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24

by 정태국 posted Feb 26, 2012 Likes 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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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24


 

(비록 미국이라 하나 우리 교회 병원이

다른 교파 사람에게도 문을 열고 받아 드리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며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이 되었다. 연재#23 끝부분)


 

3. 강봉호 선배


 

나는 35년 전에 헤어진 의명학교 선배 강봉호 씨를 찾고 싶어

박창욱 씨에게 부탁을 했다. “순안 의명학교 동창선배인

강봉호 씨가 나성 지역에 산다는데 어떻게 찾을 수 없겠소?”

“아이고 목사님, 이 넓은 나성에서 어찌

아무 연락처도 없이 찾겠습니까?”

하기야 연락처는 고사하고 영어 이름도 모르고 왔으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한참 후에 나는,

“박 선생, 당신이 영어를 잘하니 전화번호 책을 한 번 보고 찾아봅시다.”

과연 박창욱 씨는 영어 이름을 몇 번 바꾸어 찾아보더니

강봉호 씨의 이름을 찾아내어 그분 댁에 전화를 해서 강봉호 씨의

직장을 찾아가게 되었다. 강봉호 씨는 1913년에서 1914년 3월까지

일년 동안 순안 의명 학교에서 재학한, 인정 있는 사람으로

나의 선배동창이었다. 정말 오래간만에 만나는 기쁨을

기대하면서 그의 직장을 찾아가니 마침 돌아서서

일을 하고 있었다. 하도 반가운 김에 뒤에서 내 두 손으로

감봉호 씨의 두 눈을 가렸더니 영어로 “누구시오?”하고 물었다.

나는 “봉호 형님, 저 정동심입니다”하고 인사를 드리니

도무지 몰라보는 것이 아닌가?

 

 

나는 대총회를 위해 떠나면서 강봉호 씨가 나성지역에 산다는

말만 듣고 은수저 한 벌까지 준비해 찾아왔는데

전혀 알아보지를 못하니 난감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분을 마지막 본 것이 1914년인데

지금이 1950년이니 36년 만에 연락 한마디 없이

불쑥 찾아왔으니 몰라보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이 되어

순안 의명학교 기숙사에서 같이 살던 이야기를 하니까

한순간 “아! 바로 당신이 그 정동심이란 말이오?”하고

알아보고는 어찌나 기뻐하는지, 기쁨이 배가되는 기분이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강봉호 씨는 우리가 이미 방문했던

화잇부인 기념병원 옆에 살고 있었는데 우리보고

자기 집에서 유하자고 권했다. 우리가 호텔에 머문다고 하니

좌우간 저녁식사는 자기 집에서 하자며 우리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의 부인도 크게 반가워했다.

강봉호 씨를 위해 한국에서 준비한 은수저를 선물로 주었더니

더욱 고마워하며 내일 저녁에 정식으로 다시 초대를 한다고 했다.

다음날 저녁에 다시 그 집을 가니 어찌나 푸짐하게 차렸는지,

미국에 와서 이런 만찬은 처음이었다. 누구보다도 박창욱 씨는

연속해서 푸짐한 저녁상에 감탄사를 발했다. 식탁에는

내가 선물한 은수저가 놓여있었다. 강봉호 씨의 부인은

“마침 오늘이 강봉호 씨의 생일인데 무엇을 선물할까

생각 중이었는데 마침 정 선생님이 이걸 가져와서

너무 감사하다.”고 하며 “생일선물로 받은 은수저로

식사를 하니 더 의미가 깊다.”고 하며 재삼 감사를 표했다.

 

 

강봉호 선생은 평안남도 강서군 함종면 샘톨이라는 곳에서

출생한 나의 동향인(同鄕人)으로 성격이 아주 다정다감한 분이다.

1914년 3월에 순안 의명학교를 졸업하고 순안병원에 근무하면서

사회적으로 이름 있는 인물들과 교제하며 지내다가

춘원 이광수 씨와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이광수 씨는

상해 임시정부를 시찰하고 그곳에 정직한 경리가 필요함을 알고

강봉호 선생을 추천하여 상해 임시정부로 갔다.

그 후에 의명학교 졸업생 김병모 씨도 강봉호 씨를 따라갔다.

강봉호 선생은 상해 임시정부에 가서 일을 해 보니 자기는

도저히 그곳에 맞지가 않는다고 느껴져서 김병모 씨와 함께

불란서 파리로 갔다가 다시 미국으로 들어왔다.

