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사람의 안식일 교회 목사였던 사람이야기

by 로산 posted Feb 20, 2012 Likes 0 Replies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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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이단 논쟁에 대한 소고 (교회와 신앙에서)

http://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502

곽정환


곽정환 씨는 안식교에서 모태신앙인으로 태어났다. 중학교부터 대학원, 필리핀 유학 등 모든 학사 과정을 ‘삼육’에서 밟았다. 1988년 안식교 전도사로서 교역자 생활을 시작했고 목사 안수도 안식교에서 받았다. 22년간 목회를 했으나 안식교의 심각한 교리적 문제를 깨닫고 2010년 9월경 안식교를 탈퇴했다. 현재 필자는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재학 중이다. 이 글은 필자가 2011년 6월 22일자 670호의 <재림신문>(안식교측 신문)과 2011년 4월 발간한 <백년의 선한 이웃>(김상래 저)이란 안식교측 변증서를 읽고 난 후 이단문제와 관련한 단상을 기록한 것이다.<편집자주>


며칠 전의 뉴스다. 서울대 병원에서 30대 후반의 한 여성이 유방암으로 오른쪽 가슴 1/4을 잘라냈다. 그녀가 유방암 진단을 받았을 때의 그 충격, 그러나 잘라 내면 살수 있다기에 의사의 진단을 믿고 여자의 자존심이라 할 수 있는 가슴을 잘라내는 수술에 자필 서명하고 수술대에 누웠다. 그 심정이 어떠했을까? 수술 끝내고 보니 암이 아니라는 것이다. 암 종양 제거 수술을 받은 것이었지만 잘라낸 유방에는 암세포가 없었다.


서울대 병원은 세브란스병원이 내린 판정을 그대로 믿고 재검 없이 수술을 한 것이고 세브란스 병원에서는 다른 환자의 차트와 바뀌는 바람에 암 판정이 김 씨에게 내려졌던 것이다. 이에 두 병원과 의사를 상대로 낸 억이 넘는 손해배상 소송으로 법정 공방까지 이뤄졌다. 금전 보상이 김씨의 마음에 입힌 상처와 충격에 얼마나 위로가 될까마는 보도를 접하는 것만으로도 아리고 아찔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단 오판은 암병 오진에 비할 바가 아니다. 중세의 신정(神政) 체제 시 이단 정죄는 구원에서 제외된다는 정신적 고통을 주었을 뿐 아니라 재산 몰수는 물론 공개 화형으로까지 다스려진 끔찍한 낙인이었다. 과거와는 양상이 많이 달라졌지만 오늘날도 “이단으로 정죄하는 일은 영적으로 사형을 선고하는 행위와 같은 것으로” 여겨지는 점은 동일하다고 본다. 그리하여 이는 이단 규정의 역사적 오남용을 거울삼아 심사숙고해야 하면서 동시에 진리 수호 차원에서 결코 방치할 수 없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영혼을 파괴하는 이단 사상들은 위험 수위를 넘고 있기 때문이다.


간첩 아닌 사람을 간첩으로 오판하면 당사자와 그 집안 전체의 명예를 죽이는 셈이고 반대로 틀림없는 간첩을 오판하여 풀어주면 이것은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다. 이단이 아닌 사람을 이단이라고 하면 그 죄는 얼마나 크랴? 또한 분명한 이단 사상을 이단이 아니라고 하면 그 피해는 얼마나 크랴?


오늘 정작하고픈 얘기는 이런 서설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재림교회에 관해서다. 한국의 재림교회가 자그마치 100여 년 넘게 이단 시비에 휘말려 있다. 이 문제가 얼마나 더 가고 또 언젠가 끝이 날는지 모를 일이다. 재림교회, 이 교회는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나고 자란 운명적 요람이다. 얼마나 오래 동안 인가? 전혀 유쾌하지 않은 이런 시비를 보고 들을 때마다 또한 선교 장벽을 느낄 때마다 그 고통은 애절했고 가끔의 논쟁에서 통쾌한 적도 있었지만 상쾌하진 않았다. 그 단어가 주는 깜깜한 전율과 아픔을 알기에 이단이란 단어를 친구들에게 대 놓고 쓰긴 그렇지만 세기가 넘도록 끌어온 재림교회 이단시비에 대한 명쾌한 답은 도대체 없는 것인지 정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최소한 나에게는 그렇다.


