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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에서 우리는 이중 심판론과 만유 구원론 모두를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천국과 지옥의 이중 심판이 있고 없고의 문제는 신의 영역이다.


그리고 '조사 심판'이 있다고 믿는다 해서 더 선하게 살아야 되고, 

없다고 믿는다고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자신과 타인 대한 신앙의 자세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지점은

내가 믿는 하나님이 어떠한 하나님이냐 하는 것 아닐까?!


아래의 글은 김명용교수(장신대, 조직신학)의 글이다.
[출처]  http://cafe.naver.com/systematic/283


만유 구원론을 위한 신학적 지평

김명용



1. 만유의 구원론이 성서적으로 가능한가?


 칼 바르트의 만인구원론적 신학에 대해 에밀 브룬너와 게르하르트 에벨링은 성서에 충돌된다고 비판했다. 이들에 의하면 성서는 이중적 심판론을 가르치고 있지 만인구원론을 가르치고 있지 않다. 몰트만에 의하면 이중적 심판론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성서본문은 마태복음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7:13-14). 위의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의 대립 외에도 마태복음 25장의 미련한 처녀와 슬기 있는 처녀의 비유 및 양과 염소의 비유 등은 대표적인 이중심판론을 근거하는 마태복음의 본문들이다. 이 마태복음의 본문 외에도 막 9:45은 지옥에 대해 말하고 있고, 눅 16:23은 음부에서 고통하고 있는 부자에 대해 언급하고 있고 막 9:48은 꺼지지 않는 지옥의 불에 대해 말하고 있다.


  위와 같은 이중적 심판론을 말하고 있는 성서본문을 앞에 두고도 어떻게 만유구원론을 언급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몰트만은 물론 저주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영원하겠는가 하는 데 있다. 몰트만에 의하면 영원을 나타내는 헬라어 아이오니오스(aionios)는 같은 의미의 히브리어 올람(olam)과 마찬가지로 끝을 제한할 수 없는 긴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지 헬라 형이상학의 절대적 의미에서의 영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 그런 까닭에 이 단어들은 복수형 아이오네스(aiones)와 올라민(olamin)이 존재하고 있다. 성서에 나타나고 있는 저주의 기간을 나타내는 영원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끝을 제한할 수 없는 긴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지 절대적 의미에서의 영원은 아니다. 몰트만에 의하면 막 9:49의 지옥의 불은 교육적 형벌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정화의 불이다. 마 25장의 축복과 저주의 대립은 결단코 같은 높이의 대칭적 대립은 아니다. 왜냐하면 축복 받은 자들을 위해 예비된 나라는 "창세로부터"(마 25:34) 예비된 나라이지만 저주받은 자들에게 주어지는 불은 창세로부터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그것은 세상 끝까지 존재할 수 없다. 발터 미하엘리스(Walter Michaelis)는 저주와 심판과 영원한 죽음은 종말론적으로 관찰할 때 최후의 것의 지평 속에 있는 "한 단계 이전의 것"(ein Vorletztes)으로 보았는데 몰트만은 이를 매우 정당하게 평가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있어서 저주와 지옥은 최후의 것이 아니다. 최후의 것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 21:5)이다.


  몰트만은 성서에는 이중적 심판론을 근거 지을 수 있는 본문만 있는 것이 아니고 만유구원론을 근거 지을 수 있는 가르침이 있다고 보고 있다. 몰트만에 의하면 행 3:21에 "만유를 회복하실" 하나님에 대해 언급되고 있다. 엡 1:10 에는 하나님의 예정과 경륜이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다. 골 1:20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과 화해되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몰트만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화해의 사건은 인간만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만유를 하나님과 화해시키고자하는 화해의 사건으로 만유의 구원을 향하고 있는 사건이었다. 몰트만은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의 우주적 그리스도론은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 있는 피조물 심지어는 불순종에 떨어져 있는 천사까지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과 화해되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나로 통일되는 인격화된 창조의 지혜를 나타내 주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런 까닭에 이 본문들은 만유의 회복에 초점이 있는 본문으로 몰트만은 이해하고 있다. 몰트만에 의하면 마지막 날은 모든 인간이 구원을 받는 만인 구원의 날일뿐만 아니라 만유가 회복되는 만유의 구원의 날이다.


