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26

by 정태국 posted Mar 03, 2012 Likes 0 Replies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26

 

 

(함양교회를 방문하지 못한 것이 매우 섭섭했지만 죽을 고비를

넘기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다시 한번 헌신할 것을

결심했다. 나는 다시 거제도로 돌아왔다. 연재#25끝부분)


지난 #25번에 제주도에서 배출된 분들중 조수영 의사와 강석배 목사가 있다고 했는데

강석배 목사님은 그당시 나이가 어려서 해당이 되지 않으시며 아마도 강문수 형제일 

것이라고 강 석배 목사님께서 지적해 주셨습니다. 대단히 감사 합니다.)

 

 

7. 원동 지회 총회

 

 

1951년 년 말,

전쟁이 길어지면서 “거제도에서 다시 겨울을 보내겠구나!”라고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합회에 계시는 이시화 목사에게서 통지가

오기를 “연초에 원동지회 총회가 있는데 정 목사는 총회에

참석하기위해 식구들을 대전으로 데려다 놓고 12월 그믐께까지

서울로 오라”는 소식이었다. 전보를 받고 보니 날자가

얼마 남지 않았다. 가족과 함께 의논을 해 보니 경실이는

학산에 남아서 공부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에 학산에는

김창수 선생 등 몇 분이 아이들 공부를 지도하고 있었는데

경실이는 친구들도 있고 하니 그냥 있겠다는 것이었다.

당시에 태목이는 공부를 위해 제주도로 가 있었다. 그래서

아내와 의논을 하여 경실이는 학산에 두고 태국이와 태경이를 데리고

대전 집으로 가기로 의논이 되어 피난가면서 가져갔던 살림들을

몇 개의 큰 포대 자루에 겨우 겨우 쌌다. 학산에서 100여명 가까운

교우들과 딸 경실이를 두고 떠나려니 모두들 정이 들어 눈물로

작별들을 했다. 비록 피난길이었으나 학산 주민들과도 많은 정이

들었었는데 우리를 눈물로 배웅해 주어 마음이 아팠다.

 

 

부산가는 배 시간에 맞추어 학산에서 통영으로 건너 왔는데,

배에서 내리자 웬 순경이 나와서 검문을 했다. 아마 우리가

몇 개의 큰 포대자루에 짐을 싼 것이 이상하게 보인 모양이었다.

이 순경은 마치 죄인 다루듯 기세가 등등했다.

“당신 뭐 하는 사람이요? 지금 어디로 가는 길이요?”

“지금 학산으로 피난 왔다가 부산으로 가는 길입니다.”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묻지 않았소?”

“아, 저는 목사인데 피난 왔다가 지금 대전 우리 집으로

가족을 데리고 가는 길입니다.”

“목사라? 목사고 뭐고 그 짐 다가지고 경찰서로 갑시다.

가서 짐부터 검사해야 되겠소!”

학산에서 짐을 배에 실을 때에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겨우 실었는데 이 짐을 다 가지고 경찰서로 가려면 몇 번은

오가야했고 또 얼마나 힘들게 싼 짐인데...

더구나 곧 부산가는 배를 타야 되는데 경찰서를 갔다 오면

오늘 부산가는 배는 탈수가 없고 부산으로 가는 다음 배는

이삼일은 기다려야 했다. 앞 뒤 사정을 말하고 순경에게

선처를 부탁하며 사정을 했다. 그러나 막무가내였다.

“아니 말을 아니 듣겠소? 이 사람이 전쟁 중인데 정신이 있나, 없나?”

학산에서 같이 배타고 온 동네 사람 중 누구도 감히 나서서

나를 증명해 주는 이도 없었다. 전쟁 때인지라 군인과 순경의

말 한마디가 모든 것을 좌지우지(左之右之)할 때였다.

꼼짝없이 경찰서로 모든 짐을 가지고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면 부산으로 가는 것은 고사하고 그 많은 짐을 가지고

경찰소로 끌려가 얼마나 고생을 할지 몰랐다.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간절한 기도의 길 외에는

다른 길이 보이질 않았다.

“아니, 목사님! 여기는 웬 일이십니까?”

뜻밖에도 통영에 계시는 이용진 목사(당시는 선생)가

길을 가다가 우리를 보게 된 것이다.

“아이고, 이 선생! 내가 이시화 목사의 전보를 받고 서울로

가는 길에 식구들을 대전 집에 데려다 놓고 가려고 떠났는데

아마 짐이 많아서 그런지 여기 계신 순경이 이 짐들을 가지고

경찰서로 가서 조사를 한다니 사정을 하는 중이오.

이제 부산가는 배를 놓치면 다음 선편이 언제인지도 모르고...”

정말 하나님의 도우심이었다. 그 시간에 통영사람

이용진 선생이 나타나시다니! 더구나 이용진 선생은 워낙 활달하신

분이시라 당시에 통영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분이었다.

“이보시오, 나는 통영 저 위에 사는 이용진이오, 이 분은 우리 교회

목사이시고 남쪽 지역을 전부 책임지신 분이시란 말이오.

우리 통영도 자주 방문 오시던 분이오. 어떤 의심도

받으실 분이 아니오, 만약 조금이라도 의심되는 일이 있다면

내가 모두 책임지겠소!”

그제야 순경도 의심을 풀고 나를 풀어 주어 겨우 부산가는 배를

시간에 맞추어 탈수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하나님의 은혜와

이용진 목사에 대한 감사한 생각을 잊을 수가 없다.

 

 

부산에 와서 아무리 생각을 해도 경실이를 태목이가 있는

제주도로 데려다 놓는 것이 좋겠다고 의논이 되어 아내는

태국이, 태경이를 데리고 먼저 대전으로 떠났다. 나는 부랴부랴

거제도로 가서 경실이를 설득하여 제주도로 데리고 가서

태목이와 함께 셋방을 얻어 있게 하고는 부산으로 다시 왔다.

