믿음을 가지고 해 달라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아, 그러면 해 봅시다.”

“그런데 목사님, 결혼식을 꼭 예배당에서

해야 되겠습니다. 부탁입니다.”

갈수록 태산이라지만 오히려 목사인 내가

두 평신도에게서 감동을 받았다.

그래도 교회에서 하기는 힘들고 기독교식으로 하려면

산속에 들어가 몰래 하기로 하고 신부될 사람을

데리고 오라고 했다. 이튿날 신부될 처녀가 왔는데

광주가 고향이며 침례를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 처녀도

교회에서 결혼식을 하게 해 달라고 끈질기게 졸라댔다.

“좋소! 그렇게 해 봅시다. 지금 서울 청진동교회당이 그냥 있고

그 사택에 나하고 같이 일하던 최철순 전도사가 있으니

가서 알아보고 해보도록 합시다.”

그래서 청진동교회를 찾아가니 최철순 전도사가 반갑게 맞으며

우리의 말을 듣고는 “목사님이 찾아오셨으니 비밀리에 예배당 문을

열어 드리겠습니다. 내일 교회 한쪽 구석을 치우고 거기서

결혼식을 하십시다.”라고 하니 그 두형제도 좋다고 해서 서로

약속이 되었다. 다음날, 유용기라는 청년, 주수록 씨, 새 색시,

최철순 전도사, 나, 이렇게 다섯 명이

교회 구석에서 결혼식을 했다. 부모도, 축하객도 없는

그야 말로 약식중의 약식 결혼식이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해야 할 모든 순서는 하나도 빠지지 않고 다했다.

아마 이런 결혼식은 전무후무할 것이다. 비록 사람 수는 적고

비밀 결혼이었지만 그들도, 나도 기쁜 마음으로 돌아갔다.

신랑 되는 주수록 군은 함경북도 북청이 고향이었는데

지금 아들, 딸 낳고 잘살고 있으니 감사한 일이며

유영기 군도 후에 내가 체포 되었던 충남 청양군 화성면

화강리 교회 성희수 장로의 딸과 결혼을 했다.

이것이 해방 전에 마지막으로 한 결혼 주례였다.

 

 

교회는 해산이 되고, 시간은 자꾸 지나가는데 안식일도

지키기가 힘들고 해서 나는 가끔 검거 되었던 분들 중

한 두 분을 찾아가 뵈었다.

그러면 반가이 맞아 주는 것 보다는 마치 기피인물이라도

되는 듯이 피하려하니 매우 섭섭했다.

나는 “당신들이 비록 교회 해산문에 서명을 했다 해도

교회의 지도자요, 간사(幹事)가 되는 분들이니 지금이라도

안식일만큼은 거룩히 지킬 방도를 마련하여 지켜야

하지 않겠소?”하고 권면을 했다. 그 분들 중 어떤 분은

나에게 “우리는 당국과 약속한 바가 있으니 그리 알고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히는 말은 하지 말아 주시오!”라고 했다.

그 분들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선구자들의 신앙을 따르자! 라고 하던 그 신앙은

어디로 사라지고 주님 재림 전에 있을 환난을

견디어 나갈 사람들은 누구란 말인가?”하는

서글픈 심정으로 작별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1944년 12월 25일,

여관조합회원 중 한분이 연말이 되어서 그랬는지는 양식도

귀한 때인데 적지 않은 양의 고기류를 선물로 보내왔다.

당시에는 교역자가 교우들에게 선물을 받는 것은

적절한 일로 취급을 받지 못하는 불문율아래 생활해온 나는

그 예물을 돌려보냈다. 그 예물을 보냈던 분은

“예수교 목사들은 선물도 받는 일이 없고 서로

관계도 맺지 않고 사는 사람들인가?”라고 말을 하고 다닌다기에

나는 사회적 일에 너무 박절하게 한 것이라 생각이 들어

그 분을 찾아갔다. 나는 교회 일을 하면서 그런 습관이

배어버린 것을 설명 드리며 예물 돌려보낸 것도 사과하며

“여관조합직원 전부를 초청하여 식사를 대접해 주신다면

전부 가겠다.”고 했더니 반색을 하면서 초청하여 그간의

모든 어색함도 풀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이 때부터 그 회원은 물론, 모든 조합직원과도 더욱

신의를 돈독히 할 수가 있었음을 하나님께 감사 드렸다.