  몰트만은 에베소서와 골로새서 뿐만 아니라 만유구원론을 정초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성서 본문으로 빌립보서를 언급하고 있다. 특별히 빌 2:6 이하의 그리스도 찬가는 만유구원의 결정적 비젼을 보여주고 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0-11). 몰트만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그 날이 되면 그의 원수들까지도 그의 발아래 무릎을 끓게 되고(고전 15:25),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모든 무릎이 예수의 이름 앞에 꿇게 된다는 이 비젼은 그리스도의 원수들이 어두운 지옥에서 이를 갈면서 강제적으로 복종 당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되면 안 된다. 몰트만은 이 비젼을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 마침내 그리스도의 원수들까지 굴복시켜서 변화된 그들이 그들의 입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즉 땅 아래 지옥에 있는 자들도 하늘에서 어둠의 세력을 만들고 있는 불순종의 천사들까지도 궁극적으로는 예수의 이름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위대함에 사로잡혀 하나님아버지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이다. 바로 이 날이 하나님께서 "모든 것 가운데 모든 것"(고전 15:28)이 되는 날이다.


  몰트만은 바울 신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아담과 그리스도 사이의 유형론도 만유구원론의 중요한 근거로 이해하고 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느니라"(고전 15:22). 몰트만에 의하면 성서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은혜가 만민에게 미치는 보편성을 언급하고 있지 제한성을 말하고 있지 않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롬 11:32). 그리스도의 은혜는 만민에게 미치는 긍휼이고 하나님은 바로 이런 긍휼로 만민을 구원하고, 만유를 구원하고자 하신다.


  몰트만은 성서에 이중적 심판론과 만유구원론이 공존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몰트만에 의하면 인간이 신앙을 갖게 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인간이 축복받는 상태에 들어가는 것은 신앙과 깊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앙이냐 불신앙이냐 사이의 결단은 축복과 저주로 나뉘어지는 길이다. 그러므로 성서는 매우 진지하게 이중적 심판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몰트만은 보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결단해야 하는 존재이고 이 결단의 실패는 끝없는 저주 아래 사는 삶이다. 그만큼 인간의 결단은 심각하고 진지한 일이다. 그것은 시간의 세계 속에 사는 인간이 겪게 되는 운명적 결단이다. 인간의 자유는 보장되어 있고 인간은 저주받는 삶을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저주가 끝없이 계속될 수 있다. 그러나 몰트만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하나님의 궁극적 계획은 만유를 구원하는 것이고 만유를 구원하고자하는 하나님의 예정과 계획이 십자가 속에 밝히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인간이 선택한 저주받은 삶이 끝없이 계속될 수는 있지만 영원할 수는 없다.


  2. 지옥은 영원한가?


  몰트만은 자신의 만유구원론을 발전시키면서 우선 지옥의 영원성에 대해 질문을 제기했다. 예로부터 교회의 전통은 영원한 지옥에 대해 가르쳤다. 그런데 몰트만은 지옥이 정말로 영원할까라는 질문을 제기한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몰트만 자신의 답은 지옥은 결코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몰트만은 아직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에게 있을 지옥의 경험을 부정하지 않는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비롯한 성서의 여러 곳의 지옥에 대한 표상들을 아직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이 겪을 지옥의 가능성과 연결될 수 있다. 그러나 몰트만은 그러한 지옥이 영원하다면 십자가에 계시된 은총과 자비의 신은 무의미해진다고 보고 있다.


