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29
(지방색을 토대로 당을 짓는 일은 그 나름대로 명분이 있는 것처럼
보일수도 있었지만 이일들은 교회의 발전에 상당한 지장을 주었다.
더 안타까운 일은 이런 일에 관계 되었던 분들 중에 정말로 교회
요직에서 훌륭하게 일할 수 있는 분들이 그냥 평범하게 교회일을
하다가 그만두거나 은퇴하게 된 것이 몹시 아쉽게 생각이 된다.
연재 #28 끝부분)
11. 중한 대회장과 영남 대회장-제 2 부
한번은 내가 영남대회장으로 있을 때에 부산위생병원 요직에는
이준민 씨가 병원총무로, 나의 맏사위인 김성래 목사가 원목으로,
그리고 김성래 씨의 부인이자 나의 맏딸인 “진실”이가 부산위생병원
원장인 에릭 의사의 간호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이준민 씨도
이북사람이오, 김성래 목사는 나의 사위였다. 그런데 어느 날,
이북사람이거나 이북사람과 가족관계가 있다하여 병원에서 전부
나가 달라는 배척운동이 일어났다. 부산위생병원은 영남대회구역 내에
위치해 있었지만 연합회 직속기관이었다. 그래서 부산위생병원에
잠시 들려보니, 내가 보기에도 해결을 빨리 보아야 할 정도로
심각해 보였다. 그래서 연합회행정위원회에서 우선 이준민 씨와
김성래 목사, 두 가정을 부산위생병원에서 다른 곳으로 전직을
시키자고 내가 안을 내고 설명을 하여 전격적으로 결의가 되었다.
그런데 부산위생병원 원장인 에릭 의사 본인이 한국어를 못하는데
부산에는 그나마 영어를 하는 간호원이 김성래 씨의 부인 리나
(진실이의 영어 이름)인데 김성래 씨 가족이 전근을 가면 자기가
일을 할 수가 없다고 고려해 달라고 요청을 했다. 다시 연합회
행정위원들은 여러 가지 의논들을 해서 다른 결정을 했으나 계속
배척운동을 하여 결국 다른 곳으로 전근을 시켰고 부산 위생병원은
한동안 진통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때 문제를 시작한 분들이 혹시 교회 사역에서 당시 말로
“잘릴가 보아” 좀 젊고 과격한 분들과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는 모르나 그런분들 몇 명이 대구에 있는 영남대회 사무실로
데모를 하겠다고 찾아 온 것이다. 당시에 아무리 사회에서 자기들이
원하는 바를 데모를 통해 성취하는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교회 안에서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이 되었다. 당장 눈앞에 벌어진 이 일도
해결을 해야 하지만 교회의 장래를 위해서라도 어떤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이 되어 모든 사람들을 사무실로 불러드려서 전에 없이 심하게
질책도 하고 타이르기도 했더니 자기들이 생각을 잘못했노라고
사과 하면서 돌아들 갔다.
그런데 이 일들의 전후 과정이 누구를 통해 어떻게 연합회장과 연합회
행정위원들의 귀에 들어갔는지 얼마 후에 연합회에 회의에 침석 차
서울에 갔는데 연합회장 데이비스(한국명 태 비수 목사)목사가 회의 때
느닷없이 내게 이런 말을 하셨다.
“정 목사는 대회장이면 대회장답게 일을 처리 하셔야지 그게 무엇입니까?”
“태비수 목사님, 무슨 일을 가지고 지금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영남대회내에서 사역자 배척운동을 한 사람들을 아직도 그냥 두고 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연합회장님, 그런 말 마십시오, 비록 사람들이 실수를 할수 도 있지만
지금 서로 마음을 합하여 일들을 잘하고 있습니다. 염려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교회 일에 따르지 않은 사람을 그냥 두어서야 되겠습니까?”
“태비수 목사님, 지금 그 분들은 저와 의좋게 일도 잘하고 있고 또
그 지역에서도 그분을 좋아하고 있으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더구나
대회내의 사역자를 옮기는 것은 대회행정위원회가 할 일이지,
연합회장이나 연합회행정위원회가 뭐라고 할 것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어떤 결정을 해야 한다면 대회행정위원회에서 하겠습니다.”
“..............”
나는 영어는 잘 모르지만, “서양 분들은 우리의 생각과 너무도 달라서
그분들의 생각대로만 일하면 문제가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연합회장이라 하더라도 할 말은 하곤 했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할 말이 없으셨는지 태비수 목사도 가만히 계셨다.
