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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27


 

(임병의 씨는 내가 추천한 김동해 씨를 불러서 일하게 했고

이 분은 운전과 구내발전소등을 책임져서 삼육신학원에서

인정받게 되었고 삼육신학원 후에 그의 자녀들도 모두

교회 내에서 신실히 일하게 되어 하나님께 감사하다. 연재#26 끝부분)


 

9. 청주 합회 총회



1952년 6월,

청주에서 한국연합회총회를 하게 되었다. 해방 후 교회가

아직 자리도 잡히기 전에 육이오 사변과 일사 후퇴로 인해

교회가 당한 피해가 너무 커서 복구하기가 벅찬 때에

이렇게 청주에서 합회총회가 열린 것은 기적 같은 일이며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 되었다. 총회에 관한 결정 사항들은

교회 역사를 보면 알겠지만 나와 관계된 한두 가지만

말하고 싶다. 6.25 동란과 1.4 후퇴 때에 이북에서 월남하여

이 총회에 참석을 하게 된 분도 꽤 계셨는데 김O장로나

박O 목사 같은 분들이 계셨다. 박O 목사는 나와 동갑으로

생일은 나보다 늦지만 순안 의명학교는 나보다 선배였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별 허물없이 친구로 지내왔다.

 

 

그런데 앞서 말한 대로, 원륜상 목사는 1946 년 3월경에

내가 원동지회부회장으로 선출된 것을 알려 주었다.

원동지회부회장으로 어떤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보다는

오랜 시간동안 일본의 압제아래서 고생한 한국교계에

정신적인후원을 위한 것이 아니었는가 하고 생각이 된다.

그나마 내가 중선대회장으로 서울에 있다가 남선대회장이 되어

대전으로 가면서 원 지회부회장직분을 그만두게 해달라고

원 목사를 통해 원동지회에 사의를 표명했었다. 원 목사는

나에게 “목사님, 아무말씀 하지마시고 가만히 계십시오.”라고

하기에 그대로 끌고 오다가 이번 청주총회에 남선대회장과

원동지회부회장의 직분을 가진 채로 참석을 했다. 그런데

친구로 지내던 L목사가 이 원동지회부회장직을 맡고 싶다고

운동을 하게 된 것이다. 얼마나 열심히 운동을 하게 되었는지,

한국교회역사에 없던 이 분의 후원회까지 만들어 김O 장로,

나의 친구 되는 박O 목사까지도 그분의 후원회에 참가하여

적극적으로 운동을 하는 부작용까지 생겨났다. 문제는

원동지회부회장직은 원동지회총회나 원동지회행정위원회에서

결정해야 되는 일인데 이일을 한국연합회 총회에서 선출하자고

운동을 하고 있으니 법적으로도 문제가 되지만, 더구나

개인적으로는 내가 현재 그 자리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의 친구 되는 L목사가 몇 분과 함께 선거운동을 하고 있으니

비록 내가 사의를 표명했던 일인데도 불구하고 조금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현재 내가 그 자리에 있으니 그런 선거운동이 가부간에

옳다, 그르다, 라는 말도 할 처지가 못 되어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합회총회 선거위원회에서 발표하기를 원동지회부회장은

그냥 정동심이로 되었다고 발표가 되었다. 일이 그렇게 되고 보니

원동 지회부회장의 자리를 원했던 L목사나 맹렬히 운동을 하던 분들의

섭섭해 하는 모습도 보기 민망했지만, 이 분들이 나 보기를 얼마나

어색해 하는지 그것이 눈에 띌 정도였다. 그래서 생각다 못해

안식일시간이 되어오는 금요일오후에 나는 L목사에게

“우리 목욕이나 하러 갑시다.”하고 청했다. 역시 친구는 친구이었다.

L목사는 목욕하러 따라 나서면서 “정 목사! 대단히 미안합니다!”라고

하기에 “미안하기는 뭐이 미안해?”하고 되물었다. “아, 내가 쓸데없는

운동을 한 것 같아 미안하오!”라고 재차 사과했다.

“L목사! 나 그런 것 괴이치 않아! 그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지

뭘 그래!”하고 몇 마디 이야기를 서로 나누고 나서 시원하게

목욕한번 하고 나니 우리는 다시 친구로 돌아와 있었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말하는 것은 누구를 비난하거나 섭섭했던 일을

말하려 함이 아니다. 우리 한국재림교회는 바닥이 본래 작은 곳이니

친구사이에서나, 잘 아는 동료사역자사이에서 이런 일이 얼마든지

있을 수가 있으나, 이런 일이 있은 후에 한시라도 빨리 서로

섭섭함이나 어색함을 해결하지 아니하면, 교회 내에 파가 생겨나기

마련이니, 부디 속히 해결하여 사단이 사역자 개인의 신앙은 물론이오,

우리교회의 귀중한 사업을 방해하지 말게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지체함 없이 이렇게 목욕 한번으로 다시 옛 친구로 돌아가 평생을

친구로 보냈고 그의 자유손이나 나의 후손들도 이런 일로 한번도

사이가 벌어진 일이 없이 서로 형제처럼 가까이 지나고 있으니

하나님의 은혜라 생각이 된다. 나의 자유 손들이나 L목사의 자유손도

그 점을 명심하고 계속 한 형제처럼 지내기를 바란다.