  지옥의 영원성에 대한 반대는 17세기와 18세기에 본격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 중 첫째는 계몽사상의 영향 하에서 휴머니즘이 강조되면서 나타났다. 세속적 휴머니즘의 대표자들은 지옥과 지옥의 영원성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었다. 그런데 지옥의 영원성에 대한 반대로 몰트만이 중요하게 생각한 흐름은 이 세속적 휴머니즘이 아니고 성서만을 사랑했고 성서를 일생토록 읽고, 설교했던 독일의 뷔르템베르크의 경건주의 신학자들이었다. 벵엘(Johann Albrecht Bengel, 1687-1752)에 의하면 천국과 지옥은 있지만 그 모든 것은 마지막 건설될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봉사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옥의 고통은 영원하지 않다. 하나님이 모든 것 가운데 모든 것이 되는 날에는 지옥의 고통도 지옥도 없을 것이다. 벵엘의 훌륭한 제자였던 외팅어(Fr.Chr.Oetinger, 1702-1782)는 자신의 스승의 이론을 더욱 발전시켰는데, 외팅어에 의하면 은혜의 선택이 하나님의 길의 시작이라면 만유의 회복이 그것의 목표의 종국이다. 외팅어는 특별히 만유의 회복이라는 중요한 신학적 개념을 발전시켰는데 몰트만은 이를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19세기와 20세기에 들어와서 독일의 뷔르템베르그의 경건주의의 가장 중요한 인물은 요한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Johann Chr. Blumhardt, 1805-1880)와 그의 아들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Chr. Blumhardt, 1842-1919)이다. 이 블룸하르트 부자에게 있어서 만유 구원은 희망의 고백이었다. 아버지 블룸하르트는 아들  블룸하르트에게 터어키인 노예도 이집트인 노예도 신앙인으로 대할 것을 언제나 가르쳤다. 왜냐하면 그들도 그리스도의 은총에서 제외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정신을 이어받은 아들 블룸하르트는 구원과 멸망을 대칭적으로 생각하는 사고는 잘못되었다고 가르쳤고 하나님의 구원이 영원하기 때문에 비참이 영원할 수 없다고 밝혔다. 하나님의 구원이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구원 아닌 것은 중지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아들 블룸하르트의 신념이었고 가르침이었다.


  몰트만이 이 뷔르템베르크 경건주의 신학자들의 가르침이 옳다고 보았다. 즉, 하나님의 구원이 있는 한 언젠가는 구원 아닌 것이 종결될 수밖에 없다. 지옥의 고통과 경험은 현존하고 있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영원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 가운데 모든 것이 되는 그 날에는 그 모든 것은 폐기되고 없어질 것이다. 지옥이 있고 지옥에서 고통하는 자들이 있는 한 하나님은 아직 모든 것을 완성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지옥도 없애고 지옥을 경험하는 모든 자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3. 그리스도의 지옥여행과 파괴된 지옥


  몰트만에 의하면 지옥은 열려져 있고 파괴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지옥을 열기 위해서 지옥의 고통을 당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지옥의 고통을 당하시고 지옥을 열었기 때문에 지옥의 고통도 출구가 없는 고통이 아니다. "그가 지옥의 고통을 당하셨기 때문에 그렇지 않으면 모든 희망이 떠나갈 수밖에 없는 그곳에도 희망은 존재하게 되었다". 몰트만은 그리스도의 지옥의 고통의 경험으로 지옥의 문이 열린 것뿐만 아니라 지옥을 감싸고 있는 성벽이 무너졌다고 말하고 있다. "그의 고난으로 그리스도는 지옥을 파괴시켰다." 몰트만은 지옥을 파괴시켰다는 표현을 고대교회는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이 표현이 바른 표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지옥은 파괴되었고 더 이상 "영원한 저주는 존재하지 않는다".