그런데 말은 얼마나 빨리 전해져 나가는지 문제를 야기했던 분들의 귀에
내가 연합회 행정위원회의에서 마치 연합회장과 크게 다투기나 한 것처럼
전해 져서 행정위원회가 끝난 후에 대회로 돌아오자 그 분들이 나에게
사과를 하는 연락들을 해 왔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오히려 우리는
더욱 신뢰를 쌓을 수 있었고 전보다 더 마음을 합하여 얼마동안 일을
잘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그러나 당시에 요직에서 일을 하기 위해서는 연합회총회나
연합회 행정위원회의 결의를 거쳐야만 했는데 당시에 선교사의 통솔하에
있던 한국 교회는 연합회장을 비롯해 대부분의 연합회 행정위원이 선교사인
까닭에 정말로 요직에서 중요한 일을 해야 할 충분한 자질이 있는
분들도 결국은 평범하게 교회 일을 마치게 된 것은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교회는 세계적으로 매기13째 안식일에 선교지를 위해 특별
연금을 거두어 특정지방을 위해 사용하는데 이번에는 한국에
배정이 되었다. 그래서 연합회행정위원회가 열리기 전에 영남대회
본부에 예배당이 없으니 그곳을 위해 사용하게 해 달라고 안을
미리 제출을 하니 생각해 보겠다고 하셨다. 연합회행정위원회가
시작이 되어 이 안건이 나와 의논이 시작도자 다른 대회 대회장께서
우리 대회도 본부 예배당이 없으니 우리 대회에도 그 선교지 자금을
달라고 즉석제안을 해서 그 돈을 둘로 나누기로 결정이 되었다.
둘로 나누인 돈을 가지고 건축업자에게 교회를 짓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나는 옛날에 원산에서 교회를 한번 지어본 경험밖에는 없었다.
그것도 교회라야 가정집 수준이었다.
나는 영남대회 회계(재무)인 노 승익 장로가 건축에 대한 경험이
조금 있는 듯하여 의논을 한 결과, 쉬운 일은 아니지만 우리가
직할(直轄)하여 건축을 하면 돈이 적게 든다고 했다. 수소문 한 결과
경주교회에 새로 나오는 목수가 일을 잘 하신다 하여 불렀다.
그분은 신체피부에 조금 문제가 있는 듯 했으나 일을 신실하게 하셨다.
또 대구에 벽돌 쌓는 분이 계셔서 부탁을 했더니 “예배당을 짓는 일이니
임금을 얼마를 주던지 자기가 일을 하겠다.”해서 맡기었더니 매우
신실하게 해 주셨다. 그래서 꽤 큰 이층 건물을 지어서 아래층은
대회 사무실로 하고 이층은 교회로 설계를 하여 건물을 완성 시켰다.
이층이 교회인지라 소음을 막기 위해서 마루를 이중으로 하고 그
사이에다가 톱밥을 많이 사다 넣었더니 소음도 없고 보온에도
도움이 많이 되었다. 아래층에 대회 각부사무실이 들어가고
이층은 예전에 비해 매우 큰 교회가 들어갔다. 좋은 목수가 있는 김에
예배당 의자까지 직접 만들어 넣으니 매우 훌륭한 교회가 되었다.
교인수가 원래 얼마 안 되어 걱정을 했지만 큰 교회를 짓고 나니
교인수도 훨씬 늘어나서 매우 감사했다.
그전부터 대회 본부교회에 정복수라고 하는 과부가 한 분 계셨다.
그 남편은 나와 순안 의명학교동기 동창인 이격원 씨였는데
외아들을 키우고 있었다. 내 안사람과는 전에 같은 전도부인으로
친하게 지내시던 분인지라 여러모로 대회와 우리 집을 도와주곤 하셨다.
그런데 이 분은 발이 넓어서 많은 사람들과 잘 알고 지내시고 계셨는데
마침 그때 나의 네째 아들 태목이가 군대에 나가 전라남도 광주에
가 있었는데 나의 집사람이 태목이를 자주 보기를 원하는 것을 알고는
염려하지 말라고 하기에 그저 감사하다고만 말을 하고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정복수 씨가 자기아들과 어떻게 운동을 했는지
우리 태목이를 대구로 오게 한 것이다. 태목이는 음악을 좋아하던
아이인지라, 대구지방에 군인으로 있으면서 주말에는 교회로 나와서
찬양대를 조직하여 열심을 내니 여기저기서 많은 청년들이 찬양대에
가입을 하여 교회가 청년이 많아져서 매우 활기를 띄게 되었다.