거제도와 제주도로 약 삼사일을 갔다 온 사이에 내가 대전으로

가지고 가야할 짐들을 누가 풀어서 귀중한 것을 모두 가져간

것이 아닌가? 알아보니 짐을 가져간 사람은 잘 아는 사람이었다.

“피난 중에 오죽하면 내 물건을 가져갔겠는가?

피난 중에 일어난 일이니 수원수구(誰怨誰咎) 하겠는가?”라고

생각이 되어 속은 상하지만 그 사람의 장래를 위해서 묵묵히

기도를 드렸다. 그래도 남은 부엌살림과 책들을 싸니 매우 무거웠다.

서울로 가야할 시간이 촉박해 졌다.

 

 

태영이와 함께 기차역으로 나가서 태영이의 도움으로 짐 하나는

기차 선반에 올려놓고 다른 짐 하나는 매우 무거워 바닥에 두었다,

기차가 떠나자 곧 이동경찰이 와서 “그것들이 무슨 짐이고

당신은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내가 목사라고 하면서

책과 부엌 짐이라고 했다. 며칠 동안 먼 길을 쉬지 않고 다니느라고

내 몰골이 험했었는지 또는 짐이 무거워 보여 무슨 의심이 생겼는지

몰라도 나보고 다음 역인 삼량진역에 도착하면 짐을 가지고

내리라는 것이었다. 나는 ”왜 그러느냐?”고 묻자 “내리라면

내릴 것이지, 웬 말이 많으냐?”면서 “나의 아버지도 목사인데

당신 같은 목사는 처음 본다.”면서 몹시 퉁명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그래도 같은 목사이니 봐주겠지.”했는데 웬걸!

삼량진 역에 도착하자마자 아까보(기차역의 짐꾼)를 시켜 내 무거운

포대자루를 덥석 기차 밖으로 던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할 수 없이 나도 따라 내리자마자 급행 열차였던 이 기차는

1분 만에 내 짐 한 개가 선반에 있는 채로 떠나고 말았다.

짐 검사를 끝내고 풀려나니 김천까지만 가는 완행열차밖에 없었다.

 

 

김천에 내리고 보니 벌써 해는 져서 어둑어둑해 왔다.

서울 가는 기차가 있어야 대전으로 가겠는데 이미 기차 편은 끊기고

김천정거장 앞에 군인 트럭에 어떤 점잖은 사람 둘이 타고 있기에

물으니 서울로 간다했다. “나도 대전까지 꼭 가야 하는데 함께

트럭을 탈수 있을까요?”하고 물으니 “이것은 군인 트럭인데

우리는 이미 허락을 받았소! 그러니 우선 타고 있다가 운전병이 오면

허락을 맡아보라”고했다. 겨우 그 무거운 짐을 실어놓고 기다리니

술잔이나 비운 듯한 운전병이 오기에 나는 내려서 간청을 했더니

한마디로 거절을 하며 그 자리에서 발동을 걸고는 내 짐을 실은 채로

떠나는 것이 아닌가? 다행히도 위에 있던 손님이 내 짐을

던져 주어서 그 가방은 찾았으나 당시에는 귀했던

양산 둘은 잃어버리고 말았다. 전쟁 중이라 인심이 사나왔다.

할 수 없이 김천역에 있는 여관에 들어가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새벽에 무거운 짐을 겨우 다시 기차에 실고 대전으로 향했다.

그런데 내 맞은편에 신사 양반이 한분 타고 있다가 말을 걸어왔다.

“무엇 하시는 분인지는 모르나 얼굴에 수심(愁心)이 많아 보입니다.

무슨 근심되는 일이라도 있으신지요?”하고 묻기에

“내 표정이 뭐 어때서 그러는가?”하고 내심 조금 불쾌했지만

예의상 대강 이동경찰 때문에 생겼던 황당한 일을 설명을 했다.

그랬더니 “뭐, 그만한 일을 가지시고 그리 수심이 많으십니까?

너무 근심하지 마십시오!”라고 말을 하기에

“아차! 이 양반 말마따나 목사라는 사람이 이만한 일을 가지고

남이보아도 그리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었단 말인가?” 하면서

자존심도 상하고 반성도 하게 되었다.

그러자 이분은 “혹시 그 이동경찰의 이름을 기억하는가?”하고 묻는데

그 경찰의 명찰을 보아 기억은 하고 있지만 괜히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그런 말하기가 뭣해서 의아하게 쳐다보면서 “모른다!”라고 했다.

그제야 그 사람은 알았다는 듯이 나에게 “저는 이동경찰을

감찰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제가 그 짐을

찾아서 댁으로 전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말이라도 감사해서 그제야 나는 이름과 주소와 그 짐의 종류를

자세히 말했다. 그러고 나니 머리가 한결 가벼워지고 기분도

한결 좋아졌다. 하도 걱정을 하니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만나게 해 주신 것 같았다.