  몰트만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지옥여행은 십자가의 고난에 대한 깊은 표현이다. 루터는 지옥을 어떤 특정한 장소라고 생각지 않았다. "지옥은 세상의 어떤 장소나 지하세계의 어떤 장소가 아니고 하나의 실존적 경험인데 곧 죄와 하나님 없는 존재 위에 떨어지는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의 경험이다". 그런데 루터에 의하면 이 지옥의 고통을, 저주받은 세계를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겪으셨다. 몰트만은 이 루터의 전통을 이어받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지옥을 파괴시키기 위해서 지옥의 고통을 겪으셨다고 보고 있다. "겟세마네에서 골고다까지의 버려진 그리스도의 모습은 영원히 저주받은 한 인간의 버려진 모습이다". 겟세마네에서의 그리스도의 기도는 하늘에 상달되지 않았고 응답되지 않았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지옥의 고통의 서곡이었다. "그리스도는 게헨나와 지옥에 떨어지고 있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없는 세계에 떨어지는 하나님의 현재의 진노뿐만 아니라 미래의 진노와 미래의 지옥의 고통까지 겪고 계셨다". 바로 이 그리스도의 지옥의 경험이 지옥을 열고, 지옥을 파괴시킨 결정적 근거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십자가가 지옥이 파괴되었다는 결정적인 보증이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파괴된 지옥을 발견한 몰트만의 발견의 중요성을 유념해야 한다. 왜냐하면 대개의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인간의 죄의 속죄만을 발견하는 데에 멈추고 있기 때문이다. 대개의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속죄의 상징이지 파괴된 지옥의 상징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속죄의 상징으로만 멈추고 있으면 지옥은 파괴되어 있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죄용서 받은 사람만이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 행운을 얻게될 뿐이다. 그런데 몰트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 속에서 지옥을 경험하는 고난을 읽었고 여기에서 파괴된 지옥이라는 매우 중요한 신학적 개념을 도출시키고 있는 것이다.


  몰트만은 초대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그리스도의 지옥여행이란 상징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지옥의 고통의 경험으로 재해석하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은 만인의 죄를 속량하는 사건일 뿐만 아니라 지옥의 문을 열고 지옥을 파괴시킨 사건으로 이해했다. 이런 이해를 근거로 몰트만은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그리스도의 지옥여행은 궁극적으로 지옥과 죽음이 하나님 안에서 폐기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지옥의 경험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그 지옥에서부터 꺼내주시는 분이시다. 모든 불행과 모든 버림받음과 모든 죄악과 모든 저주의 죽음과 허무에 굴복되는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의 지옥의 경험으로 폐기되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옥은 열려져있고, 닫혀진 영원한 지옥은 존재하지 않는다.


  4. 죽은 자들에게 전파되는 복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죽은 자들의 장례식에서 목사는 무엇을 설교할 수 있을까? 몰트만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들을 위해 죽었다는 것을 설교해야 한다. 몰트만에 의하면 그들은 영원히 희망 없는 존재가 된 것이 아니고 믿지 않고 죽은 그 순간에도 여전히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로부터 오게된 희망의 빛 가운데 있다. 개신교 전통은 믿지 않고 죽은 자들에게는 영원한 형벌밖에 없다고 가르쳤다. 그런 까닭에 믿지 않고 죽은 자들에게 주어질 수 있는 어떠한 가능성도 차단했고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도 거부했다. 그러나 몰트만에 의하면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는 초대교회의 신앙 가운데 하나였다.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종교개혁자들이 카톨릭 교회의 연옥설을 반대하고 교리에서 제외한 것은 몰트만에 의하면 매우 잘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연옥설은 가르쳐서는 안 되는 업적과 행위를 통한 구원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고 그리스도를 통한 은총에 의한 구원론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잘못된 이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연옥설에 대한 반대가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교제와 죽은 자를 위한 기도의 가능성까지 잘라낸 것은 잘못된 발전이었다. 왜냐하면 초대교회는 연옥설은 알지 못했지만 산 자와 죽은 자의 교제와 죽은 자를 위한 기도는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몰트만에 의하면 믿지 않고 죽은 자들도 그리스도 안에 있다. 벧전 4:6에 의하면 "죽은 사람들에게 복음이 선포된다"고 기록되어 있고, 벧전 3:9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셨다"고 언급되어 있다. 몰트만은 이 본문들은 죽은 자들도 그리스도와의 연대성 속에 있다는 뜻이고 그들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이 충분히 열려있다는 의미를 전달해 준다고 보고 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죽은 자들도 희망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 죽은 자들도 복음의 소급하는 능력에 의해 신앙에 이를 수 있다. 죽음도 그 무엇도 그리스도와의 교제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므로 인간의 죽음을 기준으로 희망의 가능성을 차단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그들이 아직 구원에 이르지 못했다할지라도 그들을 완전히 버려진 자로 인식하는 것은 잘못이다. 십자가는 그 누구도 버리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은총의 표현이다. 죽은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들을 바르게 하고 그들을 살리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가는 희망과 은총의 빛이 그들에게도 작용하고 있다.