그러다가 1961년인가 갑자기 5.16혁명이 생겨서 모든 일이
혼란스럽게 보였다. 그중 한 가지는 정부주도로 학교마다 혁명 전,
즉 구체제 하에 있던 선생들은 다 내보내고 새로운 사람들로 채우라는
정책이 시달되었다. 참 난처한 일이었다. 나는 군부에 찾아가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우리는 제7일안식일 예수재림교회인데 우리교회학교
선생들을 그렇게 급하게 대체(代替)시킬 수가 없다. 그 이유는
그간 교회학교이기 때문에 담배나 술도 하지 않는 품행이방정한
교사들을 채용했는데 갑자기 그런 사람들을 구할 수가 없으니
이제 정부의 새 대책 때문에 아무나 데려다가 대체(代替)시킨다면
교회학교로서 학생들의 교육은 어찌하란 말이냐?”하고 사정을 해대었다.
그러자 그 군부의 사람들은 ”아, 그런 학교라면 혁명에 반대될 것이
없으니 모든 선생들을 그냥 유임시켜도 좋다“라는 허락을 받고
무사히 어려움을 넘겼다. 다만 지레 겁을 먹었는지 미리 사직을 해버린
한두 분 선생은 어쩔 수가 없었다.
혁명 정부가 제기한 그 다음문제는 교회단체가 재정에 대한 문제는
외국사람에게 의존 말고 내국인이 맡아야 된다는 시책이었다.
우리교회는 재단법인체로 되어있었고 교회 재단이사장은 연합회장이
겸직을 하고 있었다. 선교사가 연합회장이니 연합회장은 그대로 두어도
되지만 재단이사장은 한국 사람으로 해야 했다. 그래서 긴급 연합회
행정위원회를 소집하여 영어를 아는 박창욱 선생으로 하자고 의견이 나왔는데
연합회장 데이비스(태비수)목사는 이일은 원동지회에서
결정이 되어야 한다고 하며 그 결정을 원동지회에 넘겼다.
곧 원동지회에서는 “정동심 목사를 재단법인이사장으로 하라.”는
회신이 왔다. 그래서 1961년 5월에 재단법인이사장직을 맡게 되었다.
우리교회 안에서는 이사장이 무슨 권력을 갖는 것도 아니고 국책 상
그 직분을 맡기는 했으나 공부도 별로 못하고, 영어도 못하는
보잘것없는 사람을 믿고 교회 내에서 중대한 일이 있을 때마다
믿고 맡겨 주심을 감사했다. 원동지회의 회신이 오자 박창욱 선생은
웃으며 “모든 것에 경험과 힘도 있어야 하지만 배경도 있어야 되는
모양입니다”라고 하기에 “그것이 무슨 말이냐”고 물었더니
“정 목사님은 이력도 있고, 원동지회 빽(배경)도 있으니 이렇게
된 것 아닌가? 해서요” 하면서 당시에 사회적으로 “빽”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해서 함께 웃었다. 재정에 관한 경험이 많은 박창욱 선생은
나의 이사장 직분을 잘 하도록 정말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61년 6월, 또는 7월인 것 같다.
영남 대회총회가 열렸다. 대회본부는 대구에 있지만 숙소와
집회장소 등을 참작하여 영남대회 총회는 경산에 있는 경산
삼육고등학교를 사용했다. 여기에서 걱정을 했던 지방색 문제가
다시 불거져 나왔다. 총회 참석자들 중에 유력한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를 아니했다. 조금 후에 알아보니 유력한 분들 중 몇 분이
경산역에 나가 대표자로 오시는 분들을 다른 곳으로 모시고 가서
먼저 회의를 한다는 말이 들려 왔다. 대회총회가 열리기 약 두 시간
전에 나에게 자기들이 모인 곳으로 오라는 연락이 왔다.
거절할 수가 없어서 그곳에 가니 유력하신 총회 대표자들 중
대 부분의 남한 출신들이 그곳에 모여 계셨다. 들어가자마자
그 분들은 나에게 흥분된 음성으로 말했다.
“정 목사님, 이번 총회에서 사표를 내시겠습니까?
아니 내시겠습니까? 대답을 하십시오!”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
“여러분, 내가 책임 맡은 바로 이 대회에서 이런 불상사가
일어난 것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일을 추진 할 때는
교회의 규정도 잘 알아서 해야 합니다. 이런 일이 알려지면 신도들은
물론 지도자들도 대회장으로 있는 정동심 목사는 그 동안 어떻게
일을 하였기에 총회대표자들이 교회의 기본규정도 모르고 이렇게
하는가 하고 이야기 할 것 같아 마음이 무겁습니다.
