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에 관한 가장 훌륭한 설교 하나

by 김원일 posted Feb 14, 2012 Likes 1 Replies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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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기도로 무엇을 얻는가? 2

마태 6:5-8

곽건용 목사

하나님 뜻에 맞는 기도라면 굳이 할 필요가 있을까?


지난 주일에 이어서 오늘도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겠습니다. 그리스도교는 기도를 ‘하나님과 나누는 영혼의 대화’라고 정의하지만 실제로 대부분의 기도는 기도자가 하나님이 이루어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내용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일방통행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기도자의 관심은 기도한 내용이 이루어지는지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기도한 내용이 이루어졌으면 기도가 응답받은 것이고 이루어지지 않았으면 응답받지 못한 것이 됩니다. 기도가 응답받았다면 기도의 능력이 있든지 아니면 기도의 내용이 애당초 하나님의 뜻과 일치했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곧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서 하나님께서 본래의 계획을 바꾸셨든지 아니면 이미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을 기도했다는 얘기입니다. 만일 후자라면 굳이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도가 응답받는 데만 관심을 가진다면 말입니다. 반대로 기도가 응답받지 못했다면 기도의 능력이 부족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든지 본래부터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뜻에 맞는다고 여겨지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기도해도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공동체의 정의와 평화를 위한 기도나 전쟁을 멈추게 해달라는 기도, 극도의 빈곤과 굶어죽는 사람을 없애 달라는 기도, 자연 생태계 안에서 제 자리를 잡고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를 보호해달라는 기도 등은 아직까지 제대로 응답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지금도 지구상 어딘가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고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1%에 의한 99%의 지배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루에도 수만 명의 어린이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비참한 현실이 지속되고 있는 것은 우리의 기도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이런 기도가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까? 이런 기도가 하나님의 뜻에 맞는다면 사실 기도를 드려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본래부터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이라면 기도하지 않아도 이루실 것 아닙니까? 만일 당신 뜻에 맞는다 해도 사람들의 정성이 부족하면, 곧 기도하지 않으면 응답하지 않는 하나님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반면 이런 기도가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다면 이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하나님이란 말입니까? 전쟁을 좋아하고 살육을 즐기는 신입니까? 정의와 평등보다는 부정과 불평등을 더 좋아하는 신이란 말입니까? 아무 잘못도 없는 아이들이 오로지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굶어죽어도 아무렇지 않은 신일까요?


이런 문제들도 중요한 신앙의 주제이긴 하지만 사치스런 얘기일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을 텐데 그 기도는 어떤 것일까요? 모르긴 해도 대부분의 기도가 더 많이 갖게 해달라는 기도일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는 가질 수 없는 것을 절대자의 힘을 빌려서 가지려 하는 기도가 대부분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힘을 빌려 자기의 욕망을 채우려고 기도를 ‘기복신앙의 기도’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기도는 어떤 신에게 하든지 간에, 곧 야훼에게 하든지 알라에게 하든지 부처에게 하든지 상관없이 모두 기복신앙의 기도입니다. 아무리 세련된 형식을 갖춰서 미사여구를 늘어놓더라도 그것 역시 기복신앙의 기도입니다. 그리스도교의 기도는 이런 것이 아닙니다. 기복신앙의 기도가 아니란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드려야 할 기도는 이런 기도가 아닙니다.


사람이 조물주다!


