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 새벽에 일어나 설교를 준비하다가
결론 부분에서 읽어 주고 싶은 글
"누워서 침뱉기" 를 민초에 써서 올렸는데 얼마 있지 않아서
생소한 전화가 걸려 왔다.
연세가 있으신 아주머니의 목소리였고
나의 글을 줄곧 읽는 독자라 소개하였고
요즘에 무림의 고수처럼 나타나 재림교리와 재림교단의
불편한 교리들을 향하여 리우에서 활을 쏘는 김우진 못지않게 백중하는
칼질(?)을 하고 있는 민초1님의 글을 읽으며
재림교단에 남아 있는 한가닥의 불씨를 보았노라고
시작하는 목소리 속에서
또박또박한 저음으로
차분하면서도 이슬을 머금은 듯 풀어내는
실타래가 삼십분이 넘게 흘러 나오면서도
멈출줄을 모르고 계속되었다.
열한시에 시작하는 교회에 갈 시간이어서
다음으로 미루자고 하지 않았다면
독실한 장노교 집안에서 독실한 재림교인으로
변신하여 지낸 삼십여년의 이야기는
"허공속에 묻어야만 할 슬픈 옛 이야기" 같이
아쉬웠고
공허했고
실망스러웠고
황당했던 아픔들이 몇시간이고 흘러 갈 것만 같았다.
도중에는 눈물이 났다.
처음엔 완벽한 교리라고 믿었던 날들에는
이 교회야 말로 지금 지상에 딱 하나밖에 없는
완벽한 교회요 교리라고 믿어져서 흥분속에 살았었단다.
그런 날들이 서서히 지나면서
구원의 기쁨을 교리와 교회 그리고 날자에만
귀속시켜놓고 전에 다니던 개신교보다 못한
내부적 분열과 분위기로 자신이 전도하여 데리고 온
영혼들까지 피폐하게 하는 흐름속에 떠내려 가는 자신의
신앙의 현주소가 진절머리가 났고
오직 예수만이 아닌 또 다른 요인으로
오직 하나님의 사랑만이 아닌 또 다른 이유들이
구원의 전신갑주로 변화되어 누구도 어쩌지 못하는
철벽이 되었다고 확신하며 이년전에 교회를 떠나서
이따금씩 오직 설교만을 듣기 위해서 한 교회를
다니고 있노라고 했다.
재림교회의 숲에서 알을 까서 키운
미쳐 손을 잡고 함께 떠나오지 못한 아들과 딸들을
놓아두고
어디로 가야할지도 결정하지도 못한 채
방황하고 있는 듯한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분과 나는 결국 어디론가
침뱉기를 하고있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얼굴없이 떠드는 무자비한 기별과
절은 좋은데 절의 도서관이나 주지스님이 좋지 않으니
책 하나만 남기거나
예수라고 하는 중 한분만 남기거나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힘없는 자의 조언 사이에 중보하는 천사님들이 얼마나 계실까?
천사님들이 얼마나 계셔서 이 땅에서도 우리의 눈물을 씼어 줄까?
어제도 요한복음 5장을 읽고 듣고 기도하다가 줄줄이 눈물을
훔치던 교우들의 눈물까지도...
이것은 뭐 기독교 전체가 다 비슷한 상황이니 개탄스런 일이지요.
거기에 대해선 욕을 한 참 먹어도 당연하고 싸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에 대해선 두둔하고 싶은 마음 조금도 없구요.
자질이 부족한 지도자때문에 상처받고 떠나는 영혼들을
보면 울화통이 터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결국은 사람을 초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바라보지 말아야 합니다. 근데 이게 쉽지 않아요.
이것때문에 자꾸 상처받고 넘어지게 되는데
어디가든 사람 사는 곳은 비슷할 겁니다.
당장 꼴보기 싫은 사람 있으면 다른곳으로 가야지 어떡합니까?
그런데 평생 그럴 순 없잖아요?
결국은 내 수준이 높아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어차피 구원이 누구 따라 가다보면 얻어지는게 아니고
자기가 홀로서기를 통해서 이루어야 하기때문에
홀로서는 연습을 하는게 필요합니다.
문제는 사람에게 있지 교리에 있지 않다는 것...
그래서 사람은 비판할지언정 교리를 부수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교리문제로 성공한 교회 있으면
나와보라고 하세요. 제도가 아무리 좋아도 그 제도를 운영하는
인간이 덜 되면 방법이 없는 겁니다.
공산주의 이념은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실제로는
독재와 억압과 횡포가 행해지는 곳이잖아요?
문제는 어디가나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마음에 없는 그리스도인이 문제인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