단도직입적(單刀直入的)으로 말할 것 같으면 내가 이번 대회총회에
사표를 제출한다는 일은 없을 것이오! 왜냐하면 이 정동심이라는
사람을 영남대회장으로 결정하여 보낸 것은 한국 연합회총회의
결정이지 영남대회의 결정이 아닙니다. 그런고로 내가 사표를 제출하면
한국연합회로 제출하지, 영남대회 총회에 제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원하는 일을 이룰 수 있는 길을 알려드리지요.
만일 저에 대해서 불평이 있을 것 같으면 이번 총회에 오신 대표자
여러분들이 전부 연명(連名)해서 이 정 동심 이가 영남대회 대회장으로
적당치 않다는 결의문을 써서 연합회로 보내도록 하십시오!”
그러자 그 중에 박의창? 이라고 하는 분이 있었는데 일정시대에
경찰서 사법계주임으로 계셨던 분인지라 경우가 밝고 세상 돌아가는
규칙을 잘 아시는 분이었다. 그는 부산 서면에 있는 보육원 원장
최매실 씨의 가장 되시는 분인데 그분이 큰소리로 말을 했다.
“정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니 우리가 뭘 모르고 이렇게 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하다간 영남대회에 수치만 돌아 올 것입니다. 총회 시작할
시간도 다 되었으니 총회장소로 갑시다.”
나는 이분의 하는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나왔다. 후에 알게 된 것은
내가 나온 후에 그 사람들은 원래 계획대로 노승익 씨도 불러서
나에게처럼 “이번 총회 때 영남대회 회계 겸 서기 직분을 사직하겠느냐?
안 하겠느냐?” 고 질문한 것이다. 노승익 씨는 내가 이곳에 이미
불려 왔었다는 사실도 몰랐지만 교회의 규정을 잘 아시는 분이라
”저는 이번 총회에서 사표를 낼 수가 없습니다. 저는 한국 연합회
총회에서 결의하여 영남대회에 회계 겸 서기를 하게 된 것이니
사표를 낸다면 한국 연합회에 제출 할 것입니다.”라고 같은 대답을
한 것이었다. 노승익 씨까지 그렇게 대답을 하자 박의창? 씨는
”노승익 회계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우리가 잘못된 일을
하고 있는 것이 더욱 확실하니 총회에 참석하러 가자“라고 하자
많은 대표자들이 동의를 하고 총회로 왔다고 한다.
나는 그곳에 모였던 대표자들 모두가 다 지역감정을 가지고
사전에 계획하여 당을 짓고 대회장과 회계 및 다른 부장들에 대해
이북사람이라고 배척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다만 몇 몇 분들이 주동이 되어 기차에서 내리는 대표자들을 안내하여
총회장소가 아닌 다른 장소로 가서 그들 나름대로 섭섭했던 일을
설명하자 동정심도 생기고 또 군중 심리에 의해서 과격한 언동을
하게 되었으나, 경우가 바른 몇 분의 말을 듣고 지금의 일들이 경우에
어긋나는 것을 알고는 헤어져서 총회로 온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대회총회는 시작이 되었다.
내가 대회장이니 총회의 사회자가 되어 대회총회를 시작했다.
그런데 총회 첫날밤 집회가 거의 끝난 무렵, 어떻게 된 일인지
대표자 중 신모라고 하시는 분과 경산에 사는 권모라고 하는 두 분이
일어나서 서로 팔을 벌려가며 큰 소리로 말을 하다가 갑자기 신모씨가
뒤로 넘어지며 마치 호흡이 끊어진 사람처럼 되어버린 불상사가 생겼다.
그런데 갑자기 당한 일이라 겁이 났는지 아무도 신모씨를 돕겠다고
나서는 이가 없었다.
그렇다고 응급상황인데 어디서 의료인을 찾을 수도 없어서
나는 사회를 하다말고 내려와 대야에 찬물과 수건을 가지고 오라고 해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면서 수건에 물을 적셔 신모 씨의 얼굴을
닦아주고 몸을 주물러 주고 하니 얼마 후에 깨어났다.
이번 영남대회 총회 때 일어난 첫 불상사이었다. 그 이튿날 아침 일찍
신모씨와 권모씨를 방문했더니 서로 미안하다는 표시를 해서
일이 수습이 되어 총회 동안 무사히 넘어갔다.