계속되는 공방전


지난 6월 22일 재림신문(670호)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Seventh Day Adventists, 이하 재림교회) 대전 동부교회에서 발생한 한 공격 사건을 계기로 <재림교회와 이단논쟁 1-3>이란 특집을 마련하여 재림교회 이단 논쟁에 대한 재림교회의 자평적 생각을 보도했다. 재림교회에서 태어나서 14년 이상 삼육 교육을 받고 목회자로 20년 이상을 섬기고, 인생의 전반전이라 할 시간을 재림교회에서 보내다가 교리적인 문제로 고뇌하다가 재림 교단이라는 유형적 울타리를 벗어나게 된 필자로서 이러한 내용에 대한 관심은 남다르다.


재림교회가 이단 시비에 휘말려 있는 형국은 하루 이틀이 아니고 크고 작은 격돌이 있을 때마다 공격과 반증이 평행을 달려왔다. 재림교회는 “성경의 진수를 ‘기본적 신조들에 관한 성명서(Statement of Fundamental Beliefs)’로 발전시켰”는데 “이 신조들 중 52%는 이미 보수적인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에서 채택한 신조들과 동일한 것들”이고 타 교단들과 함께 선택적으로 신봉하는 교리군(群)이 약 39%라서 “보수적 교회가 일치하여 신봉하는 52% 신조와 어떤 교회들이 신봉하는 39% 교리를 합하면, 재림교회는 91%의 신조들이 보수적 교회들과 같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다른 교회와는 달리 재림교회에서만 신봉하는 신조들은 9%쯤 된다”고 재림마을 사이트는 자평(自評)적으로 밝히고 있다. 이에 대해서 보수적인 개신교회들이 얼마나 동의할지는 차치하고, 아무튼 이 자평적 공유 교리 91%는 정말 압도적인 공유일 것이다.

양적으로만 본다면 이로 인해 일반 개신교와 화목한 공감대를 이루고도 남을 법 한데 9%에 해당하는 재림교회의 특수교리라는 것 때문에 격돌하고 그 때마다 치열한 설전에서는 불꽃이 튀는 것이다. 목숨을 걸고 하는 일생일대의 신념(믿음)이 조금이라도 허술하거나 미신적인 허상위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은 양보하거나 용납할 수 없다고 양자가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운명 걸린 진리 논쟁이라고 여기는데다 집단이기주의와 자존심까지 포개지면 양보와 물러섬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것이 교리 논쟁이다. 개신교와 재림교간의 논쟁이 있을 때마다 동일한 공격 패턴에 동일한 방어 패턴이 돌고 도는 변증을 보면서 정말 해결은 없는 것인가? 많이 생각해 보았다. 이단논쟁을 끝내 버릴 돌파구가 있을 것 같은데 대명천지 밝은 세상이 왔건만 오프라인 모임에서 역량과 책임을 진 자들이 머리를 맞댄 진지한 논의조차 한번 없는 것이 아쉽다.


생각하는 재림 교인들에게


재림교회의 엄격한 골수 가정에서 태어나 47년의 삶의 많은 시간을 삼육정신에 물들어 살며 재림교회에서 염색되어 보낸 필자다. 변화하는 세월의 격랑 속에 재림교회는 점점 그러나 확실하게 달라졌고 달라지고 있고 앞으로는 더 달라질 것으로 본다. 재림신앙은 가파르게 퇴색되어 가고 정체성은 자꾸 허물어져 이제는 무늬만 남아가고 있지 않는가 하는 것이 솔직한 생각이다. 그러나 교단은 자존심 때문에 재림교회 존재의 근거가 되는 교리들을 포기할 수도 없고 정체성 회복을 외치며 정착시키려고 사투를 벌이지만 흐르는 강물을 손바닥으로 막으려는 듯 포스트모던 시대를 맞은 현대인들 특히 젊은이들에겐 좀처럼 먹히지 않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6-70대의 기성세대가 죽고 나면 아마 재림교회는 부동산 관리를 위한 명맥만 간신히 유지하는 교회로 전락할 위기에 처해있다고 본다. 비관적인 예측이라고 비난할지 모르나 현재 선교현황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또한 대다수 재림교인들의 의식의 내면을 분석해 보면 무늬만 그럴 뿐 재림교회의 정체성과는 상관없는 재림교인들이 태반이다. 딱딱한 껍데기만 재림교인일 뿐이다.