특히 이일로 나는 사람을 사귈 때에 진실하게 사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사회생활인가를 배웠다.

 

 

조합으로 양곡을 배급 받으러 오는 사람들의 성격이

꽤나 거칠었는데 한 여성은 그 태도가 얼마나 우아하고

배급을 먼저 타거나 더 많이 받으려고 하는 티도

내지를 안아서 나의 주의를 끌었다. 하루는 이야기를 해보니

동아여관을 경영하고 있는 안창남 씨의 여 동생이라고 했다.

“충신가문에서 충신 나고, 효자가문에서 효자난다.”더니

과연 진실한 집안에서 진실한 사람이 나온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창남 씨는 1923년경에 동아일보사의 후원으로 일본에서

고국으로 비행기를 몰고 온 한국인 최초의 비행사이다.

당시에 안창남 씨가 일본 소택 비행학교에 재학 중이었는데

조건이 훨씬 좋은 다른 언론기관들의 후원을 마다하고

동아일보가 조선을 대표하는 참다운 애국신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조건이 훨씬 못한데도 기꺼이 동아일보의 후원으로

고국 비행을 해서 그의 애국적인 인간상(人間相)이 널리 알려져

인간국보가 되었다. 나는 안창남 씨의 여 동생의 태도를 보면서

가정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새삼스럽게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재림교회 가정들은 성경과

예언의 신을 따라 자녀들을 바르게 교육 시켜야 한다고 생각이 되었다.

 

 

전쟁이 점점 막바지로 치 닫으면서 식량배급이

점점 악화 되었으나 여관조합으로 나오는 양곡과

부식은 꽤 잘나왔다. 양곡은 어김없이 조합원들에게

배급을 했지만 부식은 총무의 재량에 의해 배급을 했다.

부식이라는 것은 신당동에 소재한 어떤 제면소에서

만들어 내는 소면이었는데, 전표제도에 따라 나누어 준

전표를 가지고 제면소에 가서 소면을 배급 받으면 되었다.

이런 제도를 눈치 챈 우리 교우들이 전표를 좀 달라는

요청을 해왔다. 입장이 난처했지만 내가 감옥에 있는 동안

고생한 아내를 생각하며 전표를 한두 장씩 드렸더니

“그 전표로 부식을 받아 요긴하게 썼다.”는 소문이

이 입 저 입으로 전해져 내가 목사로 일할 때보다

더 많은 교우들이 전표를 얻으려 나를 찾아오니

입장이 참 난처했다. 조합원들의 눈에 띄게 될까보아

염려도 되었다. 그 다음부터는 집에 손님이 찾아 온 분에

한해서만 전표를 나누어 드렸는데 그 덕분에 손님대접을

잘 받았다는 인사와 또 손님을 잘 대접 했다는 인사를

해 올 때면 계주생면(契酒生面-남의 물건을 가지고 생색을 내는 것)

이라는 말이 생각이 나서 몸 둘 바를 몰랐다.

후에 들으니 손님이 오신 교우 집에만 이 전표를 준다고 해서,

이 전표를 받느라고 전보다 서로 손님 대접을 더 잘했다는 말을 듣고

고소(苦笑)룰 금할 수가 없었다.

 

 

제 7 부. 혼란(混亂) 속에서 인도하신 하나님

 

 

1. 해방과 재건

 

 

1945년이 되었다.

시국이 점점 어려워 졌다. 1941년 12월 8일 하와이

진주만을 폭격하여 미국에 선전포고를 한 일본은

중국 북경, 남경, 중경 및 남태평양으로 진출하며

승승장구 하는 듯이 보이더니 점점 전세가 불리해 졌다.

지독한 일본은 4년째 전쟁을 끌고 있었고 미국은

이 전쟁을 더 질질 끌 수가 없다고 판단을 했는지,

불행하게도 두 개의 원자폭탄을 일본에 투하하여

수만 명이 죽게 되자, “최후의 한 사람까지라도

항복하지 않고 전쟁을 한다.”고 하던 일본천황이

드디어 1945년 8월 15일에 항복을 했다.

 

8월 16일,

종로 바닥으로 수많은 청년들과 셀 수 없는 사람들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밀려오는 것을 보았다.

