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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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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같이 공부하던 이들이 다 훌륭한 주의 종이 되어 일선에서

수고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내 생애에 큰 기쁨이 되었다. #27 끝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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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중한 대회장과 영남 대회장-제 1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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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8월에 삼육동에 왔으니 거의 만 3년 되는 1956년 7월에

합회총회가 열렸다. 총회 때에는 대회장들을 선출하는데 이때

중한대회장은 대회장으로 계신지가 일년이 채 아니 되신 분으로

나와 매우 친한 분이셨다. 중한대회장으로 계시던 김명길 목사가

개인사정으로 1955년에 대회장직을 그만두자 합회평의원회에서는

잔여기간을 위해 이 분을 중한 대회장으로 선출했었다.

그래서 나는 그분이 그대로 유임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렇게 될 것으로 기대를 했었다. 과연 예상한대로 총회

선거위원장은 “중한대회장에 현 대회장님이 유임되었다.”고

발표를 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총회대표들이 이 안을

거부하고 다시 선거위원회로 되돌려버렸다. 총회선거위원회는

다시 회의를 하여 결정한 것을 발표 하는데 나를 중한대회장으로

한다고 발표를 하자 총회대표들이 이 안을 만장일치로 받아들였다.

나는 친구로서 참 난처했지만 피할 수도 없는 사정이었다.

한국내 안식일교회가 워낙 바닥이 좁은지라 이런 일은

비일비재 하였다. 합회총회의 뜻하지 않은 결정으로 중한대회장이

되긴 했지만 일년 만에 물러나신 친구 에게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총회 끝날 무렵에 이렇게 결정이 되어 이 분에 대한

보직도 결정 못하여 결국 대회장을 하시던 분이 내 지도아래서

보직도 없이 계셔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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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다 못해 중한대회 평의원회의 결의를 거쳐 이 분을

OO교회로 모시기로 했다. 나는 한 3년 동안 교육계에서만

묻혀 있다가 나와서 그 동안 목회 방면에서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이번에는 OO교회에서도

대회의 결정에 반대를 하고 나왔다. 참으로 난감했다.

할 수 없이 나는 직접 OO교회 직원들과 머리를 맞대고

상의하면서 ”대회장을 하시던 분을 교회가 담임목사로

맞는다면 교회의 체면이나 대회장 하시던 분의 체면에도

얼마나 좋겠는가?”하고 설득하여 결국 의견에 일치를 보게 되었다.

전임대회장 하시던 목사님도 교회를 사랑하여 열심히 일하시고

교우들도 목사님을 도와 일을 잘하여 좋은 결과를 보게 된 것은

지금도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아무리 교회일이라 하지만

일을 하다 보면 어디에나 어려운 문제는 있었다. 그런데

그때 중한대회에 내가 있을만한 집이 없어서 집을 찾고 있는데

이단열 원장은 나를 불러 “왜 아직도 이사를 나가지 않는가?”라고

추궁하기에 “이사하는 것이 그리 쉬운 줄 아는가? 내가 이사할 만하면

지체 없이 할 터이니 재촉하지 말라”고 하며 다시 한번 의견에

충돌을 보았다. 이 당시 중한대회구역은 충청남북도와 경기도와

서울지역이었다. 이전에도 중선대회에서 일해 보았고 해방 후에도

합회 부회장으로 있으면서 이 지방들을 돌아보았기 때문에

별로 낯설지 않게 일을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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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대회 사무실로 경기도 남쪽에 있는 오래되고 건실한

우리 교회에서 오랫동안 신실한 교인으로, 장로와 교회 직원으로

오랫동안 교회를 섬겨 오시던 분인데 그냥 지나가다 들리신 것이

아니라 나를 찾아 온 것이 틀림이 없는데 말문을 열지 못하고

자꾸 지체하셨다. 그 교회에는 나와 거의 동년배로 그동안 교회의

여러 요직을 두루 거친 유능하신 분이 사역자로 시무하고 겠셨다.

한참 만에 이 장로님이 말문을 여셨다.

“대회장님. 우리 교회에 좋은 사역자를 보내 주셔셔 감사 합니다.”

“아 그야 내가 한일이 아니라 대회 총회와 대회 행정위원회에서

결정한 일이고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그렇게 된 것 아닙니까?

그런데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그 분이 오셔서 열심히 하시고 또 교인들도 사정이 전보다 좋아져서

십일조가 많이 늘었습니다.“

“아, 듣던 중 하나님께 감사한 일입니다. 장로님.”

“그런데 우리 사역자님께서 얼마 전에 그 많아진 십일조를 대회로

보내지 말고 교회에서 쓰자고 제안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저는 교회 행정상 원칙으로 볼 때에 잘못된 것이라고 말씀을 드리고

그 제안을 철회해 주실 것을 간청했으나 고집을 부리십니다.

