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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22

 

 

 

(막상 김O 형제가 가족을 데리고 부임을 했는데 알고 보니 나의 존경하는 친구 

김OO 장로의 장남이었고, 훌륭한 내조자를 데리고 와서 마음 든든하였다. 

누군가 교회의 일을 의논할 대상이 있다는 것이 이렇게 좋고 감사한 일인 줄을 

새로이 깨닫고 감사했다.연재 #21의 끝 부분)

 


6. 이스라엘 집의 잃은 양

 

 

1943년 12월 28일 아침,

제7일안식일 예수재림교회의 해산문을 받고

교역에서 물러나 더 이상 교회로 돌아오지 않고

계신 분들을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은 양”이라 이름하고

그들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이때 물러나간 사람들이

초근목피(草根木皮)로라도 생계를 유지하면서

신앙생활을 계속 했더라면 참 좋았겠지만 교회에서

일을 하다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해산 통지서를 받았으니

얼마나 당황했을 것이며 그 후 그들이 겪어야 했든

그 어려움이 얼마나 심했으랴?!!

 

 

그런 분들 중에서 우선 나와 한 울타리 안에 살고 계시는

이응준 선생과 권숙련 씨를 찾았다. 내가 신자들을 데리고

예배드릴 때에 이 분들은 안식일도 제대로 지키지를 못해서

민망해 했고 우리나 가족들도 서로 보기에 참 민망했다.

그래서 그 두 분 댁에 들려서 “이제 해방 된지 벌써 3년인데

그전에 교회 일을 하시던 분들이 지금 안식일도 제대로

못 지키고 계시니 내가 오히려 미안합니다. 이제라도

교회가 당신들을 부르면 다시 일할 마음이 있는가?” 하고 물으니

두 분 다 ”아, 교회에서 부르기만 한다면야 교회 일을

하다마다요!”했다. 그리고는 아직 어떤 보직도 주지를 않았는데

그 분들이 다니던 직장에 사직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 정신이 얼마나 감사한지! 그 용기가 참으로 가상했다.

 

 

 

 

우리 재림교회의 사업 부문 중에 중요한 부문인

문서 전도부를 다시 시작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박찬문 씨를 부르기로 했다. 박찬문 씨는 전북 금산군

마전 태생으로 불신자의 가정에서 소년시절에

우리 교회로 나온 청년이다. 이십 세도 되기 전에

문서전도를 매우 성공적으로 한 분이기에 남선대회

문전부주임으로 부르기로 했다. 이 분은 교회해산 당시에도

신앙을 잘 간직한 분들 중 한분이시다. 이분에게 몇 번씩

사람을 보내어 문전부주임을 맡도록 권해 보았으나

매번 거절을 했다. 생각다 못해 내가 직접 권해 보았으나

사양을 하면서 “교회에서 월급을 받고 일하는 사람들은

거의 다 그 월급을 가지고는 생활고를 견디기 힘들어 하니,

나도 이제 더 이상 교회월급생활을 하고 싶지 않다.”라고 하셨다.

이 분도 식구가 많으신 분이라 그 사정을 얼마든지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우리 대회가 문전부를 새로 만들기 위한 것이니

잠간이라도 맡아서 시작만 해주고 조금 궤도에 오르면

그만 두어도 좋다고 했더니 잠시만 한다는 조건으로

일을 하시겠다고 약속을 했다.


 

조금씩 대회사무실이 자리 잡히기에 지방순회로

전라남도 목포에 가니, 목포교회의 사택에 허만식 씨가

살고 있었는데 이 분도 역시 교회 일을 하다가 지금은

다른 직장에 다니며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고 계셨다.

나는 허만식 씨에게도 웃으면서 “지금 살고 있는 집이

교회 사택인데 교회 일을 할 사람에게 사택을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허 선생도 교회에서 부르면 그냥 사택에서

사시면서 다시 교회 일을 할 마음이 있는가?” 물으니

“아, 교회에서 부르지 않아서 그렇지, 교회가 부르기만 한다면

다시 일하지요!”라고 하기에 허만식 씨도 다시 불러

교회전도부에서 일하도록 해 보겠다고 약속을 했다.