강봉호 선생은 교회계통에 일한 경험이 있는 고로

미국에 머물게 되고 김병모 씨는 멕시코로 갔다.

강봉호 선생은 불란서에 가서 많은 고생을 하면서도

신앙의 길을 떠나지 않았다. 불란서 파리에 있으면서

의명학교 학생일동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내용은

불란서에 우리 재림교인이 많지는 않은데 화요일이나

금요일이나 안식일에 교회 참석하는 숫자가 거의

비슷하다면서 고국에 있는 우리 교인들도 이러한 신앙심을

갖게 되기를 바란다는 간곡한 서신이었다.

이런 정신을 가진 강봉호 선생은 미국에 와서도 신실한

신앙생활을 하며 훌륭한 실업가가 되었고 교회에서도

회계집사로 여러 해 봉사 하고 있었다. 나는 하나님을

신실히 섬기는 백성은 어떤 환경가운데서도 영육 간에

성공이 있음을 이 분을 통하여 보았다.

 

 

 

닥터 루를 다시 반갑게 만났는데 지난번엔 대전 지역에

무슨 강이 있는가 묻더니 이번에는 “대전은 이미 북한군에게

함락 당하고 현재 북한군이 대구로 내려가고 있는데 대구에는

무슨 강이 없는가?” 물었다. 이미 일본신문을 통해 대강

사정을 알고 있지만 닥터 루에게 “낙동강이 있다”고 대답하자

“그러면 이번에는 그 강에서나 막을 수 있을까”하며 더 이상

확신하는 말을 아니 하시기에 “미국군인은 강밖에는 북한군을

막을 다른 계획도 없는가?”해서 더욱 가족과 나라가 걱정이 되었다.

그 후 닥터 루의 권유로 화잇 부인 기념 병원에서 대변 검사를

해 보았더니 나에게 십이지장충이 있다고 해서 그 치료를 위해

몇 번 더 병원을 드나들면서 강봉호 씨의 집에 초대되어 식사를 했다.

 

 

안식일이 되자 박창욱 씨는 곧 한국으로 갈지도 모르니 큰 교회와

그 찬양대도 구경해야 되겠다고 해서 화잇 부인 기념병원교회로 가고

나는 그 옆에 있는 멕시코인교회로 갔다.

강봉호 씨도 나와 함께 멕시코인의 예배당으로 갔는데 전에

보지 못한 동양인이 찾아오자 나더러 어떻게 왔느냐고 물었다.

강봉호 씨를 통해 나는 “대총회에 한국인 대표로 왔다가

전쟁 통에 발이 묶여서 이 교회까지 방문하게 되었다”하니

즉석에서 한 10분 동안이라도 말씀을 좀 해 달라 했다.

그 분들이 강봉호 씨에게 통역을 부탁하자 강봉호 씨는

“이 분이 한국에서 통역을 데리고 왔는데 바로 옆에 있는

병원교회에 있다”고 하자 곧 어떤 사람이 가서 박창욱 씨를

데리고 왔다. 그래서 내가 말하면 박창욱 씨는 영어로

통역을 하고 또 다시 이 교회의 교우는 멕시코말로 통역을 했다.

그야말로 2중으로 통역을 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한국이라는 나라를 소개하고 그동안

일제하에 겪었던 교회의 어려웠던 시간과 지금은 전쟁을 통해

당해야 하는 어려움을 이야기 하고 특별히 한국을 위해

기도를 부탁하자 모두 큰소리로 “아멘!!”을 해 주었다.

2중 통역을 통해 세 나라 방언으로 이야기를 했으니

내 뜻이 제대로 전해 졌는지는 모르나 모두 감동을 받은 것은

성령의 역사라고 확신한다. 세계만방의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한 방언으로 예배할 날이 기다려졌다.


 

하루는 모처럼 닥터 루가 자기 차로 우리를 데리고

시외로 나가기 시작했다. 얼마 후 먼지가 풀썩풀썩 나는

포장되지 않은 산길로 한참 들어가니 그곳에는 배 밭이 있었고

어떤 미국 여자 분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 여자는

닥터 루에게 “어떻게 소식도 없이 이렇게 왔는가?

미리 온다고 알려 주었으면 손님들을 위해 터키라도

한 마리 잡아 요리를 했을 텐데” 하며 말했다.