 

대전에 내려서 무거운 짐 한 개를 들기도 하고 메기도 하면서

30분가량 걸리는 집으로 왔다. 아내를 볼 면목이 없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내가 삼량진역에서 기차에 두고 내린

그 짐이 나보다 앞서 고스란히 이미 집에 와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목사로서 샌프란시스코에서 잃어 버렸던 양복이 나보다 앞서

일본에 도착했던 경험을 하고도 하나님의 섭리를 잊어버리고

걱정에 걱정을 더하여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 찬 채로 이삼일을 보내면서

다른 사람에게 까지 수심이 들어나게 했는데 하나님은 나보다

훨씬 빠르고 정확하게 인도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 연유를 물으니

간호원 두 명이 그 짐을 대전 역에서부터 우리 집까지

가지고 왔다고 한다. 6.25 사변동안 많은 위생병원 간호원들이

피난을 하거나 끌려가면서 대전을 거쳐 갔는데 이 두 분도

우리 집에 들려 나의 아내의 신세를 졌던 간호원들로

제주도에 있다가 서울로 가면서 대전을 들려 나의 아내를 찾아

인사를 하려고 했었다 한다. 나는 이 간호원들을 모르지만

이 두 간호원은 나를 잘 알고 있었다는데 부산에서 내가

기차에 올라 이동 경찰에게 어려움을 당하더니 급기야는

삼량진 역에서 짐을 하나 기차에 둔 채로 하차를 당하는

것 까지 다 보고 있었다. 대전에 도착을 했어도 내가

나타나지 않자 이 두 간호원들은 그 무거운 내 짐을 가지고

우리 집에까지 찾아와 나의 아내에게 전해주고, 반갑게

하룻밤을 유하며 지난날의 이야기를 하다가 다음날 떠났던 것이다.

나는 아직도 그 두 분의 간호원들이 누구였는지를 모르지만

그 분들께 감사할 뿐이다. 그리고 모든 일이 어렵게 되어 가는 것

같을 때에 나는 하나님을 잊고 허둥댔지만 그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기이하게 인도하고 계셨다.

나의 하나님께 다시 한번 감사를 드렸다.

 

 

대전 집에 와서 보니 우리교회에서 제 1대 목사 안수를 받으신

정문국 목사의 가족이 일사 후퇴 시에 월남하여 대전까지 와서

나의 집을 사용하고 계시고 또 중선대회에서 문서전도부장으로

수고하시던 최철순 선생도 대전까지 와서 우리 집 뒷방을 사용하고

계시기에 기쁘게 만났다. “비록 피난 중에 만남도 이리 기쁘거늘

하늘에서의 기쁜 만남을 위해 준비를 게을리 하지 말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 섭섭한 것은 모든 교우가 헌신하여 마련했던

대형풍금을 누가 뜯어가 버린 것이었다.

 

 

대전 집으로 오자 곧 서울로 갔다.

아직도 한강을 자유스럽게 건널 수 없었다. 나는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한강을 건널 수 있는 특별 도강증(渡江證)을

가지고 있었다. 원동지회에 총회를 가자고 나를 부른

이시화 목사를 만나니 다시 부산으로 가자고 하시며

만약 너무 늦었다면 부산서 비행기를 이용하자고 하셨다.

다행히 우리가 타기로 했던 대형 영국화물선이 떠나지를 않아서

우리는 배에 올랐다. 그 큰 배에 합회장 이시화 목사, 시조사 편집국장

왕대아 여사, 또 한국 교육사업을 돕겠다고 나왔던 다른 서양선교사,

그리고 나까지 네 사람뿐이었다.

다시 멀미를 할까보아 걱정을 했지만 그 큰 배에 짐을 많이 실었는지

거의 요동하는 것을 느낄 수가 없어서 전혀 멀미 없이 여행을 했다.

화물선인지라 서양 사람들과 같은 객실을 사용했는데

나만 영어를 모르니 걱정이 앞섰지만 한국말을 잘 하는

이 시화 목사와 왕대아 여사가 있으니 좀 위안이 되었다.

왕대아 여사는 시조사 편집국장이었지만 일본에서 일하고 계셨다.

해방직후 겨우 시조사가 자리를 잡으려 하는데 6.25 동란과

1.4 후퇴를 겪으면서 시조사는 문을 닫고 한국시조사의 자매기관인

일본 시조사에서 일을 하고 계시다가 원동지회 회의 참석차

우리와 동행하게 된 것이다.

 

 

여행 중 하루는 왕대아 여사가 “지금 증언보감을 한국말로

출판할 준비가 되었는데 단권으로 만들기에는 책의 부피가

너무 크고 두 권으로 하자니 너무 돈이 많이 들것 같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하고 물었다. 당시에 우리말로 번역된

예언의 신이 불과 몇 권 없었던 때인지라 새로운 예언의신이

출판되기를 무두 목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는 판에 증언보감이

부피가 너무 커서 출판이 불가능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당시 시조사에서 출판되는 모든 책들은 활자와 줄 간격이 다 같은

규격으로 정해져 나오고 있었는데 나는 활자의 크기도 그렇지만

줄과 줄 사이가 너무 넓다고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나는

왕대아 여사에게 “글자의 크기도 좀 줄이고 줄의 간격을 좁히면

부피가 거의 반 이상으로 줄일 수가 있지 않겠는가?”하고 제안을 하니

“어떻게 그렇게 책을 규격에 맞지 않게 만들어 낼 수가 있는가?”하고

의아해 했다. 그만큼 우리는 어떤 규정이나 틀에 맞추어, 살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다른데서 만드는 책들은 글자의 크기나

줄과 줄 사이를 좁혀서 만들고 있는데 책 읽는데 별 지장이 없습니다.

지금 두 줄을 석 줄로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설명을 하자

“그렇게 해 보겠다”고해서 드디어 증언 보감이 출판되었다. 모두들 기뻐했다.

 

 

이 일에 관해서 쓰는 것은 물론 이렇게 해서 책이 나온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이유가 있다. 그동안 선교사들이 본방인(本邦人)과는

거의 아무일도 의논하지 않고 일을 해왔다. 물론 그들의 헌신에

감사하지만 그들이 본방인들과 의논을 해서 일을 진행해 왔다면

많은 시행착오를 면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왔다. 이번에 비록

여행 중이었지만 왕대아 여사가 먼저 의논해 와서 간단히 해결하고

책이 출판 되었으니 하는 말이다. 나는 왕대아 여사가 나의 의견을

쉽게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용기를 얻어 여행 중에 합회장

이시화 목사에게 단독면담을 하고 싶다고 했더니 순순히 시간을

마련해 주었다. 이시화 목사는 내 생각에 우리나라에 나온 선교사중에

가장 성경을 잘 알고 계시던 분이시다. 이시화 목사는 아마

이십대에 선교사로 나왔는데 이미 목사 안수를 받고 나오신

것으로 알고 있다. 그분의 해박한 성경지식으로 이 분은

우리나라에서 주로 신학교를 맡아서 헌신 하셨다. 당시에

대 부분의 사역자는 이시화 목사가 길러서 내 보낸 사람들이었다.