 

 

다음에는 신종균 형제가 부산에 있다기에 찾아 갔더니

부산에 있는 어떤 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직업이 이분의 성격에도 맡는 것 같고

또 즐겨일하고 계신듯해서 교회 일을 하기위해서 다시

오라는 말을 하기가 매우 조심스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다시 일할 마음이 없는가?”하고 어렵게

말을 꺼냈더니, 즐거운 마음으로 교회에서 일할 마음이

있다고 하셨다. 그래서 기자직을 내어 놓고 기다리라 했더니

성격이 화끈 하신 분이라 곧 그리 하였다.

 

 

김동윤, 류재목,

이 두 분도 교회해산 당시에 유급생활은 아니 했으나

문서전도부에서 많은 수고를 하시던 분 들이라

“이제 다시 교회로 돌아와서 문서전도부에서 일할

생각이 없는가?”하는 의견을 타진하니 “즐거이 다시

일하겠다.”고 하시더니 불원간 돌아와 문서전도를 시작하였다.

얼마 후에 교회의 유급 사역자로 일을 하다가 목사 안수까지

받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였다.

 

 

대강 이러한 분들을 다시 교회로 오라하기는 하였는데

대회로서는 이 분들을 사역하게 할 만한 자금이 없었다.

이 분들은 용기 있게 직장에 사직을 하고 대회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을 생각을 하니 어깨는 무겁고 잠이

오지를 않았다. 연합회와는 일언반구도 의논을 하지도 않고

이렇게 일을 저질렀으니 합회장의 얼굴을 보기도 미안하였다.

그러나 기도를 드리고 용기를 내어 염치 불구하고 합회에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1943년 12월 27일 교회 해산과 함께 정직되었던

다음 몇 분들을 복직시키기로 생각하고 있으니

남선대회를 위하여 실수 없이 결정하여 주십시오,

특히 한 분은 문서전도부의 책임자로 신규 채용을

해야 하오니 고려하여 결정하여 주십시오.”라고 하면서

이응준, 권숙련, 허만식, 신종균, 신규채용에 박찬문

제씨의 이름을 올리고 하회(下回)를 기다렸다.

 


합회에서는 내가 진언한 남선대회의 상황과

제출한 분들에 관하여 난상토의(爛商討議)끝에 모든 분들을

적당한 곳에 배치한다는 통지를 받았다. 조금도 과장함 없이,

마치 내가 부름을 받는 것 이상으로 마음이 기뻤다.

합회의 통지에 의하여 이응준 씨는 경산학교에,

권숙련 씨는 경북 안동에, 허만식 씨는 전남 목포에,

신종균 씨는 경남 진주에, 박찬문 씨는 대전에 있는

남선대회 문서전도부장으로 배치를 했다.

이때 나는 하나님께 두 손을 들고 감사하였다.

어느 지방보다도 남선대회는 교회가 한곳도

제대로 정리가 된 곳도 없을뿐더러 부임지의 사정도

매우 어려웠지만 모두 기쁜 마음으로 부임하는 것을 보면서,

이분들의 교회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나는 감동을 받았고,

하나님 안에서 부디 성공하기를 기도드렸다.

박찬문 씨는 남선대회 문서전도부를 성공적으로 운영하다가

나중에는 호남대회가 생긴 후에 그곳으로 가서

목사안수까지 받고 본인의 많은 가족들을

교회 안에서 양육하여, 각 곳에서 교회를 도우며

특히 맏아들 되는 박성우 군은 목사로써 수고하는 것을 보니

마음이 든든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그 외의 모든 분들도

각자 부임한 곳에서 열심히, 기쁨 중에서 일하시다가

모두 목사의 안수를 받으시고 두어 분은 대회장까지 지내게

되었으니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도 깊고 크시다.


 

한국이 독립하면서 사회가 혼란하고 살기 어렵겠다고 해서

대총회에서 구호품이 많이 나왔다. 그 구호품의 양도

상당히 많았고 종류도 다양했다. 주로 의복이나 건포도 같은

것이 많았다. 남선대회에도 상당한 양이 오곤 했다.