대회(현재의 합회)총회기간 중에 중요한 일들 중 한 가지는
선거위원회에 관한 일인데 관례적으로 연합회장이 선거위원장의
일을 하게 된다. 나는 20 여 년간 대회장을 하면서 한번도
선거위원회에 들어가겠다고 신청을 한 일도 없고 또 한번도
선거 위원회에 들어가 본 적도 없다. 그 이유는 대회총회
선거위원회에 그 지역 대회장이 들어가면 자유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의논한다는 것이 힘들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번
대회총회는 시작 전부터 지역적인 파벌과 그룹을 짓는 문제가 있었고
또 선거위원도 그룹의 영향을 받아 선출이 되었기에 걱정이 되어
나는 선거위원장이 되신 연합회장에게 이번에는 선거위원회에 좀
들어가고 싶다고 요청을 했다. 평생 처음 그 같은 요청을 했으나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총회가 끝날 무렵, 선거 위원회는 결정한
사항들을 대회장인 나에게 먼저 통보한 후에 총회에 내어놓고
가부를 결정하려 한다면서 선거위원 몇 분이 나를 만나자 했다.
“목사님, 이것이 선거위원회에서 결정된 사항인데 이대로 총회에
제출해도 되겠습니까?”
결정된 사항들을 보니 앞으로 일을 해나가기가 거의
불가능한 결정들이었다.
“선거위원회의 일들을 보느라 수고 하셨고 이렇게 미리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결정된 사항들을 보니
저에게 영남대회에서 대회장의 일을 그만 두라는 말과 같습니다.”
“아니 목사님, 어떤 면에서 그렇게 생각을 하십니까?”
“대회행정위원들은 대회의 모든 중요한 일들을 결정하는 사람들인데
영남대회 내에 우리 신학교까지 나오신 분들도 많은데, 어떻게
우리교회의 국민학교도 구경 못한 사람들을 이렇게 많이 행정위원으로
선출을 했으며, 더구나 영남대회 내에서 가장 큰 지역인 부산에서
사역하는 사역자들은 모두 행정위원에서 제외 시켰으니 어떻게
영남대회를 이끌어 나가라는 말씀들이신가요?”
그러자 선거위원중의 한사람인 D 장로가 말씀을 하셨다.
“목사님, 다른 것은 저도 별로 할 말이 없지만 부산에서 일하는
사역자를 행정위원회에서 제외시킨 것은 그 분들을 다른 곳으로
보내기 위해 그랬습니다.”
D장로는 영남대회 평신도 대표로써 가장 경우도 바르시고 모든 일을
올바르게 생각하시는 분이었는데 이 분까지도 이렇게 말씀을 하시기에
나도 모르게 언성이 조금 높아졌다.
“그렇다면 정말 그 안을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총회 선거위원들은 대회 각부주임들과
대회행정위원들을 선정하는 일까지만 총회에 제출하는 것이고
대회내의 사역자 이동문제는 새로운 행정위원들이 충분한 계획과
토의를 거쳐서 결정을 하는 것인데 어찌 이번 선거위원들은
사역자 이동문제까지 거론을 한단 말입니까?
부산에서 사역하는 분들을 제외시킨 것은 그분들을 우리 영남대회에서
쫓아내기라도 하실 생각들이신가요? 어찌 이리 경우에도 없는 일들을
한단 말입니까? 다시 잘 생각 하셔서 올바른 결정들을 하시게 되기
바라면서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착잡한 마음을 가지고 그 자리를 떠났다. 총회 시작 전부터 몇 사람에
의해 시작된 지역적 배척감정과, 당을 만드는 일들을 보면서 우려했던
유감스러운 일들이 총회기간 중에도 계속되고 있었다. 다행히
선거위원들이 다시 총회에 내어놓은 선거위원회의 안들을 보니
부산에서 사역을 하고 있는 권숙련 씨, 고문경 씨 등 몇 명이
행정위원으로 포함이 되었다.
선거위원들이 올바른 결정을 하도록 아무리 우리가 기도를 드려도
어떤 때는 개인의 감정이나 불순한 의견들이 잘못된 결정들을 하도록
영향을 끼칠 때도 있다. 이번 총회에서도 몇 분의 주동으로 처음부터
총회가 힘들게 시작이 되고 잘못된 결정들이 생길 뻔 하였으나 다행히도
다시 원칙적인 결정들을 하려는 노력들이 보인 것은 하나님께
감사한 일이었다. 이런 일들은 언제라도 생길 수도 있으나
잘못된 일들을 바로 잡아야 할 대회부장까지 합세하게 된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몇 번이나 OO부장을 불러 자제해 줄 것을
부탁 드렸으나 앞에서는 그렇게 하겠다고 하고는 계속 그 일에 앞장 서는
일을 서슴치 아니하였던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영남대회총회는 무사히 마치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 드렸다. 총회가 끝나기 전에 새로 건축된 대회본부교회
낙성식을 하기로 결정이 되어 모두 대구로 올라갔다. 낙성식은 성대하게
치러졌고 많은 분들이 교회를 위해 선물도 준비해 주신 것을 잊을 수가 없다.
