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다에 연재하던
우리 건강기별 역사 이야기 제 9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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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잇가의 두 형제와 켈록가의 두 형제가 입학한 뉴저지 플로렌스 하이츠에 있는 트랄의 수치료 대학 (Hygeio-Therapeutic College) 은 사실 무척 엉성했다. 원래 교수진은 트랄을 포함해 세명으로 되어 있었는데 입학하고 보니 선생 둘이 결원이라서 혼자 남은 교장 트랄은 메릿 켈록을 조교로 임명했다. 쟌 켈록이 이 학교를 수상쩍게 생각하게 된 것은 트랄이 유기화학을 쓸데없는 학문이라 하면서 공부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열여덟살 윌리는 의사가 되기에는 법적으로 나이가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트랄은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시험도 없었다. 그런 엉성함 때문인지 화잇 형제들은 공부를 열심히 안했다. 어쨌든 거기서 소정의 과정을 이수한 이들은 졸업장을 받았고 당시 아직 분명한 것이 없었던 의료행정 덕택에 원하면 의사 간판을 내 걸 수 있게 되었다. 넷중 셋은 학업을 마치고 돌아갔는데 쟌 켈록은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수치료대학의 교육이 부족함을 알았다. 그래서 배틀크릭으로 바로 돌아오지 않고 주류의학을 가르치는 학교에서 학업을 더하기로 결심한다. "치료야 어차피 자연이 하는 거니까 의사가 뭘 하든지 무슨 상관이 있겠어" 라는 다분히 현실적인 생각을 하던 '빨리빨리' 주의의 행정자 제임스 화잇으로서는 답답한 결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켈록은 제임스 화잇을 설득하여 재정적 지원을 받아 미시간 대학 의과대학 (The College of Medicine and Surgery of the University of Michigan) 에서 2년을 공부하고 당시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병원이었던 뉴욕 벨뷰 병원 의과대학 (Bellevue Hospital Medical School in New York City) 에서 1년 더 공부하여 1875년에 학업을 마치고 배틀크릭으로 귀환했다. 젊은 켈록의 이 선택이 우리 교회 건강기별을 살렸고 더 나아가 이 교회를 살렸다. 무슨 말인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