나는 각 교회로 구호물품들을 보내고, 두 분 대회직원인

박찬문 씨와 김응식 씨를 불러 “근방 동회(洞會)를 통해

불신자들에게도 대회에 할당된 구호품을 나누어주는

것이 어떠한가?”하고 의논을 하자 적극 환영하였다.

그래서 대회 바로 옆에 있는 대전시 효동동회와,

조금 떨어진 문화동동회를 통해 구호품을 분배하자

얼마나 감사해 하고 교회에 대해 호감을 갖는지 몰랐다.

우리는 구호품을 주면서 “미국에 있는 안식일교인들이

한국 안식일교인들이 어렵겠다고 해서 이것들을 보냈는데

우리만 쓸 것이 아니라 근방에 있는 당신들과도

나누고 싶어서 이렇게 드린다.”고 하자 물품이

부족한 때인지라 모든 주민이 감사해 하고

또 우리교회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고 지나게 되었다.

나는 지금도 교회는 그 지역사람들과 함께 나누면서

좋은 관계를 갖는데 앞장서야 한다고 믿고 있다.

 

 

새로 대회를 시작했으니 정리할 문제도 많았고 새로 생겨나는

문제도 많았지만 영남과 호남지역에서 팔렸던 예배당을

찾아야 교회가 집회를 시작할 터인데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몇 곳에서는 교회를 다시 찾았으나, 그 중에서

경상남도 진주는 힘에 겨웠다. 모든 교우들과 의논하고

기도드리며 예배당을 찾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했다.

해산당시에 진주교회를 사려고 돈을 조금 지불했던 사람이

그 지방 제일의 불량자이었는데 얼마나 위협을 해대고

못살게 구는지 재산환수를 포기하고 말았다. 나보다도

교우들이 매우 섭섭해 했다. 그러나 교우들과 사역자가

협심하여 기도드리면서 일치단결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포기한 예배당보다 훨씬 아름다운 2층집을 마련하여

교회로 삼고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그야말로 화가 굴러 복이 된 셈이다.


 

대전에 온지 2년이 되어 가는데 연합회로부터 뜻밖의

편지를 받았다. 어떤 사역자 한분이 천신만고 끝에

만주로부터 서울까지 왔는데 남선대회에서 채용하라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이분을 아는 사람은 남선대회장 정동심 목사뿐이라는

것이었다. 남선대회 예산이 비록 적지만 이 분을

채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분은 북 간도 용정에서

김규혁 목사 당시에 우리 교회의 일을 시작했었으나

지금 김규혁 목사는 은퇴를 하셨으니 나를 찾게 된 것이다.

나와 이분과의 인연은 1926년 북 간도 용정에서 전도사로

일할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분의 이름은 김완식 전도사로서

당시에 감리교인이셨다. 용정에서 그 어려웠던

장막 전도회를 끝내고 나서 이 분은 감리교 목사의 허락아래

묵시록 예언에 관하여 알고 싶다고 찾아와서 함께

예언을 공부하다가 극적으로 개종하신 분이시다.

 

 

그런데 20년 만에 대전에서 만나게 되니 그 기쁨을

말로 형용하기가 힘이 들었다. 김완식 전도사는 부인,

두 아들, 딸 하나를 이끌고 다섯 식구가 왔다.

남선대회가 이 분을 전남 송정리 교회로 파견하니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몰랐다. 그런데 송정리 교회로 부임한지

1년쯤 된 후 김완식 전도사의 부인께서 남자 쌍둥이를

출산하다가 불행히도 난산(難産)이 되어 산모와 두 아이가

모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세상에 막막한 일이 있다한들

이렇게 막막한 일이 있을까? 천신만고 끝에 그 먼 길을 오셔서

이제 숨 좀 돌리고 살려고 하시는데.......

우리는 손을 잡고 함께 통곡을 했다.

 

 

백주(白晝)에 환부(鰥夫홀아비)가 되신 김 전도사와

의논한 결과 전도부에서 일한다는 것은 힘들겠다고 생각되어

전남 진도에 있는 학교로 부임하시게 했다. 그러나 혼자

세 아이들을 데리고 교회 일에 종사한다는 것이 너무

힘에 벅찬지라 새로운 배필을 구하시겠다고 해서

모두 하나님께 간구하며 배필을 찾았다.