교회 직원회에서 그분의 뜻에 동참하는 분과 원칙을 내세우는 분들과

완전히 둘로 나뉘었습니다. 교회 역사상 처음 있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계속 사역자와 다툴 수도 없고 교인들이 알면 교회가 둘로 나뉠 것 같아

걱정이 되어 대회에서 속히 해결해 달라고 이렇게 찾아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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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분을 일단 보내놓고 아무리 생각을 해도 묘안이 떠오르지를 않았다.

경험이 없는 젊은 사역자라면 꾸중이라도 할 일이지만 나와 거의 동년배로

교회의 모든 요직을 거쳐 간 경험이 많은 분이니 참 난처하기 말할 수

없는 일이 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대회에서 회의를 열어 그 사역자를

문책할 수도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시간을 끌면 교회가 정말 둘로 나누일

수도 있는 중대한 일이었다. 하나님께 다시 기도드릴 수밖에 없었다.

오랜 시간 기도를 드린 후 다음날 몇 시간을 내서 그 사역자를 찾아갔다.

정말로 그 말이 사실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분에게 우리가 가진 시간

중에서는 안식일을, 그리고 우리가 가진 재물 중에 유일하게 하나님과

함께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십일조의 축복임을 설명하고 그 분이 말씀한

십일조에 대한 그 제안의 부당함을 설명했더니 역시 경험이 많으신

사역자이신지라 곧 그 사항의 중대함을 깨달으시고는 내가 생각이

짧았노라고 하시면서 곧 시정하시겠다고 하셨다.

우리는 곧 다시 옛날의 우정을 되 살릴 수가 있었다.

역시 모든 일에 하나님께 간구하는 일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했다.

나는 안식일과 십일조만은 우리가 하나남과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최대의

축복이라는 생각을 옛날에도 가지고 있고 지금도 동일하다. 교인으로서,

그리고 교회나 사역자로서, 또는 대회나 대회장이라 할지라도 십일조

문제에 있어서 결코 시험 받지 말기를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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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장이 된지 약 일년 반 뒤인 1957년 말, 합회총회가 다시

열렸는데 이번에는 나에게 문제가 닥쳐왔다.

합회총회 하는 중에 총회 선거위원 중 한분이 나를 찾아왔다.

“정 목사, 지금 총회선거위원회를 하는 중인데 누가 정 목사에게

비리가 있다고 하여 사실여부를 알고 싶어 왔습니다.”

“무슨 일인지 말씀이나 해 보시오. 전혀 감이 잡히지를 않습니다.”

“예, 정 목사가 중한대회장으로 재직하면서 대회와 의논도 없이

대회자금으로 정 목사가 거할 사택을 지었다 하니 사실인지요?

사실이라면 중한대회를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것이 무슨 말입니까? 내가 아무리 일을 잘못한다고 할지라도

내가 그렇게 대회 돈을 마음대로 사용할 사람입니까?

이문동에 우리교단의 사택들을 지을 때에 대회평의원 중에서

우리대회도 이번에 사택을 하나 준비하자하여 회의를 해서

지은 것이니 대회평의원회 의사록을 가서 조사해 보십시오.”

그러자 이 분은 대회평의원회 의사록을 점검한 결과 모든 일이

대회평의원회의 의결을 통하여 진행된 것이지, 대회장 마음대로

한일이 없음을 알아내고 나에게 다시 찾아 왔다.

“정 목사! 대회 돈을 마음대로 사용한 일이 없음은 밝혀졌습니다.”

“내가 그런 짓을 아니 한다는 것은 잘 아시지 않습니까?”

“압니다. 그래도 중한 대회를 떠나심이 좋을 듯 합니다.”

“떠나야 된다면 떠나겠지만 이번에는 또 무슨 이유이랍니까?”

“다름 아니라 정 목사가 대회장으로 공평하게 한다면서

구제품을 합회본부교회인 회기동교회에 많이 주지 않는다하여

회기동교회 도르가회에서 들고 일어났습니다. 사실 입니까?”

나는 곧 “나를 대회에서 내 보내기 위해 누군가 무슨 일을

진행하고 있구나!”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예, 사실입니다. 나는 대회장 때나 삼육동에서 미국구호품을 우리만

쓸 것이 아니라 공평하게 이웃과 나누어 쓰도록 해 왔습니다.

지난번에는 대회의 돈을 의논도 하지 아니하고 불공평하게 사용한다고

하더니 이제는 공평하게 한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까?”하고 물었다.

그분은 아무 대답도 아니 하고 돌아갔다. 그리고는 선거위원회에서

나를 영남대회장으로 선출했다고 발표가 되었다.

