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31

by 정태국 posted Mar 17, 2012 Likes 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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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31


 

(나성 교회 조병서 목사의 후임으로 두 명의 이름이 대회에 제출이 되었다고

했다. 후보자가 두 명이나 되어서 그런지, 대회에서는 어떤 결정도

내리지를 못하고 자꾸 시간만 지나갔다. 연재#30 끝부분)


 

3. 나성 교회- 제 2 부


 

하루는 집으로 전화가 왔는데 Los Angeles 비행장이라 한다.

그 당시 한국에서 나성으로 오시는 분들은 대부분 나에게 온다는

연락을 하곤 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교우들이나 나의

자녀들에게 부탁을 하여 차편을 마련하여 편리를 보아 드리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무 연락도 미리 없다가 비행장에서 전화가 왔는데

이영린목사의 가족이었다. 조병서 목사도 이미 일을 그만두신

후인지라 연락을 해도 잘 되지가 않는데 마침 태국이가

“비행장에 나갈 수가 있다.”해서 그리하라 했다. 그런데 비행장에 나간

태국이가 내게 전화를 했다. “비행장에 나와 보니 이영린목사 가족 외에

저의 선배인 김영환 씨 가족도 왔다.”는 것이었다.

김영환 씨는 한국에서 위에 혹인지, 암인지가 생겼었는데 특별한

기도를 통해 극적으로 회복이 되어 한동안 교회 내 뉴스의 초점이

되었던 사람이다. 그래서 여기 저기 전화로 알아보니 김상용 장로와

그 외 한 분이 더 차를 가지고 갈 수가 있어서 세 명이 비행장에 가서

모두 모시고 우리 집으로 왔다. 모든 분들에게 점심을 대접한 후에

몇 사람이 여기 저기 알아보아 두 가족의 거처를 정하고 갔다.

당시에는 빈 아파트들이 있어서 그날로 들어 갈 수가 있었다.

 

 

그 후 며칠이 지나 누가 나에게 “목사님, 교회의 새로운 뉴스를

아십니까?”하기에 “그 뉴스가 대체 무엇이오?”하고 물었더니

“저, 이영린 목사도 나성교회 담임목사가 되겠다고 대회에

신청서를 제출했답니다.”라고 했다. 나는 무언가 잘못되어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대회에는 이근화 박사와 최희만 형제,

두 사람의 이름이 올라 있어서 처리를 못하고 있다는데 이제

세 명이 되면 일은 점점 더 힘들것이라 생각이 되었다. 그래서

가까이 살고 계신 이 영린 목사를 집으로 오시라고 해서 “대회에

신청서를 낸 것이 사실이냐?”고 물었더니 사실이라 하셨다.

그래서 나는 “내 생각에 현재 대회에 목사의 자리를 놓고

이근화 박사와 최희만 형제가 신청을 한 것도 보통 일이 아닌데

또 한 명이 신청을 하여 세 명이나 되면 대회에서 처리하기가

더 어렵지 않겠는가 하고 말을 하니 이왕 신청한 것인데

대회의 답을 기다려 보지요 하기에 더 이상 더 말을 하지 아니하고

그렇게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내 마음은 매우 착잡했다. 세 명 모두 내가 아끼는 사람들이오,

나와 절친했던 사람들의 자제 분들이었다. 또 아직 정식교회도 아닌데

얼마 전까지는 구하기도 힘들었던 목사자리에 세 명이나 신청을 했으니

대회에서도 참 힘이 들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만약 이 영린 목사가

미리 대회에 신청을 했는데 후에 이근화 박사가 신청을 했다면

이근화 박사에게도 꼭 같은 권면을 했을 것이다.

 

 

여하간 이 세 분들이 그 후에 대회와 어떤 연락들을 취했는지,

또 대회에서 개인적으로나 또는 세분 모두를 함께 불러서

어떤 의논들을 했는지는 전혀 모르지만 얼마 후에 대회에서

나를 보자고 했다.

