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교보다 훨씬 나은 교단 얼마든지 있다. 떠나고 싶은 거 하루에도 열두 번 참는다: 왜 참느냐고 묻는 그대에게

by 김원일 posted Aug 01, 2016 Likes 0 Replies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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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유일한, 아니면 마지막 남은 진리 교회이어서?
물론 아니다.

무슨 개뿔.


여기에 밥줄을 대고 있어서?
글쎄, 그럴 수도.

누군가는 물을 것이다.
왜 여기다 밥줄을 걸었는가.

그러나 사실 순서는 그 반대다.

여기다 밥줄을 걸었기 때문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남아있으므로 여기다 밥줄을 건 거다.

결국, 왜 남아 있기로 했느냐는 본래의 질문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왜 안 떠나고 남아 있는가.


사실 한 번 떠났었다.

그런데 왜 돌아왔는가.


돌아오고 싶어서 돌아왔다.
고향이 그리워서.


내가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이 내 선택이 아니었듯
내가 남자로 태어난 것이 내 선택이 아니었듯

내가 안식교인인 것도 내 선택이 아니었다.
삼대째 안식교 신학을 한 집안이다.


초중교 한 학년 윗반이었는데
예고로 진학해서
오십 년 연극, 영화배우 하는 선배 한 분 있다.

어느 날 신문에 난 향린교회 목사의 정치적 발언을 읽고
아, 이런 교회가 있었네 하면서 나가기 시작한 게 인연이 되어
지금까지 그 교회 교인이다.

스스로 한 선택이다.


나에게는 그런 선택을 할 여건이 없었다.

아니, 
여건이란 눈 뜨고 보면 있는 거고
없으면 만드는 거고
때로는 못 만들어도 행동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선택을 할 줄도 모르는 채
내가 태어나 성장한 교단, 공동체 안에서
초중고와 대학을 다녔다.
초중고는 한국에서
대학은 미국에서.

그러다가
감리교 소속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초교파인 신학대학원 다니던 어느 날 

떠났다.


졸도할 듯 숨 막히고
까무러칠 듯 답답하고
지랄 맞게 유아기적인 동네 떠나면서
이쪽으로는 오줌도 안 누리라 했다.



왜 돌아왔는가.

부모님, 인연, 등등
좁게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렇고

좀 넓고 모호하게 말하면
고향이 그리워서였다.


잘한 결정이었는가.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돌아온 것 후회하는가.

하기도 하고 
안 하기도 한다.

-----------------


완벽한 교단이나 교회 없더라.
하나 마나 한, 진부한 얘기다.

이 세상에 완벽한 종교, 이념, 제도는 없었고
앞으로도 없다.

여기보다 나은 동네 없더라?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에게는 말도 안 되는 웃기는 얘기다.

없긴 왜 없는가.
천지에 깔린 게
여기보다 나은 교회, 교단이다.


모든 핵무기를 없애라고 수십 년 전에 성명을 낸 미국 주교들의 천주교,
뒤이어 같은 성명을 낸 bishop들의 북미 감리교,
해방신학을 만들어낸 남미 천주교,
여자에게 목사 안수 주고, 동성애 인정하고 포용하는 숱한 교회, 교단들,
온갖 제도적 사회악에 칼날 같은 비판을 퍼부어대며 사회에 뛰어들어 행동하는 퀘이커 계통 교회들, 등등.


그런데 왜 그리로 안 가는가.

그냥 안 간다.
고향이 원수여서.


게으르고 무책임한 이유라고 하려는가.

맞다.
게으르고 무책임한 이유다.

-------------






이 교단 희망 있는가.
없다.

세상이 이 교단을 바꾸는 것이
이 교단이 세상을 바꾸는 것보다
훨씬 빠를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전자 후자 모두 요원하다.



지성소 어쩌고 저쩌고 
지지고 볶는 이 한심한 누리
누가 어디서 안수를 받았네 안 받았네
누가 누구를 고소 했네 어쨌네 
지지고 볶는 이 한심한 누리
그냥 걷어치우고 싶은 유혹 하루에도 열두 번씩 접듯

이 교단 떠나고 싶은 유혹 하루에 열두 번씩 접는다.

.............


내가 "우리"라고 말할 수 있는 공동체 여럿이다.
그 중 어느 하나도 물론 완벽하지 않다.
완벽은커녕, 그리 흡족하지 않은 게 대부분이다.

그래도 "우리"다.
나만큼 불완전하고 흡족하지 못한 

"우리"다.



이 "우리"보다 나에게 더 "우리"인 곳이
저 밖에 있다. 
여럿.

그곳에 가서 보면
내가 밥줄 걸고 있는 이 "우리"가 바깥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어쩌면
나는 저 "바깥"에서 보면 "바깥"으로 보이는
이 "바깥 우리" 안에서
오늘도 숨 쉬고 있다 하겠다.

내일은 모른다.

내가 아는 건
오늘뿐이다.

--------------


돌이켜보면
교리 때문에 이 교단에 남아 숨 쉰 적 한 번도 없었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

언젠가 비 내리는 날
훌쩍 차에 올라 가까이 있는 숲에 갔었다.

앞에 있는 나뭇가지 끝에서 몇 초마다 떨어지는 물방울 속에
그 주위에 있는 삼라만상이 함축되어 들어있는 것이 보였다.

조그만 물방울이
정말 주위 모든 것의 영상을 그 안에 담고 있었다.

마치 그 무게를 못 이기듯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떨어지면 곧
또 다른 물방울이 맺혔다.

비가 계속 오는 한
그 과정은 끊이지 않았다.


안식교.


그 물방울 안에 무엇이 담겨 있는가.

이 세상이 담겨 있다.


모든 공동체는
나름 세상을 담고 있는 물방울이다.



.................

어쩌면 T. S. Eliot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탐구하는 여로는 끝나지 않거니와
그 모든 여로의 끝에 가면
거기가 바로 우리가 출발했던 지점인 것을 알게 되고
비로소 그곳을 처음으로 알아보게 된다.

We shall not cease from exploration,
and the end of all our exploring will be to arrive where we started
and know the place for the first time.

(Little Gidding 중에서)

.................





사실 한 번 떠났었다.

그런데 왜 돌아왔는가.


돌아오고 싶어서 돌아왔다.
고향이 그리워서.





돌아와서

이곳을
처음으로 알아봤다.






오늘도 나는
수없이
떠나고

오늘도 나는
수없이
돌아온다.

돌아올 때마다
나는 이곳을

처음으로 알아본다.





우리의 탐구하는 여로는 끝나지 않거니와
그 모든 여로의 끝에 가면
거기가 바로 우리가 출발했던 지점인 것을 알게 되고
비로소 그곳을 처음으로 알아보게 된다.

We shall not cease from exploration,
and the end of all our exploring will be to arrive where we started
and know the place for the first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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