 

 

안식일이 지나고 일요일 집회에서 나는 마음먹은 대로

원동지회부회장직을 사임한다고 했다. 이 때에 원동지회에서

지회장을 비롯해서 4-5명의 원동지회부장들이 참석하고 있었다.

내가 사표를 제출하자 원동지회장 암스트롱 목사는 “그러지 말고

정 목사가 부회장의 직분을 그대로 수행하라.”고 간곡한 말로 권했다.

어리석게도 나는 만약 내 사표가 수리되면 절차의 합법성에 관계없이

다시 이번 합회총회 선거위원회에서 다른 사람을 원동지회부회장으로

선출 할 것으로 확신했었다. 이렇게 해서 L목사가 원동지회부회장

자리를 합법적으로 계승할 수 있으리라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오해이며 실수였다. 암스트롱 목사는

“본인이 그렇게도 사의를 원한다면 원동지회의 책임자로

그 사표를 받겠지만 원동지회부회장직은 여기서 선출하지

못한다.”하며 더 이상 한국연합회에서 원동지회부회장 선출하는 것을

방임하지도 않고 원동지회부회장에 한국인을 두지 않을 것을

강력하게 암시했다. 합회총회에서 분수에 넘게 지회에서 다루어야 할

지회부회장선출에 관한 일을 한 것을 방임하는 것처럼 하더니 결국은

이후부터 아직까지 원동지회부회장직을 한국연합회에 더 이상

주지 않게 된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청주총회 시에 또 한 가지 나와 관계가 있는 일은 대회분리에

관한 일이다. 나는 1947년부터 1952년까지 약 6년간 남선대회를

맡아 일 해왔다. 지역은 꽤 넓으나 교인 숫자로 보면 남선대회를

둘로 나눌 때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남선대회를 호남과 영남,

두 지역으로 나누자는 의견이 나왔다. 이 문제는 선교적인

필요보다는 육이오전쟁으로 인해서 북선대회가 문을 닫게 되면서

남아도는 인적자원이 가져온 하나의 부작용이 아니었나? 라고

생각이 된다. 그러나 이 문제도 몇 명이 힘을 합하여 벌리는 운동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이 문제에도 내가 관련된

것이기에 아무런 내 의견을 말하지 않았다. 들리는 소문에는

영남대회는 그냥 정동심 목사를 두고 호남대회를 새로 시작해서

어떤 분들을 선출한다는 계획이 이미 정해진 것 같았다.

나는 이시화 목사에게 “호남대회장은 누구로 할 생각이냐?” 물으니

“새로운 사람을 찾아 안수를 주어 대회장을 하도록 하겠다.”는

말을 했다. 다시 말해서 남선대회를 둘로 나누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받아들이되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제외시키고 새로운 분에게

안수를 주어 호남대회를 맡기겠다는 의지의 표현 이었다. 결국 남선대회를

둘로 나누어 영남대회는 내가 계속 맡고 호남대회는 허만식 씨에게

목사 안수를 주어 호남대회장으로 삼았다. 남선대회를 둘로 나누니까

지역이 작아져서 일하기는 매우 쉬워졌다.

 

 

청주 합회총회 후,

1952년 하반기에 대전 삼성국민학교를 빌려 전도회를 했다.

신종균 목사를 강사로 초청해서 2주일동안 해 보았는데

대전은 워낙 유교적성향이 많고 기독교에는 너무도 관심이 없는

지방이어서 큰 성과는 없었지만 그래도 개종한 사람들 중에서는

침례교회에서 집사 일을 하던 젊고 얌전한 분이 개종하여 후에

유력한 장로가 되었다.

 

 

10. 삼육 신학원으로

 

 

1952년 합회총회가 있기 전부터 삼육신학원 원장이던

이제명 목사(JAMES LEE)가 계속해서 나를 삼육신학원으로

오라고 연락을 해왔다. 합회총회 후에 대전으로 돌아와

전도회를 하는 중에도 또 오라고 연락이 왔다.

그래서 너무 사양함도 바른 길이 아니라 생각이 되어

1953년에 가도록 하겠다고 허락을 했고 그렇게 결정이 되었다.

막상 떠나기로 작정을 하고 나니, 1947년에 와서 1953년까지

만 6년을 재직한 남선대회에서의 일들이 떠올랐다.