나는 교회 일을 시작할 때부터 가능하면 윗분들과 다투지 말자하는

생각과, 교회조직에서 나보고 어디든지 가라는 대로 가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에 다시 영남대회로 가라고 할 때 기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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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대회로 이사하는 것은 58년 2월쯤 하기로 하고 나는

총회결정대로 1958년 1월부터 일하기 위해 대구로 내려갔다.

당시 영남대회는 신종균목사가 대회장이었는데 이번총회에서

호남대회로 가게 되었는데 아직 대구에 계셨다. 그런데

신 목사는 열정도 있지만 성격이 좀 급하였다. 내가 도착하자

신 목사님 말씀이 “총회 때에 영남대회회계 이재찬 씨는 호남대회로,

호남대회회계 노승익 씨는 영남대회로 보내기로 결정이 되었는데

두 대회의 회계는 그냥 두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하고 의견을

내어놓았다. 나는 “아무래도 좋은데 합회총회에서 결정한 것이니

우선 합회에 알아보자”라고 했다. 그래서 합회에 연락을 하니

“회계 당사자들만 허락하면 그렇게 해도 좋다.”라고 답이 왔다.

그래서 노승익 씨에게 편지를 해 보니까 노승익 씨는 회답하기를

“저는 영남대회로 가겠습니다.”라고 답이 오더니 신 목사가

호남으로 떠나기도 전에 대구로 왔다. 노승익 씨는 대구로 와서

곧 모든 서류를 다 챙겨보더니 하루는 나를 회계실로 들어오라 했다.

“목사님, 서류를 다 살펴보니 영남대회에 부채가 좀 있네요,

어떻게 하지요?”

“글쎄, 부채가 있다면 차차 정리 하도록 해야 하지 않겠소?”

라고 대답을 했다. 그런데 신종균 목사가 문 밖에서 이 대화를

어떻게 들었는지 갑자기 회계실 문을 열고 들어 왔다.

“지금 무슨 말씀들을 했소?”라고 성난 목소리로 말을 했다.

“아, 신 목사, 왜 그러시오?”

“아니 나, 신종균이란 사람을 어떤 사람으로 알고들 그러십니까?”

노승익 씨는 얌전한 사람으로 말을 별로 하는 사람이 아니니

가만히 있었다. 그래서 내가 말을 했다. “신 목사! 왜 그러시오?

우리가 뭐 잘못 말한 것이라도 있소? 회계가 새로 와서

서류를 살펴보고 영남대회에 부채가 있으니 대회장인 내게

부채가 있다고 보고한 것이 무슨 잘못이라도 한 일이오?

노승익 씨가 임자를 비판한 것도 아니고 신 목사가

물어내야 한다는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무슨 말을

잘못한 것이오?”하고 내가 이야기를 했다.

“그건 그렇습니다. 미안 합니다.”하고 수그러들고 곧 사과를 했다.

성격이 조금 급하시지만 잘못되었다고 생각 될 때는 시원하게

사과를 하시는 성격이셨다. 그래서 직책이 교체될 때는 이렇게

작은 일에도 의견 충돌이 있기가 쉬웠지만 큰일 없이 신종균 목사는

이재찬 씨와 호남대회로 가고 나는 노승익 목사와 같이

영남대회 일을 보게 되었다. 영남대회를 떠나시기 직전

신종균 목사는 고맙게도 영남대회 형편에 대해 몇 가지

참고할만한 일들을 솔직하게 말씀 해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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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교회가 새로운 목사나 전도사가 부임하면

전임자들과 비교를 하거나 또는 내가 생각하는 바와

같지가 않으면 비난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어떤 목회자는 설교에 치중하거나 또는 방문하는 일에

치중하게 된다. 웬만큼 경험을 쌓은 목회자가 아니고는

두 가지 다 완전하게 하는 사람은 거의 찾기가 힘이 든다.

그 중 한 가지가 경상북도 상주에서 일하고 있는

고문경 형제에 대한 이야기였다. 신 목사의 말씀이

고문경 씨가 그 지역 전도사로 있으면서 설교준비를 한다고

별로 방문을 하지 않고 있으니 사역자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의견을 주셨다.

전임자가 아무 말도 안 해주고 떠나면 후임자는

그런 사정들을 알기 위해서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데

신 목사님은 이런 사정 몇 가지를 소상히 말씀해 주고

떠나신 것이 매우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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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1958년 2월경, 우리가족이 영남대회 본부가 있는

경상북도 대구로 이사를 끝내자 나는 첫 지방출장으로

고문경 형제가 전도사로 있는 상주로 가서 반갑게 만났다.

“고 전도사, 상주로 부임해 온 후에 설교 준비하느라

별로 심방을 하지 못하고 집에 주로 있다고 하는 소문인데

그것이 사실인가” 하고 진지하게 물어보았다.

