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셀염소(3)

by 아사셀 posted Jul 30, 2016 Likes 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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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염소는 모두 속죄제물이었다.

 

유대인들의 문헌을 읽다가 바리새 보수 학파인 샴마이와 바리새 개혁 학파인 힐렐의 뒤를 병합하여 이은 요하난 벤 자타이가 쓴 역사적 글을 보게 되었다. 그 내용은 유대인의 성전 역사를 반영하는 글로써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이 무엇을 이루었는지에 대한 어떤 실마리를 제공한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이후로부터 하나님께서 아사셀의 염소를 더이상 받지 않으셨다는 내용이다.

예루살렘 탈무드에서 이것을 찾아 볼 수 있다.

성전 붕괴 40년 전 서쪽 불이 꺼졌다. 성문의 홍색실은 붉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여호와를 위한 제비가 항상 왼손에 뽑혔다. 밤에 성전 문을 닫았지만 아침에 일어났을 때 활짝 열려 있었다.” (Jacob Neusner, The Yerushalmi, 156-157)

여기 유대문서 탈무드에서 역사적 사실을 볼 수 있다. 우리에게 언제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 어떠하였는지 그리고 속죄일에 일어난 뜻 깊은 일들에 대한 단서를 준다. 예수님은 유월절에 돌아가셨는데 속죄일과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

 

No1.제비를 뽑다.

앞서 말했듯이 제비를 뽑아 어떤 염소가 어떤 목적인지 가렸다. 대부분의 경우 오른손의 제비와 왼손의 제비는 AD30년까지는 동전 던지기와 같았다. 50:50의 확률로 고대 현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를 위한 제비가 오른 손에 뽑히면 좋은 축복이라 여겼다. 그해는 여호와께서 은총을 내리신다 믿었다. 왼손잡이인 사람도 악수할 땐 오른손으로 한다. 보좌의 오른편에서 오른편 ()은 권위를 상징한다. 대제사장의 오른손에 여호와를 위한 제비가 뽑히면 하나님께로부터 온 긍정적인 메시지로 여겼다. 랍비들의 역사적 기술과 탈무드에 의하면 AD30년 이후 40년간 여호와를 위한 제비가 왼손에 뽑혔다.

100%였다. 단 한번이라도 여호와를 위한 염소제비가 오른 손에 뽑힌 일이 없었다.

  (※ 재림교회는 AD31년 예수님 십자가에 달리심을 믿지만 문헌 이용임으로 AD30으로 인용)

No.2 아주 놀라운 일인데 각시대의 대쟁투에 보면 예루살렘 멸망전에 있었던 일로 자주 들어왔던 이야기다. 성전 문에 대한 것으로 성전 문은 밤에 닫았다. 문이 닫히면 대적이 들어 올 수 없다. 문을 밤에 닫았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20명의 장정이 닫고 여는 육중한 문이었다.) 1세기의 유대교에서 샤밧(안식일)에 문을 열고 사람들이 들어왔다. 샤밧이 끝날 때 문을 닫는다. 매해 속죄일 밤에 성전 문을 열었다. 그리고 큰 나팔을 불고 문을 닫았다. ?

문을 닫아 여호와의 임재 안으로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아침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알다시피 예수님은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있눈 죄와 사망의 저주를 가져가셨다. 그래서 누구든지 자신을 부인하고 성경의 것은 성경대로 하면 아버지께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문이 열려 있기 시작했을 때 모든 사람들이 내게로 올 수 있다. 샤밧에만 내게로 나오는 것이 허락된 것이 아니라 죄사함을 받기 위해 속죄일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의 문은 열려 있으므로 마지막 쇼파르 하가독(큰 나팔) 까지 죄사함을 받을 수 있다. ”는 의미이다. 랍비들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것 정말 이상하네.. 밤 파수꾼이 매번 내가 문을 닫았는데 왜 열리지?” 라고만 생각했다. 요한 벤 쟈카이(Yohanan Ben Zakkai)는 성전에게 말하기 오 성전이여 왜 우리를 놀라게 하는가? 성전이 결국 무너지게 될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은 성전이 무너지기 전에 쓰인 것이다. 11:1

레바논아 네 문을 열고 불이 네 백향목을 사르게 하라 는 예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1세기 문서를 보면 이들이 혼란스러워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성전 문이 계속 열리니 왜 이럴까? 결국 AD70년에 무너졌다.

 

No.3 홍색실이다.