제칠일 안식일과 예수재림의 임박, 이 두 가지가 재림교회의 강력한 영적 에너지였는데 이 두 개념이 가졌던 파워를 찾아 볼 수 없다. 재림교인 중에 안식일을 안식일답게 지키는 이가 없고 재림의 임박 개념은 상투적으로 외칠 뿐 설렘과 파워가 상실된 지 오래 되었다. 이미 전기 면도기에 익숙해진 사람이 왕년에 썼던 칼날 면도기만 안쓰럽게 자랑하는 형국과 비슷하다.


지금의 재림교회는 예전의 재림교회가 아니다. 변했고 달라졌다. 교리적으로 일관성을 잃었다. 고집스럽게 처음의 교리를 간직하고 있는 집단은 ‘생애의 빛’과 ‘개혁 운동’ 집단이라고 본다. 개신교회에서 재림교회로 넘어 간 사람들의 마음에는 깊은 회한이 있어 보인다. 안식일을 구원의 진리로 알고 목숨 걸고 왔는데 현재는 그저 일요일보다 토요일이 낫다는 것에 만족해야 할 뿐이고 자신의 선택을 되돌리기에는 살아오며 누적된 현실의 벽이 자신을 너무 세게 잡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재림교회 본부가 선교문제로 얼마나 고심하고 있는가를 안다. 사실상 선교가 전무하다. 일선교회가 죽어가고 있다. 자녀들을 신앙으로 붙드는 일도 파격적으로 실패하고 있다. 필자는 재림교회가 달라지기를 바란다. 재림교회는 복음이 잘못되었다. 예배드리는 날짜를 바꾸지 않더라도 바른 복음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윤리가 탁월한 것은 자랑할 만하지만 복음이 바르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서로의 생각이 백인백색이고 다층 다기하지만 문자주의를 넘어 하나님의 가장 큰 뜻인 영혼의 구원을 생각하는 재림 교인들에게 구원의 진리에 관하여 말하고 싶은 진실이 있다. 재림 교회만이 가진 신앙 칼라 중에서 좋은 것은 확실하게 인정하고 성경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것들은 선명하게 제시함으로서 신앙적으로 방황하는 자들과 잘못된 복음으로 철저히 세뇌되었지만 가끔은 정직한 고민으로 힘들어하는 재림 교인들에게 올바른 구원의 진리에 이르도록 생각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싶다.


재림교회의 변증서 두 권


한국 기독교계에서 재림교회에 대한 지리멸렬한 이단 논쟁에 더 이상 수동적인 입장에 서거나 좌시할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를 가지고 종지부를 찍고자 작심을 하고 펴낸 변증서, 아마도 한국 재림교회가 체계를 갖춰 발행한 최초 최고의 변증서라고 여겨지는데 그 책이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하리라>는 책이다(이하 어둠빛, 1991년 신계훈 저).


6월 22일자 670호의 재림 신문을 읽으면서 <어둠빛> 변증서 이후 최근에(2011년 4월) 재림교회가 맥을 같이 하는 또 다른 변증서를 펴냈다는 것을 구입해서 살펴보았다. 이 책 역시 한국 개신교계에 여전히 박혀 있는 ‘재림 교회에 대한 오해와 곡해’를 다시 한 번 풀어 보기 위한 야심찬 기획으로 인터넷 방송(7부 중 첫 회 2011년4월15일 방송) 대본을 첨삭해서 만든 책으로서 제목은 <백년의 선한 이웃>(부제: 재림교회(안식일교회)에 대한 오해와 곡해를 해명한다, 김상래 저)이었다. 집어 들고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공감되는 부분도 많았지만 착잡한 심정으로 읽혀지는 부분도 많았다.


<어둠빛>은 다소 공격적인 방식으로 끌어간 변증서인데 비해 <백년의 선한 이웃>은 고백적인 형식으로 담담하게 적어간 변증서이고 전자는 제목 자체가 날카로운 반면 후자는 선한 이웃이라는 부드러운 이미지를 담고 있다. 그러나 둘 다 재림교회의 9%에 해당하는 핵심교리를 전자는 거친 원석처럼 다루었고 후자는 맷돌에 갈아 보도하는 느낌이었지만 어느 모로 보나 재림교회는 이단이 아니고 틀림없는 정통 교회라는 것이 골자다.