“네! 사실입니다! 그 동안 이곳에 와서 화요일, 금요일,

안식일 설교준비만 해도 시간이 벅차서 방문보다는 설교준비에

시간을 주로 쓰고 있었습니다.”라고 변명 한마디 없이

솔직하게 말해 주었다. 나는 “이렇게 솔직한 사람이라면 됐다!”라는

생각이 들어 이야기를 계속했다.

“우리교회는 사역자가 부족해서 전도사가 설교와 방문, 두 가지를

다 해야지 한 가지라도 등한히 하면 그일을 이해못하는 교인들이

불만을 가질수 있소!”라고 차근차근 설명을 했다. 고문경 전도사는

금방 깨닫고는 “앞으로는 그렇게 하겠노라”고 말했다.

그 다음부터 “고문경 전도사는 방문도, 설교도 잘한다.”고

알려졌고 그 지방에서 “괜찮은 전도사”라는 칭찬을 받았다.

그 후로는 고문경 씨가 일을 열심히 해서 1959년 영남대회

행정위원회의에서 영남대회 청소년부장으로 결정이 되고

고문경 전도사도 쾌히 응하여 1959년 7월 하순경

영남대회가 있는 대구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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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대구로 오자마자 곧 어려운 일을 당했다.

고문경 전도사의 둘째 아이인 것으로 생각이 되는데 한두 살

정도였다. 갑자기 아이가 경련을 하며 죽을 지경이 됐다.

젊은 부부이니 어찌할 줄을 몰라 갈팡질팡 하는데 그 집을 보니

사과를 갖다 놓은 것이 있었다. 대구는 사과로 유명한 고장이라

사과를 사다 놓은 모양인데 당시 과수원에서는 독한 농약들을

사용하고 있었다. 내 생각에 이 어린애가 그 사과를 핥아먹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가 많이 오는 날이었는데 나는

그 아이를 데리고 고전도사 부인과 대구 동산병원으로 달려갔다.

의사들은 죽는다고 버둥거리는 이 어린아이에게 약을 먹여서

토하게 하고는 집으로 아이를 데리고 가라고 했다.

우리는 어린 아이를 집으로 데려와서 몸을 따뜻하게 해주고,

씻어주고, 계속 무엇을 마시게 하자 그 이튿날 회복되었다.

이 일 외에는 고문경 전도사가 대구에 와서 큰 어려움 없이

지나게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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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경 전도사가 대구로 오자 나는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고 전도사, 우리 다른 대회에서 안 해 본 일을

한번 해 보는 것이 어떻겠소?”

“안 해본 일을 해보다니요?”

“그 동안 어떤 집회를 하면 자격을 따져서 참석 시켰는데

이번 여름에 10대부터 30세 미만 청년 남녀는 누구나 다

참여하는 청년 대회를 한번 해 보면 어떻겠소?”

“제가 청년부 책임자이니 한 번 해 보지요, 장소는 어디가 좋을까요?”

“그간 여러 곳을 다녀 보았는데 부산 해운대 덕성보육원이 있습디다.

장소도 크고 밥해 먹이기도 제일 좋을 것 같소. 그곳 원장이

서 영우라는 분인데 내가 연락을 해 보겠소”

“그럼 연락을 해 주십시오, 한번 해 보겠습니다,”

고맙게도 덕성보육원 서영우 원장도 쾌히 승낙을 해서

일사천리(一瀉千里)로 일이 진행이 되었다. 그래서

각 지역 심심(深深)산골에 있는 교회까지 통지하여 각자

여비만 부담하면 숙식비는 우리가 부담한다고 했다.

그 해 8월 중순경, 교회단위로 서신연락만을 했는데도

200여명 이상의 청소년이 참가하는 큰 집회였다.

청년만의 모임을 해 보기는 한국연합회가 생긴 후에

처음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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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웃지 못 할 일이 생겼다.

깊은 산골에 사는 청년들이 평생 기차를 처음 타 본 것이다.

정거장에서 기차표를 사서 표 검사를 하고서는 기차를 탄 후에는

표가 필요 없다고 생각이 되어 기차표를 찢어버린 것이다.

처음 하는 청년대회인지라 우리는 부산역에 마중을 나갔는데

기차역에서 기차표가 없다고 이 청년들을 내어 보내지를

않는 것이 아닌가? 자초지종(自初至終)을 알게 된 우리는

역원에게 사정을 했더니 교회의 입장은 이해하나 그 많은

청년을 내어 보낼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한참 후에 역원은

사람을 시켜 이 청년들이 타고 온 기차를 검사하게 하니

과연 찢어진 표들 중 얼마를 발견해 냈다.

그래서 기차 표 값을 이중으로 내지 않고 무사히 나왔다.