알고 보니 이 배 과수원은 닥터루가 안식년으로 귀국했을 때

만들어 놓았던 것이었다. 우리는 선교사들이 안식년 하면

그냥 놀고 지난다 생각을 했는데 이 사람들의 또 다른 면을

보는 듯 했다. 관리하기가 힘이 들어 이 여자 분에게 팔았지만

생각이 나면 가끔 이렇게 들려 본다고 했다.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되었다.

 

 

미국에 온지도 몇 달이 지났다.

어떤 일요일에 강봉호 씨는 어떤 큰 호텔 회의실을

채플(Chapel)로 쓰고 있는 “낙스”라는 재림교인

평신도에게 데리고 갔다. 낙스씨는 이 장소를 세내어서

상설기관으로 정하고 일요일마다 전도 집회로 모이고 있었다.

다른 교파에서는 연금을 거두지 않아도 이런 집회에

사람이 별로 참석치를 않는데 낙스 씨의 이 집회에는

매주 연금을 거두는데도 사람이 많이 온다고 했다.

백 명이 넘는 대단한 모임이었다. 낙스 씨의 어머니는

아들이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로 돕고, 낙스 씨의 아들은 이 집회의 사회를 하고 있었다.

낙스 씨는 활동사진과 슬라이드도 보여주면서 설교를 하고

좋은 노래도 준비해서 들려주거나 함께 부르기도 했다.

낙스 씨도 아주 감명 깊게 설교를 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감동을 받는 모습이 매우 부러웠다.

 

 

때가 때이니 만큼 “다음 일요일에는 한국사정을 더 잘 알기 위하여

한국에 선교사로 갔던 닥터 럿셀이라는 의사의 말씀이 있겠으니

많은 사람을 데리고 오라!”고 광고를 했다. 나는 강봉호 씨에게

“내가 북한사람으로 한국에서 대총회 참석차 왔으니

다음 집회 때에 시간을 주면 잠시라도 말할 마음이 있다”고

알아 보라고 했더니 예배를 끝내면서 낙스 씨는 “오는 일요일에는

한국에서 온 정동심이라는 사람이 북한사정과 한국교회의 사정을

이야기 할 마음이 있다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하고 물은 즉

만장일치로 좋다고 해서 그리 하기로 했다.

그 다음 일요일에 반신반의(半信半疑)를 하며 그 곳에 갔더니

설교자 럿셀 씨는 과연 한국에서 내게 침례를 주었던

선교사 노설 의사이었다. 노설 의사는 순안병원 원장으로 있으면서

1913년 8월에 나에게 침례를 베푼 의사이며 목사였던 분이다.

나를 보고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몰랐다.

나에게 침례 준 목사와 함께 미국에서 만나 같이 설교단에

서게 된 것은 우연(偶然)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가이 만나 인사하고 노설 목사가 이야기 한 후에

내가 북한사정을 포함하여 설교를 잠시 했다.

낙스 씨의 말로는 사람이 평상시보다 삼분의 일정도

더 모였다고 했다. 족히 백 오십 명이 넘어 보였다.

 

 

집회 후에 그곳을 떠나려 하는데 누가 한국말로 우리를 불렀다.

“여보! 여보! 여보시오!”

한국말로 우리를 부르기에 너무 반가워 뒤를 돌아보니

60대쯤 되어 보이는 한국 사람이 젊은 미국 백인여자와

우리를 부르며 쫓아와 말했다.

“아, 나는 오늘 당신의 설교를 들은 사람인데 너무 반갑고

감개무량해서 그냥 보낼 수가 없어 두 분을 모시고

점심 대접을 했으면 하니 같이 가십시다.”

“예, 감사합니다만 저희는 이 집회에 오기 전에 점심을 했는데요.”

“아, 점심을 했으면 어떻습니까? 그냥 너무 반가워서 그러니 같이 갑시다.”

그래서 그분이 인도하는 대로 가까운 식당에 들어갔다.

“사실 저는 오늘 참석하기 위해서 60마일이나 떨어진 곳에서

한 시간 넘게 이렇게 왔소.”

“아니 그렇게 먼 곳에 사시면서 어떻게 알고 찾아 오셨습니까?”

“아, 신문광고를 보니 오늘 한국 사람이 말한다고 해서 왔지요.”

나는 다시 놀랐다. 내가 요청을 하니까 마지못해 그냥

잠시 이야기하도록 시간을 허락한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

더 듣게 하기 위하여 신문에 광고까지 한 것이다. 뭔가 달랐다.