남선 대회는 전라 남북도, 경상 남북도, 충청남도

이렇게 5도를 포함하고 있었으니 상당히 넓은 지역이었다.

해방 후의 힘든 상황아래서, 또 민족의 가장 아픈 6.25전쟁을

치루면서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무한히 감사했다.

또 해방 후 만 2년이 지나도록 교회로 돌아올 생각을 못하던 분들과

허심탄회하게 의논하여, 이응준 씨, 권숙련 씨, 허만식 씨, 박찬문 씨,

신종균씨 등이 다시 나와서 전부 목사가 되어 열심히 일하는 것을 보니

하나님께 감사를 아니 드릴수가 없었다.

 

 

또 한 가지 감사한 것은 남한5도를 위해 일하는 동안, 요즘 말하는,

소위 지방색이 없이 지낼 수 있었음을 감사드린다.

내가 남선대회로 와서 제일 먼저 방문한 지역이 전라북도

금산 지역이었다. 내 일생 처음 방문하는 남쪽지방이었다.

한참을 걸어 들어가다가 높은 곳에 이르러 동네 이름을 물으니

“하(下)소리”라고 했다. 한참을 내려가 평지에 도달하여 다시

그 동네 이름을 물으니“상(上)소리”라고 했다. 지형으로 보면

높은 지역이 의당 “상소리”일 것이고 낮은 곳이 “하소리”일 것인데,

하도 이상하여 그 연유를 물으니 평지 좋은 땅에서 양반이

살았음으로 지형이 낮아도 “상소리”가 되었고 지대가 높은 지역에는

상민이 살았기에 지형이 높아도 “하소리”가 되었다고 했다.

이렇게 우리나라는 작은 나라인데도 유교사상이 잘못 전해져서

양반, 상놈에 동서남북이 서로 갈라져서 남쪽지방 사람이니 북쪽지방

사람이니 해서 늘 잘 화합하지 못하는 백성이 되고 만 것이다.

 

 

내가, 전에 천도교에서 발간하는 조선지의라는 책을 사다

보았는데 어떤 암행어사가 조선 땅을 다니면서 조사하여

임금에게 바친 글에 8도 사람은 너무도 달라 서로 화합할 수

없다는 말을 한 것을 본 기억이 있다. 그러나 내가 6년간

남쪽 5도의 다른 성격을 가진 사람들과 지방색의 어려움이 없이

지낼 수가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안에서 한 믿음과 한 소망과

사랑 가운데 지났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북쪽이 고향인 나를,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분들이 아껴주시고 사랑으로 도와

주셨음을 감사 드렸다. 내가 지금까지 사역 하는 중에

제일 오래 지낸 곳이 바로 이 남선대회인 것 같다. 남선대회는

영남대회로 이름하고 경상북도 대구로 본부를 옮기게 되었다.


 

1953년 4월 경,

남선대회를 떠나기 전에 대전근방 교우들을 방문하기로 하고

나는 내 아내와 이곳저곳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뒤에서 거센 총소리가 나더니 그 총알이 내 모자를 스치고 지나갔다.

너무 놀라 뒤를 돌아보니 원두막 옆에 젊은 군인 두세 명이

총을 가지고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전쟁 후라 군인들에게는

질서고 뭐고 없었다. 아마 우리 부부를 젊은 남녀가 지나간다고

생각하고 장난삼아 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된다. 이 아슬아슬한 일을

면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렸다. 나의 후임으로는 나와 함께

일하고 있던 신종균 목사가 취임하게 되어 감사했다.

 

 

1953년 8월 중순경,

삼육신학원이 있는 삼육동으로 전근했다. 매우 오랜만에 다시

교육기관으로 왔다. 이때도 김용길 씨가 트럭을 가지고 오셔서

우리 이삿짐을 싣고서 삼육동으로 갔다. 삼육동의 모든 제직들이

따뜻하게 반기어 주어 무엇보다 감사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하고 보니

나를 오라고 청한 이제명 목사는 이미 필리핀으로 전근을 가셨다 한다.

매우 당황했다. 이제명 원장이 나를 부를 때에 내가 맡을 직책이

무엇인지를 묻지도 않고 왔는데 나를 청한 분은 이미 필리핀으로

가버렸으니 공중에 떠있게 된 나는 얼마나 후회를 했는지 모른다.

내 나이 57세였는데 평생 이렇게 어리석음을 느낀 적이 없었다.