처음 갑자기 준비한 일이라 작은 불상사들이 있었지만

재미있게 집회는 진행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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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가지 생각나는 일은 내 친구로서 순안 의명학교

후배동창인 고치규 선생의 아들 고찬연 선생의 일이다.

아마 본인은 아직까지 자기가 결혼한 일을 잘 알지

못할지도 모른다. 고치규 선생은 월남할 때 아들 하나만 데리고

월남을 했는데 그 아들이 바로 고찬연 선생이다.

한 번은 “이렇게 외롭게 월남을 했는데 내 아들은 믿음을 모른 채

군대에 가있다”며 아들을 걱정하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고 선생에게 “군대에 가있는 아들에게 이제라도 교회에 잘 나가도록

부탁하는 편지를 보내라”하면서 “당신의 아들이 공대를 다녀서

수학을 잘 한다니 제대하면 우리교회 학교계통에서 교사로

일하도록 해보자”고 했다. 고 치규 선생은 “정 목사가

그리 말해주니 고맙다”고 하면서 “정 목사도 좀 도와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래서 나도 그 아들을 보지는 못했지만

군대로 서신을 보내어 “부대를 방문하는 우리 사역자와 연락해서

안식일도 잘 지키고 믿음을 지키다가 제대를 하면 우리교회

교육기관에서 일을 하면 좋겠다.”고 했다.

아마 아버지의 편지에 감동을 받았는지 그 후에 고치규 씨는

“내 아들이 정 목사가 말 한대로 제대를 하면 교회 직장에서

일하고 싶은 듯한데 아직은 제대로 신앙생활을 못하고 있으니

이제는 교인과 결혼을 시켜서 믿음으로 잘 지나도록 했으면

좋겠다.”라고 하며 아들의 혼사를 걱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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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영남대회에서 준비한 청년대회가 해운대에서 열릴 때

고치규 씨도 부산에 계시면서 나를 만나려고 해운대로 오셨다.

이때 내 안사람과 동창생인 김인애라는 분의 큰딸 정순희라는 여성이

영문학을 전공하고 경산 삼육고등학교 영어선생으로 있었다.

그 여동생도(정영희 인가 그랬다)보기에 괜찮고 모든 면에 참했다.

나는 평소에 김인애 씨의 딸들을 잘 인도해 주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 청년대회 순서 중에 정순희 선생의

여동생의 순서가 있음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고치규 씨에게

“내가 생각한 처녀가 있는데 그 처녀가 이번 청년대회 순서를

맡았으니 그 시간에 와서 가만히 선을 보라”고 했더니 그대로 했다.

그 순서 후에 고치규 씨에게 “그 처녀가 어떠냐?”고 물으니

“참 좋습니다. 우리 집 며느리로 삼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이제는 당신 아들이 이 처녀를 보고 좋다고 해야 되니

당신 아들에게 편지를 해서 휴가를 나와 맞선을 보도록 하라”고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당시 경산 삼육고등학교장 한기조 선생에게

사정을 말하자 한기조 선생은 영어 교사인 정순희 선생에게

연락을 하여 처녀와 총각이 선을 보게 되었다. 이렇게 만난 후에

두 사람이 약혼을 하고 결혼식을 해야 되겠는데 나더러

주례를 해 달라고 부탁이 왔다. 그래서 나는 고치규 씨에게

“당신 아들은 아직 침례를 안 받았고 처녀는 침례를 받았는데

내가 목사로써 주례를 하면 우리 교회의 법을 어기는 것이 되고,

그렇다고 결혼을 위해서만 침례를 받으라고 하고 싶은 마음은

더 더욱 없으니 경산중고등학교 교장인 한기조 씨에게

주례를 청해서 하면 좋겠다.”고 하니 고치규 씨도 좋게 생각하여

한기조 씨가 주례를 해서 결혼식을 했다. 결혼식을 하고 나서

고 선생은 침례도 받고 모범적인 가장이 되어 가정을 잘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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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 영남대회에 속한 경산삼육고등학교 교사로 취임이 되어

열심히 일하다가 후에 서울삼육고등학교로 가서도 열심히 일하는

훌륭한 교사가 되었다. 아직까지도 교회 내에서 신실히 일하고

있는 것을 보니, 결혼이 이루어지도록 뒤에서 노력한 보람이 있어

마음이 매우 흐뭇한 것은 물론이고 마치 내 자녀가 잘 사는 것

이상으로 기쁘다. 그래서 이 영남대회의 청년대회가 더 오래

내 기억에 남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후에 고문경 전도사는

훌륭한 목사가 되어 대회장 등 여러 요직을 거쳐 큰 일군으로

일하고 미국에 와서도 유능한 목회 일을 하는 것을 보고

매우 기쁘고 하나님께 감사했다. 교회지도자는 본인이 교회의 일을

잘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사람을 키우고 그 앞길을

열어 주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이 된다.