“사실 나는 교인은 아니지만 신문에 한국 사람이 이야기한다고

광고해서 오긴 했지요, 광고를 볼 때는 틀림없이 이놈들이

한국에 갔던 사람을 이용해서 돈이나 뜯어내려고 광고를 했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막상 와 보니 선생님 같은 유명한 대표자들을

모시고 설교를 해 주어서 재미있기도 했지만 감사해서

식사라도 대접할 맘이 있어서 이렇게 했습니다.”

이 분 말씀이 이전에도 이와 비슷한 다른 교단의 광고를 보고

반가워서 가보면 한국에 선교사라고 나갔다가 한국 사람을

쿡(Cook)이나 하인처럼 데리고 있다가 미국에 데리고 들어와서는

광고를 하여 사람들이 모이면 돈을 모금하는 아니꼬운 일들이

많았다 한다. 이번에도 또 그런 광고일 것이라 생각을 하면서도

한국 사람이 그리워서 불원천리하고 찾아 왔는데, 너무 감동을

받았기에 식사라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청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소개와, 또 함께 온 젊은 미국 여성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지난 몇 달 동안 미국에서 우리 교회만 돌아 다녔고 만난 사람들도

다 교인뿐이었다. 그러나 오늘 교인이 아닌 이 부부를 만나

담화 하면서 미국인의 가정, 미국인의 사회와 그들의 사고방식을

엿보게 된 것이다. 이 분은 개성 사람으로 오래전에 미국에 왔다고 했다.

“저는 예순 한 살이 넘었지만 같이 온 젊은 이 백인 여자는

스무 살이 조금 넘었는데 저와 결혼해서 함께 살고 있습니다.”

나는 길안내하려고 온 어린 미국여성인줄 알았다가 너무도 놀랐다.

우선 황인종과 백인의 결혼이 그랬고 나이를 보니 할아버지와

손녀 사이는 족히 되고도 남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아니 어떻게 그리 젊은 여성과 결혼해서 살고 계십니까?”

나는 이 남자의 설명을 들으며 너무 놀랐다. 이 분은 이미

결혼하여 부인도 있고 가정도 꽤 부유한 측에 속했다.

딸도 낳아서 잘 자라고 있었다. 이웃과도 사이가 좋아서

백인 처자가 자주 놀러 오곤 했다. 옆집 딸은 이 집 딸과

친구로 지내면서 자주 놀러 왔다. 하루는 뜻밖에도

이 백인 처녀가 이 집 딸에게 “내가 너희 아버지와

부부가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해서 “그런 심한 농담은

하지 말라!”고 하고는 묵살을 해 버렸다. 그런데 계속해서

그 옆집 백인 처녀가 “너희 아버지께 말을 해 달라.”고 해서

묵살하다가 할 수 없이 하루는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했다.

처음에는 이 한국분도 “별 이상한 처녀가 다 있군.”하면서

그 이야기를 무시했다. 허나 몇 번 계속해서 그 이야기를 듣고는

자기 부인에게 말을 하자 뜻밖에도 부인도 “당신이 그렇게

하고 싶다면 하라.”고 남편에게 이 문제를 일임을 해 버렸다.

 

 

이렇게 되자 이 남편도 “이게 어떻게 된 사회인가?”하고

심사숙고 하다가 결국 그 백인처녀의 부모를 찾아가

지금까지의 일을 설명을 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백인

처녀의 부모는 “당사자인 남녀가 원한다면 당신들 마음대로

하라!”며 선선히 허락을 해 버렸다는 것이다.

“저도 젊은 여자와 살아보는 것이 나쁘지는 않겠다.”생각이 되어

30세도 넘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서로 잘 타협하면서 가정적으로는 큰 문제없이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라고 솔직하게 이야기를 했다. 삼강오륜을 중요시하는

유교 집안에서 태어나 지금은 성경대로 살고자 하는 나로서는

이 분의 이야기를 수긍도, 이해도 할 수가 없었다.

이런 미국사회를 “개방되었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타락했다고 해야 할 것인가?” 잘 알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한국남자나 그 젊은 여성이

몰몬 교회에 속했던 사람이 아닌가 생각도 되지만 당시에는

“참 미국이라는 곳이 이상하고 이해 못할 일도 많다”라고 생각을 했다.

 

 

4. 우국화 목사

 

 

한국전쟁이 속히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원동지회에서

우리에게 나성을 떠나 샌프란시스코에서 북쪽으로

두 시간 정도 떨어진 세인트헬레나(St. Helena)라는 곳으로

가라고 지시가 왔다. 지회의 지시니 따를 수밖에 없었다.