재림교회의 동시 다발적인 홍보


이단 논쟁에 대한 생각을 보도한 670호 재림신문은 그 동안 개신교의 이단 공세에 대하여 참고 견디고 있거나 어쭙잖게 변호하다가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고 보도했다. 이제는 방어만 할 것이 아니라 불합리한 공격을 없애기 위해선 과감한 도전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적시했다. 그 공격이란 성경 해석을 바로 잡고 개신교에게 그들의 주장이 성경적으로 옳은지 우리 앞에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또한 “성경대로 따르지 않는 걸 이단이라 한다면 장로교가 진짜 이단이라며 그들이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대로 신앙생활 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도전도 병기하였다.


그래서 그랬는지 6월 30일과 7월 1일 양일에 걸쳐 주요 일간지 전면 광고 싸이즈에 <전 세계 206개국에 복음을 전하고 있는 정통 복음주의 기독교 –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를 바르게 아십니까?>라는 제목 하에 대대적인 홍보를 단행했다.


그리하여 필자는 670호 재림신문, 일간지 전면 광고란에 실린 홍보 내용, <백년의 선한 이웃>이라는 두 번째 변증서와 인터넷 방송을 보면서 많은 생각에 잠겼다. 몇 번을 망설였지만 생각들을 적어 보려고 했다. 재림교회의 7-8가지 특수 교리를 8장으로 구성한 <백년의 선한이웃>의 구체적인 교리 반증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총체적인 관점에서 몇 가지를 나눠 보고자 한다.


끊임없이 진실을 추구하는 마음으로


신계훈 목사의 변증서 <어둠 빛> 첫 페이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인상 깊었던 구절이었다.

“삶을 소중하게 느끼고 진리를 귀중하게 여기며 양심을 두렵게 알고 신앙을 심각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진실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 형제자매들에게 이 책을 드립니다.” 문학적인 섬세함을 가진 저자의 아름다운 문구다. “끊임없이 진실을 추구하는 마음으로” 생각 있는 재림교인들의 생각을 촉구하고 싶다.

사람은 실수할 수 있다. 그러나 비록 틀렸지만 정직하게 틀린 사람이라면 새로운 진실 앞에 부담 없이 수정할 수 있는 이유는 지금까지 많이 드러났지만 성경은 아직도 더 많은 진리가 계시되기를 기다리는 책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이단의 아픔


재림마을은 <백년의 선한 이웃>의 원본이 되는 방송 제작의 배경을 이렇게 적었다.

“한국의 재림교인들에게는 아픔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실제 모습과는 달리 너무 많이 곡해되고 오해받는 아픔입니다. 심지어 이상한 사람들로 백안시당하고 배척당하는 아픔입니다. 맑고 깨끗한 사회를 만드는 일에 동참하며 진실하고 친절한 이웃이 되고 싶어도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아픔인거죠. 우리는 재림교인으로서 우리 사회의 '선한 이웃'이 되고 싶은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려면 불필요한 오해를 해소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애처로운 소야곡 같은 제작진의 변이다. 네 번의 아픔과 간절하게 피력한 소망을 보면서 속으로부터 저려오는 묘연한 생각이 들었다. 필자는 어떤 방식으로든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져 이런 아픔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 개신교회와 적대구도에서 벗어나 이단이라는 고깔을 벗고 형제 교회가 되어 진리의 대열에 서서 무지막지하게 밀려오는 세속화와 종교 다원주의 및 자유주의의 늪지에서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아름답게 쓰임 받게 되기를 소원한다.