잘못된 것을 보고 자르는 것만이 능사(能事)가 아니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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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사업과 젊은 목사 이야기를 하다 보니 생각나는 일이 또 있다.

각 대회 대회장은 합회행정위원회에 참석을 한다.

한번은 합회행정위원회를 참석하려고 서울에 갔다가

내가 중한대회장으로 일할 때 함께 대회청년부에 일하던

김선억 씨를 만났다. 함께 일하던 사람이니 반갑게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중 불쑥 이런 말을 했다.

“정 목사님! 제게 걱정거리가 하나 생겼습니다.”

“걱정거리라니, 무슨 일인지 말을 해보시오.”

“정 목사님 후임으로 오신 대회장님이 저에게 정 대회장이

있을 때는 청년부 일을 잘했는데 왜 지금은 이렇게 일을

잘 하지 않는가? 하며 자꾸 불만스럽다고 이야기를 하시네요.”

“그런 불평을 들을 만한 이유가 있으니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아닙니다. 목사님! 정 목사님 계실 때와 똑같이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

힘쓰고 있고 오히려 더 열심을 내고 있는데 자꾸 그런 불평을

말씀하시니 너무 힘들고 괴롭습니다.”

“..................”

“정 목사님, 제가 앞으로 어떤 길을 가야 할지

참고가 될 말씀이나 조언을 좀 주십시오.”

“김 선생, 우선 맡은 일에 충실히 하고 있으시오,

앞으로 좋은 길이 생기면 의논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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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해 주고 그날은 헤어졌다. 빨리 어떤 길을

모색해 주어야 할 것 같았다. 어떤 이유에서 인지

김선억 씨 대신 다른 사람을 쓰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합회 행정위원회에 참여하여 회의가 시작되었다.

이때 체코사람으로 미국시민이신 클라임스(구인서 씨)라는 분이

어떤 보직도 없이 한국에 선교사로 나왔는데 이 젊은 선교사

클라임스를 한국연합회 청년부장으로 하자는 안건을 선교사들이

행정위원회에 내어놓았다. 그때만 해도 우리 교회사업은 선교사가

모든 것을 다 주장하고 있었다. 대회와 합회의 인사배치까지도

합회장을 위시한 선교사들의 주장대로 거의 이루어 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행정위원회에서는 사전에 의논한 것도 아닌데

우리 한국인행정위원 몇 명이 클라임스를 연합회 청년부장으로

하자는 안에 적극적으로 반대를 했다. 어떤 보직이나 필요성도 없이

젊은 선교사를 오게 해서는 자리를 주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며

반대를 한 것이다. 그러니 선교사들 입장이 대단히 곤란해 졌다.

행정위원회를 3-4일을 해도 결정이 나지를 않았다.

지금 생각에는 클라임스 개인에 대한 반대가 아니오,

다만 선교사들의 독주를 한 번 막아보려는 공통적인 뜻이

우리 속에 있었던 것뿐이었고 클라임스가 희생양이 된 것 뿐이라

생각이 된다. 우리도 이제는 그만하면 선교사들에게 우리의 뜻이

전해 졌다고 생각들은 하는데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며칠 후에 내가 점심을 먹고 회의실에 다른 분들보다 조금 일찍

오게 되었는데 합회장도 먼저 혼자 들어오셨다.

그래서 이야기가 시작이 되었다.

“합회장님, 젊은 선교사 클라임스를 꼭 청년선교회 부장으로

세워야 되겠습니까?”

“아 그랬으면 좋겠소, 오늘 회의에서 그리 되도록 좀 합시다.”

“그러면 오후회의에서 다시 이야기해봅시다.

단 우리도 요구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요?”

“선교사들의 원대로 클라임스를 합회청소년부장으로 세운다 해도

한국말을 거의 모르니 무슨 일을 제대로 하겠습니까?

그러니 한국사람 한 분을 부부장으로 하실 수 있겠습니까?”

“아, 그러면 그렇게 안건을 내어 의견들을 들어봅시다.”라고

이야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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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오후회의를 시작할 때에 내가 발언권을 얻어서

“이만하면 우리 서로의 뜻을 알았을 터이니 다른 선교사에게

겸직을 시키는 것보다는 비록 젊지만 클라임스를 연합회 청소년부

부장으로 세우도록 해 보십시다, 이 안에 제가 동의합니다.”라고 하자

어떤 선교사가 재청을 하고 표결에 붙여 어려움이 없이 통과가 되었다.

나는 다시 발언권을 얻어서 “클라임스 씨는 나이도 젊지만

한국말도 잘 모르니 부부장에는 한국 분으로 한 분을 선출함이

좋겠다.”라고 안을 내면서 중한대회 청소년부에서 일하는

김선억 씨를 추천한다고 동의를 했다. 선교사들이 재청을 하여

김선억 씨를 합회청소년 부 부부장으로 선출했다.