구하는 이에게 주시는 하나님께서는 오래지 않아서

좋은 아내를 허락하시었고 김 전도사는 교회에서

열심히 일하시다가 목사가 되시었다.

 

 

얼마 후, 부산에 있는 어떤 국민학교 선생이

우리진리를 깨닫고 개종하자 안식일문제로 그가 일하던

학교에서 퇴직을 당하고 남편의 실직으로 그 가정이

문제가 생겨서 거의 별거상태나 다름이 없다고 했다.

모른 척 할 수가 없었다. 이 분의 가정과 취직문제를 놓고

우리 대회 직원들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나는 김응식 씨와 오래 토의한 끝에 대전에 삼육국민학교를

개설하고 이 분을 부르기로 했다. 예산도 없고, 교실도

학생도 없는 형편이었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우둔하기 그지없는 일을 하나님께 맡기기로 하고 시작했다.

이분의 취직이 말로만 해결된 채로 퇴직 당한 분을 오시라 해서

만나보니 얌전하고 인상 좋은, 그야말로 선비 같았다.

이 분이 바로 이상록 선생이다.

 


교실은 우선 예배당으로 쓰는 방을 쓰기로 하고

교인의 자녀들을 억지로 모집을 하니 한 열명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이상록 선생은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우리가

오히려 감사할 지경이었다. 시간을 오래 끌면

가정문제가 커질 것 같아 부인을 모셔오라고 권하니

이 선생은 용감하게 부인을 대전으로 오게 했다.

다행히 부인도 아무 불평 없이 남편을

열심히 돕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했다. 부인도

이 선생 못지않게 인상이 매우 온화하신 분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런 어려운

문제도 순조롭게 해결을 하여 주셨다.

이상록 선생의 개종하신 일도 하나님의 인도가

함께 하셨음을 알게 되었다. 이상록 선생이

부산 어떤 학교에 교사로 있을 때, 하루는

어떤 부인이 자기 딸의 편입문제를 상의하러왔다.

의논 끝에 그 딸의 입학을 허가하자 그 부인은

자기는 성경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인데 성경상

주일이 토요일이라는 설명을 하며 토요일에는

자기 딸을 학교에 보낼 수가 없다고 했다.

그 이유는 나중에 가정 방문을 하여 더 듣기로 하고

그 부인을 보냈다. 이 여학생의 어머니는 강원도

횡성안식일교회 교인으로 감리교에서 개종하여

신실히 교인생활을 하던 박훈옥 이라는 과댁이었다.

박훈옥 여사는 이상록 선생이 가정 방문을 하자

안식일에 대하여 성경을 가지고 철두철미하게

설명을 하자 이상록 선생은 깊은 감명을 받고 개종을 했다.

그래서 성경은 “묻는 이가 있으면 항상 대답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하신 것이다.

 

 

후에는 조광숙 이라는 처녀를 선생으로 모셔오고 또 얼마

후에는 김기방 씨가 와서 중학교도 시작하여 대회구내 안에

교육기관이 조금씩 자리 잡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회장 사택 한 방을 예배당으로 사용하여 예배를

드린 지가 10년 되었는데도 정식 예배당 없이 지내다가

학교까지 시작하니 그 불편함은 말할 수가 없었다.

이제는 교인수도 늘어나서 더 이상 그대로 지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 울타리 내에 있는 몇 채의 집중 제일 큰집 하나를

증수(增修)해서 대회 본부예배당을 만들자고 교인들과

의논을 하니 모두 좋다하며 온 교우들이 직접 나와서

당장 손수 고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해방이

되었더라도 법은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도(道)경찰국을 거쳐 우리지역 관할파출소에 가서

우리가 소유한 집들 중 하나를 중수해서 예배당으로

사용하려고 하는데 어떤 허가가 필요하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관할파출소 소장은 “예배당으로 쓰려고 증수하는데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가서 증수를

하세요!”라며 친절하게 구두(口頭)로 허락을 해 주었다.

일정 시대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겠지만 해방이 좋기는 좋았다.