당시 교회내의 분위기로는 대회에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오해받을 여지(餘地)가 많았지만 나를 믿고 부르는 대회의 요청을

마다고만 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통역이 필요한 나로서는

세 사람 다 영어를 할 줄 아는 분들이었지만 대회에서 나를

부른 것은 이 세분에 관한 것이라 생각이 되어 그 누구에게도

통역을 부탁할 수가 없어 아들 태중의사와 함께 대회로 갔다.

그동안 대회와 최희만 형제 사이에 무슨 의논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이날 대회에서는 나에게 이근화 박사와 이 영린 목사에 관해서만 물었고

최희만 형제에 관한 것은 한 마디도 묻는 것이 없었다.

“정 목사, 이근화 목사를 잘 아십니까?”

“네, 잘 아는 사이입니다.”

“이근화 목사를 안지는 얼마나 되었습니까?”

“아주 어릴 때부터 알고 있으니 수 십 년이 되었고 내 친구의 아들입니다”

“그러면 이 영린 목사도 아십니까?”

“네, 이 영린 목사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도 나와 친구사이이며

이 영린 목사는 갓난 아이 때부터 알고 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러면 이근화 목사가 서울위생병원의

원장으로 있었다는 것과 이 영린 목사가 삼육대학의

교수로 있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네, 그 모든 것이 다 사실입니다.”

“그러면 정 목사께서 이 두 분에 대해 아시는 대로 말씀을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먼저 이근화 목사에 대해 말씀을 해 주십시오.”

“이근화 목사는 이 영린 목사 보다 나이가 좀 많습니다.

이근화 씨는 잘 믿는 신실한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신학공부는 하지 않았으나 의학방면에 뛰어나 의학박사가 되어

우리교회병원에서 많은 일을 했습니다. 서울위생병원 원장으로

오래 일했고 병원을 대표해서 여러 해 동안 연합회행정위원으로도

일을 했기 때문에 저와 같이 여러 가지 교회 일을 의논하곤 했습니다.

신학은 하지 않았지만 선교열도 있어서, 매해 여름이 되면

간호원들을 데리고 지방으로 다니면서 순회 진료와 선교에도

많은 힘을 쓰신 분입니다.”

“좋습니다. 그러면 이 영린 목사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이 영린 목사도 신실한 우리교회 가정에서 출생했고 우리

삼육학교를 졸업하고 삼육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필리핀에 있는

우리대학에 유학하여 졸업을 하고 다시 삼육신학교로 돌아와서

오랫동안 교수 일을 잘 하던 분입니다. 이 영린목사도 역시

선교열이 많아서 매 안식일마다 학생들을 데리고 인근지역과

또 지방교회를 다니며 열심히 선교한 분입니다.”

 

 

대회에서는 더 이상 묻지도 않고 감사하다고 하여 나는 태중이와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교회 일을 시작 할 때부터 교회기관에서

정한일이 정말로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것이 아니라면 그대로

순종해야 한다는 원칙으로 살아왔다. 이 때에 대회에서 세 사람 중에

누구를 교회 지도자로 정하던지 나는 교우들에게 대회의 뜻에

순종하도록 권면(勸勉)하였을 것이다. 나는 진심으로 그 세분과,

모든 교인들이 누가 지도자로 선정되던지 대회의 뜻에 따르게

해달라고 전심으로 기도드렸다.


 

대회에서는 두 분에 대해 한국연합회, 삼육대학, 위생병원 등

각 부처에 조회를 해 본 후에 이근화 박사를 나성교회의 담임목사로

하기로 결정하였다 했다. 그러나 이근화 목사가 지도자로 선정이 되자,

내 생각과 내 소원과 내 기도와는 달리, 몇 분들과 그의 가족들이

이근화 박사에 대해 반대하는 것이 도를 지나치고도 남았다.

이 영린 목사는 매우 말을 삼가는 눈치였지만 그 외의 분들은

이 근화 박사의 취임을 반대하는 운동이 도를 넘었다.