 

 

무슨 일을 맡기든지 잘 감당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드렸다. 나와 같은 고향 친구인 박원실 목사도 열심히

일하고 계셨고 내가 대전에서 올려 보낸 김동해 씨도 열심히

일하고 계셨다. 얼마 시간이 지나자 나에게 삼육신학원 원장의

책임을 맡으라는 결정이 났다.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었으나

이제명 목사는 이미 이렇게 생각을 하고 나를 불러들였고 다만

내가 도착하기 전에 결정이 나지를 않았던 모양이었다. 이 때는

정말 내가 역량이 부족하여 감당할 수 없는 책임이라는 생각에

가슴만 답답했다. 그야말로 호미난방(虎尾難放-호랑이의 꼬리를

붙잡고 있음)의 느낌뿐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나의 직분을 위하여

이렇게 많은 기도를 해 본적도 별로 없었다. 내가 왜 삼육

신학원으로 왔는지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다만 박원실 목사 같은

고향 친구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

 

 

삼육신학원은 정부로부터 인가를 받지 않은 교육기관이었다.

해방 후에 한국에 다시 나온 선교사들 중 몇 분들은 “자라보고

놀란 자가 솥뚜껑만 보고도 놀란다.”는 속담처럼 일본인 당시에

정부로부터 많은 어려움을 당했던 경험 때문인지 대한민국이

독립이 되었는데도 정부로부터 학교인가 맡는 것을 적극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특별히 한국연합회장 이시화 목사는

“우리가 교육기관은 설립하되 정부당국의 인가는 절대로

받지 말자!”는 주장을 강력하게 하시는 분이었다. 그래서

삼육신학원도 정부의 인가 없이 운영되고 있었다.

나는 삼육신학원이 인가가 있어야 학교에 입학한 학생들도

안심을 할 것이며 또 대한민국이 독립국가가 되었으니

정부의 인가 없는 학교들은 곧 정리가 될 것이 자명한 터라

인가신청을 하자고 했으나 선교사들의 강력한 반대로 시작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급변하는 한국의 모든 사정을 보면서

“틀림없이 어느 날, 인가가 없는 학교들은 폐쇄하라는 불똥이

떨어질 터인데,”라고 생각하며 전전긍긍해야만 했다.


 

그런데 기회가 왔다. 내가 삼육신학원장의 직을 맡은

그 다음해인 1954년에 이시화 목사가 대총회에 참석하면서

나에게 합회장 서리를 하도록 결정하고 떠났다.

선교사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이때 삼육신학원 인가를 맡지 않으면

큰 어려움이 올 것 이라는 생각에 학교인가를 위해 서둘렀다.

이때 교육부장으로 일하고 있는 이여식 목사를 사무실로 불렀다.

“이 목사, 삼육신학원은 한국안식일교회의 최고 교육기관인데

인가가 없다니 될 말이요?”

“정 목사님, 그래 어떻게 하자는 것입니까?”

“우리가 용기를 내어 이번에 인가를 한번 얻도록 해 보십시다.”

“글쎄요, 합회장도 없는데 이런 중대한 일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교육부장 이여식 목사까지 이렇게 말하니 나도 조금 흔들렸다.

허나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인가를 받아야 우리 청년들을 계속

교육시킬 수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이 되었다.

“이 목사, 지금 이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지금 합회장 서리에 삼육신학원장 자리에 있소.

지금이 절호의 기호이니 한번 인가를 받도록 용기를 내 봅시다.”

 

 

내가 비록 이렇게 강하게 말은 하지만, 내가 생각해도

교회규칙대로 하면 도무지 사리에 맞는 말이 아니었다.

이런 중대한 일은 학교직원회와 한국연합회 행정위원회를 통해

결정을 해야 하는 것이 원칙적인 일이었다.

그러니 교육부장 이여식 목사가 주저하는 것도 당여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에게 그럴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나는 멀리 내다보기로 하고 교육부장 이여식 목사를 다시 설득했다.

“이 목사, 모든 책임을 내가 지겠소, 그러니 이 목사도 교육부장으로

장래를 내다보고 나와 협력하여 인가를 받도록 합시다.

삼육신학원의 장래가 우리에게 달렸소.”

거듭 설득을 하자 이여식 목사도 동의를 했다.

이 분의 동의야 말로 정말로 고맙고 유쾌했다.

그때의 쾌감은 말로 형용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이여식 목사에게 “우선 다른 교파에서 경영하는

신학대학들의 학칙을 참조하여 좋은 점들을 추려서

교칙을 만들어 보십시오!” 했더니 전적으로 동감이라 하시었다.

이 때부터 이여식 목사의 활동은 그야말로 물불을 가리지 않고

급속도로 추진 하셨다. 이시화 목사가 돌아오기 전에 이 일을

끝내야 한다는데 의견이 서로 합하고 나자 그야말로

“순풍(順風)에 돛단배”처럼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이 되었다.

