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타트 전문가들- 결국 어떻게 되었나?

by 김주영 posted Nov 20, 2010 Likes 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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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다에 연재하던 우리 건강기별 역사 시리즈

제 6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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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에서

엘렌 화잇과 우리 교회의 건강기별 이전에

우리식의 뉴스타트를 가르친 다른 사람들이 많았다는 이야기를 했다.


건강개혁에 관한 한 화잇과 안식일 교회는 단연 후발주자다. 


화잇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가 말하게 될 모든 것을

더 크게, 널리, 유창하게,  전문적으로 말한 사람들이 많았다.


화잇이 그들에게 배웠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다 어떻게 되었나?


오늘날 안식일교회만큼 건강개혁의 선구자라고 여겨지는 그룹이 없다. 


어쩌다가 가장 늦게 시작한 후발 주자,  미약했던 선지자와 이 교회만 남고

다른 "전문가" 들의 영향과 유산은 

그 그림자도 찾아보기도 힘들게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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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육업자들과 (흰빵) 제빵업자들의 폭동을 야기시키까지 했던

실베스터 그래함 (Sylvester Graham 1795-1851) 은

아직도 그의 이름이 붙어 나오는  "그램 크래커" 외에는 남긴게 없다.


108권의 저서를 써 냈고, 초기 미국 채식협회 회장을 지낸

윌리암 알콧 (William Alcott 1798-1859) 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밀러 운동에도 가담했고, 생전에 26판이나 발행된 건강 개혁 책을 써 냈던

(화잇이 "절제" 에서 많이 인용한)

라킨 콜스 (Larkin B. Coles 1803-1856)  는 알콧보다 더 잊혀졌다. 


수치료 대학을 운영하고 초기 재림교회 건강잡지에 자주 기고했던

러셀 트랄 (Russell Trall 1812-1877) 의 학교는 없어졌고, 그 이름도 잊혀졌다.


뉴스타트의 이론을 체계적으로 설파하고 

그 당시에 벌써 대형 건강 요양원을 성공적으로 운영하여  화잇의 눈을 번쩍 띄운

제임스 잭슨 ( James Caleb Jackson 1811-1895) 의 요양원은 없어졌고

그의 책들은 골동품 가게에서도 찾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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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엘렌 화잇과 재림교회만 

150년이 넘도록 

이 건강기별을 꾸준히 전하고

명실공히 세계적으로 그렇게 알려져 있다.


왜 그렇게 되었나?


"하나님이 인도하셨지"   라는 고백 외에


나의 대답은


"두 사람의 선택 때문이다." 


그 두 사람은 켈록과 엘렌 화잇이다. 


둘의 선택이

이 교회의 건강기별을 살렸고,


이 교회의 이미지를 살렸고


비약한다면


이 교회를 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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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록의 공로는 무엇인가?


그는 건강기별을 주변의 대체의학에 머물러 있게 하지 않고

발전하는 주류 의학에 접목시켰다.


그것이 

건강기별을 살리고


나아가 교회를 살렸다.


위에 말한 당시의 뉴스타트 전문가들은 

늘 주변, 언저리, 대체의학의 방식으로 남았으나

켈록은

주류의학을 받아 들이고 그 전문가가 되었다.


그로 인해 

재림교회는 주류 의학의 배를 타고 뉴스타트를 전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역설같이 들리지만

재림교회 뉴스타트가 살아 남고

이렇게 오늘날 크게 전파될 수 있는 것은


주류의학 때문이었다.


(다음에는 켈록에 관해 이야기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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