‘진한 불만을 가진 고객은 절대 불평하지 않는다. 다음에 오지 않을 뿐이다’ 백화점 사원 교육 내용 중에 나오는 말이다. 진정한 영혼의 필요를 채워주지 못하는 교회에 사람들은 오지 않는다. 가파른 세속화로 인하여 기독교 전도 자체가 힘들어지고 있다. 여기에 이단이라는 고깔은 재림교회의 보이지 않는 최대의 선교 장애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재림교회는 아픔을 치유하는 차원을 넘어 선교 역량을 극대화하고 이제는 생존 차원에서 이단문제는 극복되어야 한다. 김 교수가 말한 것처럼 이단이라는 정죄는 종교인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큰 욕이며 최대의 저주이며 능멸이다. ‘이단’이란 구원받을 수 없는 집단이란 말이다. 최소한 구원에 관심이 있고 영적인 자존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단시비 문제는 결코 유야무야 넘어갈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수님도 이단이었는데 남들이 이단이라면 어때? 우리만 아니면 되지···”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사람은 중요성을 전혀 모르거나 사태 파악을 한 사람이 아니다. 적자(嫡子)인 이삭이 어느날 갑자기 이스마엘 같은 서자(庶子)라고 판명되어 신분이 박탈되고 구원의 반열에서 탈락된다는 뜻인데 발끈하지 않는다면 어디 제 정신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재림교회가 이단이란 말은 ‘예수처럼 이단’이 아니라 ‘예수로부터 잘려 나간 이단’이라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대관절 무엇 때문에, 재림교회는 100년이 넘도록 이런 아픔을 벗지 못하고 있다는 말인가? 100년이란 무게를 가진 교단의 위상을 가지고 깊고 진지한 통찰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


변증서 <백년의 선한 이웃>과 670호 재림 신문 내용과 일간지 광고지를 보면서 우선 세 가지를 짚어보며 진실한 이해를 도모해 보고자 한다.


첫째 재림교회 이단논쟁을 ‘단순한 오해’라든가 ‘불필요한 이해’에서 비롯되었다는 시각이 진실인가?

맞을 일을 전혀 안 했고 잘못한 일이라곤 하나도 하지 않았는데 아무 까닭 없이 형들에게 100년이나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왕따 당하는 아이가 자기에게도 뭔가 조그마한 원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전혀 못하는 것 같다.


100년이 넘도록 끌어온 이단 논쟁에 대하여 단순한 오해와 곡해에서 비롯됐다는 것은 너무 감상적인 통찰이다. 마치 남북관계가 단순한 오해에서 비롯됐다는 말과 같다. 이것은 해명도 아니고 진실도 아니다. 결코 단순한 오해의 문제가 아니다. 몇 마디만 설명하면 해결 되는 것이 오해인데 정말 그렇다는 말인가? 말 그대로 ‘단순한 오해’라면 그것은 재림교회 지도자들의 무능이고 직무유기다.


그다지 크지도 않은 남한 땅에 100년이 넘도록 재림 교인들이 이단 문제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는데 지도자라고 하는 분들이 ‘단순한’ 이단 누명 하나를 풀어낼 능력이 없다는 면에서 무능이다. 얼마든지 벗을 수 있었는데도 100년 동안 방치했다면 대단한 직무 유기다. 따라서 재림교회 이단논쟁을 두고 단순한 오해에서 비롯된 문제라고 하는 것은 진실을 호도하는 무책임한 발언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는 절대로 단순한 오해가 아니다. 그리고 정직한 안식일 교인들 중에 단순한 오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100년을 끌만한 필연적 쟁점이 있었다. 사태를 정확히 보는 일에 성공했으면 좋겠다. 사실 오해란 대개 쌍방에 있게 마련인데 재림교회는 “불필요한 오해”의 원인이 개신교에만 있으며 재림교회 내부의 “실제 모습”에는 그럴만한 것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유아기적 발상이다. 100년 동안 오해를 받고 있으면서, ‘당사자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라는 말은 오해를 풀 의사가 없다는 뜻으로 책임 있는 자의 말이 결코 아니라고 본다.


“이상한 사람들로 백안시당하고 배척당하는 아픔”이 얼마나 큰지 필자도 알듯하다. 그렇게 아픔이 큰 만큼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문제의 본질을 꿰뚫으려는 혜안으로 사태의 진상을 파악하고 우회 말고 정면 돌파하려는 진지한 성찰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필자는 재림교회가 이단 문제로 고통스러워하는 것에 대하여 반대한다. 구원받지 못한 고통으로 안식이 제거된 율법주의 삶에서 재림성도들이 참 자유를 누리고 선교적 장래를 위하여 이단 시비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 재림교회는 여느 사교라는 집단과는 격이 다르다고 생각하며 성숙한 진리 논의를 통해서 이단이라는 멍에를 벗을 저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두 번 째 개신교와 재림교 중에서 “이단” 이라는 대포는 정말 누가 먼저 발포했나?