총회가 끝나자 대회 직원으로 유임된 OO부장이 나를 찾아왔다.
“목사님, 저는 이번에 다시는 교회 사역을 못하게 되는 줄로 알았습니다.”
“OO 부장,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요?”
“이번에 목사님이 그렇게 말리시는 데도 그룹에 가담하여 좋지 못한
행동을 함께 주동했으니 이번 일로 교회 사역은 끝나는 줄로
알았습니다. 목사님 정말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OO 부장!,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역자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해서
대회장 마음대로 그렇게 면직을 주는 것도 아니고 설사 나에게 마음대로
해직을 시킬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다고 해도 내 마음에 합당치 않다
하여 면직시키고 그럴 마음이 조금도 없으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나도 교회에서 대회장 직을 주어 사역을 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목사님, 정말 감사합니다. 다음부터 모든 일에 잘 생각하여 처신하겠습니다.”
아마 이번 일로 많이 배우고 많이 생각을 하였으리라고 믿는다.
영남대회장의 일을 보면서 경상남북 도에 계신 교우들이, 나와
영남대회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깊이
느꼈고 이일을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대회본부교회 낙성식을 하면서
그 동안 영남대회 내에 건축한 교회들이 생각이 났다.
본부예배당을 비롯하여 삼천포, 경주, 강구, 부산병원, 경상남도 함양읍
화산리, 대구 중동교회, 통영교회 등이었다.
대구 중동교회는 대회에서 별로 도와주지도 못했는데 그야말로
모든 교우들이 손수 나서서 힘을 합해서 일하는 것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 또 화산리지역 예배당을 지을 때는 그 교회에
남자는 한두 분밖에 없고 청년여자들이 많이 있었는데 모두
가정사정이 어려운 데도 불구하고 처녀들까지 나와서 모래를
머리에 이고 날라서 벽돌을 만들어 아담한 예배당을 건축하는 것을
보고는 교우들이 합심만 한다면 모든 일이 형통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배울 수가 있었고 하나님께 감사 드렸다.
그 중에도 특별히 감사한 것은 통영(현재 충무시)예배당에 관한 것이다.
통영예배당이나 삼천포예배당은 둘 다 2층으로 지었는데 통영예배당은
정말 교인들이 합심하고 헌신하여 건축하였다. 통영 내에 아주 높고
좋은 위치에 하얀 2층 예배당을 지었는데 어디서 보아도 아름답게 보였다.
통영교우들이 기뻐하는 것은 물론이고 삼천포, 부산 또는 거제도로 다니는
역객선에 타고 있는 많은 선객들이 배가 통영항구를 드나들 때마다
“저 예쁜 집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안식교 예배당“이라고 해서
선전도 잘되고 통영에서 교회를 말하려면 안식일 교회를 빼놓을 수
없게 되어 통영 내에 명물이 되었다. 모든 교우들이 자랑스럽고
대견해 했다. 교회의 아름다움만큼 사역자와 교우들이 한 마음이 되어
좋은 감화를 끼쳐서 모범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역할을 했다.
영남대회총회가 끝나고 1961년 후반기가 되면서 나의 은퇴와 나의
후임에 대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대회장을 선출하는 일은
연합회총회에서 하거나 연합회행정위원회에서 결정을 하지만 대회장이
은퇴를 할 때는 후임에 대해 의견을 내어놓는 것이 관례였다. 연합회
행정위원회의를 하려고 서울에 올라오니 박창욱 목사가 나를 찾아 왔다.
"정 목사님, 이제 목사님도 리타이어(Retire)할 때가 되어오는데
영남대회장 후임으로 누구를 생각해 본 일이 계신지요?"
"그리 물어봐 주니 감사하오, 그러나 나보다는 박 목사가 합회 회계로서
각 대회를 다녀 보았으니 나보다도 더 사정을 잘 알 것 아니오?
혹시 누구라도 생각해 보았소?"
"글쎄요, 교회사역의 연륜이 많으신 한 두분이 계시기는 하지만 지난
몇 년 동안 지방색이 문제나 경산에서 있었던 대회 총회 때의 일로 인해
계속해서 불상사가 있었으니 힘들지 않겠습니까? 그 다음으로는
이용진 목사가 어떨까 생각이 되는데 목사님 생각은 어떠하신지요?"