  5. 인간의 결정과 하나님의 결정의 질적 차이


  만유구원론이 옳은가 이중적 심판론이 옳은가를 결정하는 문제는 몰트만에 의하면 하나님의 결단과 인간의 결단이 어떤 관계에 있는가의 문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몰트만에 의하면 유일회적인 하나님의 영원한 결단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졌다. "하나님은 소수의 선택받은 자들뿐만 아니라 '우주'를 그 자신과 화해시켰다(고후 5:19). 하나님은 믿는 사람뿐만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셨다(요 3:16). 멸망에서 구원으로의 위대한 전환은 골고다에서 일어났으며, 우리의 신앙의 결단이나 전향의 시간에 비로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신앙은 이 전환의 개인적 경험이요 수단이지 그 전환 자체가 아니다. 나의 신앙이 나에게 구원을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이 나에게 신앙을 마련한다". 몰트만에 의하면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결정이 영원의 영역에 속한다면 신앙을 향한 우리의 결정은 시간의 영역에 속한다. 인간은 자신의 잘못된 결정으로 자신의 무덤을 스스로 팔 수 있다. 그러나 그 잘못된 결정은 시간의 세계에 속하는 결정이다. 그는 결코 영원한 하나님의 결정을 뒤엎을 능력은 없다.


  인간의 결정에 의해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정해진다면 태어나면서 죽은 아이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스스로 결정할 능력이 없는 정신 장애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회교권에서 살다 간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과연 그리스도를 향해 결단할 수 있는 형편에 처해 있었을까? 인간의 결정에 의해 인간의 궁극적 운명이 결정된다면 인간은 자신에 대해 스스로 신이 되는 것이 아닐까? 몰트만에 의하면 인간의 운명을 궁극적으로 정하신 분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그 인간의 궁극적 운명이 십자가에 계시되었는데, 그것은 구원이고 열락이었다.


  몰트만에 의하면 인간의 결정과 하나님의 결정은 대칭적인 것이 아니고 심각하게 비대칭적이다. 하나님의 결정이 절대우위의 능력을 갖고 있다. 인간은 끝없이 그리스도를 거부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히 인간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영원성을 극복할 수 없다. 로빈슨(J. A. T. Robinson)에 의하면 인간의 자유 때문에 천국과 지옥의 양자택일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주는 구원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실 것이다. 지옥은 하나님의 사랑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nevertheless)에 의해 한계 지워져 있다. 몰트만은 이와 같은 로빈슨의 관점을 정당하다고 파악하고 있다.