김선억 씨에 대한 걱정이 빨리 쉽게 해결이 되니까 참

내 마음도 후련했고 김선억 씨도 매우 만족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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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에 다시 합회행정위원회에 나온 안건 중 한 가지는

곧 일본에서 동양에 있는 합회청년부관계자들을 초청하여

회의가 있을 터인데 한국에서 누구를 보낼 것인가 하고 의논한 결과

나를 한국대표로 보낸다고 결정을 하게 되었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마다 나를 믿고 선택해 주는 것은

너무도 감사한 일이었다. 그러나 내 나이 이미 50이 훨씬

지난 때인지라 극구 사양을 했다. “그러면 누구를 보내면

적당하겠는가?”라고 행정 위원들은 내게 질문을 하기에

나는 청년부관계자 회의이니 합회청년부 부부장인

김선억 씨를 보내는 것이 좋겠다.”라고 추천을 했다.

모두들 좋게 생각해서 김선억 씨가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

원래 얌전하고 성실한 김선억 씨가 일본에 가서 아주 좋은

인상을 주고 온 모양이었다. 일본회의에서 돌아 온지 얼마 후에

일본 삼육대학에서 김선억 씨를 일본 삼육대학 기숙사사감으로

초청을 했다. 김선억 목사 본인도 “그 초청에 응할 마음이 있다.”해서

합회행정위원회에서 쉽게 결정이 되어 일본으로 갔다.

사감이라는 직분이 생각보다 몹시 어려운 것인데도

한 4년간 일본에서 일을 잘 했다고 들었다. 그러다가

미국이민의 문이 열리자 일본 삼육대학에서도 그 동안

일을 열심히 한 김선억 목사에게 미국으로 가도록 길을

잘 열어주었고 또 일본주재 한국대사가 김선억 씨의 일을

적극적으로 도와 미국으로 비교적 쉽게 오게 되었다.

김선억 목사는 미국에 와서도 성실하게 목회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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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 말이 나온 김에 젊은 분 한사람에 관해 더 이야기하고 싶다.

내가 원래 교사로 사역을 시작해서 그런지 청소년과 교육에

관한 일에도 매우 관심이 많았다. 영남대회장으로 일하면서

자연히 영남삼육 중 고등학교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지방학교이기 때문에 우리교회 원칙을 따라 교사를 구하기가

참 힘이 들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생각한 사람이

유형환 씨였는데 그는 내가 삼육 신학교에서 가르친 청년으로

후에 한국연합회 회장도 오래한 분이다.

어느 때인지는 잘 기억이 나지를 않지만 어떤 행정위원회 때

서울에 와서 유형환 씨를 만나 함께 일할 것을 권했다.

“유 선생, 영남지방으로 와서 학교에서 일할 마음이 없는가?”

“목사님의 부름에 응할 마음이 있으나 이미 다른 대회장이

가자고 청한 분이 계십니다.”

“한발 늦었구만! 여러 곳에서 오라고 한다니 좋은 일이네,

어디를 가든지 잘 해보게나.”

“목사님, 저는 어느 대회를 가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목사님께서 저를 불러 주시니 영남대회로 갈 마음이 있지만

어디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아보고 가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본다니 그것이 무슨 말인가?”

“먼저 말씀하신 대회장님이 내일 9시에 오셔서 확실한 말씀을

주신다 했으니 그 때까지 오셔서 가자고하시면 그리 하겠고

그렇지 않으면 정 목사님 부르심에 응하겠습니다.”

“아, 정말 고맙소, 유 선생, 그러면 내일 아침 9시까지 기다리겠소!”

나는 다음날 아침 9시가 되기도 전에 유형환 선생을 찾아가

9시가 될 때까지 기다렸으나 다른 대회장이 나타나지를 않았다.

그러자 유 선생은 “목사님, 먼저 저에게 말씀하신 대회장은

어찌 된 일인지 아니 오시네요, 목사님의 부름에 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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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30세 미만인 청년 유형환 선생은 영남삼육 중 고등학교로

부임을 하게 되었다. 선생들과 의논하여 유형환 선생을 교사와

사감을 겸하도록 했다. 체격도 늠름하고 말도 잘하고

또 신앙도 좋아서 학생들이 유 선생을 대단히 좋아했다.