이여식목사와 함께, 이미 인가를 받은 다른 신학대학과

일반대학들의 학칙을 수집하여 좋은 점들을 따서 급하게

학칙을 만들어 인가신청을 했다. 일정시대와는 달리

그리 까다롭지 않다 하지만 보통 몇 번씩 수정하여 다시

제출하게 한다는데 그런 일 한번도 없이 정부의 인가를 받은 것은

기적중의 기적이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교육 부장

이여식 목사의 열정과 수고를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인가는 허락이 되었는데 당국에서

인가서를 내주지를 않는 것이었다. 이시화 목사가 오기 전에

인가서를 찾아놓아야 되는데 해당부서에서는 뒷돈을 바라는지

허가된 인가서를 내주지를 않으니 속이 탔다. 이시화 목사가

돌아와 인가를 취소한다고 한마디만 하면 끝장이었다.

그래서 교육부장 이여식 목사와 의논을 하니 뒷돈을 줄만큼

여유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대신 “코”가 필요 하다는 쪽으로

우리는 의견에 일치를 보았다. 마침 셜(설인호)선생이라는,

키가 대단히 크신 분이 선교사로 나왔으나 한국어를 배우느라고

아직 직분이 없이 계시던 분이 계셨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삼육신학원 인가서를 찾아와야 할 터인데 같이 가자”고

부탁을 하니 아무 내용을 모르는 이 분은 쾌히 승낙을 했다.

문교부에서도 서양선교사가 같이 가니까 두말없이 인가서를

내 주는 것이 아닌가? 당시 한국의사정이 이러했다.

이시화 목사를 비롯한 선교사들에게는 조금 미안한 일이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인가 문제를 해결하고 나니 나는 잡고 있던

범의 꼬리를 절반은 놓게 된 기분이었다.

 

 

얼마 되지 않아 정부에서는 인가가 없는 학교들은 폐쇄(閉鎖)한다는

법령이 생기고 점차적으로 무인가 교육기관들을 폐쇄하기 시작했다.

참고로 1961년에 삼육신학원이 4년제 삼육 대학으로 인가가 승격되고

1966년에는 삼육종합대학의 인가를 받았다. 나는 인가문제를 해결하면서

내 나름대로 의문이 풀리고 내가 삼육동으로 온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즉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지만 언제든지

사람을 불러서 자기의 뜻을 이루어 나가신다는 것을 다시 실감했다.

일하게 될 부서도 모른 채 삼육동에 온 나에게 원장의 과분한 직책이

주어져 어리둥절했는데, 갑자기 교회전반의 사업을 이끌어 갈 수 있는

합회장 서리의 권한이 주어져서 이여식 목사와 마음이 통하여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적중하게 인가문제가 해결된 것을 보니

이야말로 하나님의 섭리라는 확신이 생겼고 내가 삼육동에 멋모르고 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내가 부임한지 일년 남짓 지나자 이제명 목사의 동생 되는 다니엘 리

(이단열)가 삼육신학원 원장으로 결정이 되어 미국에서 나왔다.

사실 교회기관에서, 대학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중대한 일을 맡겼었다는 생각을 하니 너무도 감사했다.

다니엘 리 선생이 삼육신학원장이 되면서 나는 드디어 호랑이의

꼬리를 완전히 놓게 되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내가 교회 일을 시작할 때에 무슨 일이든지 교회가 맡기는 일은

순종하겠다고 결심을 했었지만 신학원 원장을 그만두자

나이 60이 되어가는 나에게 같은 교내에 있는 삼육고등학교

교장으로 가라고 하니 참 난처했다. 그러나 삼육신학원장은 물론,

고등학교 교장이 될 자격도 없지만 나는 처음 결심을 생각하며

사양치 못하고 한국 삼육고등학교 교장이 되었다.

삼육 고등학교도 정부의 인가가 없는 상태이었다.

마침 나에게 몇 촌 조카사위가 되는 김영도 선생이

교감으로 있었는데 공부도 많이 했고 교장 될 자격도

충분히 갖춘 인재였다. 나는 삼육고등학교 제반 일들을

전적으로 그에게 맡겼고 김영도 교감은 모든 일을 성실히 해주어

한 일년간 나는 무사히, 큰 어려움 없이 일을 했다.

 

 

이단열 선생은 한국에 대해 너무도 모르는데다가 너무

민족적 우월감을 가지고 이유 없이 아랫사람들에게

까다롭게 임해서 가끔 충돌이 있었다. 일년쯤 지나자

나에게 고등학교 교장을 그만 두고 삼육신학원 남자기숙사의

사감을 하라고 했다. 내 직분이 점점 낮아진다고 생각되어 그런지

내가 사감직을 맡을 때는 모든 직원이 내게 미안해했다.

삼육신학원에서 졸업생 한 번 배출하고, 이제 삼육 고등학교에서도

졸업생을 단 한번 배출해 내자 삼육신학원 남자기숙사

사감 직을 맡게 된 것이다. 내가 원장 직에 있을 때에 살펴보니

특별히 남학생들의 사감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수 있었다. 이제 나이 60이 되어 바쁘게 뛰어다녀야 하는

그 어려운 사감 직을 맡는다는 것이 보통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교회가 나에게 맡기는 일이라 생각하고 맡기로 했다.