  몰트만에 의하면 모든 사람이 이미 하나님과 화해되어 있다는 바르트의 견해는 전적으로 옳다. 모든 인간은 그리스도안에서 "객관적으로"(objektiv) 화해되어 있다. 그들이 그것을 알고 있든지 모르고 있든지 그것은 이미 하나님에 의해 영원히 정해진 객관적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되어 있는 사람으로 보아야한다. 몰트만에 의하면 믿지 않는 자들의 불신앙을 하나님께서 화해시킨 영원한 하나님의 결정보다 크게 보면 안 된다. 하나님이 계시는 한에 있어서 하나님이 원치 않는 어떤 것이 영원히 존재할 수 없다. 불신앙과 저주는 인간의 자유와 시간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만유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6. 최후의 심판과 용서하시는 하나님


  과거로부터 그리스도교의 역사 속에서 최후의 심판의 날은 무서운 날로 각인되어 있다. 그 날은 모든 죄악이 드러나는 날인 동시에 그 모든 죄악에 대한 형벌이 시행되는 날이다. 그리고 이 최후의 심판의 날에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이다. 물론 의인들은 이날에 상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누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 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기 전에 이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떨고 있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는 이야기다. 루터는 은총의 신을 발견하고 싶었고, 자신이 선택된 자 속에 들어 있다는 확신을 얻고 싶었지만 그에게는 그 확신이 없었다. 그런데 이런 루터에게 하나님의 참 모습을 발견하도록 크게 영향을 미쳤던 인물이 요한네스 폰 슈타우피츠(Johannes von Staupiz)였다. "네가 예정에 관하여 논의하고자 한다면 상처받은 그리스도에게서 시작해야 한다. 그러면 예정에 관한 논의는 더 이상 필요 없을 것이다". 요한네스 폰 슈타우피츠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내가 예정된 자인가 아닌가를 종결짓는 결정적인 자리라고 루터를 가르친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보면 내가 예정된 자라는 것이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이었다. 요한네스 폰 슈타우피츠의 이 가르침은 루터의 신학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1542년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상처받은 그리스도를 보아라. 거기에 너의 선택이 확실히 있다". 요한네스 폰 슈타우피츠의 가르침을 20세기에 가장 위대하게 계승한 사람은 칼 바르트(K. Barth)였다. 바르트는 그의 예정론에서 십자가가 우리의 선택의 보증이고,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만민을 선택했다고 가르쳤다.


  몰트만은 바르트의 이 예정론을 종말론적 차원으로 확대시켰다. 몰트만에 의하면 만민을 예정하고 만민을 화해시킨 십자가의 복음은 지금은 만민에게 "선포되고"(verk ndet)있고, 마지막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날에는 십자가의 복음이 의미하고 있었던 것이 명백하게 "드러날"(offenbar) 것이다. "십자가의 그 깊은 곳 속에서 겪으신 것이, 그의 고난을 통해 극복하신 것이 마지막 날 영광가운데 드러날 것이다". 몰트만은 마지막 날이 되면 십자가에서 용서하신 하나님의 용서가 보편적인 용서로 만민이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몰트만은 요한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Johann Christoph Blumhardt)가 뫼틀링엔(M ttlingen)에서 1872년 성금요일에 행한 "총체적 용서"(Generalpardon)라는 설교를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다. "…성금요일은 전 세계를 향한 총체적 용서를 선포한다. 그리고 이 총체적 용서는 이제 드러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헛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 세상은 총체적 용서를 향하고 있고, 이 용서는 이제 나타날 것이다! 이 가장 중요한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은 성금요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다". 만민을 용서하고 만유를 하나님과 화해시킨 십자가의 거룩한 사건의 깊은 의미는 아직 세상에 완전히 알려져 있지 않다. 그것은 현재 복음 전파를 통해 선포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거룩한 십자가 사건의 깊은 의미가 역사의 마지막 날에는 구체적 현실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 몰트만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마지막 심판의 날은 기쁜 날이다. 그 날은 두려운 날이 아니고 "가장 놀랍고 놀라운"(Das Wunderbarste) 일이 일어나는 날이다. 그리스도께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은총의 하나님이 심판의 주라는 뜻이다. 따라서 그 심판은 은혜의 심판이지 사람들을 지옥으로 몰아넣는 심판은 아니다. 죄인에게 죄의 값을 매기는 보복적인 심판은 그리스도의 은혜의 심판과는 거리가 멀다. 마지막 날의 심판은 총체적 용서와 만유의 회복이 구현화되는 심판이다. 하나님께서 십자가 안에서 의도했던 바가 완성되는 날이 마지막 날인 것이다.