옛날에는 먹고살기가 힘들었습니다. 과장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랬습니다. 돌도끼 들고 들로 산으로 뛰어다니며 수렵, 채집해서 먹고살았던 원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습니다. 불과 수백 년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 그대로 잠자는 시간 빼고 하루 종일 일해야 겨우 식구들 먹을거리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단지 먹고살기 위해 잔업도 하고 특근도 하고 철야작업까지 기본적으로 해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신에게 기도했을까요? 기도의 주제는 오로지 하나, ‘생존을 위한 기도’였을 것입니다. 모든 생명체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살아남는 것이고 살아남기 위해서 갖고 있는 거의 모든 에너지를 써야 했으니, 그렇게 하고도 살아남지 못해 죽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으니, 그들 기도가 생존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는 사실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물질을 달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기복신앙인이 하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똑같이 물질을 달라는 기도라고 해도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그것과 똑같이 볼 수는 없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더 가지고자 하는 욕망을 채워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필요를 채워달라는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모두 물질을 달라는 기도지만 둘의 성격은 판이하게 다릅니다. 그들이 드린 기도를 기복신앙적인 기도라고 부르고 싶다면 그렇게 부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기복신앙적 기도와 똑같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더 갖겠다고, 끝 간 데 없는 욕망을 채워달라고 드리는 기도와 생존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생존을 위한 필요를 채워달라는 기도가 똑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지난 수백 년 동안 인류의 물질문명은 비약적으로 발전했습니다. 지금은 못 하는 게 없고 못 만드는 게 없습니다. 어디 가든 먹을거리가 넘쳐납니다. 어디를 가나 물건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습니다. 먹을거리는 온 인류가 다 먹고도 남을 만큼 쌓여 있고 여타 물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돌도끼 들고 들과 산으로 뛰어다니며 사냥하고 채집했던 원시인들 눈에 현대인이 어떻게 보일지 생각해보셨습니까? 아마 그들 눈에 우리는 ‘조물주’로 보일 것입니다. 오늘날 인간은 수백 년 전 사람들 눈에는 조물주나 다름없습니다. 현대인은 적어도 물질문명에 관한 한 조물주라고 불러도 될 정도입니다. 하나님의 힘을 빌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 방면에 관한 한 전능하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오늘날 세계는 조물주조차 고치기 힘든 중병을 앓고 있습니다. 문제가 무엇입니까? 왜 이런 중병에 걸렸을까요? 이 많은 먹을거리와 물건들을 나눠 쓰지 않고 소수가 독점하는 게 문제입니다. 많이 가진 사람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많이 갖고 있고 적게 가진 사람은 먹을거리가 없어 굶어 죽습니다. 한쪽에서는 곡식이 밑에서부터 썩어 들어가는데 다른 쪽에서는 사람들이 못 먹어서 앙상하게 뼈만 남아 있습니다. 사정이 이런데도 불구하고 지금 갖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갖게 해달라고 가도하는 도시 중산층 그리스도인들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요즘 신문을 보니까 한국 재벌기업의 2, 3세들이 빵장사를 하려 한답니다. 이를 두고 어떤 사람은 제 돈 갖고 제 사업한다는데 왜 말이 많으냐고도 하고, 또 다른 사람은 재벌이 동네 빵집까지 장악하려고 한다며 비난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동네 빵집까지 싹쓸이하겠다는 재벌기업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 갖고 있는 것보다 더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도시 중산층 그리스도인들(곧 우리가 속해 있는 집단입니다)은 동네 빵집까지 싹쓸이하겠다는 재벌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차이가 있다면 그들은 행위로 죄를 짓는데 그리스도인들은 기도로 죄를 짓는다는 차이뿐입니다.


우리네 사회가 정의롭지 않기 때문에 풍요 속에서 생존을 위협받으며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무슨 염치로 더 갖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는가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물질에 관한 한 피조물이 아니라 조물주에 더 가깝습니다. 물질을 더 달라고 기도할 사람이 아니라 그런 기도를 들어야 할 사람입니다. 응답을 기다리는 쪽이 아니라 응답을 해야 하는 쪽입니다. 풍요 속에서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의 기도를,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의 기도를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기도에 관한 한 ‘조물주’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성서의 욥기는 세상에 만연한 불의에 관해 깊이 성찰하는 책입니다. 욥은 처음에는 자기에게 닥친 불행에 대해서 의문을 갖고 하나님께 묻습니다. 왜 잘못한 것 없는 자기가 이런 고난을 당해야 하느냐고 말입니다. 그렇게 그는 친구들과 논쟁을 벌이는데 그러다가 점점 자기 시야가 넓어짐을 경험합니다. 자기가 당하는 것과 같은 고난을 자기만 당하지 않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는 세상에는 자기처럼 고난당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악인들이 그런 짓을 저지른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이렇게 깨달은 다음에 하나님께 대한 그의 호소에 변화가 생깁니다. 왜 세상에는 이런 악인들이 있냐고, 왜 하나님은 그런 악인들을 그냥 보고만 계시냐고 말입니다. 자기만 바라보던 시야가 넓어져서 이웃이 눈에 들어온 것이지요.