그런데 사감 직을 맡고 나니 성경과 한문도 함께 가르치라고 했다.

정말 힘에 겨웠다. 나의 힘든 상황을 아는 친구들이 그 모든 것을

다 떨쳐 버리고 목회로 나오면 아무 교회라도 맡겨 주겠다고 성화였다.

그러나 어려운 상황에서 함께 일하는 젊은 교사들에게 끼치게 될 영향과

오해를 생각하면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기쁨으로 일하기로 했다.

앞으로 우리교회의 지도자가 될 젊은이들과 동거동락(同居同樂)하기로

결심을 굳히자 내 마음도 안정이 되고 기쁘게 일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많은 시간을 내어 삼육신학원에 공부하는 청년 남녀들을 만나서

내 생각을 얘기도 하고 지도하면서 많은 보람을 갖게 되었다.

그때 삼육신학원 여기숙사는 얌전한 문병난 씨가 사감으로 있었는데,

문 여사감과는 서로 오래 알고 지나온 터라 남녀기숙사의 그 많고

어려운 문제를 서로 의논하면서 학생들을 지도했다.

 

 

내가 사감을 하면서 있었던 일 중에 한 가지는 생활 습관에

관한 일이다. 당시에 기숙사 방이나 예배실은 온돌이나 마루여서

들어 갈 때는 모두 신을 벗어야 했다. 각 방도 그랬지만 특별히

예배 실 앞에 전 기숙사생이 각자 마음대로 벗어놓은 신발 모양은

가관(可觀)이었다. 예배가 끝나고 나갈 때는 서로 신발을 찾아

신으려고 난리였다. 작은 일이지만 지금 정돈하는 습관을 기른다면

장래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학생들에게 방에 들어갈 때나

예배 실에 들어올 때에 보기에도 좋을 뿐만 아니라 나갈 때는 편하고

쉽게 신을 수 있도록 신을 똑바로 놓으라고 지시를 했다.

각 방에는 방장이 책임을 지고 시행하라 했다. 처음엔 학생들이

대단히 거북해 했다. 그러나 계속 이야기를 했더니 점차 습관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신발 바로 놓기 문제는 여자 기숙사도 예외가

아니었지만 남자기숙사에서 신발 정돈을 한다 하니 여기숙사도

따라서 신발 바로 놓기 습관이 시작이 되었다. 재미있는 일은

처음에 남학생들이 괴로워하였으나 여기숙사도 그렇게 한다니까

별 불평이 없이 곧 시정되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4-5명이

같이 있는 방에서 신을 가지런히 놓으니까 얼마나 모양이

좋은지 몰랐다. 이 습관은 내가 사감을 그만 둔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계속 된다하여 마음속으로 매우 기뻤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다니엘리 선생에게도 전해졌던 모양이다.

원장으로 가끔 기숙사를 돌아보곤 하신 모양인데 한 번은

다니엘리 선생이 나에게 와서 “정 목사! 학생들에게 신발 놓는

교육을 시켰다 하던데 어째서 O호실은 신발정리가 안 되어

있는 것이요? 이렇게 교육을 시켜도 되는 것입니까?”하며

따져 묻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교육적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라

시세말로 트집이 완연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서

“원장선생! 내가 아무리 지도를 한다 할지라도 학생들을

항상 따라 다니는 것은 아니지 않소? 아무리 공부를

잘 시킨다 해도 다 100점을 맞는 것은 아니지 않소?

만약 당신이 그것을 보았다면 그 방의 학생들을 당신도

나와 함께 교육을 시켜야 하는 것이 원장으로서의 도리가

아니오?”라고 이야기를 하니 “미안합니다.”하고 돌아갔다.

내가 본래 교회 일을 시작할 때에 마음에 작정한 것은

“어떤 일이 있든지 우리 교역자들끼리 다투는 일은

피하자”라고 했었기 때문에 비록 다니엘리 선생과 의견이

여러모로 달랐지만 다투지는 않았다. 그러나 종종

다니엘리 선생이 민족적인 우월감을 가지고 말을 하거나

행동 할 때는 좀 힘이 들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그 당시에 재림교회 청년이

군대에 가면 안식일문제와 집총문제로 매우 고생을 당하거나

수감되는 일까지 종종 있었다. 그래서 애국심을 가지라 하면서도

군대에 가지 않게 되면 잘된 일이라고 칭찬하는 모순(矛盾)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학생들에게 나오는 징집영장이 학교로

배달이 되곤 했는데 원장은 나에게 “이제부터는 사감이

책임을 지고 영장 받은 학생들을 데리고 소집 장소에 가서

심사를 받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군대문제를 나이가 많은 나보고

함께 가서 해결을 하라니 참 암담했다. 그러나 따르기로 했다.