이분이 지금은 한국연합회장이 되어 싱가포르에 가실 때에는

꽤 연세가 높으신 때였다. 이런 분에게 무엇이라고 말할 입장이

아니었지만 나는 왕대아 여사와 이야기를 하고 나서는

용기를 얻어 단독 면담을 요청한 것이다.

“이 목사님, 청년 때부터 한국에 나오셔서 이렇게 연세가

많아지실 때까지 헌신해 주셔서 정말 감사 합니다.

한 번 감사의 말씀을 하고 싶었습니다.”

“정 목사, 매우 감사 합니다.”

대답을 하시는 모양이 정말 나의 치사에 흐뭇해하시는 것이 역력했다.

“이 목사님,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립니다. 이렇게 한국에 나와

선교하시는 것이 매우 감사 하지만 가끔 선교사들께 섭섭한

생각도 들곤 합니다. 아마 저만 그런 것아 아닐 것입니다.”

그 분은 아주 의외라는 듯한 눈으로 나에게 말을 계속 하라는 모양이셨다.

“목사님, 우리나라도 이제는 독립을 한지가 오래 되었고 목사님이

우리 한국교회의 합회장인데 한국교우들을 독립한 나라의 교인으로

대접을 해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정 목사,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 예를 들면 조금 전에 왕대아 부인의 증언보감 책을

출판하는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일정시대에는 시조사에서

책을 한 권 만들어도 편집인이나 발행인의 이름은 전부 서양 사람의

이름으로 하고 한국사람 이름으로 한다는 것은 어쩌다 겨우

인쇄인이라는 명칭밖에는 없지 않았습니까?”

“................”

“이제 해방도 되었고 전쟁도 곧 끝나겠으니 한국 사람들도

자부심을 갖고 일할 수 있도록 이제는 서로 함께 의논하며

일할 때가 된 것 같아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아, 정 목사, 잘 알았습니다. 감사 합니다.”

나는 이 때 이분이 이렇게 말씀 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몰랐다. “함께 의논해서 일하자!”는 나의 뜻을 알아들었으리라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서 만들어진 이 증언보감 책에

“편집인 정동심”이라고 낸 것이 아닌가?

나는 이시화 목사를 찾아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내가 원동지회총회에 가면서 이 책에 내 이름을 내달라 했습니까?

한국이 독립 했으니 교회 내에서도 한국인과 의논하며 협조적으로

일해 나가자고 한 것이 아니냐?”고 했더니 “압니다! 압니다!” 라고

대답은 하면서도 이런 면에 별로 시정되는 일은 없었다.

한 가지를 지적하면 겨우 그 한 가지만 시정이 되곤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잘한 일인지는 모르나 후에도 기회가 적당하다고 생각이 되면

서양 사람들에게 종종 그런 말을 퉁퉁 한 적이 많이 있었다.

우리의 권리는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찾아야 온다고 생각이

되어서였다. 투쟁이나 충돌을 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탄 화물선은 먼저 홍콩에 들렸다. 데이비스 목사

(후에 한국연합회 회장이 됨)부부가 우리를 마중 나와

점심대접도 받고 홍콩 구경도 했다. 싱가포르에 도착하여

말을 들어보니 이곳도 사상적인 대립 때문에 우리처럼

남북이 갈려 있었다. 사상이 뭔지!

나는 원동지회장인 암스트롱 목사가, 일본합회장으로 계셨음으로

일본어를 조금 하시기에 그곳에서 왕대아 여사와 대총회에서 오신

교육부장과 함께 원동지회장 댁으로 갔다.

언어가 소통이 되지 않아 이런 영광을 얻게 된 것이다.

한 번은 이 댁에서 식사를 하다가 왕 부인은 느닷없이 “여기 앉아 있는

정 목사는 아들이 여섯이고 딸이 다섯이라”고 이야기를 했다.

암스트롱 목사 부부를 비롯하여 몇 몇 서양인 손님들은 아무 말 없이

마치 “당신은 목사가 아이들만 나았느냐?”는 듯이 쳐다보는 것 같아서

미안하기도 하고 무안하기도 했다. 문제는 나의 가정사정을

이야기해야 하겠는데 말이 안 통하니 답답하기만 했다.

왕 부인도 그 말을 해 놓고는 분위기가 쑥스럽게 되자

“이 정 목사는 후처를 얻고 자녀들이 많은데도 가정이 매우

화평합니다. 정 목사의 식구가 50명도 더 되는데 다

우리 교인이라”고 말을 하자 그 말에는 마치 “아이들은 많이 낳지만

전부 교인으로 데리고 있으니 보통 목사는 아니로구나!”하면서

감동을 받은 듯이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영어를 모르니

혼자 생각을 하고 혼자 해석을 했다는 말이다.

영어는 한 마디도 못하는 사람 이런 큰 회의에 참석은 했지만

앞으로 모든 사역자는 세계적 언어인 영어는 꼭 배워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총회를 필하기 전에 나는 암스트롱 목사에게 시가지에 나가보고

싶다고 일본어로 이야기를 했더니 시외에 떨어져 있는 지회

사무실에서 시내까지 가는 길을 친절하게 안내해 주면서 “시가지에

나가면 일본말을 약간씩은 다 하지만 일본사람으로 오해를 받지는

않도록 해야지 본국인들로부터 가끔 어려움도 당한다.”고 했다.