우리 위생병원과 패시픽 유니온대학, 그리고 화잇 부인이 지내던

집도 있던 조용한 시골이었다. 또 한국에 선교사로 계시던

우국화 목사의 사위와 한국 위생병원에서 근무하던 볼드윈이라는

의사도 이 병원에서 일하고 있다고 해서 다소 안심이 되었다.

원동지회의 말로는 이곳에서 한국동란이 끝날 때 까지

머물게 될 것이라 했다. 세인트헬레나 병원에서는 기숙사 같지만

매우 크고 깨끗한 방을 제공해 주어 박 창욱 씨와 같이 있게 되었다.

처음 미국에 오면서 박창욱 씨는 나에게 “저는 선교사들과

종종 서양음식도 먹어보고 해서 괜찮겠지만 목사님은

서양음식도 잡숴 본적이 없어서 고생을 좀 하실 것이고

특히 침대생활이 힘 들것이라.”하며 걱정을 많이 해 주었다.

그런데 도리어 박창욱 씨는 서양음식이 먹기 싫어 고생을 했고

나는 서양음식을 무엇이나 잘 먹고 지내고 있었다.

그나마 나성에서 한국음식을 가끔 먹다가 이제 이

세인트헬레나 병원에 와서 매끼 병원에서 양식을 먹게 되니

박창욱 씨는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더구나 박창욱 씨는

“침대에서 도저히 그냥 잠을 잘 수가 없다.”하여 병원에서는

침대 아래에 두꺼운 판자를 넣어 잘 수 있게 해주고,

선교사들에게 부탁을 하여 식사를 못하고 고생하는 박창욱 씨에게

한국음식을 제공하려고 갖은 애들을 다써주었다.

 

 

그런데 박창욱 씨는 영어를 아니까 자주 나가시지만

나는 영어도 못하고 짐이 되는 것 같아 방에 남아 있곤 했다.

처음에는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좀 지루했다.

그러다가 하루는 이전에 한국을 방문했던 “스파일” 목사의

경험담 설교가 생각이 나서 나도 용기를 내어 성경을 읽기 시작해서

한 달 만에 창세기부터 묵시록까지 그야말로 재미있게 정독을 했다.

스파일 목사는 “자기가 한 번은 배를 타고 여행하다가

러시아의 어떤 항구에 들려 2주쯤 머문 다기에 내리려 했더니

갑자기 짐도 압수하고 사람도 배에서 내리도록 허가가 안나오고

다만 손에 들었던 성경만 가지고 배 안에서 2주를 지내면서

창세기에서 묵시록까지 성경을 읽은 것이 아니라 성경과

이야기를 했다”고 말 하여 감동을 받았었는데 나도

성경과 이야기하는 심정으로 정말 실감나게 성경을 읽었다.

 

 

한국의 사정은 어려워 보이고 전쟁은 끝날 것 같지가 않은지

원동지회에서는 다시 지시가 왔다. 박창욱 씨는 학교로 가서

공부를 하고 정동심은 하와이로 가서 목회를 시작해 보는 일을

생각해 보라는 것이었다. 공부를 하자니 영어도 모르고,

목회를 하면 한국으로 돌아가기도 힘들 것이고...

그래서 “내가 아무리 영어를 모르지만 가서 열심히

공부하면 따라갈 수 있으니 박창욱 씨가 공부하러 가면

나도 공부하러 가겠다.”고 내 마음으로는 거의 결정을 하고

그리 답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 번은 우국화 목사의 사위가 자기 딸 두 명과 같이 우리를

찾아 온 적이 있었는데 “아이들이 몇이나 되냐?”고 물으니

“다섯이나 된다.”고 하면서 미안하기도 하고 어색한 표정을

하기에 나는 “다섯은 많은 것이 아닙니다. 나는 열 하나의

아이들을 키웠다.”고 웃으며 얘기한 적이 있었다.

얼마 후에 세인트헬레나병원 근방에 사시는 우국화 목사가

하룻밤 자기 집에서 지내자고 우리를 초대를 해서

우국화 목사의 사위가 우리를 데리러 왔는데 그 집 부부와

아이 다섯이 함께 왔다. 그 차에 아홉 명이 타게 되어

나는 웃으면서 “너희가 아이들이 많아서 차가 좁구나!”하고

이야기를 했더니 우국화 목사의 어린 외손녀가 “당신은

아이가 열 하나나 된다고 하고서는 왜 우리보고 애가

많다고 하느냐?”하며 당돌하게 말을 하는 것이었다.