그런데 당시에는 소집된 학생들과 함께 가는 책임교사가 심사관에게

이야기를 잘하면 징집을 연기해 주거나 심지어는 가끔 면제도

해 주었다. 그러니 당시에는 청년을 데리고 갔다가 군대에

안나가게 해서 학교로 다시 데리고 오면 일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학부모에게서 인정을 받았다. 지금 생각하면 아주 잘못된 폐단이었다.

그런데 내가 삼육신학원 원장으로 있을 때에, 그전처럼 구호물자가

나오면 인근동네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과 또 가까이 있는

이 징집심사관들에게도 구호물자들을 분배하여 쓰게 하였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구호물자를 나누어 준 것도 아닌데,

이 구호물자를 나누어주고 나서는 심사관들이 삼육신학원

학생들이 징집되어오면 학업을 마치고 군대에 가도록 여러 번

편리를 보아주고 있었다. 특히 내가 사감이 되어 징집된 학생들을

데리고 가면, 내가 구호물자를 분배해서 쓰게 한 사람이라는 것을

어찌 알고는 여러 번 징집 연기의 편리를 보아주었다.

물론 징집연장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학업을 중도에 그만 두고

군대에 나간 청년도 많았다. 좌우간 징집영장이 나오면 소집 장소로

가기 전에 함께 모여 기도드리고, 나는 그들을 데리고 가서

떠내 보내곤 했다.

 

 

그런데 한 번은 나도 잘 아는 우리교회기관에서 중책을 맡아

일하는 분의 자제에게 징집영장이 나왔다. 그런데 징집일에 모여서

기도드리는 중간에 이 청년이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자취를 감추어 버린 것이다. 얼마나 군대가는 것이 마음에

부담이 되었으면 그렇게 하였겠는가마는 그동안 소집 일에

당사자가 없어진 일은 없었으니 신학원의 신용문제가 걸린

참 난감한 일이었다. 할 수 없이 원장 되는 다니엘리 선생에게

이 문제를 보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랬더니 나보고

“학생들에게 애국심을 가르쳐야 할 사람이 왜 그 학생을

뒤로 빼 돌렸느냐?”고 터무니없는 구실을 만들어 나를

추궁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한국청년들이 애국심이 없다고

이야기를 하기에 나는 “내가 그 청년을 빼 돌릴 이유도 없거니와

자기가 스스로 가버린 것을 그래도 원장인 당신에게 보고를

아니할 수가 없어서 한 것인데 이게 웬 터무니없는 비난이냐?”고

강하게 항의하자 “정 목사, 미안합니다.”라고 해서 충돌을 피할 수가

있었다. 나의 나이 60세였고 원장의 나이 36세였다.

 

 

후에 안 일이지만 미국에서는 우리교회의 청년들이 군대에 가도

집총문제나 안식일문제로 고생하는 일이 없고 군대에 다녀오면

여러 가지 특전이 있으니 자원해서 군대에 가는 청년도

많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군대에 가서 종교적인 문제로 감옥까지

가야하는 우리 청년들의 입장을 알 리가 없는 다니엘 리 선생은

현지 사정을 모른 채 민족적 우월감을 가지고 군대 가기를 꺼려하는

우리 교회 청년들을 비하(卑下)하는 것 같아서 충돌이 생긴 것이었다.

이일 후에도 이런 우월감과 문화적 차이로 서로 의견을 달리 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학감으로 있는 박원실 목사에게 종종

“삼육신학원에 서양학생들은 한 명도 없고 전부 한국학생뿐인데

모든 일을 우리의 사정이나 형편을 모르는 서양 사람에게만 맡겨두고

잘 해 나가겠지 하지 말고, 당신은 비록 학감이지만 실지로

삼육신학원장과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라고 충고하곤 했다.

 

 

이단열 원장과는 한 캠퍼스 안에 살면서도 별로 동행할 기회가 없었는데

하루는 이단열 원장과 그 분의 차로 서울을 다녀오다가 경기도청 앞을

지나게 되었다. 나는 차를 좀 세우라 하고는 먼저 내려서

다니엘리 선생에게 말을 했다.

“이 선생, 여기가 경기도 도청이고 우리 삼육신학원은 경기도에

속해 있는 몇 개 안되는 대학교육기관이니 오늘 여기를 지나가는 김에

경기도지사를 한 번 만나보고 갑시다.”

“도지사를 만나면 무엇 합니까? 나는 만나볼 생각이 없습니다.

정 목사, 차에 타시오!”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만나지도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 선생, 한번만 들어가 만나 봅시다. 한번 만나보고 다음부터

만나던지 말든지 생각해 봅시다.”

