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서에 관하여 - 고 김관호 목사님의 자서전에서 발췌 (하문님께)

by 도우미 posted Feb 15, 2012 Likes 0 Replies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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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푸른 한 그루 소나무"  김관호 목사 회고록 28쪽부터 31쪽


투옥과 고문


1943년 2월 종로경찰서 고등계에서는 최태현 오영섭 박창욱 김상칠 이성의 등 5명을 체포하여 경찰서 유치장에 가두었고 잡혀간 이들도 그 이유를 몰랐다. 1996년 10월 10일 이성의 목사님의 아들인 이기돈박사에게서  당시 최태현 합회장의 죄목을 들었는데 '국민소요죄'라하였다. 그첫째가  '예수님을 왕이라 부르고 예수 재림하신다'라는 구절이 찬미가에서 완전 삭제되지 않는 것 둘째 안식일을 지키는 것 이것들이 국민소요죄라는 것이었다.


이때는 예수 교단을 미국의 스파이라 한 고로 성결교회의 이명직 총회장도 잡혀왔고 경남 산청군 화산리 감리교인 유O종씨도 잡혀들어왔다. 당시 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은 사냥개나 다름없었다. 어느 교회이던지 항상 신사참배를 목사 인솔하에 먼저 시키고 돌아와서 설교를 하게 하되 시국담은 일체 못하게 하였다. 나도 그당시 삼척 감리교회에 나가다가 신사참배(우상숭배)는 할 수 없으므로 변소에 가는 핑계를 대고 빠진 후에 교회 출석을 그만 두었다. 뿐만아니라 재림교회의 찬미가는 군데군데 굵은 먹줄로 그어서 부르지 못하게 하였다.  '예수를 왕이라고 하고 재림하신다'하는 곳들은 전부 먹으로 줄치게 했다. 내 기억에 반대일 형제의 찬미책 등이 모두 먹줄 투성이었다. 지독하게 극악한 일본 경찰의 지시이기도 하지만 선교사들에게 아부하던 이들이 지도자 무리에 섞이어 앞장서서 일본의 앞잡이 노릇들을  한 것은 한심스럽다.


형사들이 우리 교회의 5명의 사역자들을 1개월간 여러 고문으로 취조해 보았지만 죄를 못찾자 각 가정에서 밥과 옷을 차입하라 하였다. 이들의 형상은 긴 머리와 텁석부리 수염으로 초췌하였다. 이미 이들은 전기 고문을 받아 까무러치면 물통의 물을 들어 부어 정신을 차리게 하는 극형의 고문을 받았다. 다섯 가족들은 차입하라는 말이 너무 기뻐 잔치 음식같이 차려 옷과 함께 가지고 가 간수들에게 까지 풍성히 나누어 먹였다.  다섯명의 밥그릇중에 오직 최태현 목사님 밥그릇에만은 한귀통에 밥이 남아 집에 와서 속을 헤집어 보니 밥속에는 노루지에 또박또박 쓰인 편지가 들어 있었다. 편지 속에는 상상도 하지 못할 놀라운 사실이 있었다. 다섯명이 잡힌 이유는 일본제국의 국시 위반 혐의가 아니라 우리 교단안에서 같이 일하는 형제들 12명 정도(그 당시의  행정위원들)의 서명 날인한 지장과 도장이 찍힌 투서 때문이었다는 것이었다.


이들 다섯명은 사상범이 아니라 간첩으로 비국민 취급을 받았다. 고등계안에 거꾸로 다는 형틀에 매달리고 주전자에 고추가루 탄물을 코로 들어 부임을 받고 가죽 채찍으로 치다가 까무러치면 물 통을 전신에 들이붓고 한편에 치웠다가 깨어나면 전기고문을 받는 식으로 견딜 수 없는 취조였다. 차입때 보니 몸과 얼굴들이 퉁퉁 부어 있었다. 이 상황은 마태복음 10장 21절의 "... 형제가 형제를 내어주며.... "의 문자 그대로의 예언성취였으니, 앞으로 마지막 환난 날에도 일어날 광경이다. 다섯 중에서도 합회장인 최태현목사님이 집중 추궁을 받았고 나머지 네 사람은 최태현 목사에 비해 덜하였다. 2개월 동안 그들의 고문은 혹독했다. 성결교회의 이명직 총회장과 최태현 합회장님의 취조를 눈으로 지켜본 유O종씨는 1953년경 대구 덕산동 우리 집에 오셔서 예수 교단을 미국 스파이로 일본 경찰이 무릎을 꿇리우고 심문할때 이명직 목사에게 "일본천황이 높으냐? 하나님이 높으냐" 한즉 이명직 목사의 답은 "성경에 하나님이 높다 하였으니 그렇게 가르쳤을 뿐이다' 하여 일본 천황이 높다는 것을 시인하였다. 그러나 최태현 목사님은 "일본 천황은 일본에서 높고 하나님은 우주에서 높습니다"라고 대답하심으로 일본 경찰이 분노하여 최태현 목사님이 꿇은 무릎에 징이 박힌 구두로 발길질을 퍼붓는 것을 목격하였고 최태현 목사님은 굽히지 않는 하나님의 참 목자이시며 안식일 교회가 진리의 교회라는 확신이 가슴에 푹 박혔다고 증언하셨다.