아이들이라 할지라도 자기의 주장을 당당하게 말하는

모양새가 귀엽기도 하고 당돌해서 나는 한국 아이들과

비교해 보며 많은 생각을 했다.

 

 

우국화 목사의 집에 당도하니 한국 화전민들처럼

큰 나무를 잘라서 대패질도 안하고 만든 통나무집이었다.

그러나 막상 들어가 보니 겉모양과는 달리 집안에는

회를 잘 바르고 칠도 잘해서 모양이 좋았다.

우리는 금요일에 가서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안식일

예배를 통나무집에서 드리게 되었는데 약 30명이 와서

예배를 드렸다. 그 중 의사의 가정이 한 너 댓 가족

된다고 하는데 아직 교회를 준비하지 못했다 한다.

예배를 필하면서 우국화 목사의 말씀이 “우리가 지금

예배당을 짓기 위해서 50불을 예금해 놨다.”고 말했다.

그때 50불이 많은 돈인지 적은 돈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힘이 들어도 목표를 세워 놓고 한 가지씩 욕심 내지 않고

열심히 해 나가는 모양에서 많은 감명을 받았다.

 

 

우국화 목사는 우리 한국교회사업에 어느 선교사보다

공이 많으시고 수고도 많이 하신 분이다. 한국 시조사 편집국장,

서선대회장 및 한국연합회장등으로 폭이 넓게 일하신 분이시다.

지금은 은퇴를 하시고 자기 사위가 일하고 있는 세인트헬레나

위생병원 근처에서 살고 계셨다. 이 분이 한국에

선교사로 있다가 미국에 들어와 현재는 은퇴를 하고 계시지만

그간 한국교회에서 한 일에 대해 미국에서는 어떤 평가를 받고

계신지는 잘 알 수 없었다. 그저 나는 한국에서 함께 일하면서 만났던

우국화 목사와, 그분이 하신 몇 가지 일들을 보면서 갖게 되었던

나의 생각과 느낌을 좀 쓰려고 한다. 이 분에 대한 평가는

후일에 교회사를 쓰는 분들이 내릴 것이며 내 의견과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우 목사 부부는 한마디로 성품이 후덕하고 인후(仁厚)한 어른들이었다.

그래서 조선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고 함께 생활하려고 노력하신

분들이었다. 우 목사가 서선대회장이나 한국연합회장직을 맡아

일을 보실 때에 어느 누구와도 간격이나 충돌 없이 지나신 것을 보면

이 분이 얼마나 원만한 성격을 가졌었는지 넉넉히 알 수가 있다.

 

 

우국화 목사가 시조사 편집부 주필로 계실 때에

우 목사가 쓰신 글은 누구나 다 실감나고 감명 깊게 읽곤 했다.

조선말을 배우려고 꽤 열심이셨고 후에 춘향전을 읽고

감명을 받아서 춘향전을 영문으로 번역을 해 내었다.

당시에 이 사건은 많은 목사들에게 깜짝 놀랄만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또 잊혀지지 않는 일중에 하나는, 이 분이 누구에게

조선말을 배웠는지는 모르나 누구하고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 끝을 “OO나이다!”라고 하셨다. “식사를 하셨나요?”하고 물으면

“네, 식사를 잘 하였나이다.”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모든 대화에 “이렇게 해 주시면 감사 하겠나이다!”,

“오늘은 누구의 기도로 끝나겠나이다.”하는 식이었다.

그래서 한번은 가까운 사람들이 “목사님, 말씀 끝에 ‘OO나이다’ 라는

말을 하지 마십시오!”하고 부탁을 했더니 “네, 다시는 안

그러겠사옵나이다!”하고 대답을 하셨다. 조선말을 배우기가

힘든 것이었는지, “어른 되어 생긴 버릇도 평생을 가는 것인지?”는

몰라도 그 말 습관을 고치기에 퍽 힘들어하시던 생각이 난다.