마지막에 하나님이 욥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은 욥이 제기한 모든 물음에 대답을 내놓으셨는데 그 대답이 직접적이 아니라서 바로 읽히지는 않습니다. 세상에 존대하는 악과 악인들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대답해주시는데 이 대답이 놀랍습니다. 우선 세상에 악과 악인들이 존재하는 까닭은 하나님이 그것들을 허락하셨기 때문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고 그 책임을 사람들에게 지우지도 않았습니다. 악과 악인들에 대해서 하나님은 아무런 책임도 없고 그것은 그저 사람들이 책임질 문제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은 악과 악인들의 기원에 대해서는 대답하시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것들의 기원보다는 어떻게 해야 세상에서 악과 악인들을 몰아내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욥은 왜 능력의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인하시느냐고 불평했는데 그런 욥에게 하나님은 “네가 그들을 없앨 수 있다면 어디 한 번 해봐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욥이 세상에서 악과 악인들을 다 쓸어버릴 수 있다면 어디 한 번 해보라는 말씀입니다. 이불에서 먼지를 털어내듯이 이 세상에서 악인들을 다 없앨 수 있다면 어디 한 번 해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도 그렇게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조차 세상의 악과 악인들을 모두 몰아내지는 못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상의 악과 악인들을 그냥 용인하고 살아야 할까요?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욥더러 악을 몰아내는 데 있어서 당신의 동지가 되어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믿음의 사람들이 힘을 합쳐서 세상에서 악과 악인들을 몰아내자고 초청하십니다. 저는 욥기를 읽을 때마다 이 사실을 분명히 느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악의 문제를 해결하는 동지로 부르고 계심을 말입니다. 물질문명에 관한 우리는 조물주나 다름없습니다. 그리고 악의 문제와 관련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일하는 동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악의 문제와 관련해서 기도도 해야겠지만 불의한 세력에 의해 고난당하는 사람들의 기도를 듣기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지들이니 말입니다.


종교는 곧 초월적 존재를 향한 수행과 타인에 대한 관심이다


종교가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종교가 있고 종교마다 차이도 많지만 동시에 공통점도 있습니다. 평생 종교에 대해 공부해온 종교학자들에게는 미안하고 실례가 되는 얘기일 수 있지만 종교의 핵심은 단순하고 간단하다고 생각합니다. 각 종교의 교리가 복잡하고 역사적 경험도 다양하기 때문에 학자로서 공부할 내용은 물론 많겠지만 종교의 핵심은 간단합니다. 그것은 ‘초월적 존재를 향한 영적 수행과 타인에 대한 관심’이라는 두 마디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지성과 감성 말고도 초월적 존재를 향한 영성(spirituality)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영성의 존재와 중요성을 믿는 사람에게 종교가 가능하고 필요합니다. 영성을 자각하고 그것을 다양한 방법으로 갈고 닦고 감수성을 키워나가는 것이 바로 종교적 실천입니다. 기도는 종교적 실천의 하나로서 절대자를 향한 영적인 감수성을 키워나가는 수단인 것입니다. 기도 그 자체가 종교의 목적은 아닙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이나 기도를 멋지게 하는 것이 전부일 수는 없습니다. 배가 강을 건너기 위한 방편인 것처럼 기도도 초월적 존재인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수단입니다.


기도가 이런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께 무엇을 달라는 요구일 수 없습니다. 기도는 내 욕망을 채우기 위해 절대자의 힘을 빌리는 게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로 가까이 다가가는 일은 하나님의 힘을 빌려서 할 수도 없고 하나님이 대신 해줄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무엇을 달라고 할 수도 없고 달라고 해서도 안 되고 하나님께서 주실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힘을 빌려 제 욕망을 채우려는 것은 기도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소위 기도의 응답을 받아 욕망이 채워졌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응답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동네 빵집까지 장악하려는 재벌의 욕심을 채워주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종교는 무엇이든지 하나씩 얻고 쌓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씩 놓아버리고 비워가는 것입니다.


결국 기도는 우리를 하나님과의 깊은 인격적 교제로 이끌어갑니다. 이 교제는 뭔가를 주고받음으로써 유지되는 사업적인 관계도 아니고 명령하고 복종하는 주종관계도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란 마음과 영혼으로 나누는 교제이고 궁극적으로는 둘이 합일하여 구별이 사라지는 교제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고 내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이 되는 교제입니다. 이는 내가 깊고 넓은 호수와 같은 하나님의 마음에 풍덩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호수에 내 영혼이 조금씩 잠겨 들어가는 것입니다. 낯선 호수에 들어가는 일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손을 담가보고 발도 담가보고 물을 몸에 조금씩 적셔가면서 익숙해집니다. 기도도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조금씩 나를 담그는 일이 바로 기도인 것입니다.


이렇게 조금씩 하나님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의 눈에는 타인이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굳이 성경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친다고 말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들여다보는 사람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관심과 연민과 사랑을 보기 때문에 타인과 타인의 삶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 이웃에게서 하나님을 만난다.”는 말은 진실이 됩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이 어떻게 자기 욕망을 채워달라고 빌겠습니까!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이 왜 기도가 응답받았는가 안 받았는가에 연연하겠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도 기도하신다고 하면 믿겠습니까? 호세아는 “내가 반기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사랑이다. 제물을 바치기 전에 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다오!(6:6)라는 하나님의 호소를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드리는 것이, 곧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호수에 여러분을 담그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입니다. 바로 이것이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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