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이 기대고 있는 '근거'를 부수는 물음을 극한으로까지 밀어붙였고, ‘밑 빠진’ 의심의 힘을 통해 새로운 근본적 각성의 계기를 만들어내고자 했던 것은 중국의 선사들이었다.
그들은 불교도들이었지만, 불교의 가장 근본적인 지식이나 통념들을 극히 과격한 방식으로 불살라버린다.
마조(馬祖)의 제자였던 단하(丹霞) 스님의 얘기는 유명하다.
이 양반, 추운 겨울날, 어느 가난한 절에서 좌선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날이 너무 추워서 도저히 그냥 앉아있을 수 없어서 땔감을 찾아 나섰단다.
하지만 절이 너무 빈한하여 여기저기 뒤지고 다녀도 땔감을 구하지 못한 단하 스님의 눈에 대웅전에 있는 목불이 눈에 띄었다. 두 개의 목불 가운데 하나를 끌어내려 도끼로 뽀개 불을 땠다고 한다.
오 마이 갓! 따뜻하게 불을 때고 있는데,
마침 절의 살림을 맡아보던 원주 스님이 지나가다가 이걸 보고 눈이 휘둥그레져 달려들었다.
“이게 무슨 짓이요. 대체 어쩌자고 불상을 뽀개서 불을 때는 거요?”
... “아, 부처님을 태워 사리를 얻으려고.”
“아니, 목불을 때서 어떻게 사리를 얻는단 말이오?”
“어, 그래? 그럼 저기 있는 저 목불도 마저 끌어내려 때자구. 날이 좀 추워야지.”
사실이었을까?
모를 일이다. 사실이든 만들어진 얘기든,
이 과격한 얘기는 불상을 부처라고 믿고 있는 관념을 단 번에 날려버린다.
불상이란 부처님의 형상이고, 불상에 대한 공경이 불법이라고 믿고 있는 이들의 눈에다 모래를 뿌려버리는 것이다.
혹자는 추위로 강하게 표현된 실제의 삶의 욕구와 곱게 모셔진 불상 사이에서 득도한 이가 무엇을 선택하는가를 보여주는 얘기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분명한 건, 한 사람은 자신이 믿고 있는 가정 안에서 지성을 사용하며 판단하고 있다면, 다른 한 사람은 그 가정마저 의문에 부치며 자유롭게 넘나들며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것은 분명 불교도의 입장에서 본다면 금기의 선을 넘는 난감하고 위험스러운 모험일 것이다.
자명하다고 믿는 가정 안에, 그게 그린 선 안에 갇혀 있는 한, 진정한 자유란 있을 수 없다.
그런 믿음은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것일수록 강하고,
그런 만큼 그것이야말로 사람을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
신이나 ‘교조’에 대한 믿음이 배타성으로 이어지는 것을 흔히 보는 일 아닌가?
선사들의 타격이 가장 빈번하게 교조인 부처를 겨냥하는 것은 이 때문일 게다.
하여, 임제 스님은 “부처를 만나거든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만다면 조사를 죽여라.”고 했고, 조주 스님은 “부처가 있는 곳도 그냥 지나가라. 부처가 없는 곳을 빨리 지나가라.”고 했다.
부처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운문 스님이 “뒷간 똥 막대기”라고 대답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구약의 신이 모세를 통해 유태인에게 주었던 율법.
돌판에 새겨진 율법이 뭇 인간을 옭아매는 것에 에수는 분노했고 이를 혁파했다.
마치,
단하선사가 부처를 뽀개 아궁이에 던지듯....
2,000년전 오직 유대인을 위한 율법,
그 유대인 돌판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 개독교들.
자칭 예수를 믿는다는 자들의 율법 타령과 무시로 들이미는 그 잣대.
가소롭다.
율법!
개나 줘버려라!!!
(가라사대 예수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