추후에 김예준 목사도 잡혀 들어가서 많은 취조를 받으셨다. 경찰은 감금 2개월 동안의 혹독한 취조 끝에 아무런 간첩의 혐의를 발견할 수 없으니 다섯 가족의 집에 "의복과 음식을 보내라 내일은 출감된다"는 소식을 통지 했다. 이에 다섯 가족들의 기쁨은 헤아릴 수 없었다. 이 소식이 교단의 간부들에게 알려지자 그들은 자기들에게 보복이 올 것을 느끼고  다시 투서를 하여 재수감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결정이 내려졌으니 사단의 발동이었다. 두번째의 투서내용은 '다니엘서와 계시록에 일본은 망하고 미국은 흥한다'는 가르침의 예언 해석으로 다섯 명을   꼼짝달싹할 수 없이 얽어 넣은 것이었다. 당시 18세였던 차남 최승만군은 위험을 무릅쓰고 취조실 뒷방에 몰래 들어가 다니엘 2장 도표를 걸어놓고 심문하는 광경을 문틈으로 엿보았다. 그는 경찰이 "예수께서 만왕의 왕으로 재림을 하느냐?" " 뜬 돌로 세계가 망하느냐?" 는 취조를 하면서 혹독한 고문을 하는 광경을 보았다.


순교


구금 4개월이 되는 1943년 5월 "내가 11번 까무러쳤으니 언제 일을 당할는지 모른다. 옥만아! 어머님 모시고 동생들 데리고 잘 지내라"는 유언의 비밀편지가 밥그릇 속에서 나왔음으로 가족들은 엉엉 울고 아들은 아버님께 참을 인(忍)자를 써 보냈다. 1943년 6월 2일 최태현 목님은 고문에 못견디어 열두번째로 까무러쳤다. 형사들은 아무리 물을 끼얹어도 회생의 가망이 없으므로 술렁거렸다. 종로경찰서에서는 가족들에게 "가져가라'고 지시 하였다. 가족들이 울며 부르짖으며 혼수 상태에 있는 목사님을 서울 위생병원으로 바로 모시지 못한 것은 두번씩이나 투서한 그 사람들의 진영이 병원에도 있었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다른 병원으로 모셨으나 회복의 가망이 없으므로 이에 서울 위생병으로 옮겼다. 그당시의 위생병원 간호원이었던 전헤심 자매는 "흰 홑이불로 온몸을 덮고 병실에서 끌고 나가는데 최태현 합회장님이라"고 후일 내게 말하였다. 최태현 목사님은 혼수 상태 8시간만에 주안에서 순교의 잠을 드셨다. 유치장에 아직 갇혀있는 나머지 가족들은 최목사님의 가해자들을 그대로 둘 수 없으니 고소하자고 분개하므로 장례식을 어찌해야 할 줄을 몰랐다. 막상 고소를 하면 최목사님을 해부해야 하므로 가족회의에서는 "성경 말씀대로 장렬히 순교하신 아버님을 두번 주검을 시키지 못하겠다"고 누물뿌리며 고소제기를 그만두었다. 다섯의 가족들은 크게 분개하는  마음에서 그 자녀들에게 "못난 자식들 같으니"하고 불만스러워 했다.


이말은 상황이 너무나 가슴에 깊이 못박인 아픔이었기 때문이었다. 12인 행정위원들의 두차레의 투서는 결국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했고 이는 분명 사단의 교란에 넘어간 것이다.  역사는 바로 잡아야 한다. 그 명단들이 우리 한국 교회 역사에 사실대로 실리지 못하고 50년이 넘도록 흘러 온 이유는 그 자손들이 지금 교회안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투서사건의 배경에는 두가지 견해를 가질 수 있다. 행정위원 전원이 함께 모의했을 수도 있고, 당시 행정위원중 주모자가 2명 혹은 3명일수 있고 나머지는 행정위원의 위치에서 피해를 당할 까봐 서명할 수 있었을 것이다. 김창집 곽종수 같이 세상으로 나간 이도 있다. 어떻든지 생각하여야 할 것은 그 자신들의 서명날인으로 형제가 해를 입헜으니 그 일에 동참한 이들에게 심판의 날에 그 행한 대로 피값이 따를 것이다. 그러나 자손에게 죄의 연루가 될 수 는 없나니 아비가 신 포도를 먹음으로 아들의 이가 시지 않기(렘 31:29)때문이다.


자손들이 현재에 하나님의 사업을 위하여 믿고 봉직한 것은 당히 옳은 일이요 누구나 다 충성할 것도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각자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헌신과 봉사가 있어야 할 따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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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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