얼마 후에 들으니 이근화 씨에 대해 별의별 험한 말들과

인격적인 험담(險談)들이 대회에 접수가 되어 할 수없이 대회는

결정을 다시 보류하고 그 일들에 대해 조사할 수밖에 없었다 한다.

 

 

급기야(及其也)는 서울 위생병원 원장 닥터 루에게 까지

이근화 박사에 대한 조회를 한 결과 닥터 루에게서

그런 일들이 없다는 회답이 오고 나서 대회는 다시

이근화 박사를 나성 교회 지도자로 확정을 한다고 했다.

그러나 대회의 결정과 교회내의 사정은 전혀 달랐다.

대회에서 나와서 이근화 박사를 나성교회 목사로 통고하는

과정도 몹시 힘이 들었다.

이근화 목사가 나성교회 정식목사로 임명이 되어 교회 앞에 통고가

된 후에도 그분은 교회지도자의 일을 시작도 할 수가 없었다.

교회에서 예배가 시작 되거나 끝나는 시간에는 이근화 목사에게

삿대질이요, 고성으로 다툼이 계속 되었다. 나잇살이나 먹은 나 같은

사람은 듣기에 거북하다 못해 창피하기가 말 할 수 없는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때에 이근화 목사도 여러모로 고생이 많았지만

가장 큰 피해자는 순진한 교인들이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금요일 저녁예배는 물론이요, 안식일 설교예배가

끝나면 이제는 나에게까지 듣기 힘든 말들은 물론 고성에 삿대질을 하며

소란을 피웠다. 어른에 대한 말과 어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찾아 볼

수도 없었다. 회고해 보면, 내가 대회의 결정에 따르자고 교회에서

권면한 것이 원인이거나, 아니면 대회가 나를 불러서 들어갔었다는

말이 나가면서 마치 내가 대회에 제안이라도 해서 이 근화 목사가

결정이 되고, 다른 후보자가 목사로 결정이 되지 않았든가, 또는

후보명단에서 제외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어디서도 그리스도인다운 면은 찾아 볼 수도 없었다.

 

 

가장 마음이 아팠던 일중 한 가지는, 몇 명 되지도 않는 나성 교회의

사역자 문제로 감정을 가지고, 순교하신 최태현 목사의 일을,

있지도 않았고 생각지도 않았던 방향으로, 나와 관계가 있는 듯이

말을 만들어 거론하며 나에게 삿대질과 고성으로 대들었던 일이다.

순교하신 최태현 목사의 일을 이런 슬픈 방향으로 결론을 내려 내게

대들던 이유는 앞에서 잠시 언급한바 있으나 좀 더 상세하게 말하고 싶다.

 

 

당시에 우리 나성교회에 다니는 자매 가운데 배선명 이라는 분이 계셨다.

김 방앗간을 하시는 김명한 씨의 아내로, 이 집도 많은 자녀들이

도미하여 가족들이 나성에 살았다. 나의 아내는 배선명 씨와

절친한 사이로 지냈고 나도 부군(夫君)되시는 김명한 옹과 가까이

지났는데 그 사위되는 분은 장모님을 위하여 가끔 우리 교인들을

식사에 초대하곤 하였다.

한 번은 그 사위되시는 분이 저녁 초대를 했는데 내가 기억하기에

이승일 목사, 황승일 장노(최희만 씨의 장인), 최옥만 씨

(최희만 씨의 맏형), 정진걸 씨 등이 거의 다 부부 동반하여 갔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다가 순교하신 최태현 목사님의

이야기가 나왔다. 이야기 중에 최태현 목사께서 종로 경찰서에

잡혀가 계실 때에 누가 주었는지는 모르나 다니엘서의 묵시 그림을

가지고 취조를 당하셨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서슴없이

“그 때 그 그림들은 내게서 가져간 것일 꺼요.”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순간 나의 그 말을 듣는 분들의 눈치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이 되었으나 내가 한 말에 대하여 아무 거리낌이 없었던 터이라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내 기억으로는 아마 최희만 씨나

최 옥만 씨 중 한 사람이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그 그림을

목사님이 갔다 주셨습니까? 아니면 누구를 통해 주셨습니까?