재림신문에서나 인터넷 방송에서 변증서 <백년의 선한 이웃>의 추천인들의 일관된 주장은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재림교회는 한국 사회에서 아주 건전하고 모범적인 단체이며 봉사하는 선한 이웃으로 100년 동안 존재해 왔다. 그런데 개신교인들의 그릇된 ‘편견과 왜곡’에 의하여 이단이란 낙인이 찍히고 ‘독선과 맹목’에 의한 왜곡으로 시달리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고 유감스럽기 그지없다고 했다. 따라서 한국에서의 재림교회 이단 판정은 더 이상 진리 차원이 아니라 기득권을 가진 다수가 소수에게 행사하는 핍박과 억압이며 중세기식의 마녀 사냥 같은 부당한 처사라는 것이다.


이러한 오명으로 답답해하고 부담스러워하는 재림교인들에게는 격려와 용기를 주고 일반 개신교를 향해서 오해는 해명하고 곡해는 바로 잡고 이해의 차이는 다시 한 번 똑 부러지게 설명하려는 취지로 <백년의 선한 이웃>을 발간했다고도 했다. 이런 주장들은 어찌 보면 평양 광장에 10만 군중을 모아 미국을 타도하는 일방적 규탄 같아 보인다. 상식적인 대화는 거부한 채 독백으로 외치는 홀로 아리랑이다. 냉철하게 보면 이런 주장 자체가 개신교회를 향한 공격이고 비판이다.

필자가 묻고 싶은 진실은 이것이다. 미국이나 한국에서 개신교회와 재림교회 둘을 놓고 볼 때 누가 먼저 상대를 향하여 이단이라는 대포를 날려 정죄하고 공격했는가를 묻고 싶다. 그것은 분명히 재림교회다. 재림교회는 이단으로 정죄 받을 때 당사자에게 물어보지 않고 ‘개신교회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강하게 항변했다. 그렇다면 재림교회가 개신교회를 향하여 바벨론이라고 선포할 때 상의하고 선포했단 말인가?


이 땅에 완벽한 교회는 없다. 얼마든지 추하고 부끄럽고 썩고 타락하고 회개할 부분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한 공동체라면 죄를 지적하되 함께 아파하고 욕하되 함께 자정 노력을 기울이면서 최소한의 기본 틀은 벗어나지 말아야 하는데 예언을 해석하면서 포구를 개신교에게 돌려 이단이라는 미사일을 먼저 발포한 집단은 분명히 재림교회다.


‘어떤 집단을 이단으로 정죄할 때 신중해야 한다’는 재림교회의 지금의 주문은 170여년 전 개신교회를 향해 바벨론이라고 선포할 때 동일하게 적용 했어야 하지 않을까? 재림교회는 개신교의 가르침에는 진노의 독주가 섞여 있으니 바벨론에서 나오라고 설교했다. 여기서 진노의 포도주 가르침이란 반성경적이고 이단적 독소 가르침이란 말이다. 지금도 총기를 난사하듯 그런 기별을 여전히 전한다고 하면 어떻게 오해가 풀리겠는가?


최초의 변증서의 책 제목이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하리라>이다. 이미 제목부터 재림교회가 개신교회를 어둠 즉 이단으로 공격 정죄한 셈이다. 이 말은 개신교회는 구원이 없다는 말이다. 어둠에 무슨 구원이 있겠는가? 그래서 따로 나와서 새롭게 세운 진리 교회가 재림교회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은 재림교회에만 구원이 있다는 말이나 진배없다. 이것은 삼척동자라도 척 들으면 그런 얘기다.


개신교를 향해서 이단이라는 대포를 먼저 날린 쪽은 분명히 재림교회 측이다. 개신교를 이단으로 사정없이 정죄해 놓고서 이제 와서 개신교회가 재림교회를 이단으로 정죄하니까 재림교회는 안타깝고 유감스럽기 그지없다는 것은 아주 맹랑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재림교회는 분명히 개신교를 이단이라고 먼저 규정한 셈이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우리(재림교회)는 너희(개신교회)를 이단이라 말해도 너희는 가만 있어야 하고 너희들이 우리에게 이단이라 하면 그것은 다수가 행하는 왕따나 횡포다’라는 얘기라면 절대로 균형 있는 논리도 정직한 논리도 아니다.


