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지기님에게 - 이신칭의(15648번 글)에 대한 담론 의 담론

by 청지기 posted Aug 27, 2016 Likes 0 Replies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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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초님께서

저의 글을 읽고 쓰신 담론을 읽고

느낀 점을 올립니다.

 

본인은 민초님의 이신칭의의 개념에 대하여 동의한다.

그러나 몇 가지의 오류가 아닌 오해되고 있는 점들을 분명히하고 싶다.

 

먼저

믿음이란 성경적인 개념이 무엇인가?

두 가지로 요약해본다.

 

1. 믿음이란?

죄인들이 구원 얻기 위한 유일한 수단(방법)으로써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제공하신 방법(수단)이다.(인간의 고안이 아님, 은혜임)

 

2. 믿음이란?

바라는(기대하고 소원하는) 것들의 실상(실체)이다. (11:1)

 

1. 번의 개념을

민초님은 동의 하실는지 모르겠다.

동의 하실 줄로 믿는다.

 

그렇다면 저와 민초님의 개념은 근본적으로 일치하다.

믿음은 구원 얻는 유일한 방법(수단)이다.(성경의 가르침)

그러나 믿음자체에 무슨 공로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은 금물.

공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으며

믿음은 오직 수단과 방법이라는 사실을

 

2. 번의 개념은

민초님이 동의 하실는지 모르겠다.

동의 하실 줄로 믿는다.

 

그러나 여기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고 본다.

 

루터시대나

오늘날이나

1. 번의 구원의 수단과 방법으로서의 (이신칭의)

믿음이란 동일하다.

 

그러나

2. 번의 믿음에 관한 -  바라는 바와 실상에 대해서

루터나 그 당시 사람들이 믿음으로 바라는(소원)바와

오늘날(셋째천사기별) 믿는 자들이 바라는(소원)바와는 동일하지 않다는 점이다.

 

루터는 야고보서를 성경으로 인정하기조차 싫어했다.

믿음과 함께 행함을 야고보는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루터는 구원의 암흑시대(행위구원)에 살았다.

그가 성경으로부터 구원의 방법(믿음)을 발견하였을 때

그의 바라는 바가 무엇이었겠는가?

오직 구원(믿음), 믿음만을 부르짖었다.

율법과 행위에 관한 문제는 안중에 없었다.(시대적 상황이)

그러나 그는 무법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하여 공감한다.

 

한번 더 역사적인 실례를 들면:

 

웨슬리는 어떤가?

 

웨슬리도 1번의 개념에는 루터와 동일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개념에는 변함이 없었다.(시대가 흘렸으나)

 

그러나 2.번의 개념에는 변화가 있었다.

루터와 웨슬리는 그 바라는(소원) 바에는

뚜렷한 변화(발전)가 있었다.

 

루터는 오직 구원(믿음)에만 관심이 있었다면

웨슬리는 구원의 은혜에 추가하여 정결한 생애를 갈망(소원)하였다.

그는 정결한 생애(행위)를 살기 위해 믿음이라는 수단(방법)을 활용한 것이다.

그러면 그들이 바라는 바의 결과는 무엇인가?

믿음은 바라는(소원=정결생애)것들의 실상(실체)인 것이다.

 

이것이 오류인가?  아니면 믿음의 활용의 발전인가?

오류가 아니다.

이것은 놀러운 빛(믿음)의 전진이며,

은혜에 은혜가 더해진 것이다.

 

이제 오늘날을 생각해보자

화잇 여사나 1888년 기별 자나

1.번의 구원의 개념에는 변함이 없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다는 믿음에는 결코 다르지 않다.

 

그러나 2. 번의 개념

믿음 안에서의 바라(소원)는 개념에서는 다르다.

 

루터 - 구원,

웨슬리 - 구원+정결

화잇여사, 와그너 - 구원+정결+완전

 

이런 믿음에 발전을 오류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믿음(방법)에 의한 결과, 놀라운 발전(성화)인 것이다.

은혜 + 은혜 + 은혜가 더해진 것이다.

무엇에 의한 것인가?

믿음으로 말미암아서이다.

이 축복을 왜 거절할 것인가?

다만 이것에 인간의 협력(행위)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나

행위로 말미암아서가 아니요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않된다.


이 시대의 바라는(소원) 바가 무엇인가?

바라는 바가 무엇이든 믿는다면 실체가 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 아닌가?

 

화잇 선지자는 말하기를

셋째천사는 지성소를 가르친다고 말씀하셨다.

지성소는 완전한 곳이며

율법이 있는 곳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완전을 바라고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는 것은 우리의 소원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이것을 바란다면(소원)

믿음은 실체를 만들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오류라고 하겠는가?

 

만약 이런 소원이 없는

루터시대의 믿음만 고집한다면

그 결과는 무엇인가?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5:12)

 

믿음을 주장하신 사도바울의 권면에 유의해야 한다.


 

루터가 무법한자가 아니었으나

루터의 기별을 오해한자들은 오늘날 대부분 무법자가 되었다.(일요일교회들)

 

화잇과 와그너는 믿음과 행위론(구원)을 말하지 않았으나

화잇과 와그너의 기별을 오해하는 자들은

믿음이 아닌 믿음과 행위론 자가 되었다. (재림교회의 대부분의 상황)

한탄스럽다.

 

그러나

믿음(방법)으로 온전한 율법의 요구가 성취될 수 있다는

가르침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의 실체인 것이다.

놀라운 빛(믿음)의 발전이다.

 

루터, 웨슬리, 화잇여사, 와그너 믿음에 대하여 오해할 필요가 없다.

1.번에 대한 개념에는 전혀 차이가 없다.

2. 번의 개념에서 소원하는 바가 발전하고 표준이 높아진 것 뿐이다.

 

이것 역시 행위가 아닌 믿음(방법)에 의한 것임을

깨닫는 자는 복이 있을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11:1)

 

아멘,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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