 

 

그런데 일을 시켜놓고 지방 출장을 갔다 돌아오니

교회증수가 중지되어 있었다. 박찬문 씨와 김응식 씨의 말이

순경이 나와서 허가 없이 일을 한다고 중지 시켰다는 것이었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이 순경은 평안남도 강서사람으로,

같은 강서사람인 김기방 선생을 찾아 왔으나 출타중이라

못 만나고 그냥 돌아가면서 우리가 교회 증수하는 일을

보고 간 모양이다. 그 후 이 순경이 다시 김기방 선생을

찾아 왔으나 이미 전라남도 광주로 전근이 되어

못 만나게 되었는데 고향사람을 두 번이나 만나러 왔다가

못 만나게 되자 자존심이 상했는지, 허가 없이 건물을

증수한다고 트집을 잡아 중지시키고 돌아갔다는 것이었다.

나는 대회 회계인 김응식 씨와 함께 구호품 중에 남아있던

마른 무화과상자를 가지고 그 순경의 집을 찾아가니 그 순경은 없고

그 부인이 올망졸망한 아이 두 셋을 데리고 사는 것이 힘들어

보였다. 마른무화과를 주니 얼마나 반가와 하는지 몰랐다.

 

 

후에 다시 찾아가 그 순경에게 “나도 강서 사람이라.”고 말하고

“지금 교회를 개수하는 것은 이미 구두로 허가를 맡았다.”고

설명을 해도 “정식허가장이 없이는 아무 일도 못한다.”는 것 이었다.

아마 일제시대에 순경 노릇을 해서 그 습관이 남아 있는 듯 했다.

그래서 “이미 구두로 허가가 난 것이니 당신만 양해를 해 주시면

되는 것인데 좀 사정을 보아 달라.”고 했더니 그나마 작은

물품이라도 주어서 그랬는지 “이번만 양해를 해 준다.”해서

그런대로 증축하고 수리하여 대회 예배당을 마련했다.

구두로 허가를 맡고 무엇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깨닫게 되었다.

 

 

제 8 부. 한국동란(韓國動亂) 속에서 인도하신 하나님


 

1. 세계 대총회 참석과 육이오 동란-제 1 부

 

 

1950년이 되었다.

이 해에 47회 대총회를 하게 되는데 한국대표로

내가 택함을 받았다. 감사하고 기쁘기는 한데

언어도 문제가 되지만 미국까지 가서 회의에 참석하는데

양복 한 벌, 구두 한 켤레도 제대로 없이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

무엇을 준비한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그렇다고 이런 이야기는 누구에게 할 수도 없어서

나는 언어가 문제인 것처럼 “영어 한마디 모르는 내가

대표로 간다면 벙어리가 가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대표라는 말뿐이지 교회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하고

거절의 뜻을 표했다. 그랬더니 “그 말씀도 옳은 말씀”이라 하면서

“영어를 모르는 정 목사 혼자 보내기는 뭣하니

영어 잘하는 이를 통역으로 보내기로 한다.”고 하며

박창욱 씨를 함께 가도록 결정을 해 버렸다.

 

 

처음부터 너무 가난해서 가기가 곤란하다고 말할 것을

이렇게 결정이 되고 보니 참 난감했다. 해방이 되자

월급은 안 올라가도 물가는 얼마나 올랐는지 양복 한 벌도

몇 백 원이 드니 양복은 꿈도 꿀 수가 없었다.

내 아내는 “한복이라도 깨끗하게 입어야 한다.”면서

고의적삼에 모시두루마기를 만든다하며 아이들을 데리고

어렵게 준비했다. 그런데 하루는 소포가 배달되었다.

한국인 친구도 아니고 위생병원원장인 닥터 루가

양복감 한 벌과 편지를 보내왔다. “정 목사가 미국

대총회에 간다니 기쁩니다. 준비하시는 일이 힘들 것이라

생각되어 별로 좋은 것은 아니지만 양복 한 벌 만들 기지를

보내니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목사님뿐만 아니라

함께 가시는 박창욱 형제에게도 드렸습니다.”라고 했다.