  몰트만은 요한계시록에 나타나고 있는 악을 악으로 갚는 보복의 원칙은 십자가 신학에 모순된다고 보고 있다. 악을 악으로 갚는 보복의 원칙은 유대의 묵시문학 속에 보편적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그것은 십자가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은총과 심각하게 모순된다. 몰트만은 십자가 안에서 마지막 날의 심판자가 어떤 분인지 확실히 알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범죄인을 대신해서 죽으시고 범죄인을 무한한 사랑으로 용서하신 분이 마지막 날의 심판자이시다. 그러므로 최후의 심판은 지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황제나 임금의 심판과는 다르다. 마지막 날의 심판은 만유를 용서하고 만유를 구원하고자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의 역사의 완성이자 계시이다.


  7. 만유의 구원


 만유의 회복과 만유의 구원은 몰트만에 의하면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목표이다. 이 만유의 구원에는 일차적으로 모든 인간의 구원이 내포되어 있다. 악한 자들의 악은 심판 받아 없어질 것이다. 죄도 없어지고 하나님이 원치 않는 모든 잘못된 것들은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악했던 자들은 구원받을 것이다. 마지막 날까지 그들은 악한 자로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살해당한 사람들도 구원받을 것이지만 그들을 살인한 자들도 구원받을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날까지 그들은 살인자로 존재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의 살인은 용서되고, 그들은 악한 데에서부터 변화된 새사람들이 되어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회복시키고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구원하고 새롭게 하시는 것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하나님은 마지막에 만인만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만유를 구원하실 것이다. 전체 피조물과 우주를 구원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종국이다. 몰트만은 마지막 날에는 세상이 폐기된다는 루터파의 주장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고 있다. 마지막 날 건설될 세상은 현존하는 세상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러나 마지막 날 건설될 세계는 현존하는 세계가 아니라 변화된 세계이다. 몰트만은 마지막 날의 세계는 변화된 세계라고 보는 개혁파신학을 긍정하고 있지만 이것에 한 걸음 더 나가 세상의 신격화를 주장한 동방정교회의 정신에 더욱 긍정성을 표현하고 있다. 마지막 날 전체 피조물과 우주는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세상의 신격화를 주장한 동방정교회의 신학이 옳다는 것이 몰트만의 견해이다.


  그런데 몰트만의 신학에서 대단히 특이한 것은 만유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종국적으로는 마귀도 구원할 것이라는 사상이다. 하나님이 마귀도 구원할 것이라는 사상은 이미 초대교회 때 오리겐에 의해 주장되기도 했지만 기독교 전통 속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던 사상이었다. 몰트만에 의하면 불순종의 천사들까지도 마지막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된다. 몰트만에 의하면 마귀가 있고 지옥이 있는 한 아직 모든 것이 회복된 것이 아니다. 마지막 날은 끝없는 기쁨의 시작인데, 그날에는 악한 마귀까지 구원받고 만유가 회복되고 하나님의 영광의 신성에 동참하게 되는 날이다.






  • ?
    김주영 2016.06.24 02:15
    아멘, 잘 읽었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 ?
    기술담당자 2016.06.24 11:56

    아기자기님,

    글자가 조금 연한 색이어서 읽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진하게 했습니다.
    혹 일부러 그렇게 하셨다면 알려 주십시오.
    이전으로 돌려 놓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
    아기자기 2016.06.24 13:45
    word에서 작성해서 올렸는데
    그렇게 나와서 저도 왜 그런가 했었습니다.
    바로 잡아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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