일본은 전쟁을 일으킨 나라로써 어디를 가나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다.

과연 시가지에 나가보니 나를 일본사람으로 알고 물건들을

사게 하려고 일본말을 꽤 잘해댔다. 시내만 잠시보고 무사히

돌아 왔다. 회의가 끝날 즈음, 어떤 서양 사람이 친절하게

자기 차로 나를 태우고 싱가포르를 구경시켜 주었다.

싱가포르도 한국처럼 반도인데 국도(國道)로 얼마간 들어가더니

이 이상 넘어가면 공산주의자들이 많아서 피살되기 쉽다고 했다.

우리나라의 삼팔선 비슷했다. 공산주의의 무서움을 다시 한번

느낄 수가 있었다. 언어의 불편은 있었지만 일주일간의 회의는

잘 끝냈다. “언어의 불편이 없는 그 나라에서 함께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일까?”하는 생각을 했다.

돌아오는 길은 비행기 편으로 오게 되었는데 며칠간 필리핀을 들렸다.

우리 교회대학에서 나의 셋째 아들 태중이와 노사라 씨

(노원호 장로의 여동생)가 공부하고 있었기에 만나게 되었다.

필리핀에 도착해 보니 이렇게 더운 곳은 처음이었다.

밤에 두 번 씩 목욕을 하고서야 잠이 들 수가 있었다.

필리핀대학 학장은 일본합회장으로 있던 넬슨 목사이었는데

한국서도 한 번 만나본 일이 있는 분이었다. 안식일에 설교는

사양을 하고 일본말로 잠간 이야기하고 넬슨 목사가 영어로 통역을 했다.

이곳에 있는 동안 나는 서로 대조되는 두 교회당을 방문하게 되었다.

한곳은 아주 깨끗한 천주교회당이었는데 매일 수천 명이

성채를 받기위하여 모여들지만 너무도 조용하고 엄숙한 것은

우리가 배울 만 했다. 또 한곳은 이슬람 교회당이었다.

이슬람교의 특징은 금요일이 주일이고 하나님 다음으로

돼지를 신처럼 위하고 성전 안에는 절대로 신을 신고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했다. 예수님 대신에 모하멧을 구주로 신봉하고 있는데

몇몇 신도들이 신발은 성전 밖에 두었는데 성전 안에서 웃통을 벗고

이를 잡고 있었다. 천주교당과는 아주 대조적이었다.

태중이와 노사라 씨등 한국 학생 서너 명을 데리고 나가

음식을 나누면서 영적으로, 학문적으로 열심을 내라고

간절하게 권면을 하고 필리핀을 떠나 대만으로 갔다.

 

 

내가 알기에 대만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국이 패하여

일본에 배상으로 주었던 땅인데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

패하게 되자 50여년 만에 중국에 돌려주었으나 중국도

내란이 일어나 장개석 씨와 그 일행이 패하여 대만에 와서

중화민국을 설립해서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지금은 자리가 잡히고 아주 깨끗했다. 시간이 없어서 우리 교회

병원만 방문을 했다. 아주 깨끗하고 잘 정돈된 병원이었다.

그런데 이시화 목사님은 내가 필리핀과 대만을 들렸기 때문에

일본으로 가려면 비자가 필요하니 나보고 혼자 하루를 머물렀다가

비자를 받은 후에 일본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영어를 모르는 나는

엄두가 나지를 않아 그냥 함께 일본으로 가겠다고 우겼다.

영어를 모르는 서러움이 이렇게 컸다. 한국의 사역자는

장래를 위해서 반드시 영어를 잘 배워두기를 부탁한다.

내 비자문제로 이시화 목사님의 염려가 컸지만 일본에 도착하니

일본입국관리의 실수인지는 모르나 아무 어려움이 없이 들어갔다.

요즘 생각해보면 참 나도 막무가내였다. 일본에 오니

조금이나마 일본말을 할 수가 있어서 내 집에 온 듯 했다.

 

 

일본에 박정현 씨라는 분이 호리끼리 교회에서 전도사로 있었는데

한국 사람도 꽤 많이 참석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한 번

그 교회를 찾아가 보고 싶다고 했더니, 일본 합회장은

“마침 자기가 호리끼리 교회에서 내일, 안식일에 침례식을

거행하기로 했었는데 너무 바빠서 연기하려고 생각중인데

정 목사가 가서 대신 침례를 베풀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일본 현지목사도 아닌지라 사양을 했으나 한국 연합회

부회장에게 부탁하는 것이라며 강권하기에 승낙하고

그 교회에 가서 일본사람에게 침례를 베풀었다.

내 일생 처음으로 일본인에게 침례를 주었는데

다나까라는 부부였다. 그 교회는 바닷가에서 먼 곳이라,

침례식을 먼저 거행한 후에 다른 손님을 받기로 공중목욕탕과

계약을 하고 교인들이 목욕탕을 깨끗하게 닦는 등

정성스럽게 준비하여 침례식을 거행하였다. 침례를 받는 사람의 태도가

얼마나 정성스러운지 또 침례 후에 얼마나 감사한 마음으로

간증을 하는지 내가 크게 감동을 받고 느끼는 바가 컸다.

또 침례를 받는 사람들이 침례목사를 대접한다고 며칠 전부터

준비한 정성스러운 음식을 대접하는데 목이메일 정도였다.

침례식이 끝나고 박정현 씨와 일광이 유명한 바닷가에 가서

좋은 구경을 하고 하룻밤을 묵고 돌아왔다.

일본에서 한 주일을 더 묵는다고 해서 나는 몇 곳을 더 돌아보았다.