그런데 한 학기가 지나고는 서울로 가서 결혼을 하고

다시 영남대회로 돌아 왔다. 신혼이 된 젊은 부부가

젊은 아이들이 쉴 사이 없이 드나드는 기숙사 사감의 직분보다는

전도부 방면으로 나가게 하는 것이 유형환 군의 앞날을 위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본인의 의사를 물으니 유 선생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기에 다음 번 대회행정위원회에서

의논하기로 했다. 내 생각에는 진주에 주상규 목사가 오래 계셨고

교인들도 점잖아 젊은 사람을 보내기에 적당하다고 생각이 되었고,

주 목사도 새로운 곳으로 보내 주는 것이 본인을 위해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대회행정위원회가 열렸을 때에 나는

“주상규 목사를 마산으로 보내고 진주에는 유형환 목사를

보내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했더니 행정위원들이

“절대로 아니 된다”고 하면서 극구 반대를 하는 것이 아닌가?

나도 처음부터 그런 완강한 반대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고,

또 그런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런 결정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그러면 유형환 씨를 마산으로 보내고 주상규 씨를 그냥

진주에 두자.”고 의논하여 결정을 하고 회의를 끝냈다.

회의를 끝내고 나오는데 몇몇 행정 위원들이 나에게 질문을 했다.

“목사님, 왜 유형환 씨를 진주로 보내고 주상규 씨를

마산으로 보내려고 했습니까?”

“왜라니요? 갓 결혼한 젊은 신혼부부를 젊은 청년들이 많은

학교 남자기숙사에 두기가 그래서 목회부로 보내려고

생각을 했던 것이오. 유형환 씨 본인도 전도부를 원하고요”

“그러면 유형환 씨를 마산으로 보내면 되지, 왜 주 목사를

마산으로 보내고 유형환 씨를 진주로 보내려 하십니까?

유형환 씨가 평안도출신이 되어 좋은 곳으로 보내는 게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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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듣고 보니 나나 유형환 씨나 다 평안도 사람이었다.

나는 진주가 마산보다 더 좋다 라고는 생각도 안했는데

이분들은 내가 이북 사람을 더 잘 봐 주려 한다는 생각들을

한 것이 분명했다. “이북 사람으로 영남 대회를 맡아 일한다는 것이

이렇게 어렵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사역을 시작하면서

“어떤 그룹이나 파를 조성하지 말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일 해왔다.

같은 평안도 출신을 더 잘 봐준다는 생각은 추호도 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원산에 있을 때에 중선대회에서 ”같은 이북출신이니

서울 와서 함께 일하자“고 했을 때도 거절하고 청진으로 갔다가

아내까지 잃었는데 이제 그런 오해를 받으니 기가 막혔다.

“내가 어찌 같은 이북사람이라고 더 잘 봐준단 말씀들이시오?

내가 정말 그랬었다면 대회장으로 고집을 부려서라도

그리 했을 터인데 왜 그렇게 하지 아니 했겠소?”

“그런 것이 아니었다면 목사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십시다.

그러나 왜 주 목사를 마산으로 보내고 유형환 씨를 진주로

보내려 하시는지 그 이유는 자세히 설명을 하셔야 되겠습니다.”

다들 무슨 대단한 이유나 있었던 것으로 생각들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다들 생각해 보시오, 마산교회는 군대에 있는 청년들이

매 주일 6-7명이 교회로 나와서 자고 가곤 합니다.

그런데 처음으로 목회 일을 시작하는 30도 아니 된 신혼부부를

그곳으로 보낼 수야 있겠소? 그리고 주 목사는 진주교회에

오래 있었으니 그 분을 위해서 다른 곳으로 보냄이 좋지 않겠소?”

“아, 목사님, 그렇다면 대회장의 의견대로 처리하십시오!”하는

것이었다. 더 기가 막혔다.

“아니 행정위원회의에서 결정된 일을 이제 내 마음대로

번복해서 처리하란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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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야 모두들 회의를 다시 하자고 해서 기도를 하고

회의를 열어서 다시 결정이 되었다. 유형환 씨는 진주에 가서

목회 일을 열심히 성공적으로 했다. 매우 감사한 일이다.

교회 안에 그룹이 생기거나 지역감정을 따라 어떤 일을

결정하는 것만큼 교회의 발전에 지장이 되는 일도 없다.

그러나 그 부조리가 이미 우리 교회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은

불행한 일이라 생각이 되었다. 유형환 씨의 일은 사실

극히 사소한 일 중에 한가지일 뿐이다.

지방색에 관한 더 큰 일들과 지방색을 토대로 당을 짓는 일은

그 나름대로 명분이 있는 것처럼 보일수도 있었지만 이일들은

본인들과 교회와 대회 그리고 합회에까지 계속 어려움을 끼쳤고

교회의 발전에 상당한 지장을 주었다. 더 안타까운 일은 이런 일에

관계 되었던 분들 중에 정말로 교회 요직에서 훌륭하게 일할 수 있는

분들이 그냥 평범하게 교회일을 하다가 그만두거나 은퇴하게 된 것이

몹시 아쉽게 생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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