 

 

우리 한국 풍속에 음력 5월 초가 되면 각 지방에서 각희(角戱-씨름)

대회가 있었다. 우국화 목사가 서선대회장으로 계실 때,

순안에서도 각희대회가 있었다. 그 때에 순안 의명학교 학생들도

그 씨름판에 상당한 숫자가 나갔다. 그런데 이 씨름판에

서양청년이 나와서 한판을 거들게 되어 모두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그리고 “저 서양청년이 누군가?” 하는 수군거림과 호기심이

온 씨름판에 나 돌았다. 결국 의명학교 이야기가 나오고

우국화 라는 안식일교회목사의 아들이라는 말이 나오면서

안식일교회와 우국화 목사의 이름이 한동안 순안시내의

화제가 되었다. 씨름판에 나온 우 목사의 아들 덕분에

안식일 교회의 이름이 순안 구석구석까지 알려진 것이다.

생각건대, 우리나라에서 미국 선교사의 아들이 본토인 청소년과

씨름판에서 씨름을 한 사람은 우 목사의 아들을 빼고는

전무후무 할 것이라 생각이 된다. 우 목사는 단지 한국 미풍에

휩쓸린 것이 아니라 그의 생활 속에서 “우는 자와 같이 울고

즐거워하는 자와 같이 즐거워한다.”는 말을 실천하려고 노력하신 분이다.

 

 

1930 년경인가?

우리 시조사가 이유를 알 수 없이 화재로 전소한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런데 일부 사역자들이 그 원인을

우국화 목사 때문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다름 아니라

“우 목사가 세상적인 춘향전을 영문으로 번역하여 시조사에서

인쇄를 하였기에, 하나님이 책망을 하시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여

우 목사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이 말이 한입 두입 건너 퍼져

교인들에게도 퍼져 나가서 우 목사는 입장이 참 난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화를 내거나 그런 사람들과 마찰이나 다툼이 없이 침착하게,

한결같이 교회 일을 이끌어 나가는 것을 보며 마음으로 감탄을 했다.

 

 

1935년 또는 1936년경이라 생각이 된다.

일본이 최후 발악의 행동으로 우리나라에서 신사참배라는

엉뚱한 일을 강제하가 시작했다. 내 기억에 그 일을

평안남도에서부터 시작을 하려고 했던 것 같다.

이때 우국화 목사가 서선대회장이었는지 합회장이었는지

자세히 기억은 나지가 않는다. 신사참배 문제가 일반 사회에서는

그리 문제가 될 것이 없었지만 기독교사회에서는 도저히

용납을 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처음에 일본 관리들이 주최하는

어떤 회의에 참석했던 기독교 지도자 몇 명이 신사 참배를 거부하자

일본은 이것이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라 애국 사상을 고취하기 위한

것이라고 회유해 보려 했으나 이 분들이 거절 하였다.

이때에 일본 위정자들은 교세가 약해 보이는 안식일교회

책임자이신 우국화 목사를 불러서 회유와 공갈로 비인간적인

대우를 하여 우 목사를 매우 힘들게 한 모양이다.

하나님의 십계명을 강력히 주장하는 안식일 교회에서

이 문제가 받아드려 진다면 일본은 이 문제를 가지고

다른 교회들을 회유하는데 큰 힘이 되리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이문제가 회의에서 토론되어 대 부분 반대를 하였으나

회의 장소에 참석하여 감시하던 일본 형사들의 압력 때문인지

아니면 교인들이 이일로 너무 고생을 할까 염려가 되었는지

이 회의에서 신사참배는 종교적인 행사가 아니라 애국사상 고취의

행사로 수용한다고 결정이 되었다. 이 일로 우 목사는

전국 각지에서 교우들에게 힐난(詰難)을 받고 귀국하게 되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간 그 분이 이룬 업적을 생각하면

우리 한국 교회에 큰 공을 세우신 분이다.


 

지금 15년이나 지나서 미국에서 이 분의 집에 초대되어

하룻밤을 지나자니 모든 일들이 생각났다. 비록 이제는

은퇴를 하셨지만 앞으로 큰 영적인 성공이 있기를 기도드렸다.

나는 세인트헬레나 병원에 와서도 나성에서 발행하는

나부신보를 구독하고 있었다. 그 신문에 의하면

북한은 대전(大田)을 지나 대구로 내려와서 지금은

낙동강 상류로 해서 저 왜관으로 내려가는 것을 보니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지도에 표시된 것을 보니

남한 땅이라고는 제주도를 빼고는 부산 지역만이

콩알만큼 남아 있었다. 걱정과 실망뿐이었다.

 

 

현실이 그러하니까 가족걱정과 나라걱정으로 생각이 복잡해서

머리만 아파 왔다. 그런데 하루는 신문에 미군이 인천에서

120 해리밖에 있는 덕적도에 상륙한다는 짧은 기사가 있었다.