"내 생각에도 그렇소. 그 분들 다음은 이용진 목사가 교회 일도
열심히 하실 뿐만 아니라 그의 부인도 대회장의 부인으로 모든 일을
잘 감당하리라 생각이 됩니다."
"그러면 목사님께서 그분을 후임자로 추천하시지요."
"기회가 되면 그리 하도록 해보지요."
결국 연합회 행정위원회에서는 나의 후임에 대한 이야기가 이렇게
자연스럽게 나왔고 1961년 말, 한국연합회총회에서 이용진 목사가
영남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비록 후임이 결정은 되었다 해도 이 용진
목사를 위해서라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나는 기도를 드리고 나서
나와 오랫동안 함께 일을 했던 이 용진 목사보다 교회 사역의 연륜이
더 많으신 목사들을 찾아갔다. 그리고 이렇게 물었다.
"목사님, 이제 후배인 이용진 목사가 대회장이 되었으니 그냥 같은
대회에서 일을 하시고 싶소? 아니면 다른 지역으로 전근을 하는 것이 좋겠소?"
"목사님, 감사합니다. 실은 다른 곳으로 가고 싶지만 말 꺼내기가 뭐해서
가만있었습니다."
"그러면 어느 대회로 가는 것이 좋겠소?"
"합회에서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나는 “합회의 결정에 맡기시겠다.”는 목사님들의 이 대답 한마디에서
이 분들이 얼마나 많이 달라졌는지를 알 수 있었다. 이분에게서
더 이상 지방색 문제가 생겨나지 않겠다는 약속과도 같은 이야기였다.
나는 합회에 건의를 해서 이 선배 목사들이 다른 대회로 가서
사역을 하도록 했다. 이렇게 하고나니 모든 일이 문제가 없이
잘 해결된 느낌이 왔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원칙대로만 해 나갈 것 같으면 형제사이에 큰 문제가 없이
잘 해결되는 것을 다시 경험했다.
은퇴를 눈앞에 두고 생각해 보니 나의 사역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일이지만 연합회행정위원회의를 통해 결정된 나의 제안들도 생각이 났다.
첫째는, 내가 알아보니 세계 각국에서 안식일학교는 오전 9시 30분에
시작되는데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오전 10시에 시작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합회행정회의에서 그 이유를 물었더니 몇 몇 선교사들의 말이
"한국 사람들이 시간을 잘 지키지 아니하여 그렇게 결정이 된 것인데
10시도 잘 지켜지지 않는다.”하며 우리의 시간관념을 나무랬다.
그래서 "그것이 무슨 말씀들이십니까? 결정해서 시켜만 보시오,
잘 될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선교사들은 "연합회
행정위원회의시간도 지켜지지 않는데 그것이 가능할까요?"라고
이야기를 했다. 사실 행정위원회의가 9시 반에 시작한다 하면
10시나 되어야 어슬렁어슬렁 나오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수치스럽게도
"코리아 타임 (KOREA TIME)"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있던 형편이었다.
그래서 행정 위원들에게 "앞으로는 시간을 좀 잘 지켜서 그런 말을
듣지 말도록 하자"고 이야기를 했다. 다음날에는 모든 행정위원들이
회의시작 5분전에 다 참석을 해 주었는데 오히려 항상 회의에 늦게 오는
우리의 습관을 예상하고 선교사들이 회의에 늦게 왔다.
그래서 나는 웃으며 "이제부터는 코리아타임이라 하지 말고
아메리카타임이라 하자"라고 했더니 그때부터 모두 회의시간에
늦지 않게 참석들을 했다. 나는 선교사들에게 "자, 보십시오,
옳게 시간을 정해놓고 그대로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임을
설명하면 다 이렇게 잘 하지 않는가?"하며 "안식일 학교 시간도
세계적으로 진행되는 시간으로 결정을 하자"고 했더니
오전 9시 30분으로 결정이 되어 매우 기뻤다.
둘째로는, 우리가 사용하는 찬미가에 "천당"이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었다.
천당이라는 말은 불교에서 사용하는 말인데 우리가 원래 불교국가가
되어서 그런지 기독교에서도 별 생각이 없이 그렇게 사용하고 있었고
영혼불멸설과도 일맥상통하는 느낌을 주는 말이었다.
그래서 "우리교회 찬미책에서 "천당" 대신에 "천국"이라는 말을
사용하자"고 했더니 모두 좋은 의견이라고 결정을 하여 우리 찬미책을
교정할 때 "천당"이라는 말을 빼고 "천국"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하고 싶다.