 

 

당시에는 사역자들이 어떤 선물을 주고받는 것은

하나의 비리(非理)로 인정을 해서 나는 누구에게

선물을 받아 보거나 주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그 사정을 아는 닥터 루는 받는 사람의 부담을 적게 하기

위해서 미국을 방문 하는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선물을

한 것이다. 나는 언어보다도 준비할 처지가 못 되어

포기할까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너무 감사했다.

그 선물 자체도 감사하지만 그 분을 통해 전해지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만감이 교차하며 눈물이 났다.

나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그 분의 선물로 나는

회색양복을 한 벌을 만들었다. 얼마나 감사한지!

우리는 태극기와 장고를 준비하고 대총회장에게 드릴

선물은 연합회에서 준비를 해 주었다. 나는 36년 전에

헤어진 순안 의명학교 선배가 미국에 계신다기에

은수저 한 벌을 선물로 준비했다. 사람마음은 이상하여

막상 준비가 되니 떠날 날자만 손꼽아 기다렸다.

 

 

이번 47회 세계 총회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상항)에서

개최되기에 한국에서 일본까지는 비행기 편으로,

일본에서 상항까지는 배편으로 가기로 되어 있었다.

우리 일행은 박창욱 씨와 방례두 씨가 있었는데

방례두 씨는 자비(自費)로 가신다고 했다. 우리 누구도

비행기는 물론 이렇게 큰 배를 타본 경험은 없었고,

나만 간도 땅이나마 외국이라고 나가 보았고 모두

외국여행은 처음 이었다. 내 안사람도 남편이 미국 간다고

6월 22일인가 대전에서 서울까지 아이들을 데리고 올라왔다.

1950년 6월 22일,

김포에서 비행기를 타고 동경을 향하여 떠났다.

그 누구도 전쟁이 곧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우리가 떠나던 날, 미국 고위층이 같은 비행기를 탄다 하여

군악대와 의장대의 사열이 요란했다.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 오르니 흰 솜 방석 같은 구름 위에 뜬 것이

어찌나 감격스러웠던지 평생 잊을 수가 없다.

부산을 지나 일본 땅에 들어서면서 내려다보니

곳곳마다 논밭이 잘 정돈이 되어 있고 또 나무들이 많아

아주 아름답고 부러웠다. “일본이 이렇게 다 만들어 놓고 나니

동양에서 패권을 잡고 싶어서 우리를 36년 동안이나

속국으로 만들었던 것이구나!”라는 감상이 생겼다.

한 시간 20여분 만에 일본에 내려서 하루를 묵었다.

일본 거리는 너무도 깨끗하고 정돈이 잘 되어 있었다.

또 사람들이 그리 친절할 수가 없었다. 하다못해

푸른 산과 밭과 논도 모두 규모가 있어 보였다.

일본이 조선을 속국으로 삼고 있을 때에 왜 우리 민족을

일본시찰이라는 명목으로 자주 데리고 갔는지를 알 수가 있을 것 같았다.

 

 

6월 23일,

일본 요꼬하마에서 “골든”이라는 큰 배를 타고

미국을 향해 떠났다. 배에 올랐더니 김상칠 씨의

작은아들 되는 김영욱 형제가 있었다. 그런데 나는

출장을 다닐 때 작은 배를 타면 아무리 광풍이 불어도

괜찮았는데, 고약하게도 큰 배를 타면 조금만 흔들려도

뱃멀미가 나서 고생을 하곤 했다. 이 배도 미국서

군용으로 쓰던 것을 변조한 것인데 계속 멀미가 났다.

너무 머리가 아파 뱃전에 나와 주로 서 있었다.

앞으로 2주일이 걸려야 상항에 도착을 한다니 염려가 되었다.

거대한 미국 여객선으로 손님도 1, 2, 3등으로 구분이

되어있었는데 1등과 2등 손님은 식사 때에 이미

준비된 식탁에 앉아서 편하게 식사를 하면 되는데

이런 여객선을 처음 타보는 우리는 그것을 몰라

한 이틀 동안은 3등 식당에 가서 긴 줄에 서서

음식을 받아먹곤 했다. 한 이틀 후에 배에 선원이

우리를 알아보고 안내해 주어 그때부터 편하게

식사를 했다. 이일로 우리는 많이 웃었다.