변증서 <백년의 선한 이웃>의 저자 김 교수가 정말 이걸 모른단 말인가? 교단마다 자신들의 정체성 교리들을 강조하고 부각시키는 것은 문제될 것이 없다. 그것들은 기독교의 다양한 풍성함을 드러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 것을 강조하면서 남의 것을 치명적으로 공격하는 것은 다양성과 다름의 울타리를 벗어난 것이다. 재림교회가 개신교의 가르침에 대하여 ‘다르다’라고 말하지 않고 ‘틀렸다’라고, 심지어 ‘사단의 속임수’라고 노골적으로 말한다면 이것은 벌집을 쑤시는 것과 같고 태풍을 자초하는 일이다. 이러한 발포 자세는 동료 그리스도인이라면 할 일이 아니라고 본다.


단순히 토요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 자체나 혹은 그 날에 예배드리는 것이 더 성경적이다라고 말하는 것, 이것이 이단 문제의 핵심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 날을 지키는 것만이 ‘구원의 표’라든가 일요일에 예배 드리는 것은 ‘짐승의 표’라고 하는 것은 묵과할 수 없는 공격인 것이다. 구원의 근거는 오직 은혜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일요일에 예배 드리는 것은 우상숭배와 같으며 창조주가 아닌 다른 신에게 경배하는 것임으로 하나님이 결코 받지 않으신다고 하는 주장, 이것은 축구로 말하면 완전 퇴장 깜이다.

재림교회가 이단 시비에서 확실하게 벗어나려면 개신교를 향해 이단이라고 아니 사단이라고까지 먼저 비판한 점들에 대해 회개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아무리 덩치가 커도 바늘에 찔리면 아픈 법이며 급소를 찌르면 치명적인 것이다.


셋째 재림교회는 정통이라는 주장을 많이 하는데, 이 말이 재림 교회만 정통이라는 말인가? 재림 교회도 정통이라는 말인가부터 밝혀야 한다.

일간지 신문 광고에는 재림 교회를 ‘전 세계 206개국에 복음을 전하고 있는 정통 복음주의 기독교’라고 천명했다. 어떤 회사든지 제품을 개발하고 선전할 때면 여타 유사제품과 특별한 차별성을 부각시키는 법이지 유사점을 말하면서 장사하는 물건은 없다. 즉 우리 제품은 ‘이렇게 다르고 ~ 저렇게 다르고~ 그래서 좋습니다.’ 그러지 ‘옆집에서 개발한 이전 물건과 너무나도 같습니다’ 라는 광고는 없다. 개신교회는 재림교회 보고 ‘너희는 우리와 다른 집단이고 틀린 집단이야, 그러니 저리 가라~’라고 하는데 재림교회는 ‘아니야, 다른 긴 뭐가 달라 우리는 너희와 같은 한통이야 ’라고 말하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사람이라곤 둘 밖에 없는데 한사람이 자기가 잘났다고 자꾸 떠들면 옆사람은 자동으로 못난 사람이 된다. 재림교회가 정통이라고 자꾸 말하면 재림교회와는 분명히 양립이 어려운 교리를 가지고 있는 개신교회는 정통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재림교회가 정통이라고 외치는 소리는 있는데 이 말이 재림교회만 정통이라는 것인가 개신교회도 정통이라는 것인가? 이것이 선명하게 밝혀져야 한다. 밝히기 어려울 이유가 전혀 없는 사안이다. 그러나 신분에 관한 중요한 사안이다. 문턱에 걸쳐 앉은 자세 말고 소속을 분명히 하자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것은 재림교회 안의 사람들과 밖의 사람들(개신교회)들 모두를 속이는 것이다. 곡해를 해명하기 위하여 반드시 점검되어야 하는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재림 신문에서도 최근의 변증서 <백년의 선한 이웃> 그 어디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아서 묻는 것이다. 재림교회만 정통인가? 개신교회도 함께 정통인가?


재림 교회만 정통이라면 개신교는 정통이 아니라는 말인데 재림의 어떤 진리가 개신 교회를 정통이 못되게 만드는 것인지 확실하게 밝혀야 한다. 그리고 개신교회도 재림교회와 함께 정통이라면 재림교회가 무슨 이유 때문에 스스로 개신교 사이에 높은 담을 쌓고 일체의 교류를 차단 한 채 막힌 담 속에서 지내고 있는가?