우선 한국재림교회의 발상지 고베를 찾았으나 우리가 잘 아는

구니야 목사는 이 곳을 이미 떠났기에 한국인으로 교리를 처음 받은

손흥조 씨 등이 침례를 받았다는 곳만 방문을 하고 돌아왔다.

그곳을 방문하며 우리한국에 복음의기별이 전해진 하나님의

기이한 섭리에 감사했다.

 

 

8. 최승현 형제

 

 

최승현이라는 청년형제는 함경남도 함흥사람으로 일본에 간지가

꽤 오래되었는데 함흥에서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가 재가하자

우리교회에 다니는 할머니와 살면서 믿음을 배우고 함흥에서

우리교회에 잘 나오다가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이다.

최승현 형제가 함흥에 있을 때에 나는 북선대회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고 또 들은바가 있어서 이번에 꼭 그 형제를

방문하고 싶은데 그 청년이 있는 곳을 알 길이 없었다.

생각다 못해 한국교회와 인연이 많고 한국까지 다녀가신

국곡수(구니야) 목사에게 알아보기로 했다.

일본연합회에 문의하여 국곡수 목사 계신 곳을 찾아가니

나에게 한국교회의 사정을 물으시면서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하나님 안에서의 사랑과 교제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를

십분(十分)느끼게 해 주시는 분이었다. 구니야 목사님은

최승현형제의 주소와 근황은 물론 다른 한국인들의 사정도

소상히 알고 계셨다. 구니야 목사님은 “한국인 교우들을

만날 때마다 그 기쁨이 더해가기 때문에 최 형제의 집을

종종 방문 한다.”고 하셨다. 그분이 얼마나 한국인들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알만했다. 구니야 목사는 최승현 군의

신앙경험을 말해주면서 “최승현형제가 동경에서

약 반시간 떨어진 곳에서, 창씨개명을 하여

요시노부슈다이(義信主待)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으니

그 동리에 가서 일본이름으로 찾으라.”고 친절하게 알려 주셨다.

기차를 타고 그 동네에 가서 어떤 사람을 붙잡고는

창씨개명 한 이름으로 최승현형제의 집을 물으니 그 사람은

“저기 서있는 아이가 그 집 아이라.”고 가르쳐 주어서

쉽게 최 형제의 집을 찾았다. 마침 최승현형제가 집에 있어서

반가이 만났다. 일본여성을 부인으로 맞아서 아들 하나를 나아

키우며 살고 있었다. 방으로 들어가서 보니까 한국식 삿자리를 깔았는데

하도 오래 사용하여서 다 헤어져 부스러기가 널려 있는 것이

경제적으로는 그리 부유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만나고 싶은 사람을

외국에서 만나니 더욱 반가운 느낌이 들었다.

 

 

그와 결혼한 일본여성은 동경에 있는 우리 위생병원

간호학교를 졸업한 간호원으로 면허를 갖고 일하던 여성으로

최승현 씨의 믿음과 생각이 자기와 같아서 가정을 이루었다고 했다.

그 여성은 결혼하고 나서 간호원을 그만두고 남편과 함께

자전거수리를 하고 있었다. 내가 최 형제와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남편에게 “목사님과 말씀을 나누라.”하고는 나가서 그 자전거를

친히 수리하고는 남편에게 돈을 들여놓는 것을 보았다.

남편에게 잘 순종하는 전형적인 일본여인이었다.

점심을 먹으면서 최승현 씨는 자기의 창씨개명 하던 일을 이야기했다.

사실은 “의로운 믿음으로 주(主)님을 모신다.”는 뜻으로

요시노부슈시(義信主侍)라고 했는데 “모신다.”는 뜻의 시(侍)자와

“기다린다.”는 뜻의 대(待)자가 거의 비슷하니까 관리들이 잘못 적어서

이렇게 요시노부슈다이(義信主待)가 됐다고 하며 서운해 했다.

이제 다시 고치려면 재판도 해야 하고 변호사비용과 수속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포기 했다고 한다. 나는 한문을 조금 아니까

“그것이 바로 전화위복”이라고 했더니 그 이유를 내게 물었다.

나는 “主侍(모신다)라는 이름에 실수로 획을 하나 더 넣어서

主待(기다린다)가 되었지만 그 잘못된 한문 이름의 뜻은

“의로운 믿음을 가지고 주를 기다린다!”는 의미이니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이 얼마나 더 좋은 뜻인가?”라고 말해 주었다.

그러자 최승현형제는 “참으로 그렇군요. 정말 이제부터 내 이름에

감사하며 그렇게 살겠습니다.”하며 대단히 기뻐했다.

창씨개명 하나를 하더라도 신앙적으로 하려고 애쓰는 청년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이 최 현 형제는 참 특별한 형제였다.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목사님! 제 집을 찾아오면서 동네 입구근처에

집을 짓다가 버려 둔 것을 보셨습니까?”

“보긴 보았지만 그것이 최 형제의 집을 짓던 것입니까?

왜 지금 중단을 했습니까?”

“실은 제가 살집이 아니고 우리예배당을 짓고 있었는데

원래는 그 자리에 신사(神社)가 있다가 폭격을 당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신사자리에 예배당을 짓고 전도하려고 했는데 신사자리에

예배당을 짓는다고 동네사람들이 소송을 제기해서 중단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중단하지 왜 짓다가 그냥 두고 있습니까?”

“목사님! 재판을 하면 재판관과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는 안식일 교인인데 신사를 짓지 말고 하나님 섬기는 예배당을

지어야 된다고 전도하고 싶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말 독특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젊은이였다.

그뿐 아니라 대담하고 엉뚱한 청년이었다.