 

 

나는 멀미가 심해 방에 누워 있거나 종종 갑판에 나가

서 있곤 했는데, 하루는 어떤 사람이 내 어깨를 탁 치기에

그간 영어회화 책을 보고 겨우 몇 자 익힌 영어를 가지고

“WHY?”하고 물으니 “너 애드밴티스트(재림교인)냐?”고

묻는 것 같았다. 그래서 잘 되지도 않는 영어로

“나는 재림교인이다, 당신은 누구냐?”라고 물으니

“자기도 재림교인이라며 필리핀서 온다고 한다.

그러면서 나보고 “대총회에 가는가?”하고 묻기에

그렇다고 대답하며 내가 재림 교인인 줄을

어떻게 알았는가?”하고 물어보니 자기가 몇 번 나와서 보니

당신이 담배도 피지 않고 가만히 서서 묵상기도 하는 것을 보고

재림교인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말이 잘 통하지 않아

여러 가지 몸짓을 해가며 이야기를 했지만 뜻은 다 통한 듯 하다.

 

 

그 이튿날도 또 어떤 사람이 어깨를 툭 치기에 또 “WHY"하고

질문을 하니 이 사람도 “자기는 재림교인으로 대총회에 가고

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아시아지역에서 대총회에 가는 사람들은

일본에 모여서 함께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은 중국 어느 대회의 대회장이었다. 내가 중국말을

몇 마디 할 수가 있어서 이 사람과 가끔 대화를 나누었다.

“후일에 하늘에 가면 만방에서 온 사람들이 이렇게

만나게 될 것이며 그 기쁨이 어떠할까?”하는 생각이 났다.

감사한 것은 우리가 비록 말이 안통해도 행동을 보고

안식일 교인인 것을 알아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손짓과 몸짓을 해 가며 이야기를 해도 이해할 수가 있고

그런대로 서로 기쁘게 대화할 수 있음을 감사 드렸다.

한편 깨끗한 생활과 행동을 통해 재림교인 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앞으로도 더욱 처신을 잘 해야 되겠다는 각오도 새로이 했다.

그런데 하루는 아침에 어떤 선원이 “너 어디서 왔냐고?”고

묻기에 “한국에서 왔다”고 했더니 “너희 나라에 무슨 트러블이

생긴 것 같다”고 한다. “그것이 무슨 소리냐?”고 물으니

“이 배에서 뉴스를 들었는데 문제가 있는 것 같다”라고

말을 해 주었다. 그래서 “우리도 뉴스를 들을 수가 없는가?” 물으니

”너희는 이등선실 손님이니까 신청을 하면 뉴스를 방으로

넣어 줄 것이다.”했다. 내 생각에는 무전이나 레디오로

뉴스를 듣고 정리하여 방에 넣어주는 모양이었다.

그 신문을 부탁한즉 당장 가져다주는데 정말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남침을 했는데 북한이 벌써 서울을

점령했다는 뉴스였다. 막상 나에게 일이 닥치고 보니

대총회를 간다는 것은 안중에 없고 대전으로 내려간다고 한

내 아내는 잘 내려갔을까? 특히 서울에 있는 박창욱 씨의 가족은

어찌되었을까 하는 근심 걱정이 가득했다.

난리라곤 처음 당하는 것이니 아무 정신이 없이

무엇이 계속 나의 머리를 짓누르는 듯 하였다.

그 배에는 서로 인사를 나눈 필리핀 대표자,

중국 대표자등 다른 나라 목사 서너 명이 있었는데

박창욱 씨와 나, 방례두 씨, 일본에서 배에 오른

김상칠 씨의 아들 김영욱 씨와 함께 있을 때에

우리에게 “한국에서 이런 어려운 전쟁이 났으니

우리가 함께 예배를 드리자!”라고 제안을 했다.

그래서 필리핀 형제의 방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나에게 말씀을 하라고 해서 시편에 있는 말씀,

즉 “여호와는 우리의 산성이 되고 반석이 된다.”는 말씀을

내용으로 예배를 드렸고 박창욱 씨가 통역을 하여

서로 권면하며 용기를 주었다. 우리는 걱정과 근심 속에서도

예배드리면서 서로 위로했고 머리가 아프면 갑판에 서서

기도드리면서 여행을 했다. 뱃멀미도 그랬지만

한국이 전쟁에 휩싸여 있다하니 며칠 되지도 않은

이 배 여행이 길고 지루하기만 했다.