그렇다면 누구에게 주셨습니까?”하고 묻는데 무엇인가 매우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느낌에 그렇게 따져서 묻는

말들에 대해 간단히 대답할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내가 준 것이라”고만 대답을 했다.

 

 

이 질문들에 대해서 내가 자세히 설명을 하지 않은 이유는

그 그림을 내게서 가져간 분은 임종회 목사인데 그분은 나의

큰 아들 태혁이의 장인 되시는 양반이니, 나의 사돈이 되시는

목사님이다. 이 때, 소식에 의하면 임종회 목사가 지금 사경을

헤 메일 정도로 심하게 앓고 계시다고 했다. 그런데 그 다니엘

묵시에 관한 그림에 대하여 묻는 분위기로 보아 내가 만약

그 그림을 임종회 목사님이 나에게서 가지고 가셨다고

쉽게 대답을 하면 전후 사정은 모른 채 곧 임 목사에게 편지나 전화,

또는 다른 사람을 통해 직접 ”정 목사가 그러는데 당신이 그 그림을

가지고 갔다는 것이 사실인가? 아닌가? 왜 종로 경찰서에

가지고 갔는가?”하면서 심문하듯이 이야기가 된다면 그분의 병 회복에

조금도 도움이 아니 될 뿐 아니라 오히려 크게 누를 끼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나만 말을 삼가고 참고 있다가

그분이 회복되면 자세한 말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며칠 후에 “최 목사님이 종로 경찰서에 계실 때에 정 목사가

다니엘 그림을 내어 주었기 때문에 풀려나지 못하시고 혹독한

취조를 받다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는 소문이 들려오더니

조금 지나자 “최 목사를 고통 받도록 하려고 그림을 경찰서에

갖다 주었다”라는 더 심한 소문도 들려오기 시작을 했다.

도저히 그 소문을 듣고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정동심이라는

사람이 최태현 목사님으로 하여금 그런 고통을 당하게 하기 위해서

다니엘서의 그림을 내어 주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도 마음 아픈 일이었지만 “그렇게 이야기가 되어 버리면

최 목사님이 순교를 당하신 것이 아니라 모함을 당해 돌아 가셨다.”라는

말이 되는 것이 더욱 마음 아픈 일이었다.

 

 

또 임종회 목사가 최 목사를 그렇게 혹독하게 형벌을 받으라고

그림을 가져다주었을 리는 더욱 만무한 일이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이렇게 되어서는 나 자신과 임 목사는 물론

최태현 목사님을 위해서는 더더구나 안 되겠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내가 살고 있는 몬트레이 파크 딸네 집으로 최희만 형제를

오라고 했다. 최희만 형제가 그의 집안을 대표해서 말하곤 하기에

그를 불러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며칠 전에 배선명 씨 사위 댁에 초대를 받았을 때,

부친 이야기가 나와 그 그림을 내가 주었다고 할 때에

당신들의 표정이 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이제 정 목사가

그 그림을 내어 주었기 때문에 최 목사님이 혹독한 고문을 받다가

나와서 세상을 떠났다는 소문이 들리니 그것이 될 말인가?”

“목사님, 염려하지 마십시오, 목사님이 그 그림을 내어 주셨다

할지라도 우리 아버지가 혹독한 고문과 취조를 받으라고 내어

주셨을 것은 물론 아니실 것이고, 만약 그렇게 해서 내어 주셨다면

그 그림을 나에게서 가져갔는데 라는 말씀은 꺼내지도 않으셨을 것이

자명하니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는 최희만 군의 말을 듣고는 안심이 되었고 “이런 저런 소문이

들려와도 조금 지나면 없어지겠지” 하면서 지내었고 감사하게도

그 후로는 조용했다. 그런데 이제 이근화 목사가 나성 교회의

지도자로 선정을 받고 나자 이근화 목사에 대한 비난은 물론이요,

“대회의 결정을 받아드리자.”라고 말한 나에게까지 “왜 그림을

내어 주어서 우리아버지 (또는 우리 할아버지)가 혹독한 고문을 받고

세상을 떠나게 했는가?”하며 교회 예배만 끝나면 삿대질이요,

고성(高聲)이 들릴 때에는 정말 섭섭하기가 그지없었고

억장이 무너지는 듯 했다.