일본이 대동아전쟁을 일으키고 극심하게 발악을 해서

일본 내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물론 우리 안식일교회도

많은 탄압을 받게 되었다. 일본연합회장 “오구라”목사도

잡혀가고 일본 시조사도 문을 닫았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일본교우들도 교회집회를 중지하고

꼼짝 못하고 있는 비상시에, 최승현형제는 용감하게

일본 경시청에 들어가 “당신네가 만일 참된 교회를

이렇게 핍박하고 지도자를 잡아 가두어 예배를 못 드리게 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 나라를 폐하실 것이니 주의하라”고

겁도 없이 큰 소리로 야단을 쳤다한다. 그러자 경시청사람들은

최승현 씨에게 “당신이 누구이며 뭐 하는 사람인데 여기 와서

큰 소리 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최 형제는

“나는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회 교인입니다. 바로 당신네가

예배도 못 드리게 하고 전도도 못하게 하면서 잡아드린

교회책임자가 담임하는 그 교회의 교인입니다.”라고 경시청 안에서

항의 겸 전도를 한 것이었다. 경시청 사람들은 최 형제가

한국인 신분임을 알고는 매우 까다롭게 취조를 시작했다.

 

 

최승현 형제는 기다렸다는 듯이 더욱 큰 소리로 성경을 가지고

종교탄압과 교회지도자들을 투옥한 일본의 잘못을 조목조목 지적하며

그 사람들을 당황케 했다. 그러자 그들은 최 형제에게

“그러면 당신은 어쩌자는 것인가?”라고 물었다.

최 형제는 이 순간 자기의 말 한마디에 체포당할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최 형제는 두려움 없이 경시청 사람들에게

“일본에 있는 우리교회본부의 문을 닫고 지도자를 잡아간 것은

당신네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만 나는 당신네가 잡아가던지 말든지

예배드리려고 이미 집을 하나 얻어 놓았습니다. 우리는 참된

신앙을 가지고 우리의 구원보다는 일본 나라를 위해서

기도드리려고 합니다! 허락 하시오!”라고 선언을 했다. 놀랍게도

경시청사람들은 “당신이 예배 할 집을 얻었으면 나가서 당신과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과 예배를 드려도 좋다”라고 허락을 했다.

그래서 동경 한복판에서 집을 얻어서 예배를 드렸다는 것이다.

최 형제는 지금 생각하니 경시청에 들어가 호통을 친 것은

분명 자기의 힘이 아니었음을 여러 번 강조했다.

경시청을 다녀와서 허락받은 집회장소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자

우리 교인뿐만 아니라 각 계층의 사람들이 참석을 했다.

그 중에 한 변호사는 최 형제의 전도를 통해 진리를 깨닫고

“니고데모”처럼 거듭나서 교인이 되었다 하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목사님! 얼마 후 정 목사님이 청양에서 사고가 생겨 재판도 받고

형무소로 가게 된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전도해서

개종한 이 일본변호사와 목사님의 구명을 위해 여러번 의논하였습니다.

그 변호사에게 비용은 내가 부담할 터이니 조선에 나가

정 동심 목사를 위해 변호를 해 달라고 청구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변호사는 여러 가지로 알아본 결과 시국이 시국인 만큼

일본인변호사가 나간다 해도 정동심 목사는 형을 면하기가

불가능해 보인다 해서 포기한 일도 있습니다.”

 

 

나를 위해 일본에서도 구명운동 한 것을 늦게나마 알게 되었다.

너무도 감사했다. 최승현형제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를 않았다.

놀라운 일은 그 지역에 많은 폭격으로 다른 집들이 불에 타거나

무너졌지만 최승현형제가 예배드리는 집만 폭격당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기에 불신자들도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증거라고

말을 했다는 것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일본 합회장도 석방이 되어

동경 우리본부교회에 참석하고 있는데도 교회집회가 잘 안되지만,

최승현형제가 와서 설교를 한다면 입추에 여지없이 참석을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일본에 간 것이 1952년경이니 최 형제가

경시청에 들어가 담대히 호통친일도 7년이나 지난 시기인데도

요시노부슈다이(義信主待)형제가 설교를 한다면 교인은 물론

불신자도 많이 참석을 한다는 것이었다. 한국 사람으로서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승리의 생활을 하면서 복음을 증거

한다는 것이 매우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옥에도 티가 있듯이,

최승현형제가 일본이 전쟁 후 교회를 재건할 때에 전쟁 기간동안

신실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한명도 재건위원에 참석시키면 안 된다고

계속 강경한 주장을 해서 문제를 많이 일으켰다고 한다.

마침 점심시간이 되자 “점심준비를 어떻게 할까?” 망설이는 일본인

부인에게 최승현 군은 “목사님은 식사비까지 출장비로 받아서 다니실

것이니 염려 말고 찬밥 있는 대로 가져와 대접하면 된다.”라고 이야기 했다.

그러자 일본인 부인은 정말 찬밥을 점심으로 내어 왔다.

최 형제의 성격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만남의 기쁨이 너무

좋았기에 우리는 찬밥이지만 맛있게 먹었다. 최승현 부부는

열 한 살쯤 된 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세상학교에 보내면

안 된다고 해서 자기 집에서 부부끼리 성경도 배워주고

다른 책을 얻어 학교공부를 가르치고 있었다. 나로서는

그 아이를 정규학교로 보내지 않는 것은 유감스러웠지만

그 부모의 믿음은 칭찬할 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승현 형제는 자기의 포부를 말하면서 예언의 신 말씀대로

“의료사업이 하나님의 사업에 오른팔과 같다.”라는 생각이 들어

어느 지방의과대학에 지망을 했다한다. 그런데 자기는 어느 모로

보아도 의과대학에 입학할 정도가 못되는데도 입학시험이나

그 까다로운 수속도 그저 형식적으로 요구를 하고 있어서

하나님께서 내 뜻을 이루어 주시는 것 같다고 했다.

최 형제는 그간 있었던 경시청의 일이나 의과대학 입학과정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도우심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며

나의 연약한 믿음을 재삼 반성하게 되었다. 그 집에서

하루를 묵고 떠날 때에 최 형제는 이런 부탁을 했다.