 

 

며칠 후에 동편으로 산봉우리가 보이는데 사람들이

“와! 하와이다!”라고 해서 하와이 가까이 온 것을 알았다.

지루한 여행이 되어서도 그랬지만 저 곳이

반세기 전에 조선인들이 사탕수수 밭에서

일하던 곳이구나 하니까 감개무량 하였다.

하와이에는 최형국 씨의 삼촌 되시는 분이 살고 있지만

연락을 할 길이 없었다. 그런데 알지도 못하는 한 사람이

우리를 얼마나 반가이 맞아 주는지 너무 감사하고

어리둥절했다. 알고 보니 김상칠 씨의 아들 김 영욱 씨를

마중 나온 추 선생이라는 분인데 김영욱 씨와 함께 있는

우리를 이리도 반가이 맞아 준 것이다. 불원(不遠)하여

세계만방에서 구원 얻는 이들을 상봉할 때에

이러한 기쁨일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 사람은 우리를 데리고 해변으로 가서

좋은 경치에 우리를 파묻히게 하여 서울서 날아온

근심도 잊고 바다를 내려다보며 오래간만에 즐겼다.

그 사람은 우리가 생전 처음 맛보는 싱싱한 파인애플을

하나씩 사 주었는데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지금 생각하여도

군침이 돈다. 우리가 너무도 한국소식을 알고 싶어 하자

이분은 우리를 하와이 주재 한국영사관으로 데려다 주었다.

그 당시에 하와이에는 경상남도 통영사람으로 후에

외무부장관까지 지낸 김용식 이라는 사람이 총영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이분은 “걱정 마십시오! 이미 미국군대가

한국으로 나가고 있으니 선생님들이 미국 본토에 도착할 때쯤에는

그 놈들은 다 쫓겨 가 있을 것입니다”하고 우리를 안심 시켰다.

우리는 좀 마음이 가벼워져서 영사관을 나왔다.

 

 

우리는 김영욱 씨의 사돈되는 추 선생에게 “한국에 있는

최건주 씨의 동생이 하와이에서 우리교회를 다니고 있다는데

아는가?” 했더니 “하와이는 바닥이 작아 다 잘 알고 있다.”고 하며

그 집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었다. 최건주 씨는 우리 한국 교회

초창기에 교회일과 시조사일로 수고를 많이 하신 분이다.

최건주 씨의 동생은 우리를 차에 태우고 하와이 시내와

자기가 경영하는 빠찡고 장을 구경시켜 주고 자기 집에서

점심과 저녁을 대접했다. 저녁식사 후에 항구로 나와

배를 탔는데 전송하는 사람들이 떠나는 사람들의 목에

하와이 꽃으로 만든 아름다운 화환을 걸어 주었는데

정말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또 떠나는 사람이 배 위에서

수많은 테이프 한쪽 끝을 잡고 땅에 있는 사람에게 던지면

부두에 있는 사람은 테이프의 다른 끝을 잡고 있으면서 흔들면

오색이 영롱한 테이프들이 휘날리는데 그 광경이 장관이었다.

우리도 최건주 씨 동생이 테이프를 사서 그렇게 했는데

그 아름답던 광경을 잊을 수가 없다. 또 하와이는 더운 지방이라

수십 명의 아이들이 여객선 옆으로 헤엄을 치다가 동전(銅錢),

백전(白錢), 은전(銀錢)들을 던지면 그것을 찾으려고

수십 명의 아이들이 일제히 물속으로 들어갔다가는

동전들을 찾아서 올라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참으로 장관이었다. 그런데 배가 떠난 후에 알게 된 것은

우리 일행은 시간을 맞추어 배에 잘 탔는데 다른 목사 몇 명이

하와이와 일본의 시간이 다른 것을 몰라 배를 놓치고 말았다.

후에 알고 보니 이 분들은 돈을 들여 비행기를 타고 올 수밖에 없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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