옛 글에 “세 번 장마당에 범이 내려왔다.”는 거짓말을 전하니

사람들은 “정말 범이 내려 왔구나!”하고 믿었다는 말이 있는데

“이렇게 정동심이가 그 그림을 종로경찰서에 내어 주어서

최 목사님이 그렇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자꾸 입에서 입으로

건너가면서 가감이 되어 그것이 마치 정말인양 만들어

질 수 도 있겠다.”라고 생각이 되고 “그것은 순교하신 최 목사님은 물론,

그 가족과 또 순교자를 모시고 있는 우리교회 누구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그때에 그 다니엘 그림을 종로경찰서로 가져가게 된

동기와 형편을 한 번 더 얘기 하고자 한다. 우리의 가족, 자녀들도

앞뒤의 경우를 잘 알고 있다가 행여 이 다음에 그런 소문이 혹 들린다

할지라도 귓가의 바람처럼 생각을 하고 그 소문에 대해 한 점 양심에

부끄러울 것이 없게 하기 위해서 다시 언급 하고자 한다.

 

 

1943년 1월,

합회총회가 열렸는데 무슨 연유인지 예상과는 달리 합회장 선거에서

최태현 목사님이 낙선을 하고 오영섭 목사가 선출이 되었다.

나는 형무소에서 징역을 살고 나온 전과자로 요주의(要注意)

인물이라 하여 아무 책임도 맡을 수가 없었고, 또 시대가 험악하여

누가 나에게 와서 교회의 돌아가는 형편도 알려주지를 않았다.

그저 총회 때 제일 뒷 구석에 앉아있는 형편이었다.

그러니 총회선거위원회에서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는 아직도

나는 모른다. 새로 선출된 오영섭 목사는 신임합회장 인사를 통해

말씀을 하면서 “일본나라가 소위 ”대 동아 전쟁”이라는 것을

일으켜 놓아 시국을 대단히 어렵게 만들어 놓은 이때에 이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희생도 할 각오가 되었다“고 하셨다.

나는 험한 전쟁시기에 저렇게 이야기를 하면 일본정부가

어떻게 할 것인가가 걱정이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총회 후 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안식일교회 핵심목사와

간사들이 모두 종로 경찰서로 검거당하여 구속이 되었다.

신임 합회장 오영섭 목사, 최태현 목사, 김상칠 선생, 박창욱 선생,

이성희 목사, 김예준 목사 등이 다 검거되었다.

이 때에 최태현 목사님이 연합회장직에서 낙선이 되리라고는

생각들을 안 해서 그랬는지, 그 분에게 아무런 보직도 주지 않은 채로

총회가 끝나게 되었는데, 다행히 평양지역 대표자들이 평양교회

담임목사로 모셔가겠다고 해서 최 목사님도 승낙을 하셨다.

그런데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한 달이 다 되도록 평양으로

가시지 않으셨다가 검거 되셨다. 평양으로 조금 일찍 가셨으면

검거대상에서 빠졌을 수도 있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남아있다.

이같이 안식일교회 핵심목사와 간사들이 검거되고 나니 전국적으로

우리교회의 형편은 말할 수 없이 나빠졌다. 다만 검거되신 분들이

속히 나오시기를 바라며 한두 달 기다리다가 나오시지를 않자

“합회대행위원을 조직하자.”하여 대행위원을 만들었는데

임종회 목사가 대행위원장이 되고 김명길 목사, 고두칠 선생,

이근팔 선생, 곽종수 선생 같은 분들이 대행위원이 되어서

교회 일을 돌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1943년 4월 하순인지, 5월 초순인지 확실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데 나의 사돈되시는 합회대행위원장이신

임종회 목사가 우리 집에 모처럼 인사차 찾아와서 교회 일을

걱정하시다가 하시는 말씀이 “다니엘그림만 구할 수 있다면

최 목사님이 속히 나오실 수가 있는데 그 다니엘그림이

어디 있어야지요.”라고 했다. 당시에 교회에 관계된 사람들은

만나기만 하면 어떻게 검거된 분들을 나오게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대화의 내용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다니엘그림을

가지고 가면 분명히 나오시게 되느냐?”하고 물었다.