자기가 내년에는 의과 대학에 입학할 것 같은데 공부가 끝나면

고국에 있는 위생병원에서 일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국 연합회가 자기학비의 일부를 대어주어

자기와 관계를 맺게 되면 자기도 정신적으로 항상 고국을

염두에 두게 될 것이며, 의과대학을 졸업할 때 즈음에

가족을 설득하여 한국에 나가 한국의료사업을 하도록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자기가 학비를 조달 할 수가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고 힘주어 강조를 했다. 나는 해방과

육이오사변을 겪은 우리 교회가 아직 전쟁의 어려움으로 인하여

재정적으로 너무도 힘든 때인지라 시원한 대답을 할 수가 없었지만

마음에 그의 부탁을 담고 돌아왔다. 그 후에 최 형제가

의과대학에 들어갔는지도 연락이 없었지만 나도 연락을 하지 못해

그때의 만남이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최 형제를 만난 후에 국곡수 목사를 다시 만나니 최 형제에

대해 많은 칭찬을 했다. 나는 최 형제의 정신상태가 보통을

넘는다고 말하니 국곡수 목사는 웃으면서 아다마(머리)가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최승현 형제만큼 신자를 많이 얻는

사람이 없다하며 칭찬을 많이 했다. 최승현형제도 구니야 목사는

가끔 자기 집에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고 그 허름한 집에서

잘 자무시고 간다고 하며 감사해 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맺어지는 사랑은 국경도 초월함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 후에 서로 연락도 안 되어 최 형제가 원했던 한국연합회차원의

도움도 들어주지 못한 것이 아직도 미안한 생각으로 남아 있다.

숙소에 돌아와 최승현형제의 신앙 경험담이 계속 내 마음을

벅차게 하면서 한국에서 있었던 세 청년의 일이 기억났다.

1943년, 한국연합회책임자들이 검거되면서 그 여파로

황해도 지역의 작은 지방교회에서 세 명의 청년교우가

경찰에 잡혀 들어가 분리취조를 받은 일이 있는데 당시에는

이 분리취조가 사람 잡는 수단이었다. 다른 사람이 하지도 않은

말을 가지고 다른 쪽에 와서는 말 한 듯이 하는 그들만의

악랄한 수법이었다. 이런 수법에 걸려든 세 청년 중 두 청년은

겁이 났는지 신앙을 버리겠다고 하고 유독 한 청년은 취조관에게

담대히 자기의 신앙을 증거 하였다. 이 청년은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이야기를 하며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회는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공경하며 세상나라들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그 분의 말씀을 따라 생활 한다.”라고 담대히 이야기를 하자

취조관들이 감동을 받고 다른 두 청년을 불러 들여서 “너희도

믿으려면 이 청년처럼 믿어라!” 하면서 모두 훈방 했던 일이 기억이 났다.

 

 

집에 돌아오니 남선대회 직원들은 피난길에서 아직 돌아온 직원은 없고

나의 아내와 두 자녀만 있어서 마음이 아팠지만 오래지 않아

직원들이 돌아오면서 다시 자리가 잡히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며 이시화 목사는 금년에 합회총회를

해야 되겠는데 서울보다는 충청도 지방에서 하고 싶다고 하기에

대전에서 하게 된다면 교인들을 다 동원하여 도울 마음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합회행정위원회에서는 1952년 6월에

충청북도 청주에서 하기로 결정이 됐다. 합회총회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기에 여러 지방을 보살피는 일을 하면서

대회장의 일을 다시 시작했다.

 

 

그중 한 가지가 남선대회 연합침례식이다.

그간 육이오사변과 일사후퇴 등 어려운 사정으로 침례식을

거행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금만경(?) 광활한 벌판에 있는

개울에서 침례식을 거행했는데 52명이 함께 침례를 받았다.

50명이 넘는 신자가 함께 침례를 받은 것은 교회역사상

처음인 듯 하다. 이때까지는 1945년 12월경 강원도 묵호에서

반내현 형제가 인도한 40여명에게 침례를 준 것이 최고의

숫자였던 것 같다. 당시에 한국 교계에서 침례자를

얻는다는 것은 정말 어려웠던 때이어서 52명에게 침례를

준다는 것은 재림 교계에서 잊을 수 없는 쾌사(快事)였다.

그런데 51명을 침례주고는 다 끝난 줄 알고 물에서 나오는데

저쪽에서 한명이 뛰어 오면서 침례를 받겠다고 소리를 쳤다.

알고 보니 자기차례를 기다리다가 더 기다릴 수가 없어

넓은 벌판에서 적당한 장소를 찾아 소변을 보고 오느라고

늦었다고 해서 모두 크게 웃으면서 52번째 신자에게

침례를 준 일이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또 한 가지 기억에 남는 일은 삼육신학원에서 일하는

임병의씨가 나에게 삼육신학원에서 자동차 운전할 분을

남선 대회에 있으면 추천해 달라고 했다.

내가 합회총회 전에 각 교회를 순시하다가 마침 대전서

멀지 않은 금산지역, 지량리라는 곳에 우리교인으로 일본에 가서

자동차, 특히 트럭에 관해서 배우고 해방 후에 한국으로 나온

김동해라는 형제가 생각이 나서 추천했다. 임병의 씨는

내가 추천한 김동해 씨를 불러서 일하게 했고 이 분은

신실히 일하여 운전과 구내발전소등을 책임져서 삼육신학원에서

없으면 안 될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었고 삼육신학원 교회의

장로가 되어 봉사했다. 후에 그의 자녀들도 모두 교회 내에서

신실히 일하게 되어 하나님께 감사하다.

 


Articles

36 37 38 39 40 41 42 43 44 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