그래도 안 만나겠다고 계속 우기다가 내가 차에 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어쩔 수 없이 끌려 들어가듯 도 청사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도지사가 이익흥 씨였는지 아니면 이기이라고 하는 평안도

사람이었는지 확실히 기억은 안 나지만 사람이 큼직하고

너그러워 보였다. 내가 다니엘리 선생을 데리고 들어가

소개를 하니 이 도지사는 “서양 사람이 이렇게 오셨냐?”고 하면서

좋은 자리를 양보하고 좋은 차(茶)를 만들어 대접을 하면서

계속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고 사진사를 불러 다니엘리를

가운데 세우고 사진까지 찍으며 융숭한 대접을 하자 다니엘리도

처음 들어갈 때와는 완전히 표정이 달라 보였다.

 

 

학교로 돌아오면서 다니엘리에게 오늘 도지사 방문한 감상이

어떠냐고 물으니 “괜찮아요” 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괜찮아요! 가 뭡니까? 이제는 우리나라도 독립하고 이만큼

발전했는데 우리나라 선교사로 오면 할 수 있는 대로 그 지방의

수장(首將)이나 나아가서 대통령이라도 방문하여 학교에 관한 일이나

우리 선교에 관하여 설명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 아니겠는가?”하고

물었더니 “정 목사의 말이 옳습니다. 다음부터는 방문을 잘 하겠다”고

시원하게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 면도 있는 사람이었다.

이해부족과 문화의 차이로 의견이 상반되는 적도 있었으나,

이런 솔직하고 시원한 면도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가능한대로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을 했다. 나는 우리교회에서 수많은

선교사들과 함께 일을 했는데 까다로운 선교사 두 어분 중 한분이

이단열 원장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내가 까다롭다고 생각한 분들도

모두 지식과 뛰어난 행정력을 가졌던 분들인데 “본방인(本邦人)들과

협력하는 일에 서로 좀더 각근(恪勤)했더라면!”하는 아쉬움이 있다.

우리 또한 새로 맞이하는 선교사들에게 우리의 풍습과 문화와 예의를

거부감 없이 잘 설명해 줄 수 있다면 우리 사업에 큰 도움이

되리라고 확신한다.

 

나는 자녀가 많았기 때문인지 젊은 사람들과 사귀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사감직도 감사함으로 맡았다. 삼육신학원 학생 중 대부분은

기숙사에서 생활을 했지만 어떤 부부는 인근에 방을 얻고 생활을

하면서 학교를 다니는 몇 가정 있었다. 나는 비록 기숙사 사감이지만

자취를 하는, 가정을 이룬 학생들도 종종 방문하여 지도하고 위로하고

또 살림의 지혜를 나누거나 너무 어려운 학생들은 가끔 힘 되는 대로

돕기도 했다. 비록 재정문제로 기숙사에 들어와 살지는 못했지만

사감이 자기들도 방문을 해 준다고 매우 기뻐하고 감사해 했다.

한국은 11월이면 김장준비를 한다. 겨울을 위해서 꼭 치러야 하는

고생되는 일이다. 하루는 자취하는 어떤 학생의 가정을 방문했는데

그 때에 그 학생은 김장독을 묻기 위해 땅을 파고 있었다.

그런데 경험이 없는지라 바로 처마 밑에 땅을 파고 있었다.

비가 오거나 또는 지붕에 있던 눈이 녹으면 김장독에 물이

들어가는 것은 물론이고 김장을 꺼내는 여자는 처마에서 내리는 물로

고생을 할 것이 뻔했다. 그래서 다른 곳에 김장을 묻으라고 말을

해 주고는 “김장할 무 배추는 어디 있는가?” 하고 물으니

어색해 하면서 말이 없었다. 그 학생의 사정을 한 눈에

알아 볼 수가 있었다. 그래서 그 학생에게 “학교 회계실에 가서

내 이름을 대고 돈을 좀 달라고 해서 김장철을 놓치지 말고

김장을 담그라.”해서 그리 되었다. 아무 일도 아니지만 이 청년은

아직도 그때 일을 이야기 하면서 감사해 하는 모습을 보면서

보람을 느끼곤 한다.

 

 

또 그때에 나에게 한문을 배웠던 옛 학생을 만나면 내가 한문 시간에

내었던 문제를 아직도 이야기하며 서로 웃곤 한다. 나는 칠판에

人人人人人人 즉 사람 인(人)자 여섯 개를 써 놓고 말을 만들라 했다.

학생들이 상당히 힘들어하기에 나는“사람(人)이 사람(人)이면

다 사람(人)이냐? 사람(人)이 사람(人)다와야 사람(人)이지!”라고

풀이를 해주고 “당신들이 앞으로 목사나 선생으로 나간다면

책상 앞에 목사(牧師)라는 여섯 글자나 선생(先生)이라는 글자

여섯을 써놓고 매일 반성하며 생활을 하라!”고 했다.

그 때 같이 공부하던 이들이 다 훌륭한 주의 종이 되어 일선에서

수고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내 생애에 큰 기쁨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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