나는 36년간 일본의 속박에서 벗어난 독립만세의 기쁨도

기쁨이지만 “대한독립이 되었으니 억울하게 해산되었던

우리교회가 다시 예배를 드릴 수 있겠구나!”하는

기쁨이 훨씬 컸다. 그런데 8월 15일에 일본의 항복,

8월 16일의 크고도 큰 대한 독립 만세,

그러나 8월 17일이 되니까 그 주위의 모든 사정들이

복잡하고 질서가 말할 수 없으리 만큼 문란했다.

그래서 여관조합에서도 사무를 보지 못하고 식량 있던 것을

조금씩 나누어 먹으며 생각해 보니 “교회재건문제와

교회재산회수의 문제를 지체할 수 없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서울에 있는 배훈덕 씨, 이여식 씨, 김병목 씨 등

몇 분에게 연락해서 “우리 조선 제칠일 안식일예수재림교회

재건위원회를 조직해야 되지 않겠는가?”하니 다 좋다고 해서

8월 18일인지 19일 밤인지 모여서 재건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열 몇 명인가 위원들을 뽑았는데 누구를 위원장으로 하자는

이야기를 아무도 하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일어나서 “결자해지(結者解之)라고, 매듭을 맺은 사람이

풀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고 말하고, “교회 해산이

오영섭 목사 때 되었으니 오영섭 목사가 위원장이 되어서

교회를 다시 부흥시키도록 하자.”고했다.

그러나 “교회를 해산 시켰던 분이 어떻게 다시 책임을

맡을 수 있는가?”하고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분도 있었지만

그래도 오 목사에게 교회회복의 기회를 주자고 의견을

피력(披瀝)하니 결국 서로 이해를 하고 오영섭 목사가

위원장이 되었다. 위원이 된 사람들은 다 기억은 못 하겠으나

오영섭, 이성의, 곽종수, 이준민, 박창욱, 이여식, 오석영,

김명길, 손형국, 정동심, 최철순, 배혜경 씨 등

열두 세 명 정도 이었다. 이 외에도 재건운동에 뜻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다 재건위원으로 받아들이기로 의논이 되었다.

재건위원회 간판은 청진동 교회에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 재건위원회”라고 써서 달고 활동해 나갔다.

 

사회적으로 모든 질서는 문란하게 되고 정치적으로도

되어 가는 일들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조선이 독립했다고 일본과 북간도에서도 사람들이 몰려오는데

기차가 좁으니까 기차 위에도 타고 오다가 다치거나 떨어져

불쌍하게 독립의 광경도 보지 못하고 죽는 사람도 많이 생겨났다.

또 조국으로 오시는 분들이 식량도 없이 독립의 기쁨만 생각하고

돌아와 보니 살아 나갈 수가 없는 형편에 처했다.

그래서 우리는 조국을 찾아오는 교우는 물론 민족을 위해

돕자하여 피난민원호회를 조직하여 이여식 씨가 잠시

위원장을 맡은 것 같다. 그중 정사영 박사 같은 분은

열심히 금전도 모집하고 병든 사람도 보아주는데 앞장서서

큰일을 했다. 후에는 정 사영 박사가 원호회위원장을 한 것 같다.

 

 

재건위원회는 라디오 방송으로도 재건위원회의 일을 알렸더니

북선지방에서 일하시던 임성원 목사, 박원실 목사,

평안남도 개천에서 사역자 양성소를 졸업하고 그 아버지 때로부터

열심이었던 김동규 씨 등이 넘어와 재건위원으로 참여해서

일을 하게 되면서 더욱 활발해 졌다. 수원에 사시는

조동의 형제는 재건위원들의 노고를 위로한다면서 자기 자전거에

당시에 매우 귀한 광목을 싣고 와서 분배하여 주면서

격려하던 일들은 잊을 수가 없다.

시조사, 서광장(위생병원), 합회사택 같은 큰 건물 등도

찾기 위해 노력을 하면서 한편 교회집기 등도 회수하기 위해

찾아 나섰다. 하루는 내가 재건위원회에 참석을 하지 못했는데

급기야 그 회의에서 오영섭 목사에게 재건위원장직을

내 놓으라고 하고 이성의 씨를 재건위원장으로 선출하여

교회재건의 일을 계속 했다.

 

어느 틈에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상이 급속하게 퍼지면서

민생형편이 극히 곤란 속에 빠져 들어갔다.