그때에 우리나라는 독립은 되었어도 교회는 재정적으로는
독립을 못하고 있었다. 선교사들을 통한 대총회나 지회의 허급액에
전적으로 의존할 때이니 우리는 선교사들이 어떻게 하자고 하면
그냥 따라가는 형편이고 우리의 의견을 별로 내어놓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한 번은 연합회장이 회의에서 교회지남을 적어도 한 4000부
정도는 출판을 해야 채산이 맞는데 너무나도 교인들이 교회지남을
구독하지 않아서 적자가 많아 출판을 계속하기가 힘들다는 말을 했다.
교인들을 위해 발간되는 교회지남이 정간이 될 처지였다.
그래서 나는 제안하기를 "내가 서양교인들의 집을 방문해 보니
아침마다 "In The Morning"이라는 기도책을 가지고 은혜롭게
예배를 드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청년들을 위해서
“매조 기도력”이라는 책을 만들기는 했는데 제목과 성경 절만 뽑아 놓았으니
재미도 없고 별로 사용하지도 않는 실정이니 이제라도 서양 분들이 보는
"In The Morning"이라는 기도력을 번역해서 교회지남에 올리면
틀림없이 독자도 많아지고 신앙적인 면에서도 도움이 될 것이니
그렇게 시도를 해 보자"고 했다. 모두들 좋게 생각하여 곧 교회지남에
기도력을 번역하여 올리자 교인들의 반응이 매우 좋았다.
많은 교인들이 영적으로 좋은 감화를 받는다고 하면서
“교회지남은 버려도 기도력 부분은 따로 떼어 보관하며
계속 읽는다."라고 했다. 물론 교회지남의 독자가 몇 배나 늘어서
더 이상 손해를 본다는 말도 없어지게 되었다.
지금도 계속 교회지남에 기도력이 실리고 있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곤 한다. 그러나 신자들이 초창기 때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력을 읽는다면 얼마나 더 좋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도 있다. 교회의 일들은 작은 것부터 항상 기도드리며
생각해서 결정을 해 나가면 모든 일이 잘 풀려 나갈 것이라 생각이 된다.
1961년, 나의 후임 이용진 목사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영남대회를 떠나게 되었다. 나의 지난 일생을 생각하니 정말
감개무량(感慨無量)하였다. 이북 땅 한 구석에 자리 잡은 작은
산골짜기에서 태어나 이렇게 하나님의 교회에서 대회장까지
할 수 있었다는 것이 내가 생각을 해도 믿어지지 않도록
하나님의 은혜가 크고 감사했다. 연약한 내가 1917년부터 일해서
1961년까지 45년간을 과히 큰 허물이나 큰 문제없이 지나온 것을
하나님과 교회와 가족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배운 것이 많지 않았지만 교회 일을 시작할 때 결심 한 것이
몇 가지 있었고 하나님께서 도우셨다고 생각이 되었다.
첫째는 교회 일을 하면서 그룹을 짓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내가 처한 입장이 약하고 힘들어도 어떤 편을 만들거나
당을 지어 해결하거나 밀고 나가지 않겠다고 생각을 했다.
둘째로 내가 교회 일하면서 위에서 지도하는 분을 거슬러
"다투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셋째는 위에서 결정된 일은 순종하고 최선을 다해 꼭
성공하도록 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넷째로는 언제나, 비록 어려울 때라 할지라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자는 결심이었다.
45년간 일해 오면서 육신의 생각으로는 견디기 어려운 일도
많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도우심과 내가 결심한 그 심정을 가지고
일해오니 별 큰일이 없이 여기까지 온 것 같아 다시 한 번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내가 대회장 같은 지도자의 입장이 되어서도
나의 지도를 받는 분들에게도 잘못된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
이러한 원칙을 생각하면서 지도를 하고, 내 생각을 말해주고
서로 감사한 마음으로 서로의 생각을 받도록 노력을 하니
문제도 적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지 않았나 생각이 된다.
1961년 12월, 다른 때보다도 대구에 추위가 훨씬 심했다.
그 추위에 이사하는 것도, 이사 오는 것도 무리라 생각이 되었다.
그래서 신임대회장이 되신 이용진 목사에게 오는 2월쯤 이사해
오시면 어떻겠냐고 의견을 물으니 쾌히 허락을 해 주셨다.
그래서 61년 연말에 대회장직에서 은퇴를 했지만
62년 2월 20일경에 대구를 떠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