임종회 목사는 “그렇습니다!”라고 확신에 찬 대답을 하셨다.

당시의 다니엘과 묵시록의 예언그림은 넓은 광목 같은 천에

천연색으로 찍혀 있는 것이었는데 그 그림은 아주 귀중한 자료로써

누구나 갖고 싶어 하던 그림이었다.

 

 

그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가 그 그림을 갖고 있었다.

그 그림은 내가 순안 의명학교에서 공부할 때에 내 은사인

김봉걸 선생이 가지고 계셨는데 정말 귀한 자료였다.

김봉걸 선생님은 김선억 목사의 부친이 되시는 분이시다.

나는 김봉걸 선생님께 “여름방학 동안에 그 그림을 다른 천에

그릴 맘이 있는데 선생님의 그림을 제게 좀 빌려주시겠습니까?”라고

말씀을 드렸더니 “아, 자네가 그것을 빌려 달라고 하는데

안 빌려 줄 수가 있겠느냐?”하시면서 쾌히 내어 주셨다.

그런데 그 그림을 그려보려고 하니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잘 그려지지가 안아 죄송하게도 몇 해가 지나도록 돌려

드리지를 못했다. 또 김봉걸 선생께서도 그것이 그렇게

필요치 않으셨는지 독촉도 아니 하시기에 “내가 꼭 그리겠다.”는

욕심에 집에 두고 있었는데 몇 해후에 김봉걸 선생님께서

세상을 떠나셨다. 김봉걸 선생님께 죄송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그 그림을 은사님의 유품이라 생각하고 장롱 속에

깊이 간직하고 있던 귀중한 그림이었다. 그런데 나를 찾아 오셨던

나의 사돈되시며 합회대행위원장이신 임종회 목사가

그 그림이 있으면 최 목사가 검거에서 풀려나실 수가 있다는데

다니엘 그림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한 것이라 한들

어찌 아니 내어 드리겠는가?

 

 

더구나 임종회 목사는 최태현 목사와는 정말 막역한 사이였다.

임종회 목사가 만주에서 상처를 했을 때에 최태현 목사님은

임종회 목사를 한 가족 이상으로 사랑하고 돌보아 주고

신학교를 가게 하여 목사가 되게 하신 분이시다.

나 역시 최 목사의 사랑을 받은 사람으로 내가 나의 아내를 여의고

재혼을 할 때에는 주례까지 해주셨고 이국 땅 간도에서부터

특별히 최 목사님의 자당과 최 목사님의 사모님에게서 얼마나

큰사랑을 받았는지 모른다. 이런 가정에 가장되시고 교회의

제일 웃어른 되시는 최 목사님이 검거되어 갇혀 계신데,

전과자의 낙인이 찍힌 나로서는 어찌 도울 길도 없이 지나던

때였는데, 최 목사님의 사랑을 받던 나의 사돈되는 임종회 목사가

그 그림을 찾고 있으니 정말 기쁜 마음으로 내어 드렸다.

최 태현 목사님이 취조를 당하실 때 사용된 그림은 틀림없이

임 종회 목사가 내게서 가져간 그 그림일 것이라고 생각이 된다.

그 그림이 있으면 최 목사를 풀어 주겠다는 종로 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의 말을 믿고 구하러 다니던 순진한 임종회 목사나

그 그림을 내어준 나 자신이나, 또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 그림이

필요하다고 임 목사에게 알려준 사람이나 모두가 최태현 목사가

하루라도 속히 풀려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한 것뿐이다.