예수님이 죽으신 뒤 일어난 아주 놀라운 기적 중 하나인 홍색실이다. 유대교에서 아주 적은 사람만 아는 기적으로 영문을 몰랐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현인들도 난감했다. 아사셀 염소에게 홍색실 반을 묶은 뒤 절벽으로 밀고 다른 반의 홍색실을 성전 문에 묶었다. 매해 이 홍색실은 흰색으로 아침녁에 바뀌었다. 대속죄일의 아침녘에 바뀌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뒤 40년 연속으로 홍색실은 바뀌지 않고 홍색으로 남아 있었다. 영적 멧세지를 전해주고 계시는 것이다. 이 멧세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기도로 구해야한다. 주시려는 메시지는 나는 더 이상 속죄일의 희생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 열납될 수 없다. 다른 것이 필요 없고 나의 아들만이 온전히 받을 만하다는 의미이다.

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찌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는 말씀의 의미이다.

 

No.4 "영원한 불이 켜져 있지 않다

이것은 아주 의미가 있는 것으로 메노라(성소의 촛대)7개의 촛대가 있었다. 한해동안 낮동안 중앙의 4개의 촛대불은 끈다. 중앙 3개와 서쪽 방향인 왼쪽 방향의 1개를 끈다. 중앙의 4개는 불이 켜지지 않은 채 동쪽 방향의 2개는 불을 켜고 서쪽 방향의 1개도 불을 켠다. 서쪽 방향의 촛대는 영원한 불로 여겨졌다. 유대교뿐만 아니라 실제 모든 문화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서쪽의 불은 영원한 불이라 불렀고 모든 촛대의 불을 서쪽의 불로부터 붙였다. (지성소는 서쪽임)메노라의 불을 켤 때 서쪽 방향에서 동쪽 방향으로 불을 켜는 것은 하누카(수전절) 때도 마찬가지였다. 흥미로운 점은 저녁때에 중앙의 4개 촛대의 불을 켜는데 불을 켜고 나가면 초자연적으로 꺼졌다는 것이다.

 

? 아사셀의 염소가 예표했던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와 수치심을 다 안고 골고다 광야위에 세워진 십자가 위에서 찢겨 돌아가셨기에, 이제는 그 염소가 필요 없게 된 것이다.

염소를 광야로 보낼 필요가 없고 더 이상 또 다른 염소를 잡을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7:27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는 말씀처럼 완벽한 희생제물이신 "[예수님께서]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또 다른 희생 제물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것이다.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하다. 그 분 안에만 참된 속죄가 있고, 그 분 안에서만 사단의 참소는 영원히 그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복음서에서는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쟁투267 “선지자는 두 증인에 대하여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11:4)라고 하였다. 또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119:105)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두 증인은 구약과 신약 성경을 대표한다. 구약과 신약은 다 같이 하나님의 율법의 기원과 영속성(永續性)을 알려 주는 중요한 증인들이다. 그 두 성경은 또한 구원의 계획을 증거해 준다. 구약 성경에 기록된 표상과 희생 제도와 예언들은 모두 장차 올 구주를 지적해 준다. 그리고 신약의 사복음서와 편지서는 표상과 예언을 통하여 미리 알려 준 그대로 조금도 틀림없이 강림하신 구주를 증언하고 있다. “

 

본론

 

이제 복음서를 살펴보자.

소망114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성령에게 이끌리시어 광야로 가셨다. 마가의 말은 좀 더 의미심장하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셔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이 모든 날에 아무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라고 그는 말한다.

 

1. 예수님을 몰아내신 성령

12절은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는 표현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여기에 이상한 부분이 있다. 성령께서 예수님을몰아내셨다는 것이다. 이 구절을 헬라어로 보면 성령께서 능동자로 되어있고, 예수님께서 수동자로 되어있다. 성령께서 주체가 되어 예수님을 몰아내셨다는 것이다.

마귀에게 시험을 받기위해 광야로 가셨다. 그러나 이 부분을 오해하기 쉽다. 예수님께서 성령께 억지로 떠밀렸다는 뜻이 아니다. 제사장이 아사셀의 염소를 광야로 보낸 것처럼, 성령께서 아사셀의 염소되신 예수님을 광야로 보내셨다는 것을 강하게 인식시키기 위함이다.

 

2. 광야에서 광야로- 또 하나의 이상한 부분을 먼저 보자.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내셨다고 기록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내시기 전, 예수님께서는 이미 광야에 계셨다. 1:4을 보라. 침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침례 요한은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침례를 전파했고, 예수님께서는 그 광야로 나오사 침례를 받으셨다(. 예수님께서 광야로 나가시기전 이미 광야에 계셨다는 것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인가? 다른 광야로 가셨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거기에는 광야가 하나뿐이다. 여기에 아주 중요한 신학적 의미가 있다. 4절의 광야는 지리적 광야를 뜻하고, 12절에 나오는 광야는 신학적인 광야를 뜻한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지리적 광야에서 신학적인 광야로 몰아내신 것이다. 왜냐하면 신학적 광야는 타락한 마귀 아사셀이 사는 지역을 뜻하기 때문이다. (천년기 사단의 유폐) 이것이 마가가 표현하고자 한 대비이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타락한 천사 사단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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