나는 박창욱 씨에게 “이제는 무엇이 되어 가는 것 같고

희망이 보인다.”고 하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하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이 신문 기사를 보여주면서 “이 덕적도라는 섬은

우리가 지리 공부할 때는 알지도 못하던 작은 섬 같은데

인천 가까이 있는 섬이니 이 섬에 미군이 상륙하는 것은

아마도 인천으로 뚫고 들어갈 계획인 것 같다”고 말을 하니

박창욱 씨도 신문을 보고는 “글세, 그렇게 되기만 한다면

너무도 좋겠습니다!”하면서 나의 기대에 동감을 표했다.

과연 일주일가량 지나니까 미군이 인천으로 상륙해

들어간다고 해서 이제는 우리가 한국으로 가게 되는구나

하며 기뻐했다. 미국신문에는 한국사정에 대하여

더 자세히 나왔는지 병원직원들도 우리가 곧

귀국할 수 있을 것 같다면서 축하의 말을 해 주었다.


 

그리고는 이 날부터 감사하게도 우리가 귀국하기 전에

미국풍습을 다 보고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하며 여기 저기

우리를 안내하였다. 장례식도 보고 배운 것이 많았다.

활동사진관(영화관)도 가자해서 병원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이나 되는 곳에 갔다. 원래 활동사진에는

취미가 없었고 영어도 모르니 별로 마음이 당기지 않았으나

이일도 경험이라 생각하고 갔다. 영화의 내용 중에

생각이 나는 것은 침례요한이 목 베임을 당하는 것이었는데

성경과는 달리 침례 요한과 헤로디아의 딸이 연애하는 내용이었다.

 

 

또 하루는 미국사람의 결혼식에 우리를 데리고 같다.

믿지 않는 사람의 결혼이지만 믿는 사람들의 결혼식이나

비슷했다. 결혼식 후에 피로연이라고 하는 것이

결혼식장 문밖에 향기로운 나뭇잎을 넣은 레몬주스를 내어놓고

그 옆에는 신랑신부가 서서 손님들이 나오게 되면 인사를 하고

그 레몬주스 한잔씩 대접해서 보내는 것이었다.

그런지 한 가지 이상한 것은 미국식이라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결혼식에 참가한 사람은 누구나 신부와 키스할 수 있다고 하는데

신부는 손수건을 꺼내 들고 축하객과 키스를 한 후 손수건으로

입을 씻곤 했다. 축하객들이 결혼을 축하 한다고 한 사람도

빠짐없이 줄을 서서 신부에게 키스를 하는데 이런 일이 처음인

우리는 참 난처했다. 우리를 인도한 사람이 줄에 서 있으니

빠져나갈 수도 없이 줄에 서서 점점 앞으로 갔다.

박창욱 씨가 앞서고 내가 뒤에 따라가는데 그 신부는

동양 사람인 우리와 키스하기가 싫었는지 박창욱 씨에게

“내가 당신과 키스했으면 좋겠지만 내가 여러 사람과 키스해서

내 입술이 더러워졌으니 안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했다.

나는 박창욱 씨 뒤에 서서 어떻게 이일을 피하나 하고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이렇게 피하게 된

우스운 일도 있었다. 박창욱 씨는 “키스도 인종차별을 해가며

하는 모양입니다.”라고 말해서 한참 웃었다.

 

 

가장 감명 깊게 방문한 것은 화잇 부인이 사셨던 집이다.

그곳 이름이 “엠스헤이븐”인가 그랬는데 병원 근처에 있었다.

집은 별로 크지 않았는데 이 집 담 너머로 천사가 종종

화잇 부인과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이곳에서도 많은 계시를

화잇 여사에게 주셔서, 우리의 미래에 갈 길들을 알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비록 교육은 제대로 받지 못한 여인이지만

그 분을 선택하사, 귀한 기별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고

그 분의 손길이 거쳐 간 이 집을 방문하며 많은 감격을

느끼게 되었다. 한국의 치과의사로 나왔던 볼드윈 의사는

자기 집에 여러 번 우리를 대접 만 한 것이 아니라

“당신네가 한국음식을 먹고 싶겠으나 우리가 한국음식을

잘 만들지를 못하니까 여기 쌀도 있고 채소도 있으니

한국음식을 직접 만들어 잡수시라”고 끝까지 친절을 베풀었다.

정말 변함이 없는 그들의 친절은 배울 점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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