 

 

그러나 그 일이 지난 지 수십 년 후에, 다른 일도 아니고

아주 조그만 나성교회 지도자 문제로 의견들이 갈라지면서

“최 목사님을 고생하게 하려고 그 그림을 경찰서에 들여보냈다.”는

식의 상상도 못했던, 가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 섭섭했던

마음을 도저히 표현할 길이 없다. 모두 최 목사님을 위해

그렇게 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이런 소리를 듣는데, 만약 그 당시에

그 그림을 아니 내어 주어서 돌아 가셨다면 어떤 비난을 들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곤 한다. 그러니 이 테이프를 듣는 우리

자녀 손들은 앞 뒤 사정을 잘 알고 최 목사님과 부모 되는

나에 대한 명예가 손상되지 않도록 올바른 생각을 하기를 바란다.

 

 

어떤 사람들은 정작 새로 합회장이 되신 오영섭 목사가

신임인사에서 일본정부의 미움을 살만한 말을 했는데,

오히려 최태현 목사님이 그렇게 고생 한 것은 최 목사님이

무슨 악한 일을 남에게 했었기 때문은 아닌가 하는 의문도

제기하고 소문도 냈지만, 그것은 당시의 주위 사정을 모르는

말이라 사려 된다. 오영섭 목사가 새로운 합회장으로 선출이

되셨고 젊고 성격이 급한 분이시라 비록 그런 신임 인사를 하셨지만,

그 동안 최 목사님이 한국 교회를 지혜롭게 지도하고 인도하신

분이시니 일본당국의 미움을 샀던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이 된다.

다만 일본정부는 그동안 지혜롭게 행동하신 최태현 목사를

괴롭힐 핑계가 없었든 것뿐이었는데 마침 오영섭 목사의

신임사를 기회로 최 목사님이하 많은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괴롭힌 것이라고 생각이 된다. 그러니 당시의 사정을

지혜롭게 생각하여 어떤 오해가 될 소문에 현혹되지 말기 바란다.

또 내게 대한 헛소문이나 오해를 불식시킨다는 이유로라도 나와 교회,

그리고 최태현 목사의 명예를 실추(失墜)할 말을 삼가기 바란다.

아마 최 목사님의 자유 손들도 어떤 오해되는 생각도 할 수 있겠으나

시간이 지나면 지혜롭고 올바르게 생각하리라 믿고 기도를 드린다.

 

 

나성교회 이야기를 하다보면 나성교회의 어떤 목사님 생각이 나며

나의 뼈아픈 실수를 잊을 길이 없다. 이분은 심성(心性)이 너무 고와서

누구에게 싫은 말 한마디 하기 힘들어하는 분이었다.

그 고운 심성은 나이가 많은 나도 본받을 만 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교회 일과 관련해서 이분에 대해 조금씩 말들이 들려오는데

이 분이 너무 심성이 좋아 지도자로서 할 말은 하지 않는 다는 말이었다.

암 모두 다 이 분께서 좀 더 강력하게 교회를 이끌어 가기를 바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해 드릴 기회도 별로 없었고

하기 쉬운 말도 아니었다.

그런데 하루는 이분이 나에게 설교를 부탁해 왔다. 그러나 당시에 나는

도무지 설교할만한 마음 상태가 아니었다. 여러 가지 가정의 어려운 일로

정신적으로 교회도 가기가 힘든 형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로 믿음이 없는 연약한 나의 인간 상태였다.

그러나 이분은 사양하는 나에게 계속 설교를 부탁 하시기에 너무

거절하기가 어려워 설교단에 서게 되었다. 그런데 설교를 시작하면서

그랬는지, 아니면 중간에 그랬는지는 모르나 원래 설교 내용에

있지도 않은, 내가 평소 생각하던 바를 교인들 앞에서 말해 버린 것이다.