특히 식량사정은 최악이었다. 해방이 되면서

배급제도도 사라지고, 가진 사람들은 양식들을 쥔 채로

풀어놓지를 않으니 서민들만 죽을 판 이었다.

나는 여덟 식구를 거느린 몸으로 식량문제를 당장 얼마라도

해결을 못하면 식구들이 다 굶을 판이었다.

그전에 면목동에 삼육학원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교회고문변호사이던 신태학 씨가 맡아서

“자동의숙”이라 이름하고, 이 곳에서 농사를 져서

곡식을 모아 두었다가 독립이 되자 신태학씨는

곡식들을 남겨 둔 채 피해 나갔다. 이곳에 이여식 씨와

오석영 씨가 책임자로 있으면서 나의 어려운 사정을 알고는

식량을 좀 가지러 오라고 했었다.

 

 

하루는 자전거를 빌려 타고 면목동에 가서 “내가 형편이

너무 어려워 할 수없이 왔다”하니 두 분은 쾌히 식량을 좀 주어서

자전거에 싣고 그날 오후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헐레벌떡 지나가다가 나의 자전거를

갑자기 붙잡으면서 나를 억지로 서게 했다.

교인도 아니고 전혀 본적도 없는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선생님은 지금 어디를 가십니까?”

“나는 지금 서울 내 집에 가는 길인데 왜 나를 붙잡고 이러십니까?”

“지금 서울로 들어가면 안 됩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 중량교에서 나가는 사람은 그냥 두는데 들어가는 사람을

막으면서 사람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들어가지 마십시오!”

“에이,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대낮에 그럴 리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아닙니다. 제 말을 듣고 들어가지 마십시오!” 하더니

그 사람은 가 버렸다.

알지도 모르는 사람이 허튼 소리를 떠드는 것인가 하고

생각도 했지만, “자전거를 타고 가는 나를 유독 잡아 세우고

그렇게 말을 해 주는데 부득부득 고집을 부려서

들어갈 필요는 없겠다.”라고 생각되어 온 길을 돌아가

교인 안문현 씨 집으로 가서 하룻밤 신세를 졌다.

 

 

이튿날 형편을 보아 가면서 중량교로 들어오는데

정말로 모래바닥에 죽은 사람만도 몇 백 명이 되어 보였다.

하나님께서는 본적도 없는 사람을 보내 나를 보호하신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하고 감사해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아마 이 때 이미 사상적인 불화로 치열한 싸움이 시작 된 듯 하다.

나는 다시 한번 이사야 43:1-2절에 있는 말씀 중에

“너는 두려워 말라....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라!”를 생각하며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께 감사했다.

이렇게 식량을 구해 오면서, 그간 내 아내가 많은 식구를

거느리고 끓일 양식이 없어도 나를 원망치 않고 수감 중이던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이 너무 고맙다는 생각이 절로 났다.

 

 

서울의 질서가 조금씩 잡히는 것 같으면서도 인심이 험악해 갔다.

독립만세는 크게 불렀는데 청량리 같은데 나가보면 전차 하나

타려고 해도 서로 치고 밀치고 하다 큰 편싸움이 나곤 했다.

전차과 직원들이 모자를 쓰고 아무리 말을 해도 들은 척도

아니 하다가 그래도 우리가 일단 연설을 하고 순서대로 타야

전차도 떠날 수 있다고 하면 사람들이 말을 잘 듣곤 했다.

그래서 종종 우리는 일부러 청량리 전차 타는데 사람을 보내서

질서를 지키자고 말도 하곤 해서 전차과에 있는 사람들이

감사를 표하곤 했다. 부질없는 일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작은 일이라도 지역사회를 위해서

필요할 때는 봉사를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가져온 식량은 곧 바닥이 났다. 그렇다고 면목동을

또 찾아 가기가 미안했다. 기도를 드리면서 생각을 해 보니

수색에 사는 “김일수”라는 친구가 급할 때 오라고 하던

생각이 나서 찾아갔다. 그 친구는 다른 때보다도 더 반가이

맞아 주면서, 내가 식량사정을 이야기 하자 상당히 많은 양의

양곡을 쾌히 내주었다. 많은 식구가 꽤 오래 버틸 수 있는

양의 곡식 이었다. 식구의 굶주림을 면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뿐만 아니라 당시에 돈보다도 귀한 식량을

쾌히 내어 주었던 친구들에게 지금도 감사한 생각을 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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