외국에서는 이단으로 보지 않는 것이 현재의 세계적 흐름과 조류라고 몇 번을 강조했다. 이것은 외국 개신교의 변화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외국 재림교회의 변화이기도 한 만큼 한국 재림교회도 개신교를 향한 시각이 확실히 달라지기를 촉구한다.


안식일 교회는 변했고 변하고 있고 변할 것이다. 초임박한 재림을 예상하고 160여 년 전에 만들어진 재림교회의 9% 교리는 지구 역사가 서기 2000년을 넘을 것을 전혀 예상하지 않았다. 서기 2000년 전에 예수님이 오셨더라면 재림운동은 지구에 홈런 날리는 특별한 진리로서 가치가 있을 뻔 했다. 그러나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오시지 않았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재림교회 특수교리는 재조명되어야 한다. 이제는 의미 없는 것으로 판명난 셈이다. 이런 사상의 압도적인 퍼짐이 재림교회의 정체성(正體性))이 정체(停滯)되는 원인이다. 재림교회의 특수교리는 이제 유효 기간이 지나버린 빵이 되었음으로 가장 귀한 하나님의 뜻인 영혼 구원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오직 은혜의 복음을 중심으로 새롭게 정리되어야 한다고 본다.


건전한 종말론이 아니라 비탈진 말세론에 세뇌되어 충실해야 할 삶을 포기하고 균형 잃은 인생을 보낸 재림교인들의 삶을 누가 책임질 것인가? 재림 교단의 행보를 보노라면 이제까지 가르치던 임박한 재림신앙은 사실상 포기한 발걸음이다. ‘주님이 곧 오실 텐데 건물은 뭐하러 잘 짓느냐?’ 하던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100년을 바라보고 건물을 짓고 있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 있는 재림성도들은 “생생한 설교”를 보고 있는 것이다. 바울도 주님이 생전에 올 것으로 알고 있지 않았느냐고 하겠지만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표리부동함을 보는 재림교인들은 속으로 분노하고 있으며 떠나가고 있는 셈이다. 많은 다수가 선교 전의를 상실한 채 힘이 쫙 다 빠져 있는 상태 아닌가? 이제까지 다닌 것이 억울해서도 못 떠나고 마땅한 대안이 없음으로 ‘아마 우리가 옳을 거야’라고 읊조리고 있는 형국이라고 감히 진단한다. 정신 차려야 하고 정직해야 한다.


지금의 재림교회는 개신교와 91%의 공통교리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 9%교리 때문에 개신교로부터는 ‘고장난 정통’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다. 내부적으로는 9% 정체성 교리의 와해로 응집력이 떨어져 허약해져 가고 있다. <생애의 빛> 같은 극보수주의자들로부터는 이 9%를 타협하고 개신교의 신신학으로 오염되었다는 공격이 거센 판국이다. 시름이 깊을 수밖에 없는 사면초가요 좌불안석인 셈이다. 이제는 재림교회 특수교리에 대한 진실한 재조명이 반드시 필요한 시점이 왔다고 생각하다.


필자는 재림교회의 특수교리가 갈고리가 되어 이단 시비의 불쏘시개가 되는 대신 성경적 상식선에서 용납할 수 있는 다름의 영역으로 대폭 수정되어 정통으로 회복되는 선례가 되었으면 좋겠다. <안식일교회 대논쟁>에서 밝힌 대로 ‘피차간에 자리를 함께하여 충분한 대화를 나누며 모든 것을 성경으로 검토, 검증하여 견해 차이를 좁히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기대 한다. 심지어 WCC에서도 회신이 오지 않았던가? ‘한국 교회들과 SDA는 서로가 더 잘 알기 위한 목적으로 상호 대화를 통한 그들의 차이점 해결을 모색’을 제안 한다고···. 그리하여 재림교회도 명실 공히 개신교회라는 깃발 아래 시대의 흑암을 밝히는 아름다운 복음의 진지가 되기를 소원하며 글을 맺는다.


P.S

오늘 처음으로 교회와 신앙이란 홈에서 안식교를 클릭했습니다

많은 이야기가 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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