“한 교회의 담임목사는 군대로 말하면 육해공군 참모총장이나 마찬가지요,

잘하던 못하던 모든 부서의 책임은 참모총장이 지는 것이니 이 교회의

참모총장격인 목사는 소신 있게 할 말을 하면서, 잘 못된 것들을

이야기 해주고 시정해 나가면서 이 교회에서 책임 질줄 아는 강한

지도자가 되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참으로 적절하지 못한 말을 설교에서 하고 만 것이었다.

그날 집에 와서 가만히 생각을 하니 “내가 아무리 목사를 위해서

말했다하더라도 교인들 앞에서 그리한 것은 정말 목사에게

잘못한 것이며 듣기에 매우 거북 하였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일요일 아침 일찍이 교회 목사사무실로 찾아가

사과를 하기 위해 “어제 내가 설교하면서.................” 하고

이야기를 시작하자 이분은 내게 거칠게 항의를 했다.

“가만 생각해 보니까 정 목사님이 나를 오랫동안 좋아하시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내가 목사가 되고부터 싫어하신 것이 아닙니까?”

 

 

나는 이분이 “얼마나 내 설교가 듣기에 거북했으면 이렇게

야단을 하겠는가?”라고 생각이 되어 그저 가만히 듣기만 하고

있었지만 이분이 목사가 되고 나서부터 내가 이 분을 싫어했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를 않았다.

“목사님, 그게 무슨 말이오?”

“아, 정 목사님은 으레 목사님의 가족이 교회 목사가 될 줄로

기대하시고 계시다가 제가 목사가 되니까 그 때부터 저를

좋지 않게 생각하신 것 아닙니까? 제 말이 틀렸습니까?"

그야말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나의 사위되는 김성래 목사를 두고 하시는 말씀 같은데

나는 김성래 목사가 한국에서 올 때부터 “미국에 와서는 목사 할

생각을 하지 말라.”고 이야기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이분의 말은 정말 생각도 못했던 뜻밖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이 분이 속으로만 그런 오해를 하고

있기보다는 비록 이런 기회에라도 속내를 이렇게 이야기 하게 된 것이

오히려 고맙고 잘 된 일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어제 나의 설교한 일로 워낙 흥분된 상태인지라

“목사님, 내가 어제 정말 실례가 많았소! 후에 내가 가서 정식으로

사과를 하고 또 설명도하고 싶소!”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어제 이야기로 제 말은 다 끝났습니다.”

대단히 마음이 상하셨던 것 같아 매우 미안했다.

그러나 어쩔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장문의 편지를 썼다.

정말로 미안하다는 말과, 한 번도 당신을 싫어 한 적이 없다는 말,

또 김 성래 목사는 미국에 올 때부터 미국에서 목회를 할 생각을

말라고 했고 지금도 같은 생각이니 오해를 풀라”고 했다.

이 편지를 읽고 마음을 풀었는지는 몰라도 지금이라도 다시

용서를 받고 싶은 마음뿐이다.

 

 

내가 이 이야기를 말하는 것은 이 분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 일을 통해 내가 얼마나 이 과정에서 잘 못했는지를 알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에 보면 (마 18:15)

“형제에게 잘못이 있다면 가서 너는 그 사람만 상대하여

권고할 것이오.”라고 한 말을, 남에게는 내가 권면 하면서도 나는

그 길을 택하지 않고 미련하고, 교만하게도 교회설교시간에 모든

교우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여 이분의 마음을 상하게 한 것이다.

지금 생각을 해도 이분에게 매우 미안한 생각이 들고 이 일을 통해

성경 말씀에 들어있는 지혜를 다시 한번 알게 된 것이 감사하다.

교만하게 한 말은 평생 후회를 하게 된다는 것을 늦게 깨닫게 되었다.

내 말을 듣는 나의 자녀들은 나의 이 미련했던 경험을 통해

“말이 많으면 실수를 하게 되고 또 나의 말로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 하기를 바랄 뿐”이다.


 

*(제가 좀 쉬기 위해 내일 새벽에 집을 떠나 한 6주간 지내고 올 계획입니다.

제가 가는 곳에 인터넷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인터넷이 않된다면